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22편 (22/62)
“제가 관리하던 구역에 변고가 생겨 보고를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변고?” 극현도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완벽주의자인 극현도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변고’라는 말이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여 완벽한 계획을 짜 놓았는데 그것이 어느 시점에 어떠한 이유로 틀어졌다는 것은 다분히 그 위치에 있는 자의 무능력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극현도의 을씨년스러운 반문에 곽형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자신의 주인에게 자비란 사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사도련에 몸을 담고 있는 무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곽형수는 부들부들 떨며 뒷말을 이었다. “그, 그것이 계획 하에 잘 돌아가던 빙궁이 갑자기 봉문을 해버렸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아보기 위해 무사들을 보냈으나 빙회석이 떨어져 유일한 입구가 봉쇄되는 바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궁주인 나소희 역시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빙궁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최근까지 궁주인 나소희로부터 모든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연락이 두절된 일주일 사이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틀림없으나 들어갈 방법이 전무한 상태라 파악이 힘든 실정입니다.” “빙궁에 누군가 개입한 흔적은?” “그, 그것이 말씀드리기 송구스러우나 ‘오정회’에 외부 감찰반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에 이런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여 미처...으악!” “갈!” 어느새 파고든 구양지에 곽형수의 허벅지가 시원하게 뚫려버렸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곽형수는 서둘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겁에 질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피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변명하지 말거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의 목숨은 거두지 않으나, 변명하는 자는 용서치 않는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이번 빙궁의 일을 조사하거라. 그리고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너에 대한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그만 물러가거라.” “철저히 조사하여 련주님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쓸모없는 놈. 어서 물러가거라.” 더 이상 보기 싫다는 듯 곽형수에게서 시선을 거둔 극현도가 방밖을 향해 외쳤다. “은영각주(隱影閣主)를 들라하라.” 아닌 밤중에 호출이 된 은영각의 각주 문설란은 잔뜩 긴장한 채 극현도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너 역시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터. 알고 있는 대로 보고하거라.” “그, 그것이 소녀 역시 아직 자세한 정황을 파악하지 못했사옵니다. 누군가 빙궁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보고를 받았으나 무엇을 숨기는지 더 자세한 정보는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저희들 모르게 나소희 그 년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게 분명하옵니다.” “그래? 빙궁의 궁주가 일을 꾸몄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12년이란 세월동안 파악하지 못한 그 일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그럼 오히려 잘 된 일이구나. 도대체 무얼 그리도 꽁꽁 숨겨놓았는지 궁금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드러나겠구나? 은영각의 현재 가동 인원은?” “저를 포함해 총 20명입니다.” “앞으로 일주일.” “복명!” 은영각주가 사라지고 방안엔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52화 고요함 사이로 극현도의 음침한 웃음과 함께 가느다란 독백이 흘러 나왔다. “후후, 앞으로 3년. 사도의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나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 혈귀대의 완성과 함께 구파일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며, 돈에 혈안이 된 황실의 절대 권력 역시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오정회의 뿌리는 썩어 문드러질 것이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마도의 하늘 역시 곧 붕괴될 것이다. 바야흐로 황실과 무림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최고 권력자가 탄생하는 것이지. 허나 방심은 금물. 거대한 둑도 작은 균열로부터 무너지는 법. 오늘과 같은 사태가 반복되면 견고하고 원대한 나의 계획에도 틈이 생기고 구멍이 생길 것이니 앞으로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한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천하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시켜주마.” 극현도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빙궁의 빙회석 함정을 아슬아슬 빠져나온 비담은 기다리고 있던 빙루와 만나 다시 낙양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우선은 취선루를 찾아가 흑막주 이성보에게 빙루의 일신을 의탁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살을 애일 듯 불어 닥치는 눈 폭풍을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걷기를 하루. 급격히 떨어지는 빙루의 체력을 보다 못한 비담이 양해를 구한 후 빙루를 업었다. 설랑(雪狼)의 털로 짠 모자를 머리까지 푹 눌러쓴 빙루가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고, 비담의 육신이 남쪽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비담의 육신은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올라선지 오래였기에 이정도의 추위와 바람은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이틀의 시간을 꼬박 달리자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대륙 북쪽의 접경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우,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은 이 느낌은 뭐지? 아무튼 화류선도 얻고 이리 무사히 돌아왔으니 된 거지 뭐. 그나저나 빙소저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 많이 지쳤을 테니 오늘은 적당히 쉬었다 가는 게 좋겠구나.” 비담은 자신의 등에 업혀 혼절한 빙루를 배려하여 적당히 쉬었다 갈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방이 확 트인 야트막한 구릉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으로 다가가 꼼꼼히 살핀 후 빙루를 내려놓았다. 적당한 높이에 사방으로 시야가 확보되어 누군가의 접근을 사전에 발견할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빙루를 눕힌 후, 주변을 돌며 땔감이 될 만한 것들을 죄다 긁어온 비담이 모닥불을 피웠고, 이내 모닥불 주위로 따스한 온기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빙궁의 여인들이 챙겨준 물과 건량을 꺼내 한데 넣고 말간 국물이 배어나올 때까지 푹푹 끓였다. 비담은 조잡하지만 그래도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 완성되자 쓰러져있는 빙루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빙루가 미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깨어나자 비담은 준비한 물로 조금씩 빙루의 입술을 축여주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 여기는...?”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국경지역입니다. 아직 조금 더 가야하지만 날씨도 많이 풀리고 위험도 많이 사라진 터라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셨는데 오늘은 이곳에서 푹 쉬며 허기를 달래시기 바랍니다.” 비담이 그릇에 국물을 떠서 건네자 빙루는 따스한 그릇을 손에 쥔 채 비담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치료해준 것으로도 모자라 빙궁에서 구해준 은혜에 이렇듯 세심한 배려까지. “고맙습니다. 어찌 이 은혜를 갚아야 할는지...” “아닙니다. 저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길천 어르신을 생각하니 그동안 소저께서 겪었을 고초가 남의 일 같지 않아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국물이 식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비담이 웃으며 거듭 권하자 빙루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손에 든 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비담 역시 빙루가 음식을 먹자 자신도 남은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었다.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하루 종일 서쪽으로 부지런히 달려온 태양도 자신의 쉼터인 지평선 너머로 아득히 사라져갔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비담은 빙루가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땔감을 충분히 넣어주었다. 비담의 따뜻한 배려에 빙루는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이를 확인한 비담이 조심스럽게 구릉 위로 올라갔다.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여 잔뜩 긴장한 채 달려오느라 길천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이제야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형님? 괜찮으세요?’ ‘후후,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아네. 신경써줘서 고마우이.’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사이에 무에 그리 망설이나. 내가 왜 무작정 10초식 ‘설매풍류(雪梅風流)’를 시전 하라 하였는지 많이 궁금했지?’ ‘그렇습니다. 땅에 새겨진 ‘雪中梅花流春風(설중매화류춘풍)’라는 글귀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자네는 그 글귀를 누가 새겼다 생각하는가?’ ‘당연히 초하련 궁주님이 남기신 게 아닐런지요?’ ‘맞네. 자네의 예상대로 그 글귀는 하련이가 남긴 거였어. 나와의 추억을 잊지 않았던 게지.’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 초하련 궁주님께서 형님과의 일을 회상하며 남겨 놓으신 글귀가 맞았군요.’ ‘하련이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가 어디인지 아는가?’ ‘글쎄요...’ ‘화산이었다네.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수놓던 늦겨울, 화산 어귀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마을에서 처음 하련이를 만났지. 자네도 알다시피 화산은 매화로 유명한 곳이라네. 수북하게 쌓인 설경을 뒤에 두고 찬연하게 자신의 존재를 피워낸 수천 송이 붉은 매화의 향연이란...정말 황홀한 그 광경에 우리 둘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지. 선계의 풍경인양 아름답게 펼쳐진 장관에 나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 때 창안한 초식이 바로 ‘설매풍류’였다네. 분분히 흩날리는 눈송이와 그것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 바람, 그리고 모든 매화꽃들 사이를 정신없이 뛰노는 어린 하련이까지. 정말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지. 하련이에게 기쁨을 주기위해 나 역시 화류선을 펼쳐들고 함께 춤을 추었고, 내손을 떠난 화류선도 장단에 맞춰 함께 흩날렸다네. 하련이는 그 때 당시 삶에 대한 어떠한 미련도 없는 상태였었지. 어린 나이지만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통찰력을 지녔던 하련이에게 삶은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네. 그래서 하련이는 그 날 이후 늘 입버릇처럼 말을 했었지. 자신이 죽으면 가게 될 저세상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날의 풍경의 펼쳐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하얀 눈을 얹은 매화 사이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흘러갔으면’이란 말을 한참 되뇌곤 하였다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 처음 받은 선물이 너무 좋다며 나에게 고마움을 전하던 그 촉촉한 눈망울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네. 나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있던 하련이에게 내 초식을 선물하였지. 물론 하련이가 익힐 수는 없었지만 너를 위해 만든 춤이라고 하였더니 무척 기뻐하며 팔짝팔짝 뛰더군. ‘설매풍류’는 검법의 ‘이기어검’과 같은 경지인 ‘이기어선’의 경지라네. 그렇기에 아무리 힘을 써도 뽑히지 않았던 게야.’ ‘아마도 제 생각엔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신 초하련 궁주님께서 형님과의 애틋한 추억이 녹아있는 설경 속 매화 밭을 회상하시며 어린 시절 그때처럼 생의 마지막 춤을 추신 것은 아닐런지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는 그 글귀만 남겨 놓으신 채...’ ‘그렇게 믿고 싶으이.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네. 설후가 모르는 우리 부녀만의 추억은 오직 그거 하나였으니.’ 무엇을 추억하는지 길천의 음성이 뚝 멎었고, 비담 역시 숙연해진 분위기에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에게 눈을 돌리며 독백을 하였다. ‘사부님은 제가 지치고 힘들 때마다 늘 밤하늘의 별을 보라 하셨지요.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이 밤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까닭은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 남겨진 이들에게 마음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아마도 초하련 궁주님의 별도 어딘가에서 밝게 빛나며 형님께 속삭이고 있을 거예요. 그만 슬퍼하셨으면 좋겠다고 말이지요. 차가운 눈의 시련을 견디고 이겨낸 매화만이 찬연한 봄날의 바람을 마주할 수 있듯 형님도 그만 궁주님을 놓아주세요.’ 다시 자리로 돌아온 비담은 빙루가 덮고 있는 옷을 다시 추켜올려준 후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비담이 그렇게 한참의 시간동안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의문의 사내가 모닥불이 타고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누구지? 내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나 가까이 접근하다니.’ 의문의 흑의사내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비담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불 좀 빌립시다. 사막의 밤이 이리도 매서울지 미처 몰랐구려.” “사막이란 놈은 준비 없이 맞닥뜨리기엔 유별나고 무서운 녀석이지요. 행색을 보아하니 며칠 고생을 한 모양인데 이쪽에 앉으시지요.” “하하, 고맙소이다. 이거 초면이지만 염치불구하고 앉겠습니다.” 사막에서 만난 뜻밖의 불청객을 위해 비담은 넉넉히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의문의 사내는 횡재라도 했다는 듯 밝게 웃으며 모닥불 앞으로 바싹 다가와 앉았다. “그나저나 사막에서 이리 사람을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갑구려. 국경을 넘어 나가시는 길이오, 아니면 국경 밖에서 들어오시는 길이오?” 53화 “국경 너머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이지요. 그러는 형씨는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보아하니 혼자의 몸으로 돌아다니시는 것 같은데 담력이 꽤나 좋은가 봅니다.” “하하, 그건 피차일반인 것 같구려. 여인과 단 둘이 이런 사막을 지난다는 게 보통사람의 담력으론 힘든 일이지요. 혹시 곤히 자고 있는 저 여인도 일행이십니까? 아니면 단둘이 밤도망이라도 치는 중인지...?” “아닙니다. 그저 인연이 닿아 동행하는 중이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냥 농을 던진 것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런데 깜짝 놀라시는 걸 보니 더 의심이 가기는 합니다.” “하하, 실없는 소린 그만하시고 어쩐 일로 예까지 오신 것입니까?” “그게 사람을 하나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하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통에 영 찾기가 쉽지 않군요.” “누군지 몰라도 형씨께 큰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사람인가 봅니다. 그나저나 형씨처럼 무서운 사람이 직접 찾으러 다니신다니 그 사람 팔자도 무척 사납군요. 도대체 무슨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후후, 사막 가운데에서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니 살짝 귀띔을 해드리지요. 글쎄 이 녀석이 제가 가장 아끼는 여동생의 순정을 짓밟은 것도 모자라 몸까지 덮쳐놓고 나 몰라라 도망을 쳤다지 뭡니까. 그래서 오빠 된 도리로써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 직접 찾아 나선 것이지요. 잡히면 세상 살기가 호락호락 하지 않음을 직접 깨닫게 해주려고 말입니다.” “음, 정말 나쁜 놈이군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저도 나서서 그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고 싶군요. 도대체 그 자의 이름이 뭐랍니까?”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양보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나저나 국경 넘어서 고작 한다는 짓이 여자와 함께 도피 행각이라니...늘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비담.” 모닥불에 비친 사내의 얼굴이 스산하게 빛났다. 비담은 사내의 반응을 익히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태도로 불을 뒤적이며 물었다.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더라도 이유나 이름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귀는 장식용이 아니지 않은가? 다 들어놓고 이제와 발을 빼시려고? 뭐 정 궁금하다면 천마의 후예정도로 해두지. 됐는가?” “천마신교에서 나왔습니까? 이거 실례가 많았군요. 서희의 오라버니 되십니까?” “보기보다 영 맹탕은 아니로군. 준비됐는가?”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빙소저가 곤히 잠들어 있어서 이곳은 좀 그렇고 나중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소저가 깬 후에 말입니다.” “잠든 여인이 신경 쓰이나 본데 너무 걱정하지 말게.” “후후, 제가 괜한 걱정을 하였군요. 그럼 자리를 옮기시죠.” 흑천대 스물을 향해 전음을 날린 구인철이 유유히 비담과 함께 구릉너머로 사라졌다. 메마른 모래바람의 스쳐 지나가는 구릉 위, 비담은 평온한 얼굴로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제 구차한 변명을 듣고 싸우자 하면 안 되겠지요?”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게요. 살짝 기대를 한 제가 어리석었죠. 끝까지 가는 겁니까?” “능력이 된다면.” “하지만 서희를 생각하자니 그럴 수가 없겠네요. 어디 몇 군데 부러지셔도 저는 책임 못 집니다.” “대관절 그런 끝도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타고난 능력이니 전들 어쩌겠습니까?” “후후,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가겠습니다. 하압!” 짧은 기합성과 함께 비담의 몸이 구인철을 향해 튕겨져 나갔다. 초장부터 끝장을 보려는지 살벌한 기세로 달려드는 비담이었다. 무인은 오로지 칼로써 대화를 나눈다고 했던가. 천생 무골인 구인철의 입가에 정체불명의 미소가 맺히며 달려오는 비담을 향해 그대로 일 검을 내리그었다. 한 치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솜씨였다. 비담은 달려오는 힘을 역이용하여 몸을 비틀었고, 그대로 검을 피함과 동시에 구인철의 허리를 향해 돌려차기를 하였다. 구인철은 익히 예상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내리 긋던 검의 방향을 살짝 옆으로 비틀어 비담의 허리를 쓸어갔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비담은 해맑게 웃으며 천근추를 사용해 그대로 내리꽂힘과 동시에 휘두르던 발의 궤적을 구인철의 다리 쪽으로 바꾸었다. 아슬아슬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검을 피한 비담이 자신의 하체를 향해 다리를 뻗어오자 구인철은 힘껏 한 바퀴 뒤로 돌아 발길질을 피함과 동시에 비담의 정수리를 향해 자연스럽게 검을 꽂아 넣었다. 영활한 뱀처럼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다가오는 칼날을 비담은 자신의 머리를 다리 사이로 파묻으며 피했고, 동시에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전갈처럼 다리를 뒤로 꺾어 올렸다. 아직 공중에 머무르고 있던 구인철은 자신의 명치를 향해 다가오는 비담의 발끝을 검병을 이용하여 내리찍었고, 비담은 검병을 피해 다리를 접어버림과 동시에 그 탄력을 이용하여 다시 몸을 일으켰다. 설명은 길었으나 실상 이 모든 과정이 불과 수초 사이에 주고받았던 공방이었고, 비담이나 구인철 모두 일련의 동작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지켜보았다면 그저 흥에 겨워 비무를 하는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휴우, 이걸로 탐색전은 마무리하죠. 그럼 본 경기를 시작해 볼까요?” “따분하군.” “정말요? 저는 신나 죽을 지경인데 형님은 따분해 죽을 뻔 하셨다니 이해가 안 되네요.” “누가 자네의 형님이지?” “서희 오라버니라면서요?” “그래서?” “그럼 당연히 형님이란 호칭밖에 없지 않습니까? 형님께서도 살갑게 매제라 불러주시면 더욱 좋구요.” “난 누구처럼 낯이 두껍지 못할뿐더러 자네를 아직 인정하지 않았네. 오늘 자네가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조금 고려해보도록 하지.” “뭐 간단해서 좋네요. 그럼 무조건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거죠? 꼭 형님을 이기지 않아도 되는 거죠? 남아일언?” “중천금.” “일구이언?” “이부지자.” “좋습니다. 그럼 갑니다.” “후후, 악몽도 즐기다보면 때론 약이 되는 법.” “헤헤, 이제 보니 타고난 자신감은 형님께서 더 출중하신데요. 타압!” 화류선을 꺼내든 비담이 제1초식인 ‘주화은극(姝花隱棘:아름다운 꽃이 가시를 숨기다)’을 펼쳤다. 크게 펼쳐진 부채는 일종의 미끼였고, 숨겨진 진짜 가시는 화류선이 접혀졌을 때 생기는 몸통 부분이었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펼쳐진 부채에 현혹되면 가시에 찔리고 마는 법. 화려하게 펼쳐졌던 부채가 구인철의 지근거리에서 접히며 무서운 속도로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주화은극’의 한 수는 천마의 진전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구인철에게 통하지 않았다. 구인철 수준의 무인에게 현혹이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으니까. 부채의 움직임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던 구인철의 눈이 부채가 접힘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반짝 빛나며 그대로 힘의 중심이 되는 부채의 살 부분을 갈라버렸다. 비담은 자신의 초식이 너무나 쉽게 깨졌으나 마치 당연한 일인 듯 실실 웃으며 바로 제2초식인 ‘횡초봉화(橫草奉花:가로로 누운 풀들이 꽃을 받들다)’를 시전 하였다. 좌에서 우로 거칠게 휘둘러지던 부채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직각으로 곧추 세워지며 구인철의 안면을 향해 솟아올랐다. 구인철은 흔들리는 부채의 움직임을 따라 그대로 칼의 단면을 비스듬히 세워 부채를 위쪽으로 흘려보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담은 위로 솟아 오른 화류선을 순간적으로 정지시킨 후 바로 제3초식인 ‘수화폭류(垂花暴流:사납게 드리워진 폭포가 꽃을 삼키며 내리꽂히다)’를 시전 하여 그대로 내리꽂았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부채의 연환초식으로 인해 구인철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지며 드디어 10초식으로 이루어진 ‘천마심검(天魔心劍)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구인철은 ‘천마심검’의 제1초식인 ‘혈세도래(血世到來)’를 시전 하여 내리꽂히는 사나운 폭포를 향해 맹렬히 검을 회전시켰다. 핏빛의 강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며 사납게 흘러내리던 폭포의 흐름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비담은 강기로 인해 자신의 선기가 흩어지자 멀찌감치 떨어지며 해맑게 웃었다. 54화 “하하, 이제야 형님의 밑천을 보여주시는군요. 그나저나 너무 쉽게 받아내시니 이거 손발이 근질거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우리 더 해요.” “후후, 언제든 들어오너라. 그런데 정말 훌륭한 선법을 익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