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1 - 14편 (14/17)
"그래서 너는 복청양의 일에 매달리겠다?" "아저씨도 복청양을 아십니까?" "너 그거 진심으로 묻는 말이냐?" 무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는 만리추종이었다. 그에게는 무슨 일을 아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요즘 갑자기 복청양이라는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중이다. 그자는 얼마 전에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모용세가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소허도장을 죽였으며 어제는 산서지부에 들어가 소란을 피우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난 이해할 수가 없구나." 만리추종이 장경신을 똑바로 보았다. "그자는 비록 천노살성이라고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는 있지만 어제 산서지부에서 큰 부상을 입고 달아났다고 들었다. 지금 산서지부에서는 그자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지. 내 생각에는 머지않아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자를 만나고 싶다면 산서지부를 찾아가도 될 텐데 굳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전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어째서냐?" "그자는 그렇게 쉽게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근거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런 예감이 드는군요." "천하의 금룡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한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으냐?" "아저씨는 의심이 많아지셨군요." 장경신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감돌았다. 그가 미소를 짓자 주루가 갑자기 환해지는 것 같다. 만리추종이 그런 장경신을 물끄러미 보았다. "너 지금까지 몇이나 되는 여자를 울렸느냐?"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건 말이다, 만일 내가 너처럼 잘생겼다면 지금쯤 여자를 줄줄이 달고 다녔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아저씨도 참……." 뻔히 농담인 줄 알면서도 장경신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아직도 순진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 얘기는 일단 접어두고 복청양에 대해서 계속 따져보자. 네가 그자를 잡으려는 것은 혹시 소허도장 때문이 아니냐?" "아니라고는 하지 못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 다른 이유라는 게 바로 본론이겠지?" 뚝! 만리추종의 손에서 나무젓가락이 둘로 부러졌다. 그가 긴장할 때 흔히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네가 복청양에게 관심을 갖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냐?" "아저씨는 한 사람이 삼백이나 되는 사람을 몰살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용세가의 변을 말하는구나?" "그렇습니다." "글쎄다……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만 무공이 고강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소허도장이 맥없이 당한 것으로 보아 그 복청양이라는 자를 가볍게 볼 수는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전 아무래도 삼백이나 되는 사람이 달아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게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혼자라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자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자의 무공이 높다면 대항하지는 못하더라도 달아날 수는 있었을 텐데 모용세가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네 말은……." "조금만 더 들으십시오." 장경신이 만리추종의 말을 막았다. "어제 산서지부의 일은 이런 제 생각에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자는 이두옹 고염세와 싸웠는데 불과 십여 합도 버티지 못하고 당했다고 하더군요. 고염세가 누굽니까? 고염세의 무공이 약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는 결코 모용천우보다 상수가 아닙니다." "그래, 그 일은 나도 어딘지 이상하다." "전 복청양의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습니다. 복청양은 그저 표면에 드러난 인물이고, 그 뒤에 몇 배 무서운 인물이 숨어서 조종을 하고 있다는 거지요. 모용세가의 참변도 복청양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일은 아닙니다. 여러 인물들이 포위 공격을 해야만 그 많은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습니다." 만리추종이 나무젓가락을 잘게 부러뜨리고 있었다. 그는 말은 안했지만 장경신의 주장을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는 듯했다. "만일 제 생각이 맞다면 복청양은 산서지부의 추적을 쉽게 벗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배후 인물을 만나러 가겠지요." "음……." "아저씨의 도움이 필요한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럼 복청양을 잡을 게 아니라 그자의 뒤를 따라가 배후의 인물을 알아내야겠구나?" "그렇습니다." 장경신이 주루에 올라온 뒤 처음으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저는 불안합니다. 삼십 년 전 통천삼십삼마의 일이 있은 이후 천하는 지나치게 조용합니다. 평화의 기간이 너무 길어요. 물론 조용하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지금까지 마의 세력이 이토록 오래 잠을 자고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뭐라고 할까, 마치 폭풍전야 같은 침묵으로…… 차라리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지나가면 안심이 될 텐데, 그러질 않고 계속 조용하기만 하니 오히려 더욱 불안해지는 겁니다. 저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 일련의 사태가 장차 닥쳐올 대격변의 징조는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지나친 생각이다. 지나친 생각이야. 내가 보기에는 넌 너무 앞서가는 것 같다." "저도 이게 기우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안심을 하기 위해서라도 확인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말이다, 만일 네 생각이 틀려서 복청양이 산서지부의 추적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럼, 아저씨는 계속 술을 드실 수 있겠죠." 장경신이 탁자를 손으로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그도 약간은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장경신을 보낸 만리추종은 다시 열 병의 술을 더 주문했다. 그러나 채 한 병도 비우기 전에 그는 훌쩍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멀쩡한 입구를 두고……. * * * 덜덜덜덜 마차 바퀴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길이 험해서가 아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이 워낙 험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저러고도 마차 바퀴가 빠져 달아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복청양과 백아아는 서둘러 길옆으로 물러섰다. 길이 좁은 탓도 있지만 워낙 사납게 마차가 달려오니 일찌감치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내주려는 것이다.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간 마차가 불과 일 마장도 가기 전에 딱 멎었다. "네가 복청양이냐?" 불쑥 고개를 내밀고 뒤를 돌아보며 말을 던진 사람은 지독하게도 뚱뚱한 여자였다. 아니, 뚱뚱하다는 표현은 이 여자에게 걸맞지 않은 것 같다. 얼굴은 온통 살로 덮여 있어서 커다란 만두를 연상시켰고 그 속에 이목구비가 겨우 형식만 갖추어 자리잡고 있는데 그나마도 살에 묻혀 보이지를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단추구멍만한 눈이 보이지, 얼른 보면 그저 희멀건한 살덩어리가 목 위에 얹혀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저 지경이니 몸뚱이야 어떨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소만……." 복청양은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이 거명되자 바싹 긴장했다. 그러잖아도 산에서 밤을 지낼 수 없어 대로(大路)로 나서기는 했지만 언제 산서지부의 추적자들이 나타날지 몰라 내심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너는 백아아란 계집애지?" 이번에는 백아아를 향해 묻는다. "그래요." 백아아는 날카로운 눈으로 뚱보를 노려보며 복청양을 부축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타거라." 뚱보가 채찍 끝으로 마차 안을 가리켰다. "뭐라고요?" "타란 말이다. 같은 말을 번번이 두 번씩 되풀이하게 할 참이냐?" "우리가 왜 그 마차를 타야 하죠? 우리는 댁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거라. 이러고 쏘다니다간 산서지부의 개들한테 붙잡히기 십상이다. 지금 이 부근에는 그들이 개미떼처럼 깔려 있다는 걸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저 여자는 이미 우리를 알고 찾아왔는데 난처하게 됐구나.' 뚱보의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혼자라면 달아나는 게 상책이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몸을 빼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동이 불편한 복청양과 동행이고 그를 두고 혼자만 도망칠 수도 없는 처지이니 그럴 수도 없다. "만약 우리가 그 마차를 타지 않겠다면요?" "그럼 천상 강제로 태울 수밖에 없겠지. 너나 나나 서로 피곤해지는 일이지만 정 그게 소원이라면 말리지는 않겠다." 뚱보가 마차를 돌리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앞에서 보니 뚱보는 더욱 가관이었다. 이건 숫제 커다란 코끼리 한 마리가 올라타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저런 거대한 몸체를 싣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마차가 부서지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뚱보를 보는 백아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당신, 혹시……?" 그녀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만대모가 아닌가요?" "날 아는구나." 만대모는 고개를 끄덕인다고 하는 모양인데 워낙 목이 굵다 보니 몸 전체가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자, 이제 나를 알아보았으니 어쩔 셈이냐? 그냥 타겠느냐, 아니면 강제로 마차 안에 처박히겠느냐?" '저 여자가 정말로 만대모라면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백아아는 은연중에 돋우었던 전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칠대공적의 하나로 인육을 즐겨 먹는다는 만대모의 소문은 귀가 아프게 들었다. 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직접 만나게 될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대모라면 산서지부와 한패는 아니다.' 백아아는 순간적으로 결단을 내렸다. "좋아요. 타겠어요." "잘 생각했다." 만대모가 하품을 하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녀 딴에는 활짝 웃고 있는 모양이다. 백아아는 복청양을 돌아보았다. "복공자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복청양의 반응이 의외로 담담했다. 백아아가 이를 악물더니 복청양을 부축하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은 두 사람이 앉기에 비좁지 않았다. 한쪽에 먹을 것과 물병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는 검은 휘장이 쳐져 있어서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됐느냐? 그럼 간다!" 마차가 출발했다. 만대모의 마차 모는 솜씨는 정말로 난장판이었다. 아마 그녀보다 험하게 마차를 모는 사람은 천하에 다시없을 것이다. 마차가 수도 없이 널뛰기를 하자 복청양이 신음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저기 부딪치는 통에 상처의 고통이 더해진 모양이었다. 백아아가 보다못해 밖에 대고 소리쳤다. "이봐요! 좀 제대로 몰 수 없어요?" "난 마차를 모는 게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불편하더라도 참아라." 웃음기어린 만대모의 음성이 즉각 날아왔다. 마차는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욱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별수없군." 복청양이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나저러나 난데없이 만대모가 나타났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에요." "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소." 복청양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내 앞에는 언제나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었소. 마치 누군가가 나의 움직임을 훤히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직접 모습을 나타낸 건 이번이 처음이오." "그럼 만대모가 지금까지 이 모든 일을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라는 말인가요?" "아니라면 또 누군가가 있겠지. 아무튼 나는 지금 약간 흥분하고 있소. 지금까지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끌려왔지만, 이제부터는 뭔가 내막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나를 들뜨게 하고 있소." "전 잘 모르겠군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오. 초조하게 생각할 것 없소." 복청양은 팔짱을 끼고 두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마차의 흔들림에 거역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끌려가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차를 세워라!" 밖에서 요란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만대모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처절한 비명소리가 뒤를 이었다. 비명은 연속하여 세 번을 울려퍼지더니 잠잠해졌다. "이런, 너희들의 고기맛을 볼 여가가 없어서 유감이로구나." 만대모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는 중에도 마차는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셋이에요." 잠자코 있던 백아아가 말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네 번째다. 그 동안 만대모의 손에 죽은 자는 열도 넘을 것이다. "저 여자는 정말로 대단하오." 복청양이 감탄했다. 매번 산서지부의 추적자들과 격전을 치르면서도 한 번도 마차를 세우지 않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저런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만대모가 칠대공적의 하나로 불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만일 만대모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뒤에 더욱 강한 인물이 버티고 있다는 뜻인데…… 당금 무림에 만대모를 수하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소?" "저도 사실은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백아아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요. 칠대공적이 그 동안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현 무림의 사도(邪道)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칠대공적의 하나인 만대모를 수하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존재할 리가 없어요." "그럼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을 만나러 가는 셈이군." 복청양이 유쾌하게 웃었다. "하여간 재미있는 일이오. 난 산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관심의 대상이 될 줄은 몰랐소." "복공자는 참으로 태평하군요." "태평하지 않으면 어쩌겠소." 복청양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휘장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산에서 무서운 폭풍이 덮쳐오는 걸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오. 산에 몰아치는 폭풍은 정말로 무섭지. 그럴 때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소. 사람이 아무리 갖은 재간을 부려도 폭풍은 오게 되어 있소. 그런 때는 그저 묵묵히 참으며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오." 마차는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사흘이 지났다. 만대모는 낮에는 쉬고 밤에만 마차를 달렸다. 그 동안 그녀는 간간이 휘장을 열어 먹을 것을 주고 용변을 보게 하였으나 마차에서 내리지는 못하게 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만대모가 곧장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아니면 종적을 감추려고 공연히 먼길로 빙 돌아가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신기한 것은 만대모는 한 번도 사람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언제나 먹을 것이 있었고 신선한 물이 공급되었다. 백아아는 중간 중간에 누군가가 식량을 공급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처음 하루는 산서지부의 추적자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도 다음 날은 쫓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마차가 산서지부의 관할을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 * * 용정차(龍井茶) 향기가 그윽하다. 저녁 햇살이 비껴드는 창가에 앉은 복청양은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얀 도기(陶器)로 된 찻잔은 여인의 피부처럼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게 해주었다. "저기……." 옆에서 쟁반을 품에 안은 어린 시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맛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다. 매우 좋다." 시비를 돌아보지도 않고 복청양이 말을 뱉었다. 그는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벌들이 엉켜있는 반원(半圓)형의 화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류 화원(花員)의 솜씨인 듯 화원(花園)은 일곱 가지 색의 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군데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피어 있다. 하지만 그 질서정연함이 어딘지 자연의 맛을 감소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차를 마시지 않고 만지작거리고만 있느냐고 묻는 것이리라. 그제야 시비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복청양의 얼굴에는 약간의 성가셔 하는 기색이 나타나 있었다. "그만 나가보아라." "예." 시비가 두려운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숙이더니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알 길이 없구나.' 복청양은 목구멍 어름에 커다란 가시 하나가 걸려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갑갑하고 짜증스럽기조차 했다. 벌써 열흘.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누구의 집인지도 몰랐다. 만대모에 의해 반강제로 끌려온 이후 복청양은 내내 이 방안에 갇히다시피 하여 지내고 있었다. 물론 그는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며 이 집 사람들이 대접에 소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산속에서만 지내온 그로서는 황송하다 싶을 정도로 각별한 환대를 받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의원이 와서 상처를 보살펴 주고 날마다 영약을 갈아대는 덕분에 산서지부에서 입은 부상도 거의 완쾌된 상태였다. 게다가 의복이나 음식은 도를 넘을 정도였고 그가 명만 내리면 무슨 일이라도 할 시비가 셋이나 붙어 있었다. 더구나 그는 마음만 먹으면 이 집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오직 한 군데, 안채만 제외하고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의 갑갑함을 더해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은 백아아를 만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만대모는 백아아에게는 다른 거처를 마련했다면서 데려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그녀에 대해 물어도 시비들은 모른다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사실 그녀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린 시비들이 알고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으며 오직 그의 시중만 들라는 명을 받은 게 분명했다. 주인은 모습도 나타내지 않고 무한정 이어지는 긴 침묵. 그것이 복청양을 갑갑하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무작정 시간을 죽일 수는 없다.' 복청양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 햇살을 바라보며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오늘밤 백소저를 찾아봐야겠다. 환대를 받는 입장으로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아마도 백소저는 저 안채에 있을 것이니 들어가 봐야겠다.' 하지만 그러한 복청양의 결심을 알아차렸는지 그날 밤 주인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복청양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중년여인의 안내를 받아 구불구불 이어진 긴 복도를 걷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여인의 뒤를 따라가며 복청양은 이 집 주인에 대한 깊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규모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면 상당한 부(富)의 소유자일 것이다. 또한 만대모를 수하로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복청양의 생각은 언제나 거기서 그치고 더 나아가지를 않는다. "여깁니다." 중년여인이 큰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방문이 스르르 양쪽으로 열렸다. 방문 뒤에는 두 명의 어린 시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복청양이 안으로 들어가자 고개를 숙이더니 일어나 나가 버렸다. 안에 다시 문이 있었다. "어서……." 중년여인의 권유에 복청양은 주저하지 않고 그 문을 열었다. 넓은 방이었다. 거대한 자단목으로 된 기둥이 네 구석에 버티고 있었고, 바닥에는 호피(虎皮)로 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사방에 여덟 개의 촛불이 켜져 있어서 방안은 어둡지 않았다. 안쪽에는 산수화가 그려진 커다란 병풍이 둘러져 있었고, 그 앞에 원형의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는 비어있는 것이 그가 앉을 자리인 듯 싶었다.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복청양이 의아하여 돌아보자 여인은 아무 말도 말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그냥 나가버렸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병풍이 스르르 걷혔다. 병풍 뒤에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그 앞에 왜소한 체격의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어서 앉으시게나." 노인은 어리둥절해 하는 복청양에게 자리를 권하더니 자기가 먼저 의자에 앉았다. 의자의 높이가 높아서 노인이 앉자, 다리가 허공에 대롱대롱 들렸다. 매우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지만 노인은 그런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인은 화려한 화복(華服)을 걸치고 있었으며 손에는 작은 곰방대를 들고 있었다. 곰방대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담배가 담겨있는 모양이었다. "노부가 이 집의 주인일세. 성은 손이라고 하지." "처음 뵙습니다." 복청양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읍했다. "그런 예의는 번거롭군. 노부는 번거로운 걸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되도록 아랫것들한테도 예의를 따지지 않지. 덕분에 조금 건방져지는 감은 있지만 그런 게 좋은 거 아닌가?" 손노인(孫老人)은 기분이 매우 좋은지 연신 곰방대를 뻑뻑 빨았다. 복청양은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손노인은 어느 모로 보나 무공을 익힌 사람 같지 않았다. 그저 작은 고을에서 큰소리를 치며 사는 촌부(村富)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인물이 만대모의 주인이라니……. "자, 자, 어서 앉으라니까. 노부의 나이가 얼만데 자네를 올려다보며 얘기해야 하겠는가?" "그럼……." 복청양이 자리에 앉자 다시 문이 열리며 시비가 차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 쟁반에는 찻잔이 하나만 놓여 있었다. "노부는 차를 좋아하지 않지." 손노인이 온화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복청양은 찻잔을 만지작거릴 뿐 마시지는 않고 시비가 나가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