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만황(卍皇) 1 - 15편 (15/50)

2026-09-21 21:18:45 조회 26
창천칠연의 안색이 일순 허옇게 질려 갔다. 예의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 실내를 음산하게 울렸다. "병아리들이 지나치게 삐약거리고 있군. 더욱이 그 꼬마는 본곽의 살인 대상이라고 이미 경고를 했을 텐데 말이야." 자천릉은 음성이 들려 온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경고? 쳇! 아까 본 그 혈관들이 이정표인 줄만 알았더니 저자들이 잘난 체 하느라 세워 둔 표식이었군." 자천릉의 시선이 꽂힌 통나무집 앞의 설원 위에는 섬뜩한 빛을 뿌리던 아홉 개의 관들이 어느새 뚜껑이 젖혀져 있고 관의 빛깔과 똑같은 혈포 를 걸친 아홉 구의 시체가 그 속에 우뚝 서 있지 않은가. - 적곽과 홍포구독. 육천마을 중 시망상천이 천민들로 이루어진 시신의 마을이라면 천하에는 무인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귀역이 존재하니, 천하인 들에게 피와 죽음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있는 가장 공포스런 살 인자들의 집단이 바로 적곽이었다. 아홉 개의 핏빛 관으로 표식을 삼는 이 홍포구독이라는 인물들이야말로 그 적곽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인물들로 황금 일백만 냥 정도로는 불러낼 꿈조차 꾸지 못하는 살인청부업계의 서열 일, 이 위를 다투는 거 목들이었다. 이때 통나무집의 부서진 틈 사이로 바깥을 쏘아보던 자천릉의 시선이 마 침 안쪽을 바라보던 홍포구독 중의 한 인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순간 자천릉의 두 눈에 파란 불꽃이 작렬하였다. "핏! 잘난 체 할 만한 놈들이긴 하군." 찰나적으로 자천릉의 뇌리에는 한 줄기 예리한 판단이 섬전처럼 스쳐가 고 있었다. '까마귀 할아범은 말했지. 적의 힘이 나보다 강할 때 피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니까 말야.' 자천릉의 입가에 냉소가 스쳐갔다. '그렇다면, 살인백율 제 팔십팔율, 기습이다.' 순간, 팽!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자천릉의 입에 물려있던 바람개 비가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헉! 호, 홍익... 크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홍포구독중 한 명이 악마의 장난감 홍익청차에 의해 허리가 잘려 나가 버렸다. 자천릉의 신형은 그 짧은 빈틈을 이용하여 벼락같이 통나무집 밖으로 퉁 겨지며 허공을 선회하는 홍익청자를 받아 물고는 곧장 산허리를 향해 달 려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자천릉의 싸늘한 음성이 중인들의 가슴에 얼음조각처럼 내리 꽂히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나를 건드리면 무서운 일이 생긴다고, 그 무서운 일은 바로 죽음이다!" "제, 제기랄! 쫓아라!" "저런! 편안히 누워 쉴 관(棺)을 팽개치고 눈 속에 드러누우려 하다니 안 될 말이지. 멈추거라!" 창천칠연과 홍포구독, 아니 이제 홍포팔독이된 그들의 신형도 자천릉을 쫓아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이때 자천릉의 신형은 능선이 꺼져 골짜기로 변한 곳에 걸쳐져 있는 거 대한 화강암 석교에 이르고 있었다. 눈 덮인 석교 너머로는 폭설을 머리 에 인 울울창창한 죽림이 펼쳐져 있었다. 헌데 자천릉이 곧장 다리 위로 달려가고 몇몇 추적자들의 신형이 다리 앞까지 쇄도해 가는 순간 돌연 뒤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터져나왔 다. "안돼! 멈춰라! 그 다리는 대곤륜의 관문, 천지금교(天地禁橋)다! 그 다리 를 건너지마라!" "헉! 천, 천지금교!" "젠장할! 큰일날 뻔했군. 이 다리가 영원한 중원의 성역 십팔만사천백와 마루의 동쪽 경계가 시작되는 생사천교였을 줄이야!" 추적자들의 몸에 벼락을 맞은 듯 전율이 일어나며 그들의 신형은 정확히 다리 앞에서 멈추어지고 말았다. ② 천지금교(天地禁橋). 하늘과 땅, 생과 사의 갈림길을 긋는 영원한 금단의 다리. 천지금교를 건넌다는 것은 곧 지상에서 하늘로 오르는 것을 의미했다. 신강(新疆)과 서장(西藏), 그리고 청해를 꿰뚫는 대곤륜산맥 한가운데 웅 크린 십팔만사천백와마루, 그 위대한 성지가 시작되고 끝나는 동쪽의 경 계가 바로 이 천지금교였던 것이다. 허나 자천릉은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계속 다리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때 돌연 자천릉의 몸은 무엇인가에 걸린 듯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 고 말았다. "뭐지?" 자천릉이 흠칫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호호, 꼬마가 달리기를 참 잘하는구나. 하지만 이제 그렇게 달릴 필요가 없어. 꼬마를 쫓는 사람들 중 이 다리를 건널 간담을 가진 자는 없을 테 니까." 자천릉의 옆에서 한 소녀가 뻗었던 다리를 움츠리며 교소를 터뜨렸다. 대략 열 두세 살쯤이나 되었을까? 흑진주처럼 크고 검은 눈망울에 곱게 땋아내린 머리칼이 지독히도 귀여운 소녀였다. 허나 움푹 파인 볼우물에 가득 담긴 매끄러운 웃음기는 말할 수 없는 장 난기를 흠뻑 풍겨내고 있었다. 이 소녀가 자천릉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 렸던 것이다. "뭐? 꼬마!" 자천릉이 사건의 진상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릴 때 어디선가 한 포동포동 한 옥수가 뻗어 와 자천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기분 나빠? 이 누나들이 꼬마라고 불렀다고 해서?" 자천릉은 의아한 눈길로 고개를 들다 뭔가 이상한 듯 힐끔힐끔 쳐다보며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쳇! 알고 보니 쌍둥이 계집아이들이었군." 자천릉의 다리를 걸고 머리를 쓰다듬는 소녀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땅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청의소녀와 자천릉의 정면에 선 채 양손을 허리에 짚고 있는 홍의소녀는 한 사람의 도공이 빚어낸 조각인 듯 한 치의 차이 도 없이 똑같은 쌍동이였던 것이다. "호호, 꼬마가 아주 주둥아리가 거칠구나. 나이 많은 누나들한테 존경하 는 말투는 못할망정 계집아이라는 상스러운 말을 쓰다니." "그래. 홍아야. 이 꼬마는 상판이 복잡하게 생긴 것 만큼이나 심성도 불 량한 아이같애." 청의소녀와 홍의소녀가 주거니 받거니 마구 수다를 떨어대자 자천릉은 어이없는 듯 천천히 일어서며 묻었던 눈을 툭툭 털었다. "그렇군. 할아범들의 말대로 강호는 정말 골치 아픈 곳이야. 풋강아지같 은 계집애들이 벌써 미쳐도 단단히 돌아 있으니." "뭐, 뭐 풋강아지?" "어머머머, 이건 심성이 불량한 정도가 아니라 숫제 구제불능의 경지에 도달한 아이잖아!" 두 쌍둥이소녀의 입에서 일순 교갈이 터져 나왔지만 자천릉은 거들떠 보 지도 않고 곧장 다리를 넘어 죽림 안으로 걸어갔다. 순간 홍의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안돼! 꼬마야, 그곳은 위험해!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오늘부터 살인경 주가, 읍!" 뾰족한 고함을 질러대려는 홍의소녀의 입을 청의소녀가 황급히 틀어막았 다. "홍아! 그건 할아버지께서 비밀로 하랬잖아." "그, 그렇지. 하지만 저 못생긴 꼬마가 불쌍하잖아." 홍의소녀가 울상을 짓자 청의소녀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두 손으로 입을 모으며 자천릉의 등을 향해 교갈을 터뜨렸다. "꼬마야! 만에 하나 사고를 당하면 우리 할아버지 이름을 말해! 할아버지 의 이름은 은하학사(銀河鶴邪) 자연수수(紫髥鬚 ) 비사벌(丕謝伐)이야!" "그걸로도 모자라면 내 이름을 대고! 난 비취홍(丕翠紅)이야!" "아니 홍아꺼 말고 내 이름을 대! 난 비청청(丕靑靑)이야!" 허나 자천릉의 모습은 이미 죽림 속으로 묻혀 사라져 버린 후였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서 있 는 한 사내가 있었다. "은하학사 장염수수 비사벌.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서 곤오풍우에 이어 서열 이 위에 군림하고 있는 그자의 이름을 저 소녀들의 입에서 듣게 되 는군. 살인경주 때문에 저 소녀들이 나타난 것이라면 비사벌도 이미 이 근처에 도착해 있음이 분명하리라." 지금 쏟아지는 눈발을 온 몸으로 받으며 서 있는 이 사내, 천하에서 진 정한 무인의 표상인 사내의 상을 묻는다면 바로 이 사내라고 대답하리 라. 짙은 용의 눈썹 아래 불타는 호랑이의 눈, 사자의 콧날과 표범의 입술이 완벽하게 조화된 굵고 강직한 선. 거기에 한 자루 붉디붉은 목검을 비끌 어 찬 그의 모습은 그지없는 야성적 남성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불도를 파계한 젊은 승려이기라도 한 것일까? 사내의 몸에 걸쳐져 있는 허름한 잿빛 승포와 그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칡넝쿨로 질끈 동 여맨 모습은 불타는 야망과 이상한 투혼이 어울린 강렬하고도 자유로운 체취를 풍겨내고 있었다. 이때 사내의 눈길이 문득 폭설을 쏟는 회색빛 겨울하늘로 향해졌다. "나 소달마(小達磨) 무인(無印)이 잃어버린 대소림의 꿈을 되찾기 위해 중원에 나온 지 어언 십개 성상, 그동안 살펴본 십대문파의 삼천 년 세 월의 실상은 너무도 비참했다. 십대문파가 남파(南派)와 북파(北派)로 분 열되어 삼천 년 동안 자중지란에 허덕일 때 전마(全魔)와 연사(聯邪)의 세력은 이미 하늘을 덮을 만큼 팽창된 채 쇄약해진 총정(總正)의 힘을 탄압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 소달마 십문일정 무인. 속명은 단목천검(丹木天劍) 하후걸(夏侯傑). 그의 존재는 불타의 뜻으로 천하를 제도하겠다는 삼천 년 대소림의 열망 이었다. 분열과 내란만을 거듭하고 있는 십대문파의 잃어버린 영광을 부 활시키기 위해 천하에서 두 번째의 인물인 천세미륵 자장대사가 발굴해 낸 이십 칠 세의 젊은 영웅. 소림 유일의 검의 달인으로서 입문 십 년만에 달마역근경을 모조리 파해 하고 달마칠십이종절예 중 오십 이 종을 익혀 구결무예로서는 천세미륵 자장대사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이 사람. 헌데 대소림 초유의 기재라 칭하는 그가 이곳 대곤륜의 경계, 십팔만사 천백와마루의 문턱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때가 오고 있다. 전마와 연사의 삼천 년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난세지난세의 바로 그날이!" 소달마 무인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폭설에 휘감긴 동쪽 하늘에 꽂혔다. "자륭극. 천세의 신비무인이자 연왕반정의 막후 주재자였던 관부제일무 인인 그가 한 달 전 해란주를 떠나 중원에 상륙했다. 영락제의 밀명을 받고 곤오풍우와 대결하기 위해. 그들이 벌이는 역사적인 용쟁호투의 결 과에 따라 십팔만사천백와마루는 분명 흔들린다. 전마가 구축했던 철옹 성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무인의 입가에 차가운 냉소가 스쳤다. "더욱이 연사의 힘을 대표하는 초왕사성은 세대교체의 바람을 맞아 최대 의 시련을 겪고 있는 터, 십팔만사천백와마루와 초왕사성의 동요, 그 전 마와 연사의 흔들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십대문파의 숨겨진 저력, 총정(總正)의 잠재된 힘이 삼천 년의 그늘을 벗고 양지로 나설... 그때가 왔음을 뜻한다!" 천하를 논하고 역사를 논하는 그의 음성 속에 전마와 연사와 총정의 가 장 정확한 현주소가 예리하게 분석되어 오고 있었다. 천천히 그의 두 눈은 자천릉이 사라진 죽림 위에 머물렀다. "또 하나의 변수는 바로 저 꼬마이다. 자륜극을 감시하려다 우연히 저 꼬마를 발견한 이후 한 달간 나는 줄곧 저 꼬마의 뒤를 추적해 왔다. 그 리고 알았다. 저 꼬마가 서는 자리에 따라 이제 시작되는 난세의 기류는 엄청나게 변화하고 말 것임을." 문득 그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왜인지는 모르나 관부에서 저 꼬마를 죽이기 위해 수만 금을 풀어 강호 낭인들을 샀다. 또한 초왕사성에서도 저 꼬마를 주목하고 홍포구독 등을 보내 시험을 계속했다. 허나 저 꼬마는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듯한 무학 으로 그 모든 추적자들의 습격을 뚫고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는 저 십팔 만사천백와마루의 성역이 시작되는 경계선을 넘고야 말았다." 적곽의 살인자들인 홍포구독은 바로 초왕사성에서 보낸 자들이었던가? "가공할 잠재력을 가진 아이이다. 관부도, 초왕사성도, 그리고 나 무인도, 저 꼬마를 붙잡지 못한 이상 이미 난세의 싸움에서 커다란 패배를 당하 고 있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무인의 독백은 계속되었다. "나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와 초왕사성의 움직임을 알지만 그들은 이제 십대문파가 다시 용트림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럴진대 나 소달 마 무인을 중점으로 십대문파의 신예무인들이 대화합의 장을 이루는 날, 우리 십대문파와 총정의 부활을 막아설 곳은 아무도 없으리라." 이 젊은 청년승인의 음성 속에서 삼천 년 야망의 투혼이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천하를 송두리째 불살라 버릴 가공할 난세의 불길의 시작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꼬마, 살아서 나오너라. 네가 총정과 반목하는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기 를 빈다. 다시 만나자." 나직한 한 마디 뇌까림과 함께 무인의 신형은 그가 불사를 듯 노려보던 동쪽 하늘의 폭설 속으로 환상처럼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제10장 십만철로(十萬鐵路) ① 여기 대곤륜산맥의 뿌리가 시작되고 중원의 제 이의 성역인 십팔만사천 백와마루의 성지(聖地)가 출발하는 동(東)쪽의 끝(端)인 곤산죽령(崑山竹 嶺). 하늘을 찌를 듯 빽빽이 자란 청죽(靑竹)들은 하나의 고개를 완전히 뒤덮 은 채 음습한 그늘(陰)을 만들고 있었다. 휘이이잉! 정월(正月)의 삭풍(朔風)은 눈발을 미친 듯이 펄럭이게 하고 다시 대나무 숲을 흔들며 음산한 곡성(哭聲)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대낮임에도 한 점 빛조차 새어들지 않는 그 폭설의 죽림 속이었다. 슬프도록 섬세한 기음과 함께 울창한 대나무들이 헤쳐지며 여전히 홍익 청차를 입에 물고 있는 자천릉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천릉은 발꿈치를 대지 않는 특유의 걸음걸이로 대나무 사이를 삵쾡이 처럼 헤쳐 들어오고 있었다. "제길! 이 중원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야.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 에도 벌레들이 득실거리고 쥐방울만한 계집애들이 난장판을 만드니." 나직하게 투덜거리던 자천릉이 한 순간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응? 이 죽림은 좀 묘하군." 천천히 사방을 훑어보던 자천릉의 입가에 사이로운 미소가 번져 오르기 시작했다. "쳇! 요리 솜씨가 너무 좋은 것도 문제가 있군. 단체손님들을 눈 속에 떨 면서 기다리게 만들다니." 자천릉이 걸음을 멈춘 곤산죽령의 험한 능선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한 구 릉 위, 기이하게도 퍼부어지는 눈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녹아 버리고 있 지 않은가? 더욱이 그 폭설 속에서는 온몸의 세포를 하나하나 터뜨려버릴 듯한 압박 감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자천릉의 동공에 예의 녹색 우수의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하나, 둘, 다섯, 열, 백, 일천여 명이나 되는 각기 다른 인간의 숨결이 후 덥지근하게 느껴지는군. 게다가 피냄새까지 흠뻑 배어 있고." 자천릉은 흑색 장포를 매만지며 반사적으로 몸을 고양이처럼 웅크리더니 품 속에서 금빛과 은빛이 이는 기물을 꺼내었다. "흠! 좋아. 이제 요리의 재료도 다 떨어졌으니, 그대들을 잡아 맛있는 요 리를 만들어 주지. 일천 명이 먹고 일천 명이 모두 죽어도 모를 만큼 맛 있는 요리를." 자천릉은 기물체를 양손에 나눠쥐며 퉁겨지듯 허공에 솟구쳤다. "가라!" 자천릉의 고함과 함께 두 개의 기물체가 삼 장 밖의 두 그루 대나무를 꼭대기부터 지면까지 그대로 쪼개어 버렸다. "컥!" "크악!" 비명이 터지며 뜨거운 피가 쪼개진 대나무의 골을 타고 허공에 뿜어졌 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한 줄기 폭죽이 치솟아 혜성처럼 어둠을 밝혔다 꺼 져 버리며,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하듯 대나무숲 전체에서 차가운 살기가 무섭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재료는 충분해. 얼마든지 요리를 만들어 줄 수 있어. 나와봐!" 지면에 내려서며 살기띈 대나무숲을 바라보는 자천릉의 두 눈에는 더욱 짙은 녹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헌데 지금 자천릉의 양손에 쥐어 있는 기물체는 바로 난세십승 중 사산 조의 혈장국사가 남긴 금도끼와 은도끼인 천뢰금부(天雷金斧)와 벽은월 (霹銀鉞)이 아닌가. 천둥과 번개가 각각 새겨진 장난감처럼 조그만 한 쌍의 도끼. 금방 피를 본 때문인지 금도끼와 은도끼에서 뿜어지는 차디찬 보광은 더욱 밝아져 있었다. 자천릉의 등 뒤에서 칼칼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훗, 역시 미련한 놈은 용감하군. 맨 먼저 움직이다니 그래, 이 살인경 주에서 이기고 정상에 첫번째로 도달하고 싶다는 꿈을 꾸는 것이겠지!"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에서 희디흰 백광 한 줄기가 자천릉의 전신을 백사처럼 감아 들었다. "뒤에도?" 고개를 돌리는 자천릉의 눈에 벌써 자신의 목 한 치 앞까지 쇄도해 오고 있는 백광이 비쳐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끄, 끄윽! 나, 나도 미련하다, 너무 일찍 나왔...!" 돌연 괴상한 기음과 비명이 잇달아 터지며 백광이 스르르 꺼져 버리지 않는가. "응? 이 흑의인은 왜 죽는 거지? 나의 도끼들은 분명 내 손에 있는데." 자천릉의 눈에 의혹의 빛이 스쳤다. 고개를 돌린 자천릉의 바로 앞에는 전신에 흑포를 감고 흑건으로 얼굴을 가린 한 인영이 흰 채찍(白鞭)을 쥐고 이마에 장검을 관통 당한 채 넘어지고 있었다. "컷!" 또다시 비명이 터지며 넘어지는 흑의인의 동체 위로 똑같은 차림을 한 또 하나의 흑의인이 옆구리에 수십 개의 병장기를 박은 채 쓰러지는 것 이 아닌가. 자천릉이 고개를 끼웃거렸다. "뭐지? 왜 이자들이 손대지도 않았는데 연속적으로 죽어 가는 거지?" 그순간 여기저기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꼬리를 물고 터 져나왔다. 동시에 자천릉의 눈에 고양이 떼처럼 소리도 없이 대나무숲을 헤쳐 올라가고 있는 수많은 흑포흑건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괴이하군. 이들은 나를 죽이기 위해 기다린 자들이 아니었던가?" 정녕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연쇄적인 살인, 그리고 똑같은 복장을 한 채 일제히 능선을 오르는 흑의인들. 폭설 속에 펼쳐지는 이 괴이한 장면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능선을 오르던 흑의인들 중 후미에 있던 자가 느닷없이 길을 바꿔 자천릉을 향해 칼날을 쏘아 왔다. 순간 자천릉이 곁에 있던 대나무 하나 를 허리께 까지 휘어잡았다. "그래! 뭐가 뭔지 모르지만, 분명 나는 부나비도에 가야 해. 그때까지는 누구도 내 앞길을 막을 수 없어!" 자천릉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졌다. "으악!" 만월처럼 휘어졌던 대나무가 습격해 오던 흑의인의 동체를 그대로 강타 해 버렸다. 쓰러지는 흑의인을 뒤로 하고 자천릉은 예의 흑의인들이 올 라가고 있는 능선으로 고양이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호오, 복잡하군! 왜 이들은 미친 듯이 달려가고 싸우는 거지?" 의혹과 호기심에 가득한 표정으로 달려가던 자천릉의 걸음이 무언가에 걸린 듯 움찔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ㅋ! 네가 꼭 스물 한 명째다!" 싸늘한 음성과 함께 희디흰 그물(網)이 자천릉의 몸을 싸감으며 허공으 로 빨아올렸다. 동시에 그물이 올라가고 있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한 흑 의사내가 시퍼런 검을 아래로 향한 채 그대로 자천릉의 가슴을 쪼개어 왔다. "쳇! 매미처럼 대나무 꼭대기에 붙어 있었군." 자천릉의 입에서 빨간 바람개비가 벼락같이 튀어나가며 쏘아 오던 흑의 인의 목을 날려 버리더니 그물과 대나무를 연결하던 끈을 한꺼번에 잘라 버렸다. 바람개비를 다시 받아 문 자천릉의 신형은 그물이 끊어지자 제자리로 퉁 겨 올라가는 대나무의 탄력을 받으며 까마득한 암천으로 퉁겨졌다. "풋! 빨라서 좋군." 거의 죽령의 정상 가까이까지 날아간 자천릉의 발이 막 지면 위에 닿으 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주위의 대나무들이 일제히 폭음과 함께 도끼로 내려친 듯 두 쪽으 로 쪼개지며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자 삽시간에 십 장 방원의 대나무들이 꺼멓게 죽어 들어갔다. "흥! 불을 피우는 걸 보니 숨어 있기에 무척 추웠던 모양이군." 자천릉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흙을 털고 일어서려는 때였다. 타버린 대잎들이 삭풍에 흩어지며 찐득한 살기가 밴 음성이 대숲 사이에 서 흘러나왔다. "흠, 고맙다. 약간 기다리기가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네가 첫번째 손님이 다." 자천릉이 지지않고 되받았다. "그런가? 장사가 무척 안된 모양이군. 나는 벌써 일흔 두 번째 불청객들 을 모셨건만." "알고 보니 자네 때문이었군. 손님들이 올 시각이 됐었건만, 늦더라니." 비웃는 듯 노려보는 자천릉의 시선 속에 불타 버린 대나무들을 쓰러뜨리 며 걸어나오고 있는 한 흑의사내의 모습이 쏘아져 들어왔다. 이미 죽어 간 자들과 똑같이 검은 두건에 흑포를 걸쳐 용모를 알 수 없는 흑의사내 였다. 빠꼼히 드러난 그자의 눈빛은 사람의 피를 빨다 고개를 든 흡혈귀 인 양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자의 오른손에는 그 눈빛과 똑같은 혈 광(血光)을 뿜어내는 뭉뚝한 철검(鐵劍)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자천릉이 냉소를 흘렸다. "굉장히 욕심이 과하군. 독점을 하려 하다니." "그렇단다. 나의 철칙은 독점이고, 경쟁자는 죽이는 것이지." 사내는 음산하게 내뱉으며 다가오다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길조로군. 이 엄동 혹한에 고추잠자리라니." 한 마리 핏빛 고추잠자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흑의사내의 어깨에 내려앉 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의사내의 신형이 철검을 치켜든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헌데 막 그의 철검이 아래로 휘둘려지려는 순간 윽! 하는 신음소리와 함 께 철검이 바닥에 나뒹굴며 흑의사내가 한쪽 어깨를 움켜쥔 채 내려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