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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1 - 15편 (15/17)

2026-09-14 20:49:39 조회 7
"그 동안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면서도 인사를 드리지 못해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거야 자네의 잘못이 아니지. 노부가 자네를 만나주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런데……." "잠깐만." 손노인이 손을 들어 복청양의 말을 막았다. "우리 얘기를 나누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자네는 아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러잖아도 백아아의 행방을 물을 참이라 복청양이 얼른 대답했다. "그러면 우선 사람부터 만나기로 하지. 아무래도 그게 순서인 것 같으니까." 짝짝! 손노인이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병풍 뒤의 작은 문이 다시 열렸다. 복청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문 뒤에 복금사가 서 있었던 것이다. "오빠!" 복금사가 와락 복청양의 품으로 달려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금사야…… 이게 대체……." 복청양은 동생의 등을 어루만지며 잠시 할말을 잊었다. 산서지부의 뇌옥에 갇혀 고생을 하고 있어야 할 복금사가 돌연 그의 앞에 나타났으니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빠, 나, 난……." 복금사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동안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듯 그녀의 울음은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만 되었다." 뒤에서 손노인의 엄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복금사가 대침에 찔린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더니 그의 품에서 얼굴을 떼었다. "너는 이제 나가보아라." "네, 대인." 복금사가 울음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마치 줄에 매인 인형처럼 순순히 손노인의 명에 복종하고 있었다. "금사야!" "자네는 여기에 있게." 손노인은 복금사를 쫓아가려는 복청양을 불러 세웠다. 복청양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복금사는 다시 작은 문 뒤로 사라져 버렸다. 복청양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손노인을 돌아보았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고 엉망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그것은 이 모든 의문의 열쇠를 손노인이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복청양은 복금사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손노인과 마주앉았다.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을 줄 아네." 손노인이 태평하게 곰방대를 빨며 말했다. "우선 저 아이가 어째서 내 집에 있는지 궁금하겠지?" "그렇습니다." 복청양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 아이의 일은 길게 설명할 것도 없네. 노부가 사람을 보내서 빼내온 것뿐이니까. 산서지부의 뇌옥이라는 곳이 그다지 튼튼하지는 않더군." 손노인의 말은 간단했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산서지부의 뇌옥에 갇힌 사람을 구해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그 힘든 일을 손노인은 해낸 것이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르신이 제 동생을 구해주신 데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런 일을 했느냐, 이거로군?" "그렇습니다. 저는 머리가 둔해서 어르신의 뜻을 짐작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일세." 손노인이 마시지도 않은 찻잔을 끌어당기더니 거기에 곰방대를 툭툭 털었다. "난 고루한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일을 부탁하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게 금전적인 것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말일세. 하지만 자네는 돈을 좋아할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궁리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생각 끝에 저 아이를 구해 오기로 한 걸세." 이제까지와는 달리 손노인이 눈을 빛내며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였다. "자네는 나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주어야겠네." "그게 뭡니까?" "자네 혹시 제마옥(制魔獄)이라는 곳을 알고 있나?" "모릅니다." "제마옥이란 일종의 감옥일세. 단심백결회가 무림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많은 의인(義人)들을 가둬둔 곳이 바로 거기지. 제마옥은 태행산(太行山)에 있는데 경비가 엄중하고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곳으로 소문이 나 있네." "어르신께서는 저보고 제마옥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렇네." 이미 손노인은 보잘것없는 촌부가 아니었다. 그는 강한 눈빛으로 복청양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과 접하자 복청양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제마옥에는 좌우쌍마라는 두 사람이 갇혀 있네. 물론 그 외에 다른 인물들도 많이 있지만 허접쓰레기 같은 것들이니 노부의 관심밖이고 노부가 필요한 건 바로 그 두 사람일세. 노부는 자네가 그곳에 가서 좌우쌍마를 구해 오기를 바라네." 좌우쌍마(左右雙魔). 복청양은 그들이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별호가 마(魔)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좋은 인물들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그들을 가둔 게 단심백결회라면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그런 인물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이 노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어르신께서는 제가 그 일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으십니까?" "물론 할 것이네." 손노인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왜냐하면 자네는 이미 내가 지불할 대가를 보았으니까. 자네가 좌우쌍마를 제마옥에서 구해 온다면 노부는 저 아이를 자네에게 보내 줄 것이네. 하지만 만일 그 일에 실패한다면 노부는 저 아이를 계속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네." 복청양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노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제 명백했다. 복금사를 인질로 하여 그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어르신!" "노부는 사리가 분명한 사람일세." 손노인이 잘라 말했다. "노부는 어떤 일을 시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하네. 하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야 없지. 어떤가?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이건 부탁이 아니라 강요로군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면 반드시 그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른 채 이렇게 강요에 의해서 무작정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렇겠지. 자네의 말이 틀리다는 것은 아니나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네. 자네는 백아아라는 여자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나?" 손노인의 입가에 떠오른 교활한 미소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건 바보일 것이다. "자네가 이 일을 무사히 끝낸다면 저 아이를 데려갈 수 있음은 물론이고 백아아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네. 하지만 그때까지 두 아이는 내 집에 손님으로 있어야만 하네." "어찌 그런!" 복청양이 탁자를 쾅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찻잔이 뒹굴어 찻물이 바닥에 흘렀다. 하지만 손노인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게 싫다면 또 한 가지 길이 있네. 그건 바로 노부를 인질로 삼아 그 두 아이와 교환하는 것일세. 하지만 자네에게 과연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을까 모르겠군."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노인의 몸에서 가공할 기세가 일어났다. 바람도 없는데 옷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방안의 밀폐된 공기가 거센 진동을 일으켰다. 복청양은 갑자기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저 가냘픈 촛불조차 흔들림없이 밝은 빛을 뿌리고, 손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인데 수천 근의 압력이 전신을 짓눌러 오고 있었다. 복청양은 공력을 끌어모아 무형의 압력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복청양은 탁자에 손을 짚은 채로 석상처럼 굳어 있었고, 손노인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탁자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더니 복청양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단하군." 한마디 감탄사와 함께 그토록 무섭게 압박해 오던 압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헉, 헉." 복청양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는 발자국이 한 치나 되는 깊이로 새겨져 있었다. 바닥은 단단한 돌이었는데 복청양이 물러서며 거기에 발자국을 남긴 것이다. "정말 대단하네. 노부는 자네가 그런 나이에 그만한 성취를 이루었을 지는 정말이지 기대도 하지 않았네." '이게 대체…….' 복청양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면서 경이에 찬 눈으로 손노인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가 강호에 나와 대면한 가장 강한 고수는 소허도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게도 이 왜소한 노인은 소허도장보다 세 배는 강한 것 같지 않은가? "앉게." 손노인이 의자를 가리켰다. 허탈해진 몸을 의자에 앉힌 복청양이 망연한 얼굴로 손노인을 보았다. "방금 노부는 구성의 공력을 사용했네. 당금 무림에 노부의 구성 공력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지. 그러니 자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걸세." "어, 어르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손노인의 왜소한 체구가 무척이나 거대해 보였다. 그의 작은 몸이 방을 온통 채우고도 남아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손씨 성을 가진, 아무런 쓸모도 없는 늙은이라고 하지 않았나?" 조금 전의 위엄은 어디로 갔는지 손노인이 헤실헤실 웃었다. 이럴 때는 정말 마음씨 좋은 이웃집 노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텐가? 이제는 노부의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생겼나?" "그 전에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모용세가를 멸문시킨 게 바로 어르신이십니까?" 그러자 손노인이 복청양을 빤히 보았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나?" "조금 전까지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르신의 능력을 보니 어르신이 아니면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는 것 같군요." "만일 그렇다면 어찌 하겠나?" "어르신이 모용세가를 몰살시킨 게 사실이라면 저는 우리 복가장에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도 어르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 저는 목숨을 걸고라도 어르신과 싸울 것입니다!" "하하…… 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심약한 자네가 노부와 싸우겠다? 하하하……." 손노인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렸는데 어찌나 웃음이 길던지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하하하, 하하…… 미안하네, 미안해. 자네를 놀리려고 그런 건 아니야." 손노인이 눈물을 닦아내며 힘들여 정색했다. "어쨌든 자네는 잘못 짚은 걸세. 노부는 그 일련의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네. 노부가 복가장이나 모용세가와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나?" "아니란 말입니까?" 복청양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손노인을 보았다. "믿게. 이런 일은 증거를 내세울 수도 없으니 그저 믿으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네. 하지만 노부의 말은 구구절절이 사실일세. 아마도 노부가 자네를 이리로 데려온 것 때문에 그런 의심을 한 모양인데, 자네를 이리 부른 건 자네의 명성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네." "강호초출인 저한테 무슨 명성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왜 명성이 없나? 천노살성, 강호에 모습을 나타낸 지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삼백의 인명을 살해한 사람이 어디 흔한지 아나? 아마도 자네의 이름만 들어도 등을 돌리고 줄행랑을 칠 인물이 수두룩할 걸세." "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복청양이 고소를 머금었다. 천노살성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와 찌른다. 아직 단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한 그였다. 죽일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천하에 다시없는 살성이라니, 자다가도 웃을 노릇이다. "물론 노부는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아네. 하지만 누가 과연 그 말을 믿어주겠나? 이 세상은 자기 혼자만 진실하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되는 건 아닐세. 그 증거로 방금 자네도 아무런 죄가 없는 노부를 의심하지 않았나?" '과연 그럴까? 이 노인은 그 일과 무관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진실은 언제나 거짓의 탈을 쓰고 다니므로……. "이거 얘기가 잠시 엇나갔군. 자네 내 부탁을 들어줄 건가 말 건가?" "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복청양이 말했다. "어르신은 휘하에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당장 만대모만 하더라도 천하가 두려워하는 칠대공적의 하나가 아닙니까? 거기에 어르신의 능력이 더해진다면 아마 마음먹어서 못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저 같은 무명지배에게 그런 일을 시키려고 하십니까?" "그 대답은 이미 한 것 같은데…… 내게는 천노살성이 필요하다고." 손노인이 말했다. "천하가 두려워하는 살성인 자네가 못한다면 누가 하겠나? 그리고 그 일이 노부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벌써 했지 왜 여태까지 있었겠나? 노부는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 전면에 나설 수가 없는 입장일세. 그러니 자네가 그 일을 해주어야만 하겠네." "제마옥이 그토록 엄중한 곳이라면 저 역시 자신이 없습니다." "노부도 물론 자네가 꼭 성공하리라고 믿지는 않네. 하지만 그건 부딪쳐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 아닌가? 설사 실패한다 하더라도 자네가 최선만 다해준다면 노부는 대가를 지불할 걸세. 약속하겠네."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믿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오기는 버리게. 분수를 알아야지." 몸을 일으킨 손노인은 이미 불이 꺼진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나게. 하루가 늦으면 그만큼 자네한테도 손해고 노부한테도 손해니까 서두는 게 좋을 걸세. 그리고 그 동안 자네 동생에 대한 대접은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손노인이 몸을 돌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 문으로 사라졌다. 텅 빈 방안에 복청양이 혼자 남아 있었다. 제 9 장 관(棺) 만월(滿月)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다. 달의 한쪽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까만 밤하늘에 셀 수조차 없는 많은 별들이 초롱초롱 박혀 있었다. 별빛은 맑고 깨끗하다. 그러나 달 주위에는 실구름이 허리띠처럼 둘러져 있었다. 작은 동산에 육각(六角)의 정자(亭子)가 있었다. 정자 위에는 두 사람이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상반신을 벗어부친 탄탄한 체구의 사내와 금방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운 백의여인이었다. 천하마주 단황, 그리고 백아아.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한 정자에 앉아있는 것이다. "따라라." 단황이 술잔을 불쑥 내민다. 백아아는 말없이 술병을 들어 술잔을 채웠다. 돌돌돌 술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정겹다. 단황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더니 절반도 비우지 않고 내려 놓았다. "술맛이 좋구나." 그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도 한 잔 하겠느냐?" "주신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백아아가 머리를 숙였다. 무릎을 모은 그녀의 모습은 달밤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단황이 새삼스러운 듯 그녀를 보더니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주었다. 백아아는 고개를 돌려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흉내로라도 얼굴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몇 순배인가 술이 돌았다. 백아아의 얼굴은 이미 도화(桃花)빛으로 보기좋게 익어 있었다. 단순(丹脣)을 벌리면 단내가 쏟아져 나올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단황은 조금도 취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기야 그가 취기를 느끼기에는 술이 너무 적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아느냐?" 단황이 문득 물었다. "유월 열이레가 아닙니까?" "그렇다." 단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 년에 꼭 하루만 술을 마신다. 유월 열이레, 오늘 하루만." 백아아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럴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단황의 무심한 눈이 잠깐 흔들리더니 그녀에게로 고정되었다. "나는 누가 내게 질문을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백아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단황, 이 사람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아닌가? 그녀의 고개가 급히 숙여졌다. "죄를 범했습니다." "그렇다고 무서워할 건 없다." 미소라고 이름하는 것이 단황의 입가에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지금은 누가 어떤 잘못을 범하여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백아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단황을 보았다. 이 강철 같은 사나이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여겨졌다. 그녀가 단황을 처음 만난 것은 손노인의 저택에 와서였다. 그때 그는 그녀를 열세 개의 흑주 중의 하나라고 불렀던가! 아무튼 그녀는 단황을 만난 후로 그의 수하가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그녀로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저 단황을 처음 본 순간, 그리고 그가 자신의 수하가 되라는 얘기를 한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이 떨리며 항거할 수 없는 힘에 끌려들었을 뿐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대모나 무흔색투 같은 마두들도……. 누가 이 사나이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한때 그녀를 며느리 삼겠다고 설쳤던 무독옹마저 이미 단황의 수하로 들어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녀는 하등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모든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 사나이는 불가능한 것이 없었으며 완전했다. 만일 인간 중에 신이 있다면 바로 이런 인물일 것이다. 백아아는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래 전의 일이다." 단황의 시선이 허공에 걸린 달을 향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길거리에 흔히 굴러다니는 권각술 몇 개를 익히고 우쭐해 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나이는 어렸고 돌봐주는 이도 없어 길거리의 돌멩이보다도 못한 처량한 신세였지. 나는 들개처럼 아무런 희망도 없이 굴러다니다가 우연히 어떤 일에 휘말려들어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살아날 길이 전혀 없는, 십에 십, 죽음이 눈앞에 보이는 그런 처지가 된 것이지. 그때 나는 은공(恩公)을 만났다." "은공이라고요?" "그래." 단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다. 단 이틀의 만남이었고 은공의 이름조차 모르니까. 하지만 그 이틀은 내게 있어서 십 년 이상으로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때 은공은 내 목숨을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절기를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무공이 뭔지도 모르는 나에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눈뜨게 해준 것이지." 훌쩍 술잔을 비운 단황이 눈에서 빛을 내며 백아아를 보았다. "막아 보아라." 나직한 음성. 그와 함께 단황의 손이 뻗어오며 손등으로 그녀의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한 수로 무공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백아아는 영문도 모른 채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옥수를 들어 다가오는 손등을 막았다. 그러나 분명히 막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단황의 손이 믿어지지 않는 각도로 꺾이더니 마치 고무줄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백아아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 백아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단황은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것으로 끝을 냈다. "어떠냐?" 단황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이것은……." 백아아의 얼굴이 변색되어 있었다. 그녀는 단황이 공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아무런 공력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주먹질이었다. 그런데도 그 공격이 그녀의 얼굴에 닿은 것이다. 물론 그녀가 약간 방심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시 정식으로 수비를 하라 하여도 과연 그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이 한 수의 이름은 나도 모른다." 단황이 말했다. "하지만 이 한 수로 나는 대번에 일류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모두가 은공의 덕분이지." "과연 소녀도 처음 보는 신묘한 초식입니다." 백아아는 단황의 흥취를 깨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은공을 만난 날이 바로 유월 열이레다." "네……." "하나, 단순히 유월 열이레가 은공을 만난 것 때문에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후에도 또 한 번 우연을 경험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정확하게 오 년 뒤에 나는 백마사 부근에 있는 작은 주점에서 십마를 만났는데 그날도 바로 유월 열이레였다." "아!"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 단황의 인생을 바꿔놓은 두 번의 사건이 같은 날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는 내가 왜 유월 열이레를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알겠느냐?" 한 사람이 어떤 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단황도 결국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백아아는 갑자기 단황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복청양은 떠났느냐?" 잠시 이어진 침묵이 거북했던지 단황이 불쑥 물었다. "오늘 아침에 떠난 줄로 압니다." "그를 그냥 보냈느냐? 만나고 싶지 않았느냐?" 백아아의 머리가 숙여졌다. "마주님의 명이 없으셨기에……." "네가 원했다면 만나게 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느냐?" "마주!" "후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나는 그런 걸 모르고 살아왔다만 너는 사랑을 하거라. 사랑은 좋은 거라니까." 단황의 심유한 시선이 먼 숲으로 향한다. 순간 그의 눈에서 파란 섬광이 번뜩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