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황(卍皇) 1 - 12편 (12/50)
헌데 그때 자천릉이 제갈교수의 눈을 빤히 올려다 보며 싸늘하게 말을 덧붙이고 있었다. "내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용서할 수 없어. 그건 아버지 뿐 만 아니라 나를 도와준 할아범들이라 해도 결코 달라질 수 없어." 제갈교수의 등줄기를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써늘하게 흘렀다. '그, 그렇겠지. 제 아비를 죽이겠다고 한 놈이 우리들이라고 예외로 둘 리는 없지! 허면 나도 죽일 수 있다는 말?' 그는 갑자기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 이런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구나, 제길!' 자천릉을 이용해 자륭극을 제거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제갈교수의 무지 개빛 꿈은 급속히 먹장구름에 뒤덮이고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륭극이 자천릉을 얼마나 사랑하며 또한 자천릉이 자륭극을 어느 정도 존경하고 있는지를. 제갈교수의 착각을 비웃듯 꺼지는 노을을 밀치며 어느새 밤은 깊어오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해란주의 밤이었다. ② 언제부터인가 해란주에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미 여명이 환하게 움 터 와야 할 시각, 그러나 흑해의 검은 물결 위에는 자욱한 새벽안개만이 두텁게 깔린 채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 고요한 정적 가운데 무엇인가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비춰져 보였다. 그것은 바로 산악을 방불케 하는 한 철선의 육중한 그림자였다. 전장(全長) 이백여 장, 높이만도 무려 일백 장, 검은 돛대, 검은 깃발, 장 식의 문양 하나마저 온통 틱틱한 검은 빛으로 채색 된 칠흑의 거함이었 다. 그 우뚝 솟은 돛대 위에는 <관>, <부>, <금>, <마>,<선>이라는 자색 글자가 수놓아진 다섯 개의 검은 깃발이 부슬비에 젖은 채 펄럭이고 있 었다. - 관부금마선! 그렇다. 이방의 십 오 인이 탈출하기 위해 기다리던 그날의 여명이 마침 내 밝아 온 것이다. 부슬비가 소리없이 쏟아지고 조용한 안개는 아직도 말이 없다. "빨리 빨리 움직여!" "제길! 이곳은 언제나 기분이 나빠. 꼭 살아서 지옥에 들어온 기분이니." 기묘한 타격음과 몇 줄기 거친 음성이 울리며 안개를 헤치고 관부금마선 의 갑판으로부터 해란주 연변까지 무려 이백여 장을 관통하며 끝없이 이 어진 검은 철교가 눈에 들어왔다. 지옥의 강을 건너는 죽음의 다리인가. 도대체가 하룻밤 사이에 생겨 버린 듯 이 검은 철교의 위용은 그대로 천 어독장을 넘어 해란주까지를 꿰뚫어 버릴 듯 음산하면서도 웅장하기 이 를 데 없었다. 마차 세 대는 나란히 지나갈 듯 넓은 철교 위에는 지금 상처와 흉터가 참혹하게 뒤엉킨 수십 명의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해란주를 향해 끌려가고 있었다. 이마의 낙인대신 푸른 수의를 입은 그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붉은 글씨 로 일련의 숫자가 쓰여 있어 새로 이송되는 수인의 대열임을 한 눈에 알 게 해주었다. 그들의 뒤로는 연속 채찍을 휘두르며 수인들을 재촉하는 관복 차림의 무 사 서넛도 보였다. "젠장할, 안개에다 부슬비라니, 수인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때아닌 청승 인가!" "아! 빨리 빨리 못 걸어!" 십 오 인의 이방수인들이 탈출을 계획하고 있는 운명의 이 새벽, 또 다 시 죽음의 땅을 향해 다른 한 떼의 수인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 다. 철교가 시작되는 관부금마선의 갑판 위에는 수인들 보다 두 배는 많을 듯한 관부무인들이 하나같이 질식할 듯한 살기를 뿜으며 뱃전을 메울 듯 도열해 있었다. 무장의 차림을 한 자, 검수(劍手)의 행색을 한 자 등 실로 관부 무반에서 기라성같은 인물들은 모조리 거기에 집결시켜 놓은 듯 무서운 기도를 뿜 어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억겁 세월에도 움직이지 않는 바위처럼 굳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총인원 이십 팔 명, 모두 무사히 상륙했습니다!" 누군가의 입에서 보고성이 터져나왔다. "수사철교(囚死鐵橋)를 걷어라!" 한 싸늘한 음성이 칼로 자르듯 그 말을 받았다. 그러자 갑판의 선두에 서 있던 무사의 손에서 새파란 검광이 번갯불처럼 뻗어왔다. 철교를 매 었던 연삭이 둔탁하게 끊어지면서 수사철교라 불리운 검은 철교는 땅이 꺼지듯 그대로 천어독장에 무너져 내리며 순식간에 한 줌의 독수로 녹아 들고 있었다. 해란주와 바깥세상을 연결하던 이 육중한 사슬은 생길 때와 마찬가지로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헌데 바로 그 시각, 관부금마선의 우현이며 대부분의 관부고수들이 해란 주를 향해 서 있는 바로 뒷편의 해상, 천어독장이 끝나고 흑해가 시작되 는 그곳에서 기이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돌연 검은 점 하나가 해면에 솟아나며 잇달아 도합 열 여섯 개이 흑점들 이 동시에 해면에 떠올랐다. 헌데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한날 한시에 함께 죽기를 맹약했던 이방의 십 육 인의 얼굴이 아닌가. 그 중에는 죽음의 회의에는 불참했던 지행성 신기박통 제갈교수의 얼굴 도 보였다. 이때 그들의 신형은 금방이라도 산산조각이 나서 휩쓸려 갈 듯 가랑잎처 럼 흔들리고 있었다. 폭풍와류의 무서운 회오리가 그들을 빨아들이기 시 작한 것이다. 맨 처음 떠올랐던 무의탁의 몸이 휩쓸려 갔다. 그순간 거의 간발의 차이 로 무의척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어 같은 모양으로 휩쓸려가는 무의척의 발목을 무의괄이 붙잡고 다시 무의괄의 발목을 뒤에 있던 누군가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나꿔챘다. 잇달아 촌각의 차이로 그들의 몸은 서로의 발목을 붙든 채 사슬처럼 연 결되고 마지막으로 관첸라마 포랍의 발목을 대천법왕 사륵탄의 손이 움 켜쥐었을 때, 이미 거기에는 십 육 인의 인체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인간 밧줄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사단맥체뉴긍! 곤오풍우조차도 건널 수 없다는 흑해의 폭 풍와류를 견디기 위해 대천법왕 사륵탄이 내놓은 라마교 최후의 비전, 그 처절한 연수기공이 펼쳐지는 모습이 아닌가. 서로의 내공이 동시에 통하기 때문에 그 어떤 광란의 폭풍이라도 능히 뚫고 견딜 수 있다는 생사단맥체뉴긍! 허나 그 만큼 익히는데 혹독한 고생이 수반되고 최후에는 내공의 절반을 갉아먹기에 대원이 멸망하는 순간에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그 지옥의 기 공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폭풍와류를 뚫고 위태롭게 이어진 인간밧줄의 선두, 곧 회리오조의 첫째 무의탁의 신형은 바로 관부금마선 우현의 갑판 아래까지 닿고 있었다. 그때 천어독장과 맞닿은 인간밧줄의 후미 쪽에서 또 하나의 흑점이 솟아 나 인간밧줄 위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바로 자천릉이었다. 십 육 인 이 생사를 걸고 흑해 위에 만든 인간밧줄은 자천릉을 천어독장으로부터 관부금마선까지 무사히 건너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헌데 바로 이때 였다. "아버지! 오빠는 왜 안오는 거야?" 문득 관부금마선의 꼭대기에서 어린 계집아이의 귀여운 음성이 울려나왔 다 철선의 가장 높은 돛대 위에 세워진 망루에는 자륭극이 자예린을 품에 안은 채 철탑처럼 우뚝서 있었다. 자륭극의 우수에는 사해칠재난붕 한 마리가 붙잡혀 있었다. "릉아는 다른 배를 타고 가기로 했단다." 자예린에게 대답해 주는 자륭극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배의 우현, 바로 인간밧줄이 펼쳐져 있는 그 처절한 현장이었다. "피이, 그럼 린아도 오빠랑 같이 갈래!" "하하, 릉아가 타는 배는 아주 먼 곳을 돌아야만 하는 배란다. 결코 린아 가 탈 수는 없는 릉아만의 배지." "하지만...." 자예린은 계속해서 무어라고 쫑알거리려다가 흠칫 말을 멈췄다. 안개바 다를 내려다보던 자륭극의 안색이 점차 싸늘하게 굳어져 가고 있었던 것 이다. 이때 인간밧줄 위의 자천릉은 어느덧 거의 관부금마선의 갑판에 다가서 고 있었다. 그 흐릿한 모습을 빨아들일 듯 응시하던 자륭극의 두 눈에 언뜻 희미한 아픔의 빛이 섬전처럼 스쳐가는가 싶더니 천천히 그의 입술을 비집고 태 산같은 중압을 담은 음성이 깔리듯 흘러나왔다. "잘 가거라, 릉아야. 내가 너의 아비로서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너의 탈출을 눈감아 주는 일 뿐이다. 허나 중원에 닿는 순간 너 는 죽는다." 자륭극은 이미 이방 십 육 인이 죽음으로 계획한 전말을 모두 알고 있으 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때 자천릉의 신형은 갑판 아래로 완전히 묻혀지고 인간밧줄을 형성했 던 십 육 인의 모습도 거의 동시에 바닷 속으로 꺼져들고 있었다. 천천히 들어 올려지던 자륭극의 시선은 사해칠채난붕을 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 위에 멈춰졌다. 그것은 몇 시진 전 망란비역에서 제갈교수가 초왕사성을 향해 날려 보냈 던 바로 그 새가 아닌가? "나를 알고 싶어한다면 알게 해 주는 것도 좋겠지." 자륭극이 의미 모를 음성을 뇌까리는 찰나 사해칠채난붕은 그의 손아귀 에서 풀려나 아득한 수평선 밖으로 사라져 갔다. 발목에 제갈교수의 전 서통을 그대로 매단 채였다. "대답은 이것이다!" 자륭극이 냉엄한 일갈을 터뜨리며 허공에서 손가락을 부딪쳤다. 순간 어 디선가 한 줄기 검날이 솟구치며 인간밧줄이 꺼져들어가는 해면을 벼락 치듯 가공할 기세로 쪼개어 갔다 파아아앗! 분수처럼 치솟는 물보라 사이로 안개를 뚫고 무려 십여 장 이상 허공으 로 솟구치는 한 사람의 수급이 있었다. "꺄아악! 사, 사람의 목이!" 자륭극이 그것을 한 손으로 받아 쥐는 것을 본 자예린은 그만 비명을 지 르며 혼절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초왕사성의 부군사임을 숨긴 채 자륭극을 추적하기 위해 해 란주에 들어왔던 제갈교수가 아닌가. "먼저 도전해 오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 시작이다." 자륭극이 냉혹한 음성을 뱉으며 제갈교수의 그것을 바다에 내던졌다. 그때 수급이 바다에 빠지는 것을 신호로 긴 여적을 끌며 관부금마선의 거대한 동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하얀 포말들의 거대한 궤적을 남기며, 이윽고 아득한 점으로 화한 채 안 개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관부금마선. 그 밑에 달라붙었을 자천릉과 이방 십 오 인의 흔적도 따라서 멀어지 고.... 우연이었을까? 그 뒷모습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뜬 채 떠 있는 제갈교수의 수급 위로 빗발만이 부슬부슬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③ 대명(大明) 영락(永樂) 이십 일 년 정월 초하루. 해란주에서 관부금마선이 떠난 지 꼭 사십 오 일째가 되는 이날, 중원은 수십 년만에 닥친 한파에 신년벽두부터 얼어붙어 있었다. 수 차례의 해 외정벌을 통해 바야흐로 무섭도록 강성해 가는 대명의 천하도 혹한 앞에 서는 무기력한 것이었을까. 부산하던 군마의 발굽도, 흥청이던 흥국의 노래도, 그리고 저 영광의 대 지 위에 우뚝 솟은 자금성의 호사도 지금은 다만 은빛 동면으로 고요할 뿐이었다. 잿빛 밤하늘과 눈 덮인 땅은 달빛에 비쳐 얼음조각처럼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산동반도의 끝, 이 얼어붙은 미항(美港) 청도항의 초하루 밤은 그래서인 지 더욱 춥고 스산한 느낌을 자아냈다. 수려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을 해변에는 하얀 눈발이 달빛에 푸르르고, 혼탁한 빛깔로 죽어 있는 겨울바다는 그 너머 낮은 파도의 합장 속에 누 워 있다. 파도가 흔들리는 해안선의 한 모서리, 해면에 거뭇하게 흩어진 암초군 사이로 삐죽이 솟은 한 바위 위에 언제부터인가 한 사내가 묵묵히 겨울 바다를 직시한 채 서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허나 달빛을 받으며 바다 한 가운데 서서 말없이 전방만을 노려보고 있 는 사내의 눈빛은 꼭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 버릴 것만 같 았다. 이때 문득 바다 저편으로부터 칼날같은 삭풍이 일어 사내의 신형을 휩쓸 고 지나갔다. 그 순간 그의 오른팔 소매가 펄럭였다. 그리고 팔뚝 대신 새파란 광채를 번뜩이는 물체가 보였다. 소맷자락 사이로 삐죽이 보이는 물체는 놀랍게도 굵은 쇠침을 불규칙하 게 박아넣은 둔중한 철추였다. 거기에 그의 장포는 연속적으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 있어 장포 밑으 로 철추를 전신에 감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더구나 그의 왼쪽 어깨 위에는 흡사 사마귀의 앞발을 연상케 하는 짧은 단궁 하나가 음산한 검은 빛을 발하며 걸려 있었다. 외팔이 사내의 눈빛이 달빛만큼이나 차갑게 빛나며 습한 동굴을 울리는 메아리처럼 스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멋진 죽음이다. 철랑궁자(鐵螂弓者) 피합추(皮哈鎚). 주군께서 팔병신인 나에게 가장 뜻깊은 살인의 기회를 주시고 가장 뜻깊은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해 주셨으니 어찌 영광된 일이 아니랴." - 철랑궁자 피합추! 그 소름끼치는 저주의 마령이 바로 이 외팔이사내의 입에서 불려질 줄이 야. 살수세계에서 가장 신화적인 인물이라면 누구든 장백의 살인자 회리오조 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자를 들라면 단연 이 이름을 말한다. 사마귀의 앞발 같은 검은 단궁으로 칠백여의 인명을 꿰어 인간사마귀라 불리우며, 귀신도 보면 울음을 터뜨린다 하여 귀곡사라는 별칭을 얻은 무자비한 살인자. 또한 중원천지를 피의 수렁에 몰아넣은 사십 사 인의 살인귀, 미친 개요, 악마의 광혈을 지닌 자들로 불리는 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잔독하고 참 혹한 살인수법으로 악명을 떨친 자가 바로 철랑궁자 피합추였다. 이때 밀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일까? 어느새 외팔이 사내, 철랑궁자 피합 추가 서있는 암초를 삼켜 버린 바닷물은 찰랑이며 그의 발목을 핥고 있 었다. 문득 그의 두 눈에 얼음같은 살기가 파랗게 피어나며 비스듬히 시 선이 돌려졌다. "킷! 지저분해지고 있군, 이 깨끗한 해변이. 저 벌레들과 쓰레기, 그리고 냄새나는 지렁이들 때문에." 시선이 꽂혀진 백설의 해변에는 천차만별의 인물들 수십 명이 저마다 기 이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었다. 얼굴도 나이도 의복도 신분도 천양각색으로 판이한 그들이었으나 공통점 이 있었다. 하나같이 살벌한 병장기를 차거나 메고 있고 병장기를 쥔 손에는 오랜 세월 병장기를 다루어 온 무인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굳은 살이 단단 하게 배겨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따금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힐끔힐끔 바다를 바라보는 시선에 서 한결같이 폭사되어 나오는 살기는 그들의 내력이 결코 범상하지 않음 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피합추의 간독한 시선은 칼끝처럼 그들의 얼굴을 훑어갔다. "킷! 왔군. 천남(川南) 뇌가(雷家)의 뇌융문(雷融門)에서도! 저 말미잘같은 호가(胡家)놈의 구역질나는 흉터를 보면 알 수 있지."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는 어린아이가 공기놀이를 하듯 수십 개의 검 은 구슬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서 있는 중년장한 하나가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그 검은 구슬 하나하나는 뇌화탄(雷火彈)을 조그맣게 축소시킨 가공할 폭약들이었다. - 천남 뇌가. 불의 살인가(殺人家)라고도 하는 특이한 청부살인단체로 화기를 무차별 로 사용해 청부를 해결하는 그곳의 대표적인 살상화기 천뇌주(天雷珠)가 바로 그것이었다. 호가라고 불리운 중년장한의 얼굴은 화적에 짓이긴 듯 흉측하게 일그러 져 있어 그가 얼마나 많은 화기를 다루어 온 인물인가를 말해 주고 있었 다. 피합추의 시선은 천남 뇌가의 인물을 지나 한 미부와 노파와 노인의 모 습에 머물렀다. "많기도 하군. 해남 금문도(金門島) 해오류팔십일채(海梧柳八十一寀)의 엉덩이 큰 계집 벽오동(碧梧桐)도, 저 시커먼 심장을 가진 막관천리사새 (漠關千里邪塞)의 둘째 노파도... 킷! 형주(衡洲) 청건회(靑巾會)의 개뼈다 귀같은 늙은이까지 냄새를 맡고 모여들다니." - 해오류팔십일채. - 막관천리사새. 중원천하에서 암살위탁(暗殺委託)과 살인청부로 밥을 먹는 단체를 들라 면 단연 서열 십 위권 내로 꼽아야할 가공할 이름들이 잇달아 불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킷! 늙어 나자빠진 아홉 마리 지네들, 신강사사청(新疆四四廳)의 신강구 공(新疆九蚣)이 이런 일에 빠질 리가 없지. 운남 사자산파(獅子山派)의 저 젊은 개살구들도 마찬가지, 쯧! 황금이라면 관부에서 주든 황궁에서 주든 배알도 없이 환장하는 지저분한 인종들, 겨우 오십만 냥을 풀었다 고 환장해 모이는 개구리떼처럼 저렇게 닥치는 대로 몰려들다니." 피합추의 냉소 속에 연이어 쏟아져 나오는 이름들은 중원천하의 내노라 하는 살수단체의 수뇌급들을 거의 망라하다시피 하고 있지 않은가. 이때 피합추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흠칫 딱딱하게 멎어졌다. "호! 관부의 대내어림총관(大內御林總官)께서도 친히 오셨군. 잘 하는지 감시라도 할 마음이신가?" 그렇다. 수십 명의 가공할 인물들이 늘어선 제일 끝쪽에서 자색 관복을 입은 채 싸늘한 시선으로 장내를 직시하고 있는 인물은 분명 관부의 고 수였다. 그것도 품계 일품 이상의 엄청난 신분을 가진 무반의 고관임에 분명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관부의 고수가 이 자리에 나타나 있단 말인가? "킷! 하나, 둘, 셋, 모두 사십 칠 마리의 버러지들이군. 그러나 저 치들은 내리는 눈송이를 더럽히는 버러지에 지나지 않지. 키킷, 살인에는 나, 귀 신잡는 인간사마귀 피합추가 누구의 깐죽거림도 용납치 않기 때문이야." 이때 암초 위에 서서 화석이 된 듯 굳어 있는 피합추의 몸은 서서히 바 닷물에 잠기고 있었다. 허나 결국에는 정월의 밀물이 발목을 거쳐 무릎 으로, 그리고 다시 허리로 차오르고 있어도 그의 신형은 조금의 움직임 도 없다. 이윽고 밀물이 턱 아래까지 밀려들고 멈추었을 때 암갈색 겨울바다 위에 는 두 눈을 부릅뜬 피합추의 목만이 유령의 수급처럼 솟아 있을 뿐이었 다. "킷! 춥군. 정월 초하루의 밤바다는. 허나 곧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내가 좋아하는 가장 산뜻하고 신선한 피를 맛볼 수 있을 테니까." 피합추는 한 점의 근육도 움직이지 않은 채 싸늘한 웃음을 내뱉았다. "관부금마선이 들어오기로 예정된 시간은 정시 삼경, 허면 놈들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피합추의 무표정한 뇌까림이 채 끝나기도 전 멀리 어둠에 싸인 수평선의 한복판에 검은 점 하나가 솟아나며 급속도로 확대되어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관부금마선의 거대한 위용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관부금마 선의 일백 장 전방 해안선에서 삼십여 장 떨어진 해면에 검은 물체가 생 겨나며 천천히 해안을 향해 다가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왔군!" 피합추의 눈빛이 반짝 빛나는가 싶자 그의 목은 두 눈만을 남기고 바다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렸다. 검은 물체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해면에 떠올라 있는 피합추의 두 눈동자가 얼음같은 살기를 발하기 시작 했다. '그래, 앞으로 꼭 삼 장이다!' "그만! 됐다!" 검은 물체가 일 장 앞까지 다가오는 순간 시위가 당겨진 피합추의 단궁 이 벼락치듯 검은 불꽃을 뿜어냈다. 번쩍! 동시에 검은 물체는 거인의 발에 달걀이 짓밟히듯 무참히 깨어져 내렸 다. "제길! 너무 확실하게 죽였나? 비명조차 없으니 싱겁군." 이때 으깨어진 채 해면에 떠오르는 물체는 바로 무의탁의 수급이 아닌 가. 음사한 음성을 뱉으며 날아내리던 피합추의 안색이 돌연 홱 변했다. "속, 속았다! 이 자는 내가 손대기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의 시야에 약 사오 장 정도 빠르게 수면을 가르고 있는 두 개의 인영이 비쳤다. "아교마해(牙 魔骸)! 저 말거머리 형제들이 선수를 치다니!" - 아교마해! 한 번 목적한 대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여버리기 때문에 말 거머리라 불리우는 형제살수. 피를 빨고 뼈만 남기는 거머리라 하여 마 해라는 악랄한 명호를 얻은 자들이었다. 빠르게 주위를 훑던 피합주의 눈빛에 희열이 떠올랐다. 아교마해 형제가 헤엄쳐 가고 있는 전방의 해변에 또 다른 검은물체 하나가 천천히 해안 쪽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저놈이 진짜였다." 슈파파팍! 싸늘한 냉갈과 함께 피합추의 신형은 이미 해면을 박차고 또 다른 검은 물체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갔다. 제8장 시작된 죽음의 요리! ① 그때 어둠을 가르며 다가드는 관부금마선의 좌측 오십여 장 밖, 파도에 밀리는 부표인가? 해변을 향해 흔들리며 밀려오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 문득 파도가 낮은 부르짖음을 토하며 겨울 바다를 흔들고 지나갈 때였다. 돌연 파도소리에 섞여 두런두런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가야. 저기 검은 물의 그림자가 보이느냐?" "응." "저기가 바로 중원이다. 아가의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대 륙이지." "중원?" 바다 위에 떠오른 검은 물체는 바로 자천릉을 품에 안고 헤엄쳐 오는 대 천법왕 사륵탄의 그림자였다. 해란주에서 중원으로, 그 죽음의 탈출 사십 오 일! 관부금마선 밑창에 몸 을 붙인 채 한 사람씩 스스로 죽음을 맞아야 했던 그 처절한 사투의 마 지막 순간이 마침내 도래한 것인가. 대천법왕 사륵탄. 이 위대한 라마교의 달라이대라마의 권위를 상징하던 붉은 가사는 갈가리 찢기워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뿐이랴. 지난 사십 오 일 간의 고행의 흔적은 그의 얼굴과 팔, 가슴에 할 것 없이 깊고 얕은 무수한 상처들을 새겨 놓았고 품 속의 자천릉을 보호 하기 위함이었는지 그의 어깨와 등판에는 도끼에 맞은 듯 길다란 상처가 나있어 보기에도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