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만황(卍皇) 1 - 9편 (9/50)

2026-09-21 21:18:45 조회 22
다시 이 각 가량이 흘렀을까? 사륵탄과 포랍의 주름낀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자천릉의 분칠한 듯한 얼굴에도 서서히 홍조가 피 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사륵탄의 마지막 음성이 떨어졌다. "용천혈(湧泉穴)." 포랍의 손이 자천릉의 발바닥 가운데 용천혈에 스치듯 머물렀다. 이때 포랍은 양손으로 자천릉의 용천혈을 감싼 채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 다. "정녕 천하는 물론 고금을 두고 다시 볼 수 없는 신체로다. 불필요한 근 육과 불순한 혈액이라고는 단 한 점, 단 한 방울도 찾아볼 길이 없으니." "나무환희불! 본하가 지금 중원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릉아를 본하의 후 계자로 삼았을 것이네." 사륵탄이 미소하며 말을 받았다. 지켜보던 무의탁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 무의탁이 팔십 평생 처음 대하는 기구한 운명이다. 최극의 신체에 범 인들에게서 구경조차 못할 염력의 힘까지 타고났건만 너무도 훌륭하기에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운명이라니. 이, 이런 일이 천하에 또 있을 수 있을 까?' 이때 사륵탄이 천천히 눈을 뜨며 자천릉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를 바라보 았다. "흠, 이제 릉아는 최소한 두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니게 되었군. 그만 손 을 떼시게." 포랍이 서서히 손을 거두는 것을 보며 무의탁 등의 뇌리에는 하나같은 상념이 스쳐가고 있었다. '이제는 갈 곳까지 갔다. 릉아가 깨어난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릉아의 내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진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더욱 오 랜 시간이 흐르면 영영 불귀의 객이 될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머리로서 는 추측조차 못할 초인이 될 것인지 둘 중의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 다!' 헌데 그때였다. "으응." 자천릉이 꿈틀거리면서 천천히 의식을 회복하였다. "어! 중할아버지가?" 그는 주위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의아로운 듯이 탄성을 발했다. "나무환희불. 허허허, 이제 릉아가 잠에서 깼구나." 사륵탄이 자애로운 미소를 띄며 자천릉을 바라보았다. 자천릉은 의아한 표정을 귀엽게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릉아는 분명히 동해만년붕란분지에 빠지고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는데." "허허, 깊이 생각할 것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아가가 살아 있고 또 훨 씬 몸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는 사륵탄을 보면서 자천릉은 고개를 갸우뚱거렸 다. "그래,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운 건 사실이지만." "허허허, 아가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왜?" 의혹의 눈빛으로 다가오는 자천릉의 손을 사륵탄은 부드럽게 감싸쥐었 다. "아가의 손이 무척 따뜻하구나." 헌데 그때, 촤라락! 하는 음향이 터지며 사륵탄의 오른쪽 팔목에 감겨 있 던 아수라천존상이 새겨진 우윳빛 염주가 뱀처럼 자천릉의 팔뚝에 감겨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받거라. 이것은 달라이아수백팔마라혈염주라고 부르는 물건이란다." 포랍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 나무환희불! 제하! 그것은 본교 오십 팔 만 제자들의 생사를 좌우하 는 지존신물이거늘 어찌 그 존귀한 물건을 외인의 손에!" 사륵탄은 더욱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포랍. 그대가 지닌 수미타구십팔청염주도 릉아에게 주시게." "제, 제하!" "허허허, 포랍은 잊고 있구료. 우리는 이제 내일 저녁이면 자비로우신 불 존의 곁으로 돌아갈 몸이라는 사실을." 설마 대라마교의 달라이대라마와 관첸라마라는 지고한 신분의 인물들이 내일 죽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허, 허나." "하는 수 없군. 이것을 아가에게 주면 자네도 청염주를 내어놓지 않을 수 없을 테지." 사륵탄은 빙그레 웃으며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돌연 장엄한 칠채의 서광이 눈부시게 번져오르며 동굴 안이 환하게 밝아 졌다. 포랍의 주름진 얼굴에 거센 경련이 일어나는가 싶자 그의 깡마른 몸이 그대로 땅바닥을 향해 오체투지로 굽혀졌다. "삽십삼천불연환대선장! 제자 본교 제 십 육 대 관첸라마 밀법부왕 포랍 이 교종(敎宗)의 칙령을 받듭니다!" "허허, 삽십삼천불연환대선장의 십 육 대 장법인 본하 달라이대라마 대천 법왕 사륵탄은 십 육 대 관첸라마 포랍에게 수미타구십팔청연주를 꺼낼 것을 명하네." 사륵탄의 손에는 서른 세 개의 연꽃 형태의 고리가 달린 짙은 바다빛 하 나가 들려 있었다. "천, 천명!" 포랍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품 속에서 염주를 꺼내 자천릉에게 건넸다. 흡사 아흔 여덟 개의 새파란 진주구슬을 연결시켜 놓은 듯 아름다운 염 주였다.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무의탁 등의 얼굴에 충격에 가까운 전율이 피 어나고 있었다. '저, 저 세 가지 기물은!' '오오! 라마성불삼계법품! 라마교 오십 팔 만 교도와 원로원, 장로회의 모든 불자들의 삶과 죽음을 관장할 수 있는 계율과 권위의 절대법보가 아닌가!' 라마성불삼계법품. 말 그대로 그것은 라마교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았 다. - 달라이아수백팔마라혈염주! 라마교의 오십 팔만 교도들에게 생사여탈의 천명을 내리 수 있는 달라이 대라마에게만 전해지는 절대권위의 상징. - 수미타구십팔청염주! 달라이대라마의 전횡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제 이인자인 관첸라마 에게 주어지는 율법과 계율의 법보. - 삽십삼천불연환대선장! 달라이대라마와 관첸라마조차도 항거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라마교의 절대지보. 교종 직계의 라마수호법통을 통해서만 비전되어 내려온다고 알려졌으며 법왕인 달라이대라마보다도 더욱 지고한 권력을 소유한 집단 인 원로원 및 장로회의단까지도 제어할 수 있는 사실상 라마교의 모든 권력구조의 총합체였다. 상상할 수 있는가? 말 한마디로 중원도처에 산재한 오십 팔 만의 인력을 움직이고 중원천하의 황금맥의 구할을 관장하며 제국을 통치했던 대라마 교의 모든 것을 손가락 하나로 부릴 수 있는 절대의 기물, 라마성불삼계 법품의 위용을 말이다. 헌데 그것이 하나씩도 아니고 아예 송두리째 자천릉에게 건네지고 있는 것이었다. "치이! 귀찮아. 지금 중할아버지는 릉아한테 중이 되라고 말하려는 것 같 은 데, 릉아는 결코 중이 되고 싶지는 않아!" 자천릉이 미간을 찌푸리자 사륵탄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 다. "허허허, 아니란다. 어찌 노납이 언감생심 아가에게 불제자가 되라고 강 요할 수 있겠느냐. 단지 이 죽음의 오지에서 십여 년을 맺었던 인연을 기억하려 할 따름인 게지." 그러자 자천릉은 받아든 라마성불삼계법품을 흔들어 보이며 한숨인지 탄 식인지 모를 음성으로 물었다. "푸우, 그럼 이것들을 가지고 릉아에게 어떻게 하라는 거지?" "모르긴 해도 아가가 내일 중원에 나간 후 필요할 날이 있을 거란다." "내가 내일 중원에 나간다고?" 자천릉은 깜짝 놀라는 얼굴이었다. 그가 어찌 알 것인가? 그에게 남은 수명은 잘 해야 육 년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일 해란주에 닿는 관부 금마선을 이용하여 중원으로 탈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륵탄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그럼 중할아버지랑 팔이오할아범, 까마귀할아범들도 다같이 가는 거야?" "허허허, 그렇지." "훗! 아주 재미있겠군." 자천릉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번져오르는 것을 보며 사륵탄은 지그시 두 눈을 내리감았다. 왜일까?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평온하던 저 노승의 얼굴에 문득 미세한 한 올의 파동이 소리없이 스쳐일고 있음 은.... '나무환희불. 너무도 맑고 천진한 웃음이로다. 해서 더욱 가슴이 아프구 나.' '허허, 벌써 노납도 망령이 들었는가. 일백 년 전 이미 잊은 생의 집착이 거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바에 미련이 남을꼬.' '나무환희불. 지난 십개 성상은 노납이 대원의 천하를 지배할 때보다 더 욱 애착을 남기는 세월이었도다. 바로 릉아, 저 귀여운 아이가 있었기에.' 그때 무의탁의 음성이 사륵탄의 흔들리는 상념을 깨쳐놓았다. "릉아야. 가서 돌할아범을 모시고 오너라." "알았어." 지체없이 몸을 돌려 지하석굴 너머로 사라져 가는 자천릉. 사륵탄의 시 선은 그 뒷모습 위에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듯 머물러 있었다. '허허허, 아가야. 노납은 결코 아가에게 곤오풍우를 죽여 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구나. 곤오풍우와의 싸움은 십중팔구 목숨을 잃을는지도 모르 는 위험한 도박. 아직도 이 어리석은 중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을 갚기 위한 재물로 아가를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은 까닭이다.' '다만 아가의 두 눈 깊숙히 자리잡은 그늘, 그 음영을 버리고 착하고 아 름답게 성장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될 수 있으면 노납과 달리 지극히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한 평생을 살아 주기를... 나무환희불!' 대천법와 사륵탄의 소망은 진실이었다. 허나 그것은 자천릉이 선천적인 염력술사로 태어날 때부터 이미 거리가 먼 삶일 수밖에 없었으니. 제6장 이국십보(異國十寶) ① 석양은 먼 서해의 수평선으로 기울고 황혼이 지는 해란주의 완만한 구릉 위로는 핏빛 구름이 새털처럼 낮게 깔리고 있었다. 흰빛 해란의 꽃술들이 띠를 감듯 두르고 있는 사백여 평 가량의 공터였 다. 모퉁이가 닳아 둥근 바위돌처럼 보이는 거대한 비석들이 불규칙하게 도 열해 있는 한 기이한 평지 위에도 노을의 붉은 꼬리는 스산하게 번져 흐 르고 있었다. 흡사 어떤 공동묘원이 오랜 풍파에 시달려 마모된 비석의 잔해들만을 남 겨 놓은 듯, 유난히도 쓸쓸한 느낌에 가득찬 이 공터의 난석군(亂石群) 사이로는 간간이 조각난 돌맹이와 해란의 꽃술, 그리고 잿빛의 모래알들 만 뒹굴고 있을 따름이었다. 헌데 누구일까? 유독 풍상에 시달려 이끼마저 낀 한 비석의 앞에서 지극 히 깡마르고 평범한 인상의 한 노인이 문드러진 비문을 관찰하고 있었 다. 노인의 이마에도 어김없이 예의 푸른 독수리의 문장이 섬뜩하게 찍혀 있 었다. 코와 입 사이의 인중이 유난히도 길어 보이는 것을 뺀다면 기억할 래야 기억할 수 없을만큼 평범한 용모였다. 허나 자세히 보면 그에게선 왠지 사악하고 기분나쁜 체취가 얼음 위를 떠도는 한기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흡사 굶주린 뱀의 눈처럼 축 늘어 진 노인의 두 눈꺼풀 때문인 듯 하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가 입은 다 낡고 누렇게 빛이 바랜 마의(麻衣) 가슴 부위에 초(楚)라는 글이 짙은 보라빛으로 수놓아져 있다는 점이었 다. 문득 노인의 뱀눈이 떠지며 득의에 찬 괴소가 터져 나왔다. "흐흐흐, 드디어 찾아냈다. 분명 이 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피 의 모래이자, 모래의 왕이라 불려지는 혈왕사(血王砂)임이 틀림없다!" 마의노인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연신 피폐한 비석을 어루만지며 괴 소를 흘려냈다. "후훗, 이미 살다가 갔고 또 살아있는 천하의 수많은 무인들이 그 장구한 세월 동안 꿈에서도 찾아 헤매던 지상최강의 병장기가 결국 여기에 파묻 혀 있을 줄이야." 마의노인은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천하의 그 누구도 모르리라. 나 지행성(地行星) 신기박통(神機搏通) 제 갈교수(諸葛敎水)가 중원인임에도 왜 이국인 행세를 하면서까지 곤오풍 우에게 스스로 잡혔고 이마에 치욕의 문장을 찍히면서까지 이 창살없는 감옥 해란주에 들어와 지난 십 이 년 동안을 버텨 왔는지를!" 비석을 향해 스스로 묻고 답하며 괴소를 터뜨리는 마의노인은 모르는 사 람이 본다면 영락없이 미친 놈이었다. "흐흐흐, 자륭극! 그자를 감시하라는 성주의 천명도 천명이었지만, 내가 부군사(副軍師)의 신분임에도 그 명령을 순순히 들은 것은 혈왕사가 이 곳에 묻혀 있다는 믿지못할 전설을 들었기 때문이었지. 물론 지금은 전 설이 아닌 사실이 되었지만 말이다." 자륭극 일가(一家)를 제외하고도 수인이 아니면서 이곳에 스스로 들어온 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바로 그 자륭극을 감시하기 위해서 말이다. 헌데 마의 노인이 스스로 밝힌 자신의 정체는 정녕 경이로운 것이 아닌 가. - 지행성 신기박통 제갈교수! 천기의 미행자라고 불리우는 추적술의 제 일인자. 하늘에 별이 있는 한 그 누구도 그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다. 밤하늘의 별에서 천기를 읽고 그 천기를 따라 상대의 행로를 추적하기 때문이다. 전후 오백 년을 통틀어 경공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달인이 며 천기 뿐 아니라, 지리, 산학, 진도(陳圖), 복리(卜理)등 천하만지만류잡 학에도 단연 독보적인 인물로 알려졌던 자. 허나 십 이 년 전 홀연히 강호에서 자취를 감춰 무수한 구설수만을 뿌렸 던 그가 바로 이 악마의 수용소군도 해란주에 스스로 유폐되어 있을 줄 이야. 이때 마의노인 제갈교수는 비석을 바라보며 돌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지! 자륭극 그 자도 어쩌면 이 혈왕사를 노리고 이 척박한 유형의 땅에 들어왔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허나 북극제군(北極帝君) 나란 소(羅蘭所)가 남긴 이 비문은 동토의 제국, 북국(北國)의 궁중에서만 쓰 던 빙경문자(氷京文字). 흐흐흐, 당금 천하에서 빙경문자를 알아보고 읽 을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 노부와 릉아 뿐이지." 빙경문자라면 얼어붙은 동토의 제국 북국의 궁중에서만 사용되다 실전된 천하삼대난해문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제갈교수는 희열에 가득찬 웃음을 만면에 떠올리며 꼿꼿하게 몸을 일으 켰다. "흐흐흐, 지난 십 이 년 동안 나는 자륭극의 비밀에 싸인 정체를 탐지했 고 마침내 그의 행로를 알아냈다. 그것으로 나의 임무는 끝났다. 거기에 나의 목적인 혈왕사마저 찾았으니 이제 본성은 천하를 제패할 것이고 나 는 본성을 지배하는 영세군림의 절대자가 될 것이다!" 독을 품고 일어선 뱀대가리인 듯 우뚝 선 그의 전신에서 차디찬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훗, 앞으로 남은 일은 단 두 가지. 너, 자륭극을 필두로 하여 하늘없는 땅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주인인 곤오풍우와 총정(總正)의 지주이며 소 림의 살아있는 부처로 불리우는 천세미륵(千歲彌勒) 자장대사(慈張大師) 를 제거하는 일과 우리 초왕사성(楚王邪城)에서 천천히 천하를 거머쥐는 일 뿐이다." 정녕 광오한 말이 아닌가. 헌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사람과 한 단체의 이름은 실로 가공스럽 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 천세미륵과 초왕사성! 이 두 이름은 결코 합해질 수 없는 상극의 이름이었지만 하나의 공통점 을 가지고 있었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와 곤오풍우라는 한 거대한 고목의 그늘 밑에서 그들 은 언제나 이인자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천하정도문파의 총합체인 총정의 정신적 지주이자 실질적 지배자인 천세 미륵의 앞에는 언제나 거인 곤오풍우의 위대한 이름이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전 중원 천년사파무림의 동맹인 연사(聯邪)의 제일 세력인 초왕사 성의 앞에도 언제나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그 항거할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천하에서 두 번째의 인물 천세미륵 자장대사. 천하에서 두 번째의 단체 초왕사성. 총정과 연사는 비록 그 방향은 달랐지만 삼천 년 동안 한 번도 일인자가 되어 보지 못했던 이인자의 아픔으로 처절한 공통점을 가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마(全魔)! 그 자체나 다름없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와 곤오풍우 에 대한 연사와 총정의 싸움, 곧 전마와 총정, 연사가 뒤얽히는 삼천 년 중원무림의 치열한 생사박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해란주는 더이상 수인들이 갇혀있는 유형의 섬이 아니었다. 전 마, 총정, 연사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곤오풍우와 야망의 황제 연왕, 희 세의 신비고수 자륭극과 천세미륵 자장대사, 그리고 초왕사성 등이 얽히 는 음모의 섬이었다. 바로 난세가 시작되고 있는 폭풍의 섬이었다. 이때 제갈교수는 왠지 뒤통수가 따가운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다 해연 히 놀랐다. "릉아! 너는 언제 왔느냐?" "응, 아주 오래 전에." 그의 뒤쪽에는 언제부터인지 자천릉이 쪼그리고 앉아 두 눈을 빤히 뜬 채 제갈교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길 또 놀라는군. 그 까마귀 귀신이 릉아에게 금오족형(金烏足形)인가, 까마귀 발자국인가를 가르치면서부터 릉아가 오는지 가는지를 모르겠으 니." 제갈교수가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헌데 놀라운 일이 아닌가. 추적술의 일인자라는 지행성 제갈교수가 자천 릉이 접근하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그것은 바로 무의탁이 자천릉에게 가르친 금오족형, 즉 뒤꿈치를 땅에 붙이고 발가락만으로 걷는 까마귀 걸음 때문이었다. 자천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할아범. 정신이 이상해? 왜 혼자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거지?" "흐흐흐, 그래! 기분이 하도 승하여 미쳐 버렸단다. 헌데 릉아는 웬일로 망란비역(邙蘭碑域)에 왔느냐?" "응, 중할아버지랑 까마귀 할아범이 돌할아범을 불러오래." "나를?" "그래." "필요없다. 매일처럼 신세 한탄 하는 것도 이제 들어주기 지겹다." 제갈교수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깡마른 손가락을 들어 비석을 가 리켰다. "릉아야. 우선 이 비문이나 한 번 보거라." "비문? 이것은 북방의 문자 같은데." "그렇단다. 내가 가르쳐준 대로 천천히 글을 읽어 보거라." 자천릉은 묵묵히 비석 앞으로 다가가 장님이 점자판을 더듬 듯 마모된 비문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글자를 판독해 가기 시작했다. "현종 사 년? 현종이라면 양귀비 때문에 망한 대당시대의 임금이니 벌써 팔백 년 전의 비문이잖아!" <현종 사년 정월 초닷새. 벌써 이 원한과 저주로 점철된 지옥의 유형지에 갇힌 지도 어언 칠 년하 고도 삼 개월이 지났다. 날짜나 제대로 맞는지 모르겠다. 맨처음 들어와 무료한 나날을 보내기 위해 해변에 널려 있는 조개껍질들을 깎아 만들기 시작했던 패각비도들도 벌써 일천구백 팔십 육 개나 쌓였다. 그리고 이 밤 내 품에서 친구가 죽어갔다. 수만리 너머 이방에서 사귄 마지막 친구였다. 허나 그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감정조차 느낄 수 없는 것은 무료에 지쳐 모든 인간적인 심성들이 닳아 없어진 까닭일까? 죽어간 벗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부터 나도 내 죽은 머리맡에 서 있을 비 석에 나의 비문을 새기기 시작했다. 헛허, 살아 생전 자신의 비석에 비문을 스스로 새기는 나의 가슴에 덧없 이 차오르는 이 쓰디쓴 비애는 무엇인가. 감정이 죽어버린 나에게도 아직 이런 사치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더욱 서글픈 일이다.> "흐흐흐, 패각비도라, 그래, 그래! 되도록 많이 만들어 놓고 죽어 있어라. 혹시 누가 아나? 괜찮은 물건들이 많으면 그 대가로 그대가 손수 깎은 비석 위에 한 잔 술이라도 부어줄지. 흐흣!" 제갈교수는 흥겨운 듯 볼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일기체로 써 내려간 그 비문은 아릿한 아픔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자천릉은 제갈교수의 비웃음에도 아랑곳 없이 취한 듯 계속 비문을 더듬 어 갔다. <정월 스무 이틀의 아침. 날씨가 무척이나 맑다. 내고향 북방의 언덕에는 눈이 내리고 얼음의 도 시 빙경(氷京)에도 신년의 기쁨에 흥겨운 선남선녀들의 발걸음이 한창이 리라. 허나 여기는 사시사철 따가운 햇살과 태풍과 소나기만 기승을 부리는 아 득한 이역의 저주받은 고도일 뿐인 것을. 오늘은 또 하나의 장난감을 다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죽어가고 없는 지금 유일하게 남은 친구들인 사해칠채난붕, 그 친구들이 한 번씩 옷을 벗을 때마다 남겨놓곤 하는 일곱 빛깔의 고운 깃털로 만든 무지개의 날 개였다. 나는 오백 개도 넘는 무지개의 날개를 칠채홍우(七彩紅羽)라 이름하고 내 고향 북방의 하늘을 향해 힘차게 쏘아 보았다. 잃어버린 희망의 빛일까? 하늘에서 일곱색깔의 무지개가 산산이 부서지 며 오래도록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었다. 저 하늘 아래 혼자 놀고 있을 미아가 보았다면 얼마나 즐거워 할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얼음의 도시 빙경? 칠채홍우?" 소년의 호기심 때문일까. 자천릉은 천진한 눈빛을 묘하게 추스리며 비문 에 새겨진 글자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현종 오년 칠월 초아흐레. 워낙 메마른 땅이라 장난감을 만들 재료조차 거의 구할 길이 없다. 궁리 끝에 해란의 꽃잎을 따서 천어독장에 담궈봤더니 빨갛게 물들며 쇠보다 질기고 강한 재질로 변했다. 그런데도 무게는 원래의 나뭇잎보다 수십 배는 가벼워 마치 솜털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뛸 듯이 기뻐 조금 손질 했더니 천리 밖까지도 단숨에 날아갈 수 있는 멋진 장난감으로 탈바꿈했 다. 나는 이 강하고 가벼운 꽃잎들에게 천리화엽산유화라는 이름을 주었다. 하지만 슬픈 일이다. 천리화엽산유화가 아무리 멀리 난다 한 들 이 몸은 고작 백 리도 안되는 해란주의 해변에 앉아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음을 어이 하는가. 하여 오늘은 천어독장의 물을 증발시켜 얻은 죽음의 푸른 소금, 천어독 염으로 독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색, 무미, 무취에 느낌조차 남기지 않 는 천하제일의 독품이다. 내 죽으면 묻어줄 사람 하나 없는 지금, 언젠가 이 독약을 먹고 내 스스 로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