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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황(卍皇) 1 - 22편 (22/50)

2026-09-21 21:18:45 조회 20
그리고 이(牙)와 혀를 이용해서 이렇게 살짝 공기를 퉁겨내면." 자천릉의 입에서 돌연 가죽 북을 찢듯 역겨운 소리가 사위에 울려 퍼졌 다. 그 순간 필혜슬의 등 뒤에서 짧은 비명이 터지며 긴 창 하나가 퉁겨 져 바닥에 뒹굴고 한 사내가 필혜슬을 노리던 신형을 그대로 틀어 동굴 벽을 박차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필혜슬과 냉교채 가 동시에 교갈을 터뜨렸다. "호호호! 봉아탑의 식충이 벌레였군." "어지간히 다급했나 보군. 자기 아버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십이장창을 버리고 가다니." 이때 자천릉의 눈이 힐끗 필혜슬을 향했다. "비겼어. 이제부터 그대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조잘거리지마. 나도 그대의 목을 한 번 지켜 줬으니까." "호호호, 그래, 꼬마. 이제부턴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보호자로 불려야 할 테니까 그럴 필요가 없겠지." 그때 냉교채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이채를 띠며 걸음을 돌려 다시 시체 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차! 지금 내가 뭘하고 있지? 어서 소소천총을 찾아보지 않고서!' 필혜슬도 비체인을 다시 오현금파에 꽂으며 황급히 바닥의 시신을 뒤지 기 시작했다. 그때 자천릉은 이미 소소천총의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다. <수(隨) 문제오년(文帝五年) 사월 십구일(十九日). 나 소소가의 삽십일대손(三十一代孫) 소사인(簫絲人) 유엽(柳葉)은 오늘 가문의 시사(始事)를 맞으며 선조들의 유진(遺眞)을 정리해 보았다. 소리 의 꿈을 쫓아 삼십대(三十代) 천오백년(千五百年)을 이어 내려온 우리 소 소가의 치열한 투쟁의 흔적들, 그 발자취 중 기억해야 할 만한 수기(手 記)와 무결(武訣)들, 그리고 소리의 이론(理論)이 발전해 온 문헌상의 증 거들을 발췌하여 하나의 책을 꾸민 것이다. - 소소천총(蘇 天叢). 처절하도록 가슴에 맺혀 오는 선조들의 뜨거운 피(血)와 혼(魂)의 무게가 새삼 엄숙하게 느껴지는 친필의 기록들. 이 작은 가죽 책자는 더이상 지 편(紙片)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두터운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려는 본가의 비원(悲願)은 언제야 이루어지려는가.> "소사인 유엽? 소소천총을 만든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었군. 아무튼 지 독한 사람들이다. 무려 천 오백 년이 흐르고서야 자신들의 성(姓)을 밝혀 놓을 정도니." 자천릉은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계속 책장을 넘겨 갔다. <수문제 구년(九年) 오월(五月) 십칠일(十七日). 선조들이 만든 악기를 나란히 놓고 얼마나의 음계(音階)가 담겨져 있는 지를 생각해 보았다. 비파(琵琶)가 오현(五絃), 대금(大琴)이 십이현(十二絃), 가장 음계가 많다 는 경(磬)이라 해도 고작 백 단위의 순이다. 수백 종이 넘는 이 악기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음(音)의 수는 결코 일천 개를 넘지 않는다. 허면 하나의 악기에 그 모든 음을 담는다는 것은 정녕 불가능하단 말인 가? 지금까지 분석된 바로 대자연에 존재하는 음계의 수는 적게 잡아 일 만종(一萬種), 아니 어쩌면 십만(十萬), 백만(百萬)이 넘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 가문의 제악기술(製樂技術)이 금후 몇 천 년을 더 발전한다 해도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장벽인 것, 정녕 방법은 없는 것인가? 수문제 구년 시월(十月) 이십육일(二十六日). 생각다 못해 최고의 장인(匠人)들이 사는 땅, 육천마을 중 술예벌(術藝 閥)을 찾았다. 가서 술예벌의 제삼대(第三代) 장두(匠頭)인 신예공인(神藝 工人)에게 취지를 말했더니 뜻밖에 쾌히 승낙을 한다. 그로부터 장인의 마을 술예벌의 자존심을 걸고 술예벌의 전 장인들이 동 원되는 엄청난 대작업이 시작되었다. 일천여(一千餘)의 장인들이 열 개의 음계(音階)씩을 맡아 그것을 하나의 모래알보다도 섬세한 고리(環)에 담 아 나가는 것이다. 재료는 금(金)과 구리(銅), 은(銀)과 옥(玉)을 하나로 융합시킨 금속을 쓰 기로 했다. 옥은 석질(石質)의 보석인 탓에 평범한 용광로에는 녹지도 않 는 물질인데, 그것을 어찌 하나로 녹여 합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이 대사(大事)에 참여하는 것은 본가의 소리에 관한 모든 연 구자료와 수천 수만의 음계에 대한 의견의 제출일 뿐. 허나 일은 시작되었고 나는 다만 지켜볼 뿐인 것이다. 진인사(盡人事) 대 천명(待天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수문제 십구년(十九年) 십이월(十二月) 십이일(十二日). 아하! 황홀하도다. 천하에 이토록 영롱한 보석과 이토록 아름다운 음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술예벌의 대사가 시작된 지 만 십년(十年)이 지난 오 늘, 마침내 우리는 인간이 탄생시킬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창조물을 보게 되었다. 천 명의 장인이 십 년에 걸쳐 탄생시킨 고리의 수는 정확히 일만개(一萬 個). 단 하나의 동일한 음계도, 단 일조(一調)의 깨어진 화성(和聲)도 존 재하지 않는 미증유의 일만음계(一萬音階)가 이 지상에 처음으로 고고성 을 올린 것이다.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일만 개의 환을 꿰어 한 조의 황홀한 연환(連環) 을 만들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온갖의 바람소리 새소리가 환상의 음률로 우러나고, 가볍게 흔들어 주면 작게는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로부 터 크게는 청천의 뇌성에 이르기까지 웅장한 대자연의 화성이 그지없이 조화된 선율로 울려퍼지는 하늘의 악기(樂器)였다. 허나 그 길이와 부피는 뭉쳐 쥐면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큼 섬세하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창조물 앞에서 오래도록 머리를 맞댄 끝에 소소미미 술예환(蕭 美微術藝環)이라는 이름을 주기로 마음을 모았다. 하지만 문제 는 있었다. 과연 인간의 힘으로 이 일만 음계를 조화시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률을 낼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未知數)로 남아 있었던 것이 다. 아무리 음에 숙달된 달인의 귀(耳)라 해도 삼십 종 이상의 음계를 구분 해 들을 수는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진 사실이고 보면, 실상 소소미미술 예환으로 완성된 소리를 낼 자는 신(神) 밖에 없지 않으랴. 아니면 보통의 오감(五感) 이상의 영감인 제육감(第六感)이 극도로 발달 된 인간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이상 어떤 한계(限界)를 뛰어넘은 신적 인 감각을 지닌 인간이 있어야 할 것이리라. 그리고 또 하나, 오호! 두렵도다. 만약 이 아름다운 악기가 잘못 일반인 들에게 유출된다면 그래서 만에 하나 무인이라는 자들의 손에 들어간다 면 악마의 병장기로 화해 천하를 멸살시킬 엄청난 소리의 재앙(災殃)이 소용돌이치게 될 터이니.> "소소미미술예환, 이게 어디에 있다는 거지?" 자천릉은 갑자기 읽기를 멈추고 소소천총을 마구 뒤적거리다가 멈칫하였 다. "쳇! 그런 귀중한 기물을 책 같은데다 감춰 둘 리가 없지. 더욱이 이렇게 조그만 책에...." 실망의 음성을 내뱉던 자천릉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응? 이, 이건 웬 실밥이 튀어나와 있지?" 자천릉의 눈길이 멈춘 곳은 소소천총이라 쓰인 금빛 수실의 소(蕭) 자가 쓰인 머리 부분이었다. 헌데 그 부분에 가느다란 실밥 한 올이 삐져나와 있지 않은가? 자천릉은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그 실밥을 잡아갔다. 짤랑! '엇!' 돌연 그 실밥에서 경쾌하면서도 영롱한 음향이 울려나오지 않는가? 이어 실밥을 뽑아 감에 따라 그 음향은 더없이 청아한 화음을 내며 자그만 옥 구슬을 굴리듯 꼬리를 물고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이 소리는 언제가 아득한 기억 속에서 꼭 한 번 들어본 것만 같은 소리, 아니 먼 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소리이다!' 자천릉의 눈가에 격동이 스치고 있었다. '그래.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바로 소소미미술예환에서 울리는 소리다!' 지금 자천릉의 손바닥 위에 놓인 금빛 수실은 실이 아니었다. 흡사 금빛 눈썹을 뽑아 환(環)을 만들어 놓은 듯, 직경 천분지 일 치, 두께 만분지 일 치로 정교하게 세공된 지독히도 섬세한 환이었다. 그 조그만 고리들이 무려 일만 개(一萬個)나 연결되어, 뭉치면 자그만 황 금 진주 한 알 크기에 불과하나 일단 펼치면 전장(全長)이 십장(十丈)까 지 늘어나는 실날같은 연환(連環)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자천릉은 문득 소소천총을 내려다 보았다. "이 소소천총은 없애야 한다. 왜냐하면 소소미미술예환은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물이기 때문에... 그래, 이것을 병장기로 쓰자. 천하를 죽음의 소리로 휘감을 나 자천릉의 병장기로!" 화르르르. 자천릉이 들고 있던 소소천총에 파란 안개 같은 것이 어리며 이내 연기 도 없이 재로 화해 흩어졌다. 은왕조 시대로부터 무려 삼천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며 완성된 소소천총 이 한 줌의 재로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이때 자천릉은 소소미미술예환을 목에 걸고 있었다. "훗! 사내가 개목걸이를 목에 걸었으니 내 꼴이 볼만하겠군." 자천릉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호호호, 그래! 볼만하다. 볼만해! 개목걸이가 아니라 강아지 목걸이 같구 나." 필혜슬이 아리따운 교소를 터뜨리며 자천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호호, 장난감 쌍도끼에 긴 청포, 거기에 황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목 걸이를 다 하고, 꼭 새끼 기생오라비가 어릿광대로 분장한 꼴이구나" "쳇! 싸움이 너무 빨리 끝났군. 좀더...." "좀더? 꼬마! 그 다음 말은 오래 싸우다가 이 누나가 콱 죽어 버렸으면 하는 거지?" 자천릉은 문득 얼굴을 붉혔다. "흥, 꼬마! 넌 정말 어느 정도까지 나쁜 아이냐? 그 숱한 위험을 무릅쓰 며 자나깨나 고이고이 너를 모시고(?) 온 보호자가 죽기를 바라다니." "그, 그것은 아까 비겼잖아!" "비겨? 꼬마 너 오늘 농담되는구나. 하, 참! 피보호자가 보호자를 좀 도 와줬다고 이토록 공치사를 하다니, 치사하다. 치사해!" '욱! 공치사? 제길 누가 공치사를 하는지 모르겠군. 정말 다른 건 몰라도 저 입 하나만큼은 좀 죽어 줬으면 좋겠어!' 필혜슬이 자천릉의 상기된 볼을 톡톡 쳤다. "호호, 꼬마, 아까 뭔가를 열심히 보더니 그건 어쨌지?" "버렸어." "그래? 잘했구나. 이 아름답고 총명한 누나가 이곳을 돌면서 이미 판단 한 일인데, 이곳 십팔만사천제이무관에 있는 무학들은 모두 쓰레기뿐이 었단다." '훗! 내가 자신이 찾으려는 소소천총을 태웠음을 안다면, 이 여자는 틀림 없이 저 지독한 입과 이빨로 나를 아홉 번은 더 태웠을 거야.' 필혜슬이 자천릉의 손목을 거침없이 잡았다. "자, 이제 이 냄새나는 공동묘지를 벗어나자." "으응? 나는 아직 멀었는데? 이 장포 자락을 꽉! 채우려면 적어도 백 권 이상의 무공 비급이 더 필요할 텐데." 그러자 필혜슬이 자천릉의 두툼한 장포 자락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 꼬마는 원래 커다란 보퉁이를 메고 다녔으니, 이건 좀 헐렁하겠구 나." 동시에 그녀는 잽싸게 손을 놀려 수많은 무경들을 마구잡이로 자천릉의 장포 보따리에 쑤셔 넣었다. "자자, 꼬마야. 그 장포 자락을 좀 더 벌려. 아니 하나가 더 필요하겠는 데." 순식간에 두 덩어리의 거대한 장포 보따리가 만들어졌다. "호호호, 이젠 됐지? 이 욕심 많은 꼬마야!" "에이, 이건 너무 많은데." "아냐 아냐! 원래 네가 지고 있던 보퉁이에 비하면 너무 가벼워." "끙!" 자천릉은 두 개의 자기 덩치 만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일어서며 내심 끊 임없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길, 알고 보니 저 초롱한 눈과 사과빛 뺨은 모두 심술로 가득 채워져 있었군. 헌데 나는 왜 이 고역을 치러야 하는 거지? 빌린 은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 자천릉의 등 뒤에서 돌연 나직한 실소가 터졌다. '이 웃음은 저 여자보다 향기가 진하게 나는 그 예쁜 여자다!' 어느새 자천릉의 등 뒤에는 냉교채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자천릉은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이번에는 예쁘다. 내 앞에 있는 저 심술보 여자보다 백 배는 더!' 정말이었다. 그토록 차갑고 싸늘하기만 했던 냉교채였다. 헌데 지금 가볍 게 뒷짐을 진 채 자천릉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모 습은 정녕 눈 속에 핀 한 떨기 백합 같았다. "후후, 릉아. 내가 좀 도와줄까?" "으응? 괜찮아. 릉아는 조금도 힘들지 않아." 필혜슬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꼬마가 얼마나 힘이 센데." 자천릉이 입술을 삐죽였다. '어휴, 저 입술은 벌어지기만 하면 나를 괴롭히는 구나!' 이때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졌다. 필혜슬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졌다. "꼬마! 어서 뛰어. 벌써 다른 자들이 사층에 들어갔나 봐!" 동시에 그녀는 자천릉의 손목을 꽉 붙들며 한 마리 암호랑이처럼 몸을 날렸다. '이건 정말 큰일이다!' 자천릉은 양손 가득 짐을 쥔 채 앞의 필혜슬과 뒤의 냉교채를 번갈아 쳐 다보며 내심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이 심술보 여자와 저 예쁜 여자가 앞 뒤로 싸고 릉아를 꼼짝 못하게 하 고 있으니, 제길! 꼭 팔려 가는 당나귀 같군.' 자천릉이 문득 냉교채의 얼굴을 힐끔 돌아보았다. 냉교채가 샐쭉 웃었다. "후후, 왜 자꾸 나를 쳐다보는 거지?" "으응, 저... 그대가 무엇을 얻으려 생각하고 이곳에 들어왔는지가 궁금해 서." 냉교채가 입을 다물었다. "쳇, 또 누구처럼 비밀이야?" "그렇지는 않아. 이 누나는 대풍람(大風覽)이라는 서책을 찾으러 들어왔 단다." "대풍람? 그게 무슨 책이지?" 자천릉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대풍람(大風覽). 십팔만사천백와마루와 유일하게 쌍벽을 이룰 수 있는 가문들인 한림사가 (翰林四家)중 천풍맥(天風脈)을 계승하고 있는 풍문(風門). 그 문중에 삼 천 이백여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단 한 권의 신비서책(神秘書冊)이 있 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풍람이었다. 바람(風)이 전하는 모든 것을 기록해 놓았다는 대자연의 비학기서(秘學 奇書)! 헌데 그 대풍람도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저 계집애가 풍문의 대풍람을 찾으러 왔다고? 뜻밖의 사실이군. 분명 대 좌령(大座領)께서는 소소가의 소소천총 밖에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필혜슬의 아미가 솟구치며 냉교채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아무튼 일층과 이층, 그리고 삼층에는 소소천총도 대풍람도 없었어. 그 리고 이 계집애도 얻지 못한 듯하니, 대좌령의 말씀대로 사층의 총정무 벽(總正武壁)에 있음에 틀림없어!' 그 순간 섬뜩한 기음과 비명이 잇달아 터지며 육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늦었군. 본인은 그대들이 먹을 밥을 지키느라 파리를 무려 서른 일곱, 아니 서른 여덟 마리째 잡고 있는데." 다시 예의 육중한 음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어둠 속에 새파란 청광(靑光) 이 번개처럼 그어지며 또다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느새 그 무수하던 미로의 동굴이 끝나고 대신 까마득한 계단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팔십여 개에 달하는 화강암 계단의 중간에 청 의를 걸친 무쇠 같은 이십 대 사내가 낭자한 선혈 속에 새파란 도(刀)를 비스듬히 세우고 우뚝 서 있었다. 흡사 전쟁터에서 막 귀환한 무사처럼 음산한 죽음의 채취를 풍기는 사 내. 사내의 발치부터 계단의 끝까지에는 수십여 구의 시신들이 선혈을 쏟으며 나뒹굴고 있어 사내의 모습을 더욱 공포스럽게 부각시키고 있었 다. 사내를 발견한 필혜슬이 아리따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고맙군요! 우리 끼니를 이렇게 찾아 줘서 말예요." 사내는 새파란 도에 묻은 선혈을 발치에 뒹구는 시신에 문질러 닦으며 음산하게 이를 드러냈다. "고마와 할 것까지는 없소. 본루를 위한 일일뿐이니, 만약 그대들이 이자 들보다 무능한 존재로 내 눈에 비쳤다면 여기 죽어 가는 파리들 중에 그 대들 또한 빠지지 않았을 것이오." "호호호! 그럴 거예요. 제가 먼저 와 있었다면 그대 또한 파리가 되어 있 겠지만." 필혜슬이 비웃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보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헌데 어떤 파리 한 마리가 용대가처럼 무서운 파리잡이를 빠져나 가 저 오행무벽의 집상무벽(集商武壁)에 들어갔지요?" 용대가라고 불리운 사내는 바로 천왕도(天王刀) 용붕이 아닌가? 만장석 굴 입구에서 홍금서생 적옥기를 지독히도 비웃던 사내, 원로 고수들의 희망을 한 몸에 받으며 천장원의 추천으로 만장석굴에 들어왔고, 오 인 의 후보자 중 일인(一人)으로 꼽히던 천왕도 용붕, 바로 그였던 것이다. 이때 용붕이 서 있는 계단의 끝에는 하나의 거대한 암갈색 장벽이 버티 고 서 있고, 그 위에는 화강암을 직접 박아 만든 글자인 듯 <오행무벽 (五行武壁).> 이라는 네 자의 글씨가 거의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마모된 전자체(篆字體)로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 주먹만한 크기의 붉은 전자체로 새겨진 <총정무벽(總正武壁)>, <전마무벽(全魔武壁)>, <연사무벽(聯邪武壁)>, <만천무벽(卍天武壁>, 이 라는 글귀가 네 개의 기둥처럼 나란히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 오행무벽(五行武壁). 다섯 개의 필적으로 나누어진 오행의 문(門). 그렇다. 이 석벽이야말로 십만제사연무관(十萬第四鍊武關) 앞에 설치된 입구이자 운명의 관문이었 던 것이다. 헌데 기이하게도 네 줄의 글귀 중간에 또 하나의 글귀가 들어갈 만한 공 간이 이가 빠지듯 텅비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분명 누군가가 하나의 벽을 먼저 밀고 들어가 글귀가 돌려진 흔 적이었다. 그때 용붕이 필혜슬의 시선이 예의 돌려진 석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 며 다시 육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ㅋ, 본인은 사과를 파먹는 한 마리 숫여우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을 뿐 이오." "호호호, 식충이 벌레는 날개가 달렸으니, 가장 빨리 들어간 게로군요." 필혜슬의 눈이 빛을 발했다. 용붕이 몸을 역회전시켜 계단 위로 솟구쳤다. "훗날 만나게 되길 바라오!" 그의 신형은 전마무벽이라고 새겨진 석벽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후후, 괜찮은 자야. 제법 눈도 높은 것 같고 다시 만나면 나의 맛있는 요리를 대접해 주고 싶군. 그리고 궁금하다니까, 저 무쇠 같은 얼굴 색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자천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릴 때였다. "꼬마야! 오 년 뒤에 만나." 필혜슬이 교소를 터뜨리며 계단 위로 쫓기듯 신형을 날렸다. 냉교채의 교구도 제비처럼 쏘아졌다. "릉아야, 훗날 보자꾸나!" 두 여인의 신형은 거대한 오행무벽의 글귀를 뚫고 사라지고 있었다. "흥! 다시 만나자고? 싫어 죽겠어. 릉아는 절대 그대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다음에 만나면 또 오늘처럼 그대들의 이빨과 향기에 질식해 버릴 테니까." 자천릉은 입술을 비쭉이 내밀며 천천히 계단 위로 걸음을 옮겨 놓기 시 작했다. ② "치잇! 총정무벽과 연사무벽엔 두 여자가 들어가고 이제 이 만천무벽만 남았군." 계단 위에 오른 자천릉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글귀에 손을 대는 순간 석 벽이 육중하게 회전하며 자천릉의 신형이 빨려 들어갔다. "쳇, 그 여자들에게 빌붙어서 겨우 들어왔더니, 온천(溫泉) 하나와 병장 기들만 놓여 있는 연무장에 불과하잖아." 자천릉이 들어간 만천무벽 안은 약 오백평(五百坪) 가량의 널따란 청석 (靑石) 광장이었다. 기이한 수증기가 가득차 있는 광장의 전면에는 희귀한 상고시대의 병장 기로부터 검이며 활에 이르기까지 온갖 병장기들이 가득 꽂힌 병가(兵 架)가 자리해 있었다. 주위를 자세히 훑어 가던 자천릉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응? 병가의 반대편이 서가였군." 병장기로 메워진 벽면의 반대쪽에는 청석벽을 그대로 쪼아 만든 거대한 서가(書架)가 수증기 속에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실망인데. 저 커다란 서가에 겨우 사십 권 남짓한 책과 지저분한 물건들만 뒹굴고 있다니." 서가로 다가가던 자천릉의 입에서 불평이 터져나왔다. "그 여자가 말한 대풍람인가 하는 책은 아예 있을 리도 없겠군." 서가의 한 복판에는 맹수의 가죽을 벗겨 엮은 듯한 사십여 권의 서책들 이 덩그러니 꽂혀 있고, 그 아래 수십 두(頭)의 황금빛 고루( ?)와 녹슨 청동궤 하나가 먼지 속에 뒹굴고 있었다. 자천릉은 천천히 가죽 서책들의 목차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공공천급(空空天 )이라, 이름 한 번 괴상하군. 응? 제 일대 태대각 십만 세세 곤륜천자 공공황 유필(遺筆)이라고?" 자천릉의 눈에 문득 경이의 빛이 스쳐갔다. "제 이대 태대각이 남긴 곤륜현황무경(崑崙玄黃武經), 제 삼대 태대각이 남긴 광무천서(曠武天書), 제 삼십이대 태대각 창룡일천도법해례(蒼龍一 千刀法解例), 놀랍군!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역대 태대각들이 남긴 무경 의 진본(眞本)들이 여기 모여 있었다니!" 실로 가공스러운 일이었다. 삼천 년 전부터 이미 하늘이 된 채 천하를 지배해 온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역대 태대각들이 남긴 무경의 진본들이 여기 집대성되어 있다니. "이상하군. 왜 다른 자들이 이 무경들에는 손을 대지 않는 거지?" 자천릉은 고개를 갸웃하며 황금 고루 위로 시선을 떨구다 흠칫 눈빛을 빛냈다. 아흔 아홉 개에 달하는 황금 고루의 미간에는 붉은 빛의 (卍)자가 정교 하게 새겨져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