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20편 (20/62)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더니 쓸쓸한 모습으로 자신의 처소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쾌락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허탈함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충격이라 서둘러 염천을 떠났던 것이다. 비담은 쓸쓸하게 돌아서는 여인의 등을 말없이 배웅해주며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첫 여인과의 정사가 마무리되는 순간 비담의 마음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며 작게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리 길천과 상의하여 내린 결정이라곤 하지만 수십 년간 쌓아온 내공이 부서지는 고통을 감안한다면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하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잠재적 화근이라고는 하나 아직 무림에 어떤 해악을 끼치지도 않았을 뿐더러 무림에 몸을 담은 여인으로써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에 걷잡을 수 없는 회의가 밀려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담의 반응에 여인들 역시 이상함을 느끼고 기다려주었다. 몸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지만 화류선의 주인이 석상처럼 굳어 있었기에 기다리는 것 외에 자신들도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그저 몸을 배배 꼬며 기다리는 수밖에. 비담은 심각하게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여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강신귀공을 운용하여 길천과 상의를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여인들은 오싹한 귀기가 염천을 가득 채우자 비명을 지르며 생난리를 치고 말았다. 환상적인 쾌락을 기다리고 있던 여인들에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지만 쾌락과 공포라는 상반된 감정이 팽팽히 맞서다 보니 다행히 자리를 떠나는 여인은 하나도 없었다. ‘형님? 아무래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나?’ ‘너무 잔인한 일이에요. 형님의 울분과 아픔에 동화되어 저도 모르게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잠재적 화근이요? 미래의 일을 짐작만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마음껏 남용하는 것은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이 순간 내 자신에게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네요. 방금 한 여인을 품고 그녀의 수십 년 내공이 부서지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단순히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까지 벌할 그 어떠한 권한도 제게는 없다는 사실을요. 그 구분이 애매함에도 앞뒤 가리지 않고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였으니 그렇게 욕을 했던 궁주의 행동과 저의 행동이 똑같더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우유부단한 동생을 용서해주십시오.’ ‘후후, 아니야. 죄송하다는 말도 하지 말고 용서할 일도 아니니 마음 쓰지 말게. 오히려 이번 일을 옆에서 부추긴 내 잘못이 더 크네. 용서받을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딸아이를 빼앗겼다는 슬픔과 분노에 눈이 멀어 자네의 행동을 말리지 않고 옆에서 거든 내가 오히려 나쁜 놈이지. 미안하네, 자네에게 이런 모진 행동을 강요한 못난 형님을 용서해주게.’ ‘형님을 만난 것은 정말 천운이었어요. 고맙습니다. 못난 동생을 감싸주셔서.’ ‘아닐세. 고마움을 전할 사람은 오히려 날세. 나를 이곳으로 초대해줘 고마우이. 허허.’ ‘그나저나 이 사태를 어찌하는 게 좋을까요?’ ‘사실대로 말하게. 모든 사실을 하나도 숨김없이 말하고 용서를 구하게. 그리고 빙루의 부모를 죽인 궁주와 친위대만 제거하고 빙궁의 일을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알겠습니다. 이미 무공을 잃은 여인에겐 정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되겠군요.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는 수밖에요.’ 길천과 상의를 끝낸 비담이 염천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와 옷을 걸친 후, 아직도 물속에 남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6명의 여인들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모든 사실을 하나도 숨김없이 밝히고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저희들께 용서를 구하다니요?” 비담은 여인들이 옷을 입는 동안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기다렸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여인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모두 옷을 입고 비담의 입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비담은 길천에게 들었던 내용 모두와 궁주 나소희와 있었던 모든 일, 더불어 빙루와 관련된 일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비담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여인들은 차츰 분노하였고, 이번 일을 꾸민 비담과 궁주를 향해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합을 했을 시 무공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희박한 가능성 자체가 없이 그냥 무조건 무공을 잃는다는 사실에 그저 어이가 없었다. 여인들의 표독스러운 눈길을 담담히 받아내며 비담은 그저 무릎을 꿇은 채 처분만을 기다렸다. 여인들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비담 역시 궁주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빙루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늦게나마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비담의 행동에 분노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줄어든 분노는 궁주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탈바꿈하여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알겠습니다. 늦게나마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셨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허나 그러한 사실을 숨긴 채, 저희들을 이용하고 빙루의 부모님을 죽였다는 궁주와 친위대는 용서할 수가 없네요. 아직 공자님의 말만 듣고 사건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 없으니 저희들은 돌아가는 데로 궁의 여인들을 모아 궁주님께 사건의 진상을 묻겠습니다. 공자님께서도 저희와 함께 가서 방금 했던 말을 궁주 앞에서 그대로 해주십시오.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당연히 제 몫입니다. 제가 그릇된 마음으로 궁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용서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만약 사건의 진실이 명명백백 드러나면 궁주를 비롯한 친위대는 제가 처리하고 싶습니다. 주제넘은 부탁이긴 하나 길천 어르신께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빙루의 아픔과 슬픔을 꼭 제 손으로 해결하고 싶어서 그러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 되겠군요. 궁을 좀먹는 환부를 도려내는 것은 엄연히 저희들의 몫입니다. 공자님께서 주제넘게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또 여러분들의 심기를 어지럽혔네요.” 거듭 고개를 조아리는 비담의 행동에 여인들은 싸늘하게 몸을 돌려 궁으로 향했다. 비담이 따라 오는 것에 대해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비담은 북풍한설처럼 매섭게 불어 닥치는 여인들의 모습에 씁쓸하게 웃으며 서둘러 여인들의 뒤를 따라 궁으로 향했다. 비담이 궁의 대전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궁주를 비롯한 염천에서 손을 들지 않았던 여인들 90여명이 한데 모여 있었다. 궁주는 비담이 말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남은 여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중이었다. 47화 비담의 말을 들은 6명의 여인들은 싸늘한 눈으로 궁주에게 다가가 염천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태에 대해 설명하고 궁주에게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공자님의 말이 사실입니까?” 당돌하게 따지듯 묻는 여인들로 인해 대전은 금방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비담 개인의 생각으로 치부하기엔 앞뒤의 정황이 그럴싸하게 맞아 떨어졌고, 더불어 꽤나 구체적이어서 그냥 웃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궁주 역시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비담을 날카롭게 쏘아 보았다. “이제와 이러는 연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화류선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제게 이러시면 안 될 텐데요? 그리고 너희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째서 궁주인 나보다 저자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것이냐? 감히 설후궁주님께서 남기신 기록을 의심하는 것이냐?” “물론 저희들 역시 설후궁주님의 유지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허나, 만약 공자님 말대로 무공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또 그와 같은 사실을 궁주님께서 사전에 알고 계셨다면 어째서 저희들을 사지로 몰아넣으신 것입니까? 무인에게 있어 무공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궁주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많다. 나 역시 저자의 말에 깜빡 속아 그러한 부작용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무공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사실은 지금에야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요. 그와 같은 부작용을 사전에 알고 계셨으면서 어째서 저희들을 염천에 몰아넣어 지원자를 뽑으신 겁니까? 빙궁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써 부하들부터 사지로 밀어 넣는 다는 것이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하셨는지요?” “이것들이 오냐오냐 해줬더니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그럼 너희들은 수장인 내가 먼저 나서서 극히 희박한 확률에 도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냐?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궁은 누가 책임질 것이냐? 너냐? 아니면 너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궁주가 여인들을 지목하자 대전의 공기는 삽시간에 싸늘히 식어 버렸고, 수뇌부와 일반 궁의 여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감정의 골이 깊게 패이고 말았다. “궁주님께서 궁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고 하시니 저희들도 그 부분에 대해선 한발 양보하겠습니다. 그럼 빙루의 일에 대해선 어찌 해명할 것입니까? 정말 구음절맥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부모를 죽이고 그 아이를 데려온 것입니까? 아니면 저희들이 모르는 어떤 내막이 숨어 있는 것입니까? 어째서 빙궁의 위상에 먹칠을 하는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하신 것입니까?” “호호, 가소로운 것들. 감히 언제부터 너희들이 내가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따졌단 말이더냐? 염천에서 저놈과 잠깐 뒹굴더니 아주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그리고 빙루의 일도 그렇다. 저자의 말만 철썩 같이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 증거가 있느냐? 내가 그리했다는 증거 말이다. 증거.” 궁주가 증거를 대라며 호기롭게 외치자 여인들은 그만 꿀 먹은 벙어리마냥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묵묵부답이었다. 비담의 말에 욱해서 무작정 뛰어왔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빙루가 대전에 나타났다. 궁의 여인들은 혈색이 돌아온 건강한 모습의 빙루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고, 궁주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궁주는 아직 치료도 채 끝나지도 않은 빙루가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뿐더러 나타난 순간 역시 매우 절묘했기 때문에 속으로 침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뭐, 뭐지? 어째서 저토록 건강한 모습인 게야? 분명 저자의 말대로라면 아직 1차 치료밖에 하지 못했다고 그랬는데. 그럼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모두 거짓보고였단 말인가?’ “오랜만에 뵙는군요. 나소희 궁주님.” 또박또박 이름을 밝히는 빙루의 눈매가 서늘했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는 빙루의 등장에 여인들은 모두 침을 꼴깍 삼키며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혈색을 보아하니 구음절맥의 치료가 완전히 끝난 것이냐?” “호호, 아직도 제가 구음절맥에 걸렸다 믿고 계시는군요. 공자님께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하신 모양인데 사실 저는 구음절맥과 비슷한 증상이었지 초하련궁주님과 같은 절맥이 아니었습니다. 이거 애석해서 어찌하지요?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까지 저를 데려오셨는데 궁주님의 야심이 허망하게 무너졌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여인에 불과하답니다. 그나저나 궁의 여인들이 모두 모였으니 잘난 궁주님의 입으로 직접 해명을 해주시지요. 어찌하여 제 부모님과 저희 마을사람들을 도륙하신 것입니까?” “가, 감히.” 나소희가 비담을 씹어 먹을 듯 바라보았다. 이번 일을 이렇게 만든 원흉은 그저 고개만 푹 숙인 채 서있었다. 일이 크게 틀어졌다고 생각한 나소희는 실실 웃으며 결국 본색을 드러냈다. “호호, 일이 아주 고약하게 되버렸구나. 아직은 시기상조라 여겨 참고 있었다만 일이 이 지경까지 된 마당에 무얼 더 망설이겠나?” 나소희는 사이한 미소를 입에 물더니 거침없이 자신의 소매를 찢어버렸다. 부욱 그리고 소매 안, 하얀 팔뚝에는 핏빛의 글씨로 련(聯)이라는 문신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나소희의 행동을 지켜보던 친위대 역시 궁주처럼 자신의 소매를 찢어 버렸고, 똑같은 모양과 빛깔의 문신이 같은 위치에 새겨져 있었다. “표정들이 아주 가관이구나. 그리 토끼눈을 뜨지 않아도 놀랐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그만 거두거라. 그나저나 이제 시원하게 편 가르기를 해볼까?” “궁주님? 설마 궁을 버리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사특한 문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도대체 저희들 몰래 그동안 무슨 일을 꾸미신 것입니까?” “련(聯)에 대해 알려하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진다. 많은 것을 알려하지 말거라.” “련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흐음,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자세히 알려하면 다친다고 누누이 설명했건만. 더 이상 묻지 말거라. 하지만 그동안의 정을 생각하여 한 가지 사실만은 일러주마. 머지않아 무림은 련에 의해 일통이 되고 사도천하가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당당히 무림을 활보하고 싶다면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거다. 언제까지 이런 촌구석 오지에서 썩어 지낼 셈이냐?” “언제부터입니까? 도대체 저희들 몰래 언제부터 그 련이라는 단체와 손을 잡은 것입니까?” “뭐 이 마당에 무얼 더 숨기겠느냐? 련에선 정확히 12년 전에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머지않아 사도천하가 도래할 것이고, 당당히 자리 하나를 꿰차고 싶다면 지금 선택을 하라고. 난 오랜 고민 끝에 그들이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고 비상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련에선 내게 첫 번째 임무를 부여했지. 바로 빙루의 마을을 초토화시키라는 명을. 나도 처음엔 꺼림칙해서 이유를 따져 물었으나 절대 말해주지 않더구나. 오로지 쌓는 공적치에 따라 나중에 위치가 결정될 것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해주었지.” “하지만 그들을 어찌 믿고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하신 것입니까?” “후후, 너희들은 그래서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했더라면 이처럼 고여 썩지도 않았을 것을. 잘 들어라. 솔직히 여기 포섭된 친위대를 비롯해 궁 전체의 여인들이 모두 덤벼도 사자로 온 그들 넷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처음부터 작정하고 찾아온 그들의 강요된 선택이란 말이다. 나는 그제야 궁의 초라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고, 무림은 철저히 약육강식의 논리로 움직인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만약 내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빙궁은 12년 전에 무림에서 지워졌다. 그들에겐 충분히 그럴만한 힘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궁을 지켜냈을 뿐이다. 더 이상 긴말 하지 않겠다. 선택하라. 나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곳에서 뼈를 묻던지.” 음산한 궁주의 물음에 여인들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급작스레 생각지도 못했던 대형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 셈이었다. 비담은 련이라는 단체까지 거론되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간파했다. 그저 궁주와 친위대를 제거하면 일이 마무리될 거라 여겼던 것은 자신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만약 궁주의 말대로 그처럼 어마어마한 세력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면 섣불리 나서기도 애매했기에 우선은 사태를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나소희는 정신을 못 차리는 궁의 여인들을 향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후후, 너희들로썬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허나, 나를 그동안 믿고 따라왔던 것처럼 그대로 따라오면 된다.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나 역시 그리 호락호락 련에 놀아나지 않았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설후궁주님께서 남긴 기록이 모두 날조된 것이라 저놈이 떠들었지만 사실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지 않느냐? 그리고 빙루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헛다리를 짚은 셈이 되었지만 련의 눈을 피해 그녀를 데려온 것 역시 궁의 앞날을 걱정했던 내 충정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고, 련에 대항할 내 노림수요 안배였다. 저기 서있는 놈의 지랄 맞은 성격을 예상하지 못해 일이 조금 앞당겨지게 되었으나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 사소한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으로의 일만 고민하는 게 어떻겠느냐? 강요하지 않겠으나 궁에 남겠다면 모질게 손을 쓸 것이니 후회 없는 선택을 하도록.” 여인들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선택을 강요하는 궁주로 인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빙루의 일만 놓고 보았을 때, 어떤 이유가 되었건 한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 행동은 용납할 수도 또는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것도 무림과 전혀 연관이 없는 일반인을 상대로 말이다. 허나 련이라는 단체가 정의로운 곳이 아니라고 해서 배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눈을 치켜뜨고 자신들을 쳐다보는 궁주와 그녀의 친위대의 무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빙루 역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련이라는 단체의 등장과 함께 상황이 묘하게 꼬여버리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12년 간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여인들로 하여금 눈 뻔히 뜨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48화 비담은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모두 궁주의 뜻대로 될 것임을 직감하고, 그제야 앞으로 나섰다. “후후, 호랑이의 기세를 등에 없고 왕 노릇을 하는 여우와 다를 바가 없군요. 선택은 어떠한 외부의 강압도 배제한 상태에서 하는 거랍니다. 지금 무력시위를 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은 궁주의 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나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제가 힘의 균형을 맞춰 드려야 되겠군요.” “호호,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감히 궁 안에 들어와 분탕질을 치고 분란을 일으켰으니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지. 각오하거라.” 스르릉 나소희는 순백의 검을 뽑아 들었다. 친위대 역시 자신들의 검을 뽑아 들고 서서히 비담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칼을 뽑는 궁주의 모습에 뭔가 크게 사단이 벌어질 것임을 예감하고 분분히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원래는 궁주를 도와 도발하는 비담을 제압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궁주가 자신들 모르게 외부의 세력과 결탁했다는 사실을 실토한 이상 나서기가 꺼림칙했던 것이다. 비담은 눈으로 염천에 있었던 여인들에게 허락을 구했고, 여섯 명의 여인들 역시 거리를 두고 물러남으로써 무언의 승낙을 하였다. 애초에 자신들의 지닌바 무력으로 저들을 상대하는 것이 힘에 부쳤기에 현명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여인들의 내락이 떨어지자 비담은 강신귀공을 운용하여 그대로 귀기를 방출하였다. 화류선이 아직 손에 들어오지 않아 화류선법을 펼칠 수 없는 이유도 있었으나, 길천 본연의 영력을 이용하여 간접적으로나마 빙궁에 복수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펄럭펄럭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대전에 귀기가 휘몰아치며 비담의 옷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궁주를 비롯한 친위대 역시 잔뜩 긴장하여 검을 고쳐 잡았다. “호오, 숨겨둔 비장의 한 수가 있다 이건가. 그분의 후인이라 부채가 없으면 허수아비에 불과할 줄 알았더니 어디서 얄팍한 재주를 배운 모양이로구나. 허나 수백 년 이어져 내려온 빙궁을 우습게 여긴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가르쳐주마. 쳐라!” 나소희의 외침과 함께 친위대 10명의 여인들이 몸을 날렸다. 모든 방위를 점하고 날아드는 여인들의 모습이 흡사 눈송이가 휘날리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설래발(雪來拔)’이라 이름 붙여진 검진으로 초장부터 비담의 혼을 쏙 빼놓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비담의 상단전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길천의 원영신이 함께 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고수들과의 싸움에서 한순간의 방심과 잘못된 정보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었다. 분분히 날아드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비담의 눈이 폭주하는 귀기로 물들며 붉게 변했다. 강신귀공 혼연의 장 원신강림(怨神降臨:원한에 가득 찬 귀신의 몸부림)비담 주위로 엄청난 귀기가 소용돌이치며 한순간 비담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목표물을 잃어버린 친위대는 허공에 의미 없는 칼질을 할 수밖에 없었고, 서둘러 비담의 흔적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으나 하늘로 솟았는지 아니면 땅으로 꺼졌는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순간, 속성이 다른 큰 폭발음이 연이어 터짐과 동시에 친위대 두 명의 가슴이 움푹 꺼져 들어가며 허공을 훨훨 날더니 오장(15m)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펑 콰쾅 음속을 돌파하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더불어 장력에 의해 가격당한 친위대 여인들의 타격음이 동시에 울렸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담은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인 이후 고개를 모로 비틀어 꺾으며 여전히 귀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다음 사냥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친위대의 여인들은 비담의 붉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하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소희 역시 비담이 보여준 한 수에 그만 오금이 저리고 말았다. 자신의 눈과 감각으로도 비담의 움직임을 놓쳤던 것이다. 객관적인 비교가 힘들었으나 비담은 12년 전 자신을 찾아와 압력을 행사했던 련의 사자들보다 더욱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