만황(卍皇) 1 - 31편 (31/50)
- 신비무인 자륭극이 만세제일신마 곤오풍우에 도전하다! 이주야(二晝夜)에 걸친 천세의 용쟁호투 끝에 자륭극은 곤오풍우의 만세 검(萬世劍) 아래 눈 덮인 대곤륜의 이름없는 벌판에 몸을 눕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고 했다. 자륭극의 도전은 백마회의를 통해 당금 황실 의 사주(使嗾)로 결론지어졌고 분노한 대곤륜의 거인이 천하에 경고를 내리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곤륜의 성문이 열린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 다. 자륭극의 도전은 두 개의 성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성조 영락제의 도전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난세는 삼천 년 역사를 이어온 두 개의 기둥이자 역사의 두 하늘이 마침내 정면으로 격돌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천하는 귓전을 찢고 울려오는 천둥같은 말발굽 소리에 자지러져야 했다. - 십왕(十王)과 백마(百魔)! 대곤륜의 기슭을 떠나 사천(四川) 땅을 밟다. 출병 이십 사 시진만에 사천당문(四川唐門)과 더불어 새외 십 칠 대 문 파가 일시에 초토화되다! 사천을 넘어 신강(新彊)과 청해(靑海)를 강타하다. 정사이외(正邪以外)의 대소문파 오십 팔 개가 피의 강, 시체의 산으로 화하고 십왕서열 오 위 시제 상관목수 잔기사와 백마 중 팔 인이 청해호(靑海湖)의 대운하(大運 河)위에 첫 번째 전진요새(前陣要塞)를 구축하다! 운남(雲南)과 섬서(陝西)를 휩쓸고 하북(河北), 산서(山西) 양대 성(城)을 공략하다. 십왕서열 이 위 은하학사 자염수수 비사벌을 비롯한 십 칠 인 의 백마가 숭산의 문턱에 진지를 쌓고 하란산(賀蘭山)과 낙수(洛水)에도 십왕들을 수뇌로 한 전진(前陣)이 형성되다! 서강(西疆), 요녕(遼寧), 영하(寧夏)를.... 동토를 넘어 서백리아(西伯里亞)의 빙원을.... 밀려오고 있었다. 피의 질풍, 죽음의 노도, 그리고 파멸의 말발굽 소리 가.... 대곤륜의 광활한 산역을 넘어 새외칠성(塞外七省) 북육성(北六省)을 질주 하여 중토의 절반을 강타하기까지 걸린 시일은 불과 열흘. 새북(塞北), 요외(遼外), 묘강(苗疆), 서융(西戎)의 일백 칠십 사 개 변방 무파들이 일시에 초토화되고 십왕과 백마의 발길이 그리는 직선거리의 궤적을 따라 팔십 칠 개 대소방파들과 삼십 일 개 저항세력들이 줄줄이 짓밟히고 부서뜨려졌다. 항거할 수도, 막을 수도, 도주할 수도 없이 사람들은 심장을 짓밟아 오는 이 공포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전율에 떨고 있었다. 계속해서 맹렬히 질주하는 십왕과 백마의 발길은 언제까지나 멈출 줄 몰 랐다. 강남(江南)으로, 강남으로.... 과연 백마와 십왕의 발길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멈출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열흘 동안 천하의 여덟 군데 요처에 십왕 중의 팔인(八人)을 축으로 한 백마들의 팔대거점(八大據點)이 구축되었다는 사 실만이 알려질 뿐이었다. 그것이 후계자 싸움에 나선 십왕과 백마 사이에 갈라진 여덟 개의 계파 를 의미한다는 것도 또한 그것이 본격적인 십왕들의 전쟁을 준비하는 무 서운 서곡이라는 것도 아직은 아무도 몰랐다. 그와 함께 가공할 말발굽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네 줄기 뇌전의 굉 음이 사람들의 심장을 강타했다. 대곤륜의 하늘에서 푸른 벽력이 쏟아질 때 같은 시각 천하의 또다른 네 곳에서 작렬했던 그 뇌전들의 시작은 숭산(嵩山)의 하늘이었다. - 소림이 배출한 최고의 불성(佛聖)이자 총정의 신화적인 지주였던 천세 미륵 자장대사가 입적하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팔백 년간 남북으로 갈 라서 있던 총정십대문파가 합일되고 천세미륵의 피를 마시고 새롭게 탄 생한 소림의 빛, 소달마 십문일정 무인이 연합총정(聯合總正)의 영수로 떠오르다! 그것은 정녕 먹구름을 뚫고 작렬하는 신선한 햇살이었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가 전마(全魔)의 모든 것이라면 무림의 기원을 열고 이 땅에 무의 역사를 파종했던 총정(總正)의 힘 또한 결코 그에 못하지 않는 것! 다만 스무 명의 장문인을 모신 분열상태가 너무도 오래 지속되었기에 전 마에 굴복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허면 이제 해볼 만 하지 않은가. 총정십문이 하나로 합쳐지고 천세미륵 의 죽음으로써 태어난 제 이의 천세미륵인 소달마 십문일정 무인이 더욱 무서워진 능력으로 총정을 이끌기 시작했다면 말이다. 사람들이 혼돈 속에 한 줄기 빛을 발견하며 희망의 초에 불을 당길 때 자금성이 있는 북경의 하늘에서 두 번째 뇌전이 떨어졌다. - 더이상 중원에 두 개의 성역은 없다! 있다면 단 하나 짐이 있는 자금 성 뿐! 중원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한 패도의 제황이라는 영락제가 대곤륜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린 것이다. 이 얼마나 오랜 갈증 끝에 듣게 되는 통렬한 일성인가. 지난 세월동안 스쳐갔던 수많은 황조의 제왕들은 결코 벙어리가 아니었 으련만.... 영락제는 누구도 모르게 밀지(密旨)를 내렸다 했다. 역사이래 최강의 무인 하나가 밀지를 받들고 떠났다 했다. 그가 누구인지 천년관부 제일고수라는 자륭극마저도 분사한 지금 과연 그런 인물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의혹과 의문 속에서도 사람들은 영락 제를 믿었다. 찬란한 대명의 역사를 개화시킨 그 위대한 황제를 믿었기에 또한 십팔만 사천백와마루의 붕괴를 믿었다. 백마와 십왕과 곤오풍우를 일검에 참하고 대곤륜의 땅에 황군의 기(旗) 를 꽂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갈증어린 시선이 불타고 있을 때 세 번째 뇌전이 역사의 성채 초왕벽의 하늘 위에서 뇌성을 토했 다. - 천하에서 두 번째의 단체 초왕사성이 대곤륜을 향해 정식으로 선전포 고하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은 주전파(主戰派) 젊 은 세대가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종식되고 여왕접 칠치요시 희설기와 육 천마을 중 술예벌 출신의 망월적, 망우 형제가 난세의 실질적인 통수권 자(統帥權者)로 부상하다! 이천 오백 년 동안 끊임없이 대곤륜의 성역에 도전해 온 유일한 단체 초 왕사성이 마침내 전면적인 싸움을 선언하고 일어섰다. 그것은 바로 전마 와 총정에 이어 오천 년 무림의 또 하나의 거대한 잠재력이었던 연사(聯 邪)의 본격적인 창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충격과 충격이 거듭되는 연타 속에서 네 번째 뇌전은 열사의 땅 사막의 바람을 뚫고 내리꽂히고 있었다. - 대막의 제황 달그림자가 수천의 낙타떼를 이끌고 옥문관을 넘다! 귀향 을 기다리는 뜻으로 백마의 목을 천하에 뿌릴 것을 천명하다! 달그림자가 누구인가. 대막의 유사하에 유리유사하라는 환상의 궁을 짓 고 대상과 유랑극단을 이끌며 신기루처럼 사막을 지배해 온 대막의 신으 로 불리며 곤오풍우, 자륭극, 천세미륵 등의 인물과 함께 견주어 사람들 의 입에 거론되던 그 가공할 신비의 무인이 아닌가. 달그림자는 육천마을 중 광대의 마을 천재촌 출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고향인 중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흑자는 이제껏 천하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비밀의 네 가문인 한림 사가 중 풍문(風聞)의 천풍맥(天風脈)을 그가 이었다고 했고, 그래서 대 곤륜의 신화를 전설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 도전해 오는 것이라고 말하기 도 했다. 아무튼 네 번째 뇌전이 내리꽂히고 달그림자는 중원을 향해 다가오고 있 었다. 아아! 대곤륜의 하늘에서 시작된 뇌전은 숭산과 북경, 귀주성과 대막 등 천하의 곳곳으로 확산되며 전란의 피구름을 빨갛게 잉태시키고 있는데.... 대륙에 위대한 만황의 시대를 열 한 사나이의 소식만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다. 너무도 은밀했기에. ④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근교의 만포현(萬浦縣). 중원에서 가장 많은 포도(葡萄)가 나는 포도의 특산지였다. 이 작은 현에서 재배되는 포도가 전 중원 포도교역량의 삼분지 일을 차 지할 만큼 이곳의 포도는 잘 자라고 또한 맛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만포현이 유명한 것은 매년 팔월(八月) 마지막 날 만 포 특산 청포도와 붉은 포도가 가장 탐스럽게 무르익는 그때 드넓은 포 도농원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포도축제(葡萄祝祭) 때문이었다. 포도축제가 열리면 근교인 낙양의 고관거부(高官巨富)들은 물론 하남성 에서 행세깨나 한다 하는 거상(巨商), 관인(官人), 무객(武客)들까지 각계 각층의 객들이 모여들어 수백여 리에 달하는 만포현의 포도넝쿨숲은 인 산인해를 이룬다. 그리고는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포도로부터 별미의 특산 포도주에 이르 기까지 포도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다. 팔월도 여름과 함께 저물어 가는 마지막 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도록 광활한 포도넝쿨의 대해(大海) 위로 진홍의 노을이 부드럽게 번지고 있었다. 수확기를 맞은 포도들이 알알이 터질 듯 노을빛 아래 탐스럽고 드넓은 포도벌판에는 무르익은 진한 포도향내가 가득한데 석양에 쫓긴 농부들의 분주한 일손에 의해 여기저기서 포도광주리들은 바쁘게 어디론가 옮겨지 고 있었다. 헌데 마악 저녁노을이 더욱 짙은 빛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어느 시각이었 다. 우두두두! 돌연 드넓은 포도벌판 한 가운데서 난데없이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포도벌판을 가로지르며 곧게 뻗어난 대로(大路) 위에 황금과 주옥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한 대의 사두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어머!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하하핫! 저곳이 바로 그 유명한 사계천수포도농원(四季天壽葡萄農園)이 오!" 사두마차 안에서 두 줄기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차가 달리고 있는 대로의 끝인 드넓은 포도밭 사이에는 흡사 칼로 둥 글게 도려낸 듯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공터에는 통나무 등걸을 그대로 다듬어 만든 듯한 탁자와 의자들이 드문 드문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고 지금 그곳에는 한껏 화려한 복장을 한 수 백 명의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가득차 있었다. 헌데 저곳이 바로 사계천수포도농원이란 말인가? 그렇다. 포도의 마을 만포현에서도 대부분의 포도재배지를 차지하고 있 는 중원제일의 포도농장. 사철 잘 익은 포도를 먹을 수 있고 한 알의 포도를 먹으면 일 년의 수명 이 연장된다는 믿지 못할 명성을 가지고 있어 사계천수(四季天壽)라는 농장명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사계포도주는 포도주의 고향인 서역보다 더욱 질과 맛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중원에서는 사계포도주 한 방울 이 황금 한 냥과도 교환되지 않을 만큼 그 가치가 드높았다. 헌데 간혹 몇몇의 식객들만이 포도의 맛을 음미하러 찾아올 뿐 언제나 고요한 정적에 잠겨있는 이 사계천수포도농원에 웬 난데없는 사두마차며 무수한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오늘이 바로 이 해의 여름을 보내는 팔월의 마지막 날 이였기 때 문이다. 우두두두! 히히힝! 화려한 사두마차가 멈추어지는 공터에는 이미 수백 량에 달하는 마차와 가마들이 세워져 있었다. 제각기 빼어난 미감과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일견키에도 결코 아무나 탈 수 있는 것 같지 않은 마차들이었다. 그 마차와 가마들의 대열 너머로 비로소 원형으로 자연스레 놓여진 통나 무 탁자와 의자들의 행렬이 시작되고 있었고, 자기 키보다 높이 포도를 쌓아 놓고 정신없이 입 속에 넣는 자, 포도주를 통째로 들이키는 자, 먹 기내기를 하는 자, 포도를 내던지며 노는 자 등 포도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향략과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로 탁자는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허어, 역시 백대공자의 주량은 도저히 소제가 따라갈 수 없소이다 그 려." "크흐, 좋다, 좋아. 이거 자칫하다 입맛 버리겠군. 사계포도주가 아니면 술로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으니." "호호호, 진가가. 이렇게 훌륭한 곳이 바로 본가(本家)의 근처에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낄낄, 영매가 몰라서 하는 말이지. 우리 낙양성 어귀에서 근교농업을 하 고 있는 만포의 포도들은 중원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하다네." "핫핫핫, 뿐이겠소? 소제는 맹세코 이제껏 이 사계포도처럼 위대한 술은 마셔 본 적이 없다오." "낄낄, 강남제일 거부의 아드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명주는 명 주인 모양일세." 유난히 큰 웃음소리와 교소가 뒤섞이며 광장의 가장자리에서 들려왔다. 광장에서 포도넝쿨숲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통나무탁자를 에워싸고 사남일녀(四男一女)가 앉아 있었다. 그들의 탁자 위에는 대나무의 속을 파고 거기에 술을 담도록 되어있는 만포 특산의 술병들이 이미 수십 개 이상 빈 채로 뒹굴고 있었고, 네 사 내는 물론 가운데 앉은 절륜한 미태의 여인조차 볼이 불그레하게 물든 것이 이미 자리에 앉은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볼이 불그레하게 물들었음에도 조금도 추해 보이지 않는 화사한 미태를 가진 여인이 문득 조심스러운 어조로 한 옆의 장대한 거구의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헌데 진가가, 백마가 벌써 호북성(湖北省)까지 진출했다고 하는 말을 어 제 향아에게서 들었는데 혹 알고 계셨어요?" 이미 얼큰히 술이 오른 듯 구레나룻을 기른 넓적한 얼굴을 아예 핏빛으 로 물들인 거구사내가 걸쭉한 대소를 터뜨렸다. "껄껄, 알다마다. 허나 영매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네. 백마는 절대로 이곳 하남성까지는 진출하지 못할 테니까!" "왜죠?" "껄껄, 하남에는 숭산이 있고 숭산에는 소달마 무인이 있네. 거기에 개방 의 천결선생과 남검새의 남남검후 등 총정의 모든 힘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우리 하남이기 때문이지." "핫핫핫, 뿐이오? 더욱이 우리들 여섯 명이 이렇게 버티고 있지 않소!" 거구사내의 옆에서 준수하게 생긴 서생차림의 청의사내가 그의 말을 받 자 거구사내가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껄껄, 그렇지. 우리 강남육영(江南六英) 또한 백마 중 한 명 정도는 가 볍게 무찌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남성을 중심으로 자리해 있는 삼백 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여섯 개의 무가인 강남육문대정세가에서 배출된 여섯 명의 젊은 영재들을 강남육영 이라 부른다. 헌데 그들의 말은 정녕 가공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산문이 열린지 오늘로 꼭 보름째였다. 그동안 천하의 북서변방과 중토의 북부무림을 초토화 시키며 피의 진격 을 해 왔던 백마의 발길이 어느새 하북성까지 다달아 있고 이제 그 아래 장강 이남의 하남성까지도 그들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을 정도라 니 말이다. 그 때였다. 삐류류... 삐리리리. 왠지 슬픈 색조를 띤 묘한 기음이 포도나무숲 사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 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보는 중인들의 시선 속에 가슴에 맹호가 수놓아진 혈 포를 입고 입에 바람개비를 문 채 천천히 포도밭을 가로 지르고 있는 한 혈영(血影)의 모습이 비쳐졌다. "포도가 아주 잘 익었어. 하지만 안타깝군. 이 자는 포도를 가꾸는 데 조 예가 깊은 모양인데 이제 다시는 포도를 가꾸지 못하게 될 테니." 혈영은 파랗게 영근 포도알 하나를 떼어 보다 이내 바닥에 던져 버리며 천천히 광장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중인들의 눈에 어이없는 조소의 빛 이 스쳐갔다. "깔깔깔, 어머! 참 예쁘게 생긴 사내가 돌았나 봐요." "핫핫핫! 이제 이곳 사계천수포도농원도 타락하기 시작한 모양이군. 저렇 게 너절한 장난감으로 되지도 않는 멋만 부린 기생오라비 같은 자를 다 들여 보내다니." "정말 괴상망측한 복장이군. 피칠이라도 한 것처럼 시뻘건 혈포에 쌍도 끼를 꽂고 거기에 극까지. 하필이면 얼굴은 왜 반반하게 생겨서 저리도 부조화스런 인간을 만들어 놓는단 말인가." "껄껄껄, 저자는 아마 포도밭을 싸움터 쯤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네. 그것 도 꼬마아이들의 병정 놀이터로." 사남일녀의 지독한 조소를 받으며 노을 속에 다가오고 있는 혈영의 차림 새는 더욱 기이했다. 여인처럼 긴 머리칼에 황금빛 목걸이를 목에다 걸고 허리에는 조그만 쌍 도끼를 한꺼번에 비끌어 매었으며 어깨 위엔 도신에 반월형 날이 덧붙여 진 기이한 극(戟)을 둘러메었다. 거기에 입에는 어린아이 장난감같은 빨 간 바람개비를 물고 있지 않은가. 허나 강남육영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지독히도 진기한 행색이고 어이없도록 장난스러운 차림이었지만 환상처럼 희고 수 려한 얼굴과 그런 모습이 이룬 묘한 조화미는 조금도 어색하거나 부자연 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이로우리 만큼 가슴에 파고드 는 미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바로 자천릉이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강남육영의 말에 의하면 분명 백마는 하북성까지 진군해 있다고 했거늘, 기이하게도 자천릉의 발길은 이미 전선(戰線)을 가르는 장강을 넘어 이곳 하남성의 심장부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었으니. 이때 자천릉은 특유의 모든 것을 조소하는 듯한 얼굴로 덤덤하게 강남육 영의 탁자를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머! 저 황금목걸이 좀 봐. 정말 예쁜데!" 자천릉의 목에 걸린 소소미미술예환을 발견한 여인이 저도 모르게 탄성 을 터뜨렸다. 그러자 얼굴이 핏빛으로 물든 구레나룻 대한이 거슴츠레한 눈빛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껄껄, 영매가 갖고 싶다면 이 우형이 구해 줄 수 있지." 그는 비틀거리며 자천릉을 막아섰다. "이봐, 형씨! 어쩐지 그 황금목걸이는 자네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 본 인에게... 끄윽! 넘기게. 내 사례는 후히 쳐 줌세." 그는 대나무 술병을 자천릉에게 내밀면서 소소미미술예환을 잡아 채려했 다. 그 순간 어느새 뽑아진 자천릉의 은도끼, 벽은월이 사내의 손을 차올렸 다. "쯧! 비싼 포도주를 처먹고 취하기는 더럽게 취했군." "이, 이 자식이!" 구레나룻 대한이 발끈하며 벽은월을 뿌리치려는 찰나였다. "주인은 제 정신인 모양인데 손이 취했군. 허면 손만 잘라주면 되겠지." 번쩍! 사내의 손이 갑자기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탁자 위로 놓여졌다. 그 위를 벽은월이 대나무를 쪼개듯 내리찍어 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사 내의 눈이 휩뜨여졌다. "으악!" 선혈이 튀고 비명이 터졌다. 자천릉은 무뚝뚝하게 한 마디를 남기며 천 천히 돌아서고 있었다. "네가 살아있는 것은 제법 반반한 얼굴을 가진 네 여자친구 덕분이야." 탁자 위에 올려진 사내의 손은 끊어지지 않았다. 단지 손가락 사이를 벽 은월이 파고들며 남긴 찰과상으로 선혈이 튀었을 뿐이었다. 사내는 졸지에 술이 확 깬 듯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자천릉의 등을 멍 청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멋있어! 저 괴이한 차림의 사내에게 저런 무서운 능력이 있었다니 거기다 얼굴도 지독하게 잘 생겼잖아. 헌데 나 때문에 진가가를 살려준 다고?' 우두커니 자천릉을 쳐다보는 여인의 눈에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빛이 복잡하게 스쳐가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헛, 저자의 혈포에 수놓아진 맹호의 문양! 저, 저것은." 한 사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백마다! 백마가 나타났다!" "틀, 틀림없이 백마만이 입는 혈포다!" "으으, 허면 벌써 백마들이 이곳 하남성까지 들어왔단 말인가?" 강남육영은 물론 주위에 있던 수십 명의 입에서 일시에 경악의 신음이 공포에 젖은 채 터져 나왔다. 그렇다. 기이하게도 지금 자천릉의 몸에 걸쳐져 있는 혈포는 분명 백마 들만이 입을 수 있는 맹호문양이 수놓아진 옷이었던 것이다. 불과 보름 전까지 분명 자천릉은 서열 백 육 위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자천 릉이 백마의 서열에 들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그때 느릿하게 광장을 걸 어 들어가고 있는 자천릉을 향해 시중을 드는 자인 듯 두 손에 포도쟁반 을 가득 받쳐든 사내 하나가 다가가고 있었다. "저, 무엇을 드시... 흑!" 그의 눈이 휩뜨여졌다. '백, 백마다!' 그의 안색이 대변하며 그대로 쟁반을 떨어뜨린 채 어디론가로 황급히 뒷 걸음질쳐 사라지고 있었다. "이상하군. 왜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거지? 직접 찾아 먹으라는 말인 가?" 천천히 광장을 빠져나온 자천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포도넝쿨들을 헤쳐 가고 있었다. 헌데 그의 눈 앞에는 소롯길을 통해 포도넝쿨들로 뒤엉켜 진 한 채의 거대한 장원이 보이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넝쿨의 바다와 아찔하도록 짙은 포도의 향기 한 가운데 노을을 받으며 자리한 연홍빛 장원의 모습은 마치 선경 속을 보 는 것 같았다. "저곳이, 이 포도농장의 주인, 사계수(四械秀) 황극량(黃極亮)이 사는 장 원인 모양이군." 자천릉은 나직하게 뇌까리며 소롯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제20장 매당파(魅堂坡)의 괴사들 ① - 사계수 포도산인(葡萄散人) 황극량. 천하제일의 거부(巨富), 포도의 왕(王)으로 불리우는 인물로서 만포현 밖 이백여 리에 걸쳐 포도를 재배하며 포도에 관한 한 파종에서 재배까지, 생태에서 활용까지 그 모든 것에 달통해 있다는 포도의 명인이었다. 특히 그가 빚은 사계포도주는 한 방울이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비싸다는 천하제일의 명품이며 일설에 의하면 씨없는 포도까지도 황극량의 농원에 서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