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성인소설) 하얀 짬뽕 - 31편

2026-09-12 09:55:40 조회 184


“형수를 본지는 오래됐습니다. 제 의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섹스에 대한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시작해서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당시엔 형수를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았는데 ...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고 부터는 참을 수 있게 되더군요...”

“... ...”

“실망했나요?”

“아...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태복씨는 저와 비슷하게 그런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정말로 그랬었습니다. 발기도 안 됐었는데...갑자기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저도 왜 제가 변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묻지도 않은 얘기를 주인여자에게 시시콜콜 다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에게는 내 모든 것을 얘기해주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희에 대해 궁금하죠?...”

실은 아까부터 초희의 일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여자가 먼저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나만 이 여자에게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주인여자는 대화 상대가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고 싶은 것인가?


“...정말로 초희의 소설을 보면서 질투를 느끼셨나요?...”

“... ...”

상당히 예민한 질문이었지만 내 궁금증이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소설은 신동이 없는 분야였다. 다른 분야에서는 십대 때 일찍 그 재주가 만개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소설이라는 분야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가들 중엔 참혹할 정도의 처절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 많았고, 또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게 보일지라도 정신 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사람들이 많았다. 헤밍웨이만 해도 자신의 폭력성을 주체하지 못 해 스페인 내전에까지 참전할 정도였으니 소설이란 장르는 어린 나이에 쉽게 담아낼 수 없는 크기라고 할 수 있었다.


“...태복씨도 글을 쓰고 있죠?...”

사실이었다. 정확하게 내가 중학교 때 가출했다가 아버지에게 끌려 들어와 엄마에게 뺨을 맞은 후부터 글을 썼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었고 저절로 시작했다. 당시 내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일탈의 장소였을 것이었다.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다행스럽게도 글을 쓰면서 태생적으로 나의 내면에 존재하던 폭력성이 글 속에 녹아들었고, 가출을 결정할 때와 같은 휘발성의 감정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그런 감정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고, 장롱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됐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죠...글을 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직업 외에 다른 것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하죠. 그것이 음악이든 낚시든 운동이든 사람들은 다른 것을 함께 병행해야 안정을 찾을 수 있어요.”

“...저희 과 선배 중에 김민기란 분이 있는데...오히려 음악가로 명성을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맞아요. 그 분 미술을 전공했죠. 오히려 음대 친구였던 조영남이 화가가 됐고...하하하! 재밌네요.”

주인여자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안정된 것이 그림을 시작해서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 혼자만 보는 글이었기 때문에 문장에 대해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오타에 대해 골치 아파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쓴 기록들이 모여서 어느새 일반 공책으로 180권에 달하고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글쓰기를 통해 내 감정들을 객관화 시킨 덕분이었다.


“...제가 다시 글을 쓰지 못했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어요...”

“... ...”

“십대, 이십대, 삼십대까지 전 한 번도 안정된 생활을 해 본적이 없었죠...아파트란 소설은 어쩌면 동생의 비극이 아니더라도 나왔을 소설이었어요. 부모 없이 어린 동생과 살면서 받았던 상처들...그리고 성장하면서 느꼈던 이해할 수 없는 사회구조들...은사님은 그런 감정들 모두를 삭여내야 한다고 했었는데...동생의 죽음을 마주하자 전 은사님을 증오하기 시작했어요...”


아파트란 소설은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었지만 상당한 재미를 주는 소설이었다. 시니컬하고 드라이한 문체로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써내려간 11권의 소설 속엔 사람에 대한 증오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보통의 작가들은 글 말미에 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화해를 시도하기 마련이었지만 주인여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어떠한 화해의 시도도 하지 않고 끝을 맺고 있었는데 왜 그런 결말이 나왔는지 이제야 짐작이 갔다.

아무튼 그런 결말로 인해 아직까지도 독자들은 소설이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고 있었고 다음 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없는 불친절한 소설가...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소설...출판사와 주인여자가 철저하게 마케팅을 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요소는 아파트란 소설 신드롬의 핵심이었다.


“...초희는 ...학송씨 친딸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엄마랑 그렇게 닮았는데...”

“피를 섞지 않아도 닮은 사람은 너무나 많죠...저도 너무 놀랐으니까요. 학송씨는 애를 좋아하는데 초희 엄마는 쌍둥이를 낳고는 더 이상 애를 낳지 못하니까 초희를 입양한 모양이에요. 아마 학송씨는 지금도 하나 더 입양하자고 조르고 있던데...”

[그럼 그때 아침을 먹으면서 학송이 늦둥이를 보자고 한 것은... 입양을 하자는 것이었나?]

광호의 새 가게 오픈식에 참석하고 돌아올 때 초희엄마는 나와 초희가 잘 맞을 것 같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초희엄마는 내가 입양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가? 학송과 초희엄마가 나에 대한 일을 알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초희엄마는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냥 한 얘기인가?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것저것 겹쳐지면서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학송부부도 그렇고 쌍둥이 언니 오빠도 그렇고...누구하나 초희에게 다른 피라고 부담을 준적은 없어요. 뭐 제가 모르는 부분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부분은 그렇죠.”

나도 주인여자의 생각이 옳다고 느꼈다. 적어도 내가 봤던 학송 가족들의 모습은 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초희가 14살 때였나...가출을 했었어요. 모두 로미 녀석 때문이라고 했지만 제가 알기론 초희 때문에 로미가 가출한 거죠. 몰라서들 그렇지 로미는 행동력이 없는 단순한 애에요. 로미가 망나니처럼 굴게 된 건 바람둥이 아빠의 대한 영향도 있지만 그것을 부추긴 건 초희였죠. 걔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대단히 복잡한 애에요. 여리면서도 강하고 단단하면서도 무른 ...참...얘기 하면서도 복잡하네요...”

초희는 나와 비슷한 나이에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고 있었다. 공감은 됐지만 그것이 대단한 글을 쓸 정도의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 나이 땐 누구나 홍역처럼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라에 가보면 필명 ‘변기’를 찾아보세요. 그럼 초희의 글을 볼 수 있고 녀석의 또 다른 면을 알 수 있을 거에요.”

“흐음...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 투성이네요. 녀석이 야설을 쓰나요?”

“놀라운 일이지만 섹스신도 제법 잘 쓰더군요. 뭐 말로 설명할 수는 없고 직접 보면 알거에요. 그러고 보니 태복씨는 야설을 잘 보지 않았군요? 그렇게 유명한 작가를 모르다니...”

“녀석을 가르쳐 보고 싶지는 않았나요? 어떤 식으로든 ...”

차의 속력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내 질문에 주인여자가 반응하는 것으로 보아 초희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했던 것 같았다.


“...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은 절대로 가르치는 직업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제가 그렇죠. 전 항상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어요. 제가 원하지 않아도 말이죠. 동생이 제부를 데리고 왔을 때 전 결혼을 반대했었어요. 제부에게 자기 인생 모든 것을 거는 동생이 한심하기도 했고...”

“...그만 얘기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하고 싶어요. 태복씨에겐 모든 걸 다 말해버리고 싶어요...”

“... ...”

“남편도 그렇지만 제부는 건설업을 할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를 보고 10초 만에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망가질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제부는 낭만적인 사람이었죠. 차라리 가난뱅이 화가였거나 음악인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반대하진 않았을 거에요. 동생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제부는 동생에게 ...정말로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했어요. 그런 제부가 죽었으니 ...”

“... ...”

“...초희를 가리고 있는 안개를 치워주고 싶긴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녀석은 나와 비슷한 십대를 보내고 있었고...분명...제가 은사님께 그랬던 것처럼 제게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죠...”

“... ...”

“...겁이 났어요...후후...이젠 녀석이 안쓰럽게 생각되지만...저도 변한 모양이에요. 저도 은사님처럼 그렇게 조금...아주 조금 삶을 알게 된 걸 까요?”

“...지구에서 겨우 28년 밖에 살지 못한 제게 인생에 대해 물어보시면 어쩝니까?”

“하하하! 미안해요. 이상하죠? 태복씨는 전혀 28년 산 남자로 보이지가 않아요...애 늙은이...후후...!”

“...초희 아버님이나 초희 어머님은 ...초희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신 모양입니다. 예를 들면 초희가 성적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입니다.”

난 되는대로 넘겨짚어서 말을 했다.


“아무리 부모여도 자식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죠. 더군다나 녀석처럼 벽속에 꽁꽁 숨어 있다면 말이에요. 로미 말로는 초희가 7개 국어를 한다더군요...그런 애가 성적 때문에 얼마 안 남은 기간에 갑자기 미대에 간다고 했을 때 전 더욱 ...걔가 무서웠어요. 어떤 인간이든 빈틈이 있기 마련인데 ...”

야설 얘기를 하다가 이상한 쪽으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초희의 전혀 다른 면을 마주한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로인해 침묵이 흘렀다. 주인여자나 나나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답답해하거나 위축되진 않았다. 나도 그렇지만 주인여자도 초희 문제를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래서 이놈의 직업을 싫어했다. 온전히 그림만 가르치는 것도 좆같은 일인데 그 외의 일들까지 신경 써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틈...빈 틈...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했던 아버지나 엄마도 내게서 틈을 찾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오래전 얘기도 아님에도 난 내 과거를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숨이 막혔던 것만 기억이 날 뿐 나로 인해 힘들어 했던 아버지와 엄마의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초희를 생각하니 엄마가 느꼈을 막막함과 아버지가 느꼈을 답답함이 내게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뭔가는 해주고 싶은데...해줘야겠다는 마음은 간절한데 1미터 정도의 장막을 치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형님은 제 과거를 알고 있나요?”

“우리...그 이요?”

“...예...”

“갑자기 왜 그런 걸 묻죠? ...그이가 태복씨 과거에 대해 알 수가 없잖아요?”


주인여자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 전부터 초희엄마의 말이 신경 쓰여서 물은 것이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여자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른 채 관심을 갖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주인남자도 나에 모르고 있을까? 광호와의 일로 주인남자와 가까워지면서 겪은 바로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내가 한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을 노리고 있는 여자와 연결 된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아닌가? 공무원으로서의 연륜이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연기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좋을 것이었지만 이상하게 그것이 신경 쓰였다. 주인남자와 연결된 사람들은 이 지역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남자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상황은 복잡해 질 수밖엔 없었다.

하긴...그들이 나에 대해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를 통해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괜한 생각으로 에너지만 소진시키고 말았다. 이제 주인여자의 문제는 정리가 됐고 초희가 문제였다. 모르면 몰라도 내가 녀석을 가르치고 있는 상태에서 입시에 방해될 소지가 충분할 만한 얘기를 알게 된 이상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섣부르게 건드리면 벌집을 건드린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시 침묵이 흐르다가 주인여자는 휴게소가 보이자 차를 그쪽으로 몰아갔다. 차를 세운 그녀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내렸고 나도 따라 내려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태양 빛은 따가웠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쓰레기통에 버릴 때 쯤 주인여자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한 없이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커피를 건네는 주인여자를 보자 머리가 맑아졌다.


“그거 아세요? 인영씨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거요?”

“태복씨도 그래요...전과는 다르게...”

경숙이 말한 내 몸 앞에 있던 것이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비과학적인 얘기는 싫어했지만 기라는 것은 어쩌면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다 마신 뒤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남의 차고 또 보험도 안 됐기 때문에 난 시속 60키로 이상의 속력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운전을 해야 했지만 짜증이 나진 않았다. 괜찮다고 하던 주인여자는 피곤했는지 조수석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잠이 들고 말았다. 너무나 편하게 잠이 든 주인여자의 모습은 아름답고 섹시했지만 성욕이 올라오진 않았다.

몸을 섞은 사이였지만 주인여자에게서 난 모성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여자에겐 어떤 얘기든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인가? 오랜 동안 잊고 있었던 친모의 생각을 떠올렸지만 역시나 내 기억 속엔 낯선 존재였다. 친모에 대한 생각으로 주인여자에 대한 감정이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금방 정리 할 수 있었다. 주인여자가 변한 것만큼 나도 변했다.


다행스럽게도 차가 막히지 않아서 원룸에 도착했을 때는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고생하셨어요... 전 이제 출근을 해야 합니다.”

“원장님께 말씀드리면 오늘은 쉬어도 될 텐데 고지식해요, 후후...태복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여러 가지가 포함된 주인여자의 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각자의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태복씨?...”

주인여자가 불러서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살아있는 거...맞죠?...”

“네...과분할 정도로요...”

주인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내 원룸으로 들어왔다. 약간 피곤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볍게 샤워를 한 뒤 난 내 차를 끌고 학원으로 달려갔다.




“어머, 아빠샘!~”

희정, 경화, 유림이 나를 보고는 합창하듯 외쳤다. 나는 세 여자에게 미소를 보였고, 미리 와 있던 학생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못 오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오셨어요?”

유림이 내게 말했다. 내가 학원에 나오지 못 한다니 무슨 말이지? 원장에겐 아버지의 죽음을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연락도 안 했고 그래서 이렇게 나온 것인데 이상했다.


“제가 못 온다고요?...누가요?”

“이상하다...원장님이 그러시던데...”

소란스런 상황에서 경숙이 원장실에서 나왔다. 경숙은 나를 보더니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그녀가 놀라는 것이 전에 일 때문인지 아니면 유림의 얘기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경숙은 전과 똑 같이 나를 대했고 나 자신이 얄밉도록 나도 늘 하던 대로 경숙에게 인사를 했다.

경숙은 나를 지나쳐 유림에게로 다가가 뭔가 얘기를 주고받았다. 은은한 향수 냄새와 함께 경숙의 몸이 내 눈으로 가득 들어왔다. 그러자 경화와 유림, 희정의 몸까지 시야에 잡히면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성욕이 끌어 올라오고 말았다.

이곳에서 난 경숙과 짐승처럼 섹스를 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지금 상황 또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경숙도 의식하고 있을 까? 그때를 떠 올리며 흥분을 하고 있을까?

유림과 얘기하는 것을 보니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경숙이 유림과 희정, 경화를 대하는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하던 말투는 사라지고 차갑게 느껴졌다. 경숙이 유림에게 뭔가를 지시하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무장실로 들어갔다.


“어휴!~ 요즘 저 언니 왜 저래? 무슨 일 있는 거야?”

“그러게...무서워서 학원에 나오겠니? 흐음...”


유림과 경화가 울상이 되어서 말했고, 희정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학원에 안 나오는 사이 무슨 일인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내가 말 한 것 때문인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와 새로운 관계가 된 사람들도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 것이고 어떻게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변해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노크를 하고 원장실로 들어가니 정 원장과 유정이 나를 보고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내 표정을 밝게 바꾸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와아!~ 장 선생, 너무 오랜만이다 그지?”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이 여자가 서방님보다 다른 남자를 더 반가워하고 말이야...이거 소외감 느끼는데...”

유정과 정 원장은 늘 그렇듯이 내게 하던 그대로의 반응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지금은 확인할 수 없었다. 유정은 항상 그렇듯이 내게 금방 내린 원두커피를 권했다. 나는 커피 잔을 받아들고 정 원장 앞에 앉았고, 유정은 내 옆 에 앉았다.


“휴가는 잘 보내셨어요?”

“후우!~ 파리 시내를 미친년처럼 돌아다녔지 뭐, 하하!”

“야야!~ 쏘셜 포지션이 있지...미친년이 뭐냐, 미친년이?”

“어라? 포지션 따지는 사람이 마누라에게 야야는 뭐냐?”

정 원장과 유정이 내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3년 동안 내게 보였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다르게 다가왔다. 사람들을 분석하는 정말이지 진저리나도록 싫어하는 내 습관이 또 발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경숙 일행에게 내가 오늘 나오지 못 할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고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 사실을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알았을까? 주인여자가 연락을 했다면 집에 도착했을 때 나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초희엄마도 내가 고아로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정 원장과 유정은 내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과거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은 누굴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을까?

결과적으로 초희엄마는 학송과 연결되니 아마 가장 나중에 알았다고 볼 수 있었다. 정 원장과 유정은 서울 본원의 길 원장과 연결되었다. 길 원장은 도대체 내 과거를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오직 천 선생 화실에서만 그림을 준비해서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길 원장은 본적도 없었다. 내가 길 원장 학원에 들어가게 된 경위는 4수를 하고 입학했던 효정이 누나의 소개 덕분이었다.

모두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알게 된 것 뿐이었지만 이들은 분명 내 과거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길 원장은 엄마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밤을 세고 왔더니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갔으면 합니다.”

내 말에 정 원장과 유정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정이나 정 원장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까지 직접적으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었다.


“그, 그래? 그럼 들어가서 좀 쉬어야지...많이 피곤해 보인다.”

정 원장이 말하자 유정도 그의 말을 거들었다. 나는 두 사람을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엄마였기 때문이었다. 유정과 정 원장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경숙은 사무장실에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유림, 경화, 희정이 굳은 얼굴로 일을 보고 있었다. 학생들은 수업 시작이 임박하자 서둘러서 자기 반으로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