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23편 (23/62)
부채를 무기로 사용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정도의 초식을 만들어낸 자라면 보통사람이 아닐 터. 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고 우선은 서로의 무기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지?” “두말하면 입 아프죠. 전반부의 3개 초식은 ‘강(强)’의 묘리를 바탕으로 파생된 것입니다. 중반부 3개 초식은 뭐에서 나왔을지 감상해 보십시오. 헤헤, 갑니다.” 호기롭게 외친 비담이 구인철을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비담의 동작과 속도는 이전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느려졌으며, 부채 역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둘려졌다. 마치 수면 위에 동동 떠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부드러움의 묘리를 가득 담고 있는 제4초식 ‘연상용부(淵上蓉浮)’였다. 외관상 앞서 강하게만 들어오던 부채의 공격과 달리 부드럽고 유약해보일 정도로 천천히 휘둘러지는 부채의 모습에 구인철은 더욱 신중하게 맞섰다. 무의 길을 걷는 자로써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던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렇듯 침착한 대처가 가능했던 것이다. 비담의 부채는 구인철이 전개한 천마심검 제2초식 ‘광폭참(狂暴斬)’의 사나운 파도 위를 타고 조금씩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광폭참’의 힘에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검기에 의존해 둥둥 떠오는 비담의 부채를 보며 구인철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구인철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한 기분과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하하하, 서희의 일만 아니었다면 정말 좋은 형, 동생 사이가 될 수도 있었는데 아쉽구나. 이토록 호쾌하게 어우러져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자, 이번엔 내 차례다.” “하하, 늘 호적수는 있는 법이지요. 저는 처음부터 형님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얼마든지 들어오십시오.” 살벌하기 그지없는 결투였으나 그 싸움의 한복판에서 둘은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보였다. 구인철은 기다렸다는 듯 제3초식 ‘난겁홍염(亂劫紅焰)’을 펼쳤고, 검신이 붉게 달아오르며 줄기줄기 뜨거운 화염을 뿜어내었다. 빨갛게 타오르는 화염을 피하기 위해 비담은 훌쩍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불길이 계속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비담은 제3초식을 강하게 전개하여 불길을 반으로 가름과 동시에 5,6초식을 연달아 펼쳤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던 비담과 구인철의 결투는 결국 반시진이 지나서야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선법과 검법의 초식이 각각 두 개씩 남은 상황에서 서로 선을 넘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를 본 것이다. 작정하고 목숨을 취하려 덤빈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피를 봐야 끝날 상황이었기에 마지막 비장의 수는 아껴두기로 한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둘이 싸워 누군가 크게 다친다면 나중에 서희를 볼 면목이 없다는 이유가 둘의 합의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비담이 꾸벅 인사를 하였다. 구인철 역시 한바탕 땀을 쏟아서인지 비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밝게 웃어주었다. 저 정도 실력과 배포를 지닌 사내라면 결코 자신의 여동생에게 그런 몹쓸 짓만 하고 떠났을 리가 없다. 뭔가 사정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엔 누구나 무공을 배우지만 자신과 같은 현경의 경지에 들기 위해선 무공을 뛰어 넘어 무도(武道)의 길을 걸어야만 가능했다. 무도의 길을 걷기 위해선 그만한 마음의 그릇이 갖춰져야만 가능한 법. 그런 그릇을 지닌 자가 탐욕에 찌들어 동생을 겁탈했을 리 없다 철썩 같이 믿는 구인철이었다. ‘나는 십 분지 팔의 실력만 사용했다. 천마 할아버님의 무공을 팔성이나 쓰고서야 저놈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 만약 저놈이 자신의 능력 중 둘 이상을 숨긴 채 나와 겨루었다면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것이고, 녀석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밑천을 모두 퍼부은 것이라면 내 실력이 더 월등히 앞선다. 하지만 젊다는 사실을 감안 했을 때 보통의 수양과 수련을 쌓은 게 아닐 터. 도대체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이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났을까. 그리고 서희와는 어찌 인연이 닿았던 것일까. 후후, 정말 비밀도 많고 구미가 당기는 녀석이야. 뭐 실력이나 세부적인 사항들은 같이 지내다보면 차차 밝혀질 것이니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고, 그와는 별개로 손윗사람으로써 당연히 기선제압은 해주어야겠지.’ 속으론 연신 감탄성을 발하면서도 그런 속내와는 달리 구인철은 뚱한 표정으로 비담을 대했다. “자네가 나와 대등하게 싸웠다고 해서 서희의 배필로 인정한 것은 아니니 아직 감격하기엔 이르네. 그리고 사실 서희가 눈물 질질 짜는 꼴을 볼 수 없어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니 너무 의기양양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에게 자네의 현재 상태는 딱 ‘계륵(鷄肋)’이니 알아서 처신 잘하게. 버리거나 남 주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덥석 먹자니 왠지 찜찜하고. 그래서 많이 미진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앞으로 자네와 함께 다니며 더 지켜보기로 결정을 내렸네. 그러니 실망시키지 말고 최선을 다해 증명하고 채우도록 노력하게나.” “예? 저를 따라 오시겠다고요?” 함께 다닌다는 말에 비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바탕 몸으로 진하게 대화를 나누면 적당히 인정해주고 물러갈 것이라 여겼는데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비담은 어떻게 해서라도 처갓집의 입김을 피하기 위해 입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왜? 무슨 불만 있는가?” “불만은 없습니다. 저도 형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 좋지요. 하지만 스무 명이나 되는 떨거지들 죄다 끌고 오시면 저도 번잡해서 싫습니다. 그리고 함께 다니는 빙소저도 시커먼 사내들이 우글거리면 불편할테고.” “떨거지들? 감히 믿음직스러운 내 부하들을 보고 떨거지라 했는가?” “다 합쳐도 모시는 대장 하나 감당 못하는 부하들이니 떨거지고 짐이지요.” “그럼 자네는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은가?” “저렇게 큰 소리로 부스럭거리는데 어찌 신경이 안 쓰입니까? 최소한 사생활 보호는 해주셔야죠.” 비담의 손가락이 맹렬히 구릉 옆을 가리켰다. 둘의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은신해 있던 흑천대 막내의 얼굴이 그 순간 똥빛으로 물들었다. 계급이 깡패라는 옛말처럼 닦달하는 선배들의 등쌀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둘의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막내는 현란하게 싸우던 둘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또렷이 떠올라 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막내의 판단 기준에 의거 저기 서있는 둘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구인철은 비담의 노림수가 눈에 훤했기에 피식 웃고 말았다. “후후, 주군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앞으로 주의를 주겠네. 그러면 되겠지? 그리고 자네도 무조건 내 부하들을 귀찮게 여기지만 말고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뭘 말입니까?” “자네의 여정이 어찌 되는지 알 수는 없으나 보아하니 무공을 전혀 모르는 평범한 소저던데 한 사람이 지키는 것보다 스무 명이 항상 지키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보통 사이도 아니라면서 왜 굳이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으려 하는가?” “그, 그거야...그리고 보통 사이가 아니란 말은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냥 인연이 닿아 동행한다고만 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형님.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아닌 것이지 정색하기는. 알았네, 더 이상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겠네. 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겠네.” “에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두리뭉실하게 왜 그러십니까? 제가 언제 승낙을 하였다고...?” “아, 방금 자네가 저 여인과 인연이 닿아 동행하는 거라며? 그럼 자네와 나의 인연도 보통이 아니니 당연히 동행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말이 틀렸나?” “우글우글 냄새나는 남자들과 연약한 한 명의 여자를 비교하시면 곤란하지요.” “그래서 더더욱 동행을 하겠다는 것이야. 혹시 서희 몰래 딴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감시를 하겠다는데 뭔 말이 그리도 많은가? 확, 그냥 서희한테 가서 모두 까발릴까? 정말 그러길 바란다면 원대로 해주지.” 매몰차게 등을 돌리는 구인철을 바라보며 비담은 자신에게 닥친 난관을 그냥 겸허히 수용하기로 하였다. ‘그래, 형님 말에도 일리는 있어. 이참에 함께 다니며 내가 서희를 두고 절대 딴 짓을 안 한다는 것도 직접 증명하고, 앞으로 형님으로 모셔야할 분이니 친목을 도모하는 것도 내게는 좋은 일이지. 그리고 낙양까지 가는 길에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머리수가 많으면 더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알겠습니다. 형님 뜻대로 저와 함께 가시지요. 대신 형님 부하들은 알아서 잘 단속시켜 주세요. 여차하여 정신교육 시키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잘 생각했네. 앞으로 잘 지내자고.” 구인철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 비담의 손을 덥석 잡은 다음 맹렬히 흔들었다. 그리고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입가에 맺힌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후후, 봉은 녀석이 아니라 서희가 잡았던 거였구나. 이 녀석이라면 완고하신 아버지께서도 서희의 배필로 무조건 승낙하실 거야.’ 화끈한 결투가 끝나고 다시 모닥불 앞에 앉은 인철이 비담의 신상명세와 살아온 내력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비담은 이제 한식구나 다름없는 형님이었기에 모든 사실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55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고아가 된 일부터 어떻게 귀문에 들어가 강신귀공의 수련을 했는지, 그리고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은 원영신이 바뀐 일화와 그걸 바탕으로 도색성 길천과 인연을 맺고 선법과 색공을 익힌 사실에 최근 북해빙궁에서 겪었던 일까지 그렇게 비담의 일대기를 담은 한편의 대서사시는 완성이 되었다. 정말 다채로운 이야기가 한데 섞여 있어서 이야기를 듣는 내내 구인철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론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하니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허, 정말 굴곡진 삶을 살았구먼. 그나저나 만약 대법이 제대로 성공했다면 천마 할아버님의 진전을 이어받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였겠어.” “대법이 끝났을 때, 정말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이 절절히 와 닿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왜 낙양으로 다시 돌아가는가?” “낙양에 있는 취선루에 볼 일이 있어서요.” “취선루? 자네가 도박을 하고, 기녀랑 밤새 뒹굴고, 술 먹고 시봉세 하나를 손봐준 그곳?” “네, 그곳이요.” “문 닫았던데. 내 부하들이 만류하지만 않았어도 그놈의 문짝 시원하게 두 동강 내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럼 이리 고생하며 사막을 뒤지지도 않았을 테고.” “헉! 정말 문을 닫았어요?” “내가 왜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가도 소용없네. 자네가 낙양을 떠나던 그날, 문을 닫았으니까.” “흐음. 형님 말을 못 믿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구요. 제가 그곳의 루주랑 아는 사이라 그냥 넘길 수 없어서 그러니 직접 찾아가 확인을 해봐야 되겠어요.” “그건 자네가 알아서하게. 나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열심히 먹을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취선루가 폐쇄되었다는 소식에 비담의 신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비담은 자신을 물심양면 지원해준 흑막주 이성보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며 꺼져가는 모닥불에 남은 장작을 집어 던졌다. 잠에서 깬 빙루는 새로 합류한 의문의 사내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12년 동안 빙궁에서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늘 보아오던 여인들이 아닌 건장한 사내를 보게 되자 신기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평생 무의 길만을 고집스레 걸어온 인철에게 빙루의 집요한 시선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고, 그래서 차마 마주보지 못한 채 먼 곳을 응시하거나 비담에게 시답지 않은 농을 걸기 바빴다. 비담은 화끈한 성정과 호탕한 사내다움으로 무장한 인철이 빙루에게 쩔쩔매자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 키득거리느라 바빴다. 그러다 현재의 어색한 상황에 안절부절 못하는 인철을 위해 비담이 화제를 전환시켜 주었다. “참, 형님의 떨거지들 소개시켜 주셔야죠.” “아! 어쩐지 뭔가 허전하다 싶더니 그게 빠졌었구먼. 모두 그리 납작 엎드려만 있지 말고, 나와서 서로 인사 나누거라.” 인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릉주위에 은신해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던 흑천대원 스무 명이 비담과 빙루의 앞에 연기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빙루는 급작스레 시커먼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인사를 하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흑천 1호라 하오. 흑천대에 드는 순간 이름 석 자는 버렸으니 더 이상 소개할게 없군요. 그럼.” “흑천 2호요.” . . . “흑천 20호입니다. 제가 흑천대의 막내니 앞으로 부담 느끼지 마시고 마음껏 애용해 주십시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막내 20호까지의 소개는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소개가 끝나는 순간 구인철은 우직하고 고까운 표정의 부하들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마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내라면 모름지기 저래야 하는 법. 부러질지언정 결코 휘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강자존의 세계, 그곳이 바로 마도였다. 거기에 자신들을 떨거지 도매급으로 취급했으니 더욱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게 이해가 되었다. 그나마 둘의 싸움을 직접 지켜보았던 막내만이 웃으며 정중히 자신을 소개하였다. 두 눈으로 힘의 우열을 이미 확인했으니 알아서 기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성의 없이 고개만 위아래로 까딱 흔들며 비담의 신경을 살살 건드렸다. 걸어오는 도발을 마다할 비담이 아니었기에 맞불로 응수해 주었다. “시커먼 하늘 1호부터 20호? 거참 허우대들은 멀쩡한데 작명 솜씨는 영 꽝이네. 그러지 말고 그냥 떨거지 1호부터 20호가 어떨까? 까만 하늘보다는 그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 너무 지나치군요. 아무리 대주님과 각별한 사이라고 해도 저희들과는 별개의 일이니 그걸 빌미로 아랫사람 대하듯 삐딱하게 그러면 안 되지요. 버르장머리 없이.” “후후, 떨거지라는 표현이 많이 걸렸던 모양이야. 사내들이 고작 그런 걸로 속 좁게 굴기는. 아니 주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실력이면서 대우해달라 칭얼대기만 하면 알아서 실력이 쑥쑥 자라나? 한심하기는.”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 더 이상 우릴 건드리거나 자극하지 마시오.” “오우, 표정들이 살벌하네. 눈빛만으로도 사람 여럿은 그냥 죽이겠네. 왜? 자꾸 자극하면 덤비게?” “두말하면 잔소리.” 막내는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천대 선배들이 결국 싸우려 하자 그냥 포기해버렸다. 굳이 나서서 칼을 섞고 우열을 가리겠다고 하니 말릴 명분도 없었고, 싸움구경처럼 신나고 재미난 일도 없었으니까. 정말 밥보다 싸움을 더 좋아하는 선배들다웠다. “하하, 화통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어. 좋아! 그럼 신나게 한판 붙자고. 대신 나도 위치와 체면이 있으니 어느 정도 대우는 받아야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내 부하를 먼저 내보낼 것이니 한번 어우러져 보게.” 뜬금없이 부하 운운하는 비담을 지켜보며 순간적으로 흑천대는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감을 극대화하여 살펴보아도 이곳에 있는 스물 셋을 제외하곤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의혹만 커져가는 찰나. 비담의 손을 떠난 ‘화류선’이 이기어선의 수법으로 흑천대 사이를 날아다니며 그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날개라도 달렸는지 무시무시한 강기를 머금은 부채가 훨훨 자신들 사이를 날아다니자 분분히 검을 뽑아든 흑천대가 이리지리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검을 곧추세워 날아오는 부채를 쳐냈던 몇몇의 칼은 이미 두 동강이 난지 오래였고, 그 모습에 식겁한 나머지 흑천대원들은 칼을 맞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몸을 사리기에 급급했다. “뭐야? 스물이나 되는 머릿수로 내 부하 하나도 제대로 감당 못하는 거야? 이거 이리 약해서 어찌 하늘같은 주군을 보필하려고 그러나. 좀 더 분발해보게. 하하하.” 유쾌하게 웃는 비담과는 달리 신출귀몰한 부채의 움직임을 상대하는 흑천대는 죽을 지경이었다. 정말 한순간 정신 줄이라도 놓으면 바로 골로 가버릴 상황. 이제 자존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한 식경을 미친 부채에 쫓겨 도망 다니던 대원들의 호흡이 눈에 띠게 흐트러졌고, 눈빛 역시 칙칙하게 죽어 들어갔다.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 망할 놈의 부채 좀...흐익!!” 말을 잇던 흑천 3호가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부채를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으나 결국 흑천 3호의 머리카락이 댕강 잘려나가며 허공에 흩날렸다. 자신의 떨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3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만약 부채의 주인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댕강 잘려나가 땅을 나뒹구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자신의 목이었을 테니까. 대원들의 눈빛이 공포에 젖어든 것을 확인한 순간 비담은 장시간 이기어선을 하느라 내력 소모가 심해져 있었기에 바로 화류선을 회수하였다. “춤들 추느라 고생이 많았네. 어디 내 부하랑 어우러져 더 추고 싶은 사람?” “어, 없습니다.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오! 모두 만족한 눈치네. 내 부하는 늘 한가하니까 언제든지 어려워말고 말하게. 내 명령 한마디면 껌뻑 죽어서 고분고분 따르니까.” 존경의 염을 가득 담아 비담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흑천대였다. 흑천대의 얼굴에선 비굴함 없이 순수하게 무와 힘을 숭상하는 우직한 성정만 배어 나왔다. 그리고 가슴속 깊이 비담을 인정하였기에 좀 전의 무례함이나 고까운 표정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비담은 비록 다혈질이고 호전적이긴 하나 실력을 인정하는 순간 담백한 태도를 보이는 이런 사내들이 마음에 들었다. “형님, 그래도 훌륭한 수하들을 두셨군요. 떨거지란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대신 까망이들이라 부르죠. 헤헤.” “뭐야? 그럼 난 까망이들의 대장이 되는 건가? 까망이대장? 하하하.” “풉.” 56화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던 빙루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빙루의 눈에는 정말 시커먼 장정들이 부채의 장단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것으로 비쳐졌고, 자신을 당당히 까망이들의 대장이라 칭하는 구인철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제법 외관과 잘 어울리는 별칭이라 ‘까망이’, ‘까망이’하며 입속에서 되뇌었다. 비담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신고식도 잘 넘기고, 더불어 갑자기 불어난 시커먼 장정들로 인해 긴장했을 빙루의 마음도 풀어주어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후후, 우리 까망이 대원님들! 앞으로 여기 계시는 아리따운 소저의 안전과 신변 잘 부탁드립니다. 혹여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면 제 부하랑 함께 춤을 추시게 될 것이니 각오하시구요.” “넵. 걱정하지 마십시오.” 잔뜩 군기가 든 흑천대를 바라보며 비담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인철 역시 분위기가 한결 밝아지고 부드러워지자 흑천대에게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위치로!” 나타났을 때처럼 흑천대 스물은 그대로 연기로 화해 구릉 주변으로 스며들었다. “그럼 저랑 까망이들의 소개는 끝났고...이제 두 분이 서로 소개를 하면 되겠군요.” “전 빙루에요. 올해 스물넷이구요.” “아! 빙소저였군요. 저는 까망이대장...아니 구인철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서른둘입니다.”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밝히며 구인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말이 잘못 나올 정도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우세요?” “예?” “얼굴이 너무 빨갛게 변하시고 이마에 땀도 송글송글 맺히셔서...” “그, 그러게요. 사막이라 그런지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많이 덥네요.” 빙궁의 침상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12년을 보낸 빙루였다. 좋게 말하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눈처럼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안 좋게 말하면 남녀 간의 일을 비롯해 세상 물정엔 영 맹탕인 여인이 바로 그녀였다. 빙루는 덥다는 인철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소매를 들어 그의 이마를 닦아 주었고, 인철의 육신과 영혼은 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30평생을 검만 휘둘러온 외롭고 험난했던 길. 하지만 가문과 맹의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끝없이 도전하고 참고 이겨내며 묵묵히 걸어온 외길 인생에 드디어 꽃이 피려 하고 있었다. 묘하게 흐르는 둘 사이의 기류를 지켜보며 비담은 둘의 인연이 천생연분임을 직감했다. 외롭게 병마와 싸워온 빙루와, 한 결 같이 고독을 씹으며 무의 길을 걸어온 인철은 분명 닮아 있었다. 그리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인철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 여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시큼하게 아렸던 비담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기로 결심을 굳혔다. 눈치 없는 둘에겐 이것이 최선이었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니까. 비담이 속으로 세부적인 계획을 마련하고 있는 동안에도 빙루는 여전히 인철의 땀을 열심히 닦아 주었고, 인철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대로 ‘얼음’인 상태로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