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황(卍皇) 1 - 8편 (8/50)
이들은 형제지간이었던가. 무의탁의 얼굴이 되었던 난장이 노인이 자신을 첫째라고 말한 것으로 보 아, 가슴을 베인 노인이 둘째 무의척, 그리고 맨 아래에 있던 노인이 셋 째 무의괄임에 분명했다. 이때 흰 빛의 늪 속에서 질식할 듯 허덕이던 자천릉의 눈빛이 고통 속에 서도 반짝 차가운 빛을 뿌렸다. "곤오풍우,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주인...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왠지 모를 기이한 전율이 자천릉의 작은 육신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허나 자천릉은 몰랐다. 초상감각과 천상의 골격을 타고난 그의 앞 길에 운명처럼 제시되어 있는 만황의 길, 그 한 발짝 앞에 숙명의 장벽으로 버티고 서 있는 그 두 이름의 의미를.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예감과도 같은 전율 속에서 자천릉의 의식은 점차 고통으로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회리오조의 셋째 무의괄의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어렸다. "형님. 릉아를 너무 심하게 다루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다. 우리는 아직 릉아를 모르고 있다. 극한 상황에 처할 때 나타나 는 제 칠감각, 염력! 그것의 진정한 잠력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 으로 훨씬 가공할는지도 모른다. 그 점은 릉아가 네 칼에 손등을 관통당 하고 다시 온 몸을 난자당하고서도 벌써 씻은 듯 완치되어가고 있는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보거라! 저기 릉아의 몸을." 무의탁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자천릉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고슴도 치의 털처럼 박혀있던 무수한 작살과 칼날, 그리고 암기들이 서서히 밀 려나오고 있지 않은가. 동시에 마치 모래벌에 구멍을 파면 주변의 모래 들이 이내 그 자리를 메워버리듯 상처는 제 스스로 급속히 아물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동해만년붕란분지(東海萬年鵬蘭糞池)... 만년삼왕과 청왕백사, 그리고 천 년해란만을 먹고 사는 사해칠채난붕(四海七彩蘭鵬)의 똥이 억겁동안 쌓 여서 형성된 새똥의 늪, 저것은 릉아의 몸에 잠재된 힘을 끌어올리는 가 장 훌륭한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저 자연치유현상은 단지 그 조그만 예에 불과하지!" - 동해만년붕란분지! 공작과 붕조 사이에서 태어나는 새를 난붕이라고 한다. 그 난붕이 일천 년 이상을 만년삼왕과 청왕백사, 그리고 천년해란만을 먹으며 자라 칠채 의 무지개 빛을 띨 때 비로소 사해칠채난붕이라는 영물이 되는 것이다. 헌데 그 사해칠채난붕은 오직 한 곳에 모여 서식할 수밖에 없었으니. 먹이가 되는 천년해란이 한 장소에 군집을 이루며 자라는 속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지상에서 단 한 곳, 천년 해란의 숲이 자라는 곳에는 수백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사해칠채난붕들의 배설물들이 늪을 이루며 쌓이게 된다. 만 년삼왕과 청왕백사, 천년해란의 양분이 고스란히 융합된 기적의 늪이 이 루어지는 것이다. 이곳 해란주의 천길 절벽 아래에 있는 이 흰빛의 언덕과 늪이 바로 그 동해만년붕란붕지였던 것이다. 자천릉은 지금 수만 년에 한 번을 만나기 힘든 천세의 절대기연을 얻고 있는 것이었다. 동해만년붕란분지 속으로 가라앉던 자천릉의 몸은 의식이 없는 중에도 고통에 못이긴 듯 허우적거리며 밀려나가 천어독장 쪽으로 구르듯 빠져 들고 있었다. "드디어 동해만년붕란분지의 약력이 모두 릉아의 몸에 빨려 들었다." "천어독장, 이제 그 극한의 음기가 동해만년붕란분지의 초극의 양(陽)의 기운과 합일되기만 한다면." 회리오조 삼형제의 눈빛이 차갑게 굳으며 자천릉의 전신을 초조하게 훑 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찌찍! 천어독장의 짙푸른 물에 닿은 곳부터 자천릉의 몸이 녹색으로 물들며 이 내 악어의 껍질처럼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무의탁의 말대로 자천릉의 체내에 잠재된 초상감각의 힘이 동해 만년붕란분지를 거쳐 천어독장, 그 억겁의 독력(毒力)을 만나며 맹렬하게 분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한 식경 쯤이나 흘렀을까? 자천릉의 몸은 완전히 녹색인간으로 화한 채 파충류의 화신인 듯 딱딱한 갑각(甲殼)으로 갈라졌다. 천어독장의 물결이 소용돌이 치며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퍼어엉! 돌연 억년의 물결마저 자지러질 듯 굉렬한 폭음이 자천릉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세 난장이 형제의 전신에 폭풍같은 전율이 스쳤다. "돼, 됐다! 이제 마지막 대법의 관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서 릉아를 그분들께 데리고 가야 한다!" "가자!" 무의탁이 일갈을 터뜨리며 자천릉을 안아들고 어디론가 쏘아갔다. ② 어둠이 장막을 드리우고 있는 칙칙한 해란주의 어느 한 곳, 싸늘한 한기 만이 깔리듯 흐르고 있는 깊은 침묵의 공간이었다. 동굴인가? 사방에는 거대한 암반의 가운데를 쪼개어낸 듯 거친 석벽들이 둘러서 있었다. 벽에는 금방 철새의 몸에서 뜯어낸 듯 피묻은 새모가지들이 장신구처럼 걸려 있고, 그 한복판에는 수천 개의 향로들이 놓여 푸른 연기를 자욱이 뿜어내고 있었다. 악마의 사악한 숨결과 불타는 성스러운 기운이 어우러져 있는 느낌이랄 까? 칠흑의 어둠과 푸른 연기에 가리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 이끼와 진흙의 퀴퀴한 습향만이 지하세계의 어느 한 곳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 다. 또르륵! 정적 속에는 어디선가 맑고 청량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울려퍼 지고 있을 뿐이었다. 헌데 환영인가? 음향이 울리고 있는 자욱한 연기 속에 수십 수백 개의 시뻘건 아수라천존의 형상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리 고 있지 않은가. 똑! 또르륵! 그 아수라천존의 핏빛 영상 아래에 새하얗게 빛나는 작은 물체들이 소리 를 내며 한 옥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움직여지는 물체들은 바로 불타의 살결인 양 뽀얗고 희디흰 빛깔의 완두 콩만한 염주알들이 아닌가. 아수라천존의 환영들은 그 흰 염주알 위에 새겨진 핏빛 아수라천존상 때 문에 일어난 눈의 착각이었다. 염주를 돌리고 있는 옥수 위로 붉은 가사를 전신에 두른 한없이 육중하 고 근엄해 보이는 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바닥까지 늘어진 치렁한 흑발, 그리고 무릎 위로 흘러내린 검은 수염이 지극히 강인하고도 중후한 인상을 풍겨내는 칠순의 노인. 귀 밑까지 뻗어내린 장미(長眉) 아래 지그시 반개(半開)한 두 눈은 황금 빛이고, 이마에 새겨진 아홉 개의 계인(契印)은 노인이 승려임을 짐작케 해 주고 있다. 헌데 그 계인 위에는 푸른 독수리 문장, 해란주의 수인임을 상징하는 낙 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헌데 천하에 이토록 성스러운 위엄을 가진 인물도 존재했던가. 지금 향 연에 감싸여 있는 노승의 모습은 흡사 불존의 화신처럼 숭고해 보이기까 지 했다. 노승의 앞에는 연기 사이로 은은히 하나의 돌제단이 보였고, 그 위에는 한 사람이 죽은 듯 고요하게 누워 있었다. 얼음으로 깍은 뒤 하얗게 분칠을 해 놓은 듯 창백한 얼굴, 한 올의 따스 한 숨결도 느낄 수 없는 시체와도 같은 그 인영은 바로 천어독장 속에서 의식을 잃었던 자천릉이 아닌가. 두 눈을 감은 채 한 점의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자천릉의 모습에서 느 껴지는 것은 오직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침묵 뿐이었다. 백염주를 돌리던 노승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그러자 노승의 맞은 편에서 누군가의 노쇠하고도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 려왔다. "제하(祭下)! 이제 꼭 사십 사 일이 지났습니다. 시작하시지요." "알겠네. 포랍(布拉), 준비는 됐네." 노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자천릉이 누워 있는 돌제단의 발치에는 황색 가사를 걸친 또 한사람의 노승이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있었다. 비루먹은 당나귀에 승포를 입혀 놓은 모습이 이러할까? 호호백발에 깡마른 강시를 연상케 하여 나이를 짐작할 길이 없는 노승이 었다. 늙어빠진 닭의 눈까풀처럼 축 늘어진 주름 때문에 노승의 눈은 아 예 감겨진 듯이 보였다. 돌제단의 주위에는 수십, 수백 개의 흑진주같은 눈동자들이 연기 속에 빛나고 있었다. 헌데 그것은 까마귀떼들의 눈동자가 아닌가. 날개를 접고 고요히 돌제단을 바라보고 있는 수백마리의 까마귀떼들은 마치 악마의 전령을 보는 것 같았다. 그 까마귀떼들의 뒤에는 회리오조 형제들이 세 방위로 나누어선 채 돌제 단을 호위하고 있었고, 그들의 어깨에는 여전히 커다란 황금빛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이때 자석에 이끌리듯 자천릉의 모습을 직시하고 있던 회리오조 삼 형제 의 눈빛이 긴장과 흥분으로 은은하게 떨렸다. '이제 사상 초유의 내공을 지닌 개세의 무적고수가 탄생한다. 제 칠의 초 상감각, 그 염력의 힘과 내공이 합일된 유례없는 절대공력의 고수가.' '마침내 우리의 한을 풀어줄 천고의 귀재, 그 제 이의 탄생이다.' 그때 핏빛 가사의 노승의 주위에서 아수라천존의 잔영들이 스러지며 하 나의 거대한 핏빛 아수라천존의 그림자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두 눈에서 뿜어지던 안광이 서서히 무지개빛으로 바뀌며 내뻗은 양손의 장심에 달무리처럼 둥근 원형의 무지개가 환상처럼 피어올랐다. 같은 순간 도저히 올라갈 것 같지 않던 황색승포 노승의 눈까풀이 번쩍 떠졌다. 헌데 노승의 눈빛은 겉모습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맑았다. 불타의 혜광과도 같이 잔잔하고 투명한 눈빛이 연기 속의 어둠을 헤치고 있었 다. 그리고 그의 등과 장심에서 장엄한 황금빛 환영이 번져오르기 시작 했다. 그때 시뻘건 아수라천존의 그림자에 휩싸인 핏빛 가사의 노승이 쌍장을 쭉 뻗으며 대갈을 터뜨렸다. "천지합일, 신령통교(身靈通交)!" 황색 가사의 노승도 황금빛 환영에 쌓인 양손을 벼락처럼 밀어냈다. "만황제일붕(卍皇第一鵬) 천하무적(天下無敵)!" 무지개빛과 황금빛이 어우러진 빛무리가 자천릉의 전신에 환상의 광채를 뿌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쌍장은 각각 자천릉의 천령개와 용천혈에 닿았다. 헌데 그때였다. 파파파! 돌연 자천릉의 몸에서 무형의 반탄력이 해일처럼 뻗으며 주위의 까마귀 떼들을 휩쓸어 가는 것이 아닌가. 회리오조 형제의 얼굴에 섬뜩한 놀람이 스치고 두 노승의 얼굴에도 은은 한 경악이 떠올랐다. 고오오! 빛무리가 더한층 찬란한 광채를 뿜었다. "크윽!" "이, 이런!" 이번에는 회리오조 형제들이 그 반탄력을 견디지 못하고 벽면까지 밀려 나 처박히고 있었다. 두 노승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가며 툭툭 힘줄이 거칠게 불거져 나오 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은 파도치듯 격한 경련을 일으키고 그들의 진원불기(眞元佛氣) 에서 쏟아지는 무지개빛과 황금빛 빛무리는 아예 동굴을 매울 듯 번져오 르며 빛을 더했다. 허나 그것도 잠깐,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자천릉의 몸이 미세하게 흔 들리며 뇌성같은 울림이 터져나왔다. 마치 벽력(霹靂)이 자천릉의 몸 안 에서 태동(胎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담담하던 두 노승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벽면에 처박힌 채 지 켜보던 회리오조 형제들의 눈빛이 절망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시, 실패다!" "도, 도대체, 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두 분 법왕(法王)과 부왕(副王) 의 개정개천대법(開頂開泉大法)이 퉁겨지다니!" "큭! 백 년 전 대원 최강의 고수로 천하의 서열 일, 이 위를 앞다투던 두 분 대라마교(大喇 敎)의 법왕과 부왕의 사갑자 내공력이 이렇듯 쉽게 와 해될 줄이야!" 이들의 탄식 속에 흘러나온 두 노승의 정체는 실로 경악스러운 것이었 다. - 라마교(喇 敎)! 밀교(密敎)라고도 한다. 대원(大元)이 멀리 서역까지의 천하를 지배할 때 그 대원을 지배한 또 하나의 거산이 있었다. 지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황조와 제국보다도 거대한 영토를 통치했던 대 원제국의 영광을 이루는 진정한 힘이자 주역이었던 그 거산이 바로 라마 교였다. 짧은 백 육십 년의 세월을 가장 강렬한 불꽃의 역사로 태워 버렸던 대원 제국의 영화와 함께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을 지녔던 라마교. 이 두 노승이야말로 대원을 지배했던 라마교를 통치한 제 십육대 달라이 대라마와 관첸라마였던 것이다. 대원제국 역사상 최고의 기재들로 불리웠으며 대원의 영광이 히말라야 산맥과 눈덮인 서역의 빙원을 넘어 천하로 뻗어갈 때 그 모든 것을 주관 하고 추진했다고 알려진 대원의 진정한 주인. - 제 십육대 달라이대라마 대천법왕(大天法王) 사륵탄(斯勒灘), 제 십육 대 관첸라마 밀법부왕(密法副王) 포랍(布拉)! 엄청난 일이 아닌가? 해란주의 이 칙칙한 지하에서 자천릉에게 대법을 펼치고 있는 두 노승이 바로 그 위대한 라마교의 두 종통(宗統)이었다니. "나무환희불!" 적색가사의 노승인 사륵탄의 입에서 떨리는 불호성이 흘러나왔다. "잊고 있었다. 내공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선천적인 염력의 힘이 극강 해지고 반탄력 또한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그가 힘겹게 고개를 젓자 포랍의 얼굴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제하! 우리가 실패한 이상 이제는 그 누구도 릉아의 신체를 천인합일시 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지켜보는 일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무의탁이 허탈에 젖은 음성을 흘려내었다. "법왕! 정녕 우리는 실패한 것입니까?" 무의괄도 포랍을 향해 불안과 초조가 엇갈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군요. 내공이 증진될수록 선천적인 염력의 힘도 커 진다니!" "그대들이 지켜 본 대로일세. 결과는 실패네." 사륵탄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릉아에게 천고의 기연을 주어 내공을 증진시키면 그 내공이 릉 아의 선천적 초상감각, 곧 염력을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네. 허나 우리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네. 후천적으로 내공이 축적될 때마다 선 천적인 염력도 커진다는 사실, 그 간단하고도 무서운 진리를 잊고 있었 던 걸세." "허면 릉아는 영원히 내공과 염력을 합일시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단언하지는 못하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본하와 부왕의 능력으 로써는 불가항력이라는 것이네." 순간 회리오조 형제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며 푸르르 경련이 피어났다. "끝, 끝장이다! 백 년 전에 이미 대원 제 일, 아니 중원 제 일의 내가고 수라 칭송되던 두 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면 릉아를 가르치고 완성시켜 곤오풍우에게 우리의 한을 갚으려 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말이 아 닌가!" "제, 제기랄, 우리의 마지막 희망의 등불이 불을 켜 보지도 못하고 스러 지는군." 무의척과 무의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무의탁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 사륵탄을 바라보았다. "그, 그렇다면 릉아의 몸을 완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다 는 말씀입니까?" 백 년 전 이미 내공에 관한 한 천하최강의 고수였던 두 노승이 할 수 없 는 일을 이제 천하의 그 누가 할 수 있을 것인가. 헌데 뜻밖에도 사륵탄의 고개는 무겁게 저어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친구라면 가능할지도 모르네." "그 친구라니요? 천하에 두 분보다 더 내공이 높은 인물이 또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허허허, 그는 무인이 아니라네. 인간을 구원하는데 평생을 바친 한 이름 없는 의생(醫生)일 따름이지." "의생?" "그는 이역만리 중원땅 육천마을의 한 곳, 문둥이의 섬 부나비도에 스스 로 자신을 던진 제세(濟世)의 성의(聖醫)라네. 종파도 흑백도 민족도 그 어떤 이해관계도 초월하여 오로지 인술만을 베푸는 가장 참다운 이 땅의 의인이지." "아! 시한부 인생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부나비도에 들어갔 다는 천치의성(天治醫聖) 사공역(司空易), 그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네. 노납의 우매한 머리로 생각하건대 천하를 통틀어 염력의 신비 를 이해하고 릉아의 몸을 완성시킬 만한 인물은 오직 사공시주 뿐일걸 세!" - 부나비도와 천치의성! 버림받은 땅의 육천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삶에 관한한 가장 처절한 아픔 을 삼켜야 했던 나환자들, 그리고 시한부라는 천형의 사람들이 모여 살 아가는 절망의 섬 부나비도에 유일한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천치의성 사공역. 하늘이 앓는 병마저도 고칠 수 있다하여 천치라는 이 름으로 불리우는 사람. 그는 비파의 음률을 사랑하고 이백의 시문(詩文)을 애송하며 주자의 학 론(學論)에 심취했던 이십 사 세 청년의 몸으로 모든 보장된 부귀와 영 화, 출세의 안락을 버리고 홀홀단신 부나비도에 자신을 던졌다. 그리고 백여 년이 지난 오늘 그는 부나비도의 모든 버림받은 이들의 이 웃이요, 신이요, 우상이었다. 시한부 생명들과 불치의 나병조차 치료해 내는 그를 일컬어 사람들은 의 성, 혹은 어둠의 성자라고 불렀으나 그가 부나비도에 들어간 이래 단 한 번도 중원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었기에 그누구도 사공역의 진정한 능 력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헌데 그 사공역이 바로 라마교 제 십육대 교주 대천법왕 사륵탄의 지기 였고 또한 자천릉을 천인합일시킬 수 있을런지도 모르는 유일한 사람이 란 말인가. ③ "휴우! 천우신조로군요!" "정녕, 정녕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무의탁 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며 사륵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허나 진정한 문제는 지금부터 일세." "뭐라고요?" "아니 또 문제가 남아 있었단 말씀입니까!" "그렇네. 사공시주의 말에 의하면 염력술사의 힘은 인간의 잠력을 초극 의 정신력으로 뽑아내는 것이기에, 어떤 후천적인 힘으로써 잠력의 한계 를 뚫어주지 않는 한 범인에 비하여 다섯배나 빠르게 생명의 힘을 소진 시키고 만다고 하네." "그, 그런 일이!" "본하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릉아의 잠재력이 모두 사용되는 시기는 십 팔 년, 다시 말해 릉아는 십팔 세까지밖에 살 수 없는 시한부의 생명을 타고난 것이나 다름이 없네. 더욱이 천인합일을 위해 주입시킨 내공이 염력의 활동을 자극한다면 그 연한은 더욱 짧아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십 팔 년! 허면 릉아의 생명이 이제 육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씁입니 까?" "내공이 높아질수록 염력의 힘도 커진다고 하셨거늘, 그렇다면 사실상 릉 아의 생명은 더욱 단축될 것 아닙니까?" "나무환희불." 사륵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그러진 회리오조 형제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하나밖에 없네." 순간 무의탁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관부금마선(官府禁魔船)!" 사륵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릉아의 나이는 열 두 살, 내일 해안에 닿는 관부금마선을 이용 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네." "하지만 릉아는 아직 미완의 대기(大器)일 뿐이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네. 허나 관부금마선은 십 년마다 한 번씩 왕래하는 것이며 이번을 지나면 릉아가 살아서 관부금마선을 대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음을 생각해야 하네." - 관부금마선! 중원에서 해란주로 죄인을 호송해오는 율법의 검은 수인선. 십 년에 한 번씩 대역죄인이나 전쟁포로, 혹은 역천에 준하는 대죄를 지 은 자들을 싣고 오는 관부금마선은 해란주에서 중원을 오가는 유일무일 한 교통수단이었다. 허나 관부금마선으로 호송되는 죄인들의 죄질이 무거운 만큼 탑승하는 선원과 간수들의 신분과 무학수위도 엄청났기 때문에 황명을 직접 받은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접근조차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다면 릉아를 내일 탈출시켜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무의탁이 다시 반문하자 사륵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바로 내일일세. 여명이 움터오는 인시말(寅時末), 우리는 행동을 개시해야 하네." "그, 그러나 지금 릉아를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 중원에 내보낸다면 부나 비도에 이르기도 전에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나무환희불, 미약한 본하에게 불타께서는 마지막 한 가지 복을 허락하셨 네. 선천적으로 릉아의 몸 속을 흐르는 초상감각의 잠력과 후천적인 내 공의 압력을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네. 물론 지극히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겠지만." "아! 그런 방법이." "그럼 최소한 육 년의 수명은 보장될 수 있겠군요!" 무의탁 등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사륵탄은 이제껏 침묵만 지 키고 있던 포랍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포랍. 시작해 보세." 그 음성과 함께 사륵탄의 전신에 재차 새빨간 아수라천존 형상의 후광이 떠오르고 포랍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천릉을 향해 다가갔다. 침묵과 터질 듯한 긴장 속에 포랍의 신형이 막 자천릉의 한 치 앞에서 멈추어 섰을 때 사륵탄이 조용히 눈을 감고 합장하며 나직한 음성을 흘려냈다. "먼저... 천령개를 넣어 주시게." 포랍의 주름진 두 손이 그 음성을 따라 천천히 자천릉의 천령개를 쓰다 듬기 시작했다. "미간을 더듬어 인중과 비후혈을 안마하시게." 다시 반 각 쯤의 시각이 흐르고 사륵탄의 음성은 이어졌다. "인후, 명문(命門), 상단전(上丹田), 곡지(曲地), 하단전(下丹田), 회음(會 陰)...." 정적 속에 울리는 것은 사륵탄의 고요한 음성 뿐이었다. 그에 따라 포랍 의 주름진 손이 자천릉의 전신을 골고루 조심스럽게 안마해 가고 있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