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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소설) 호색 -완 - 18편 (18/62)

2026-10-04 14:56:00 조회 8
42화 흔쾌히 승낙을 한 나소희가 비담과 함께 음봉각으로 향했다. 궁주를 따라 나선 비담은 길천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궁주 앞에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을 이용해 궁주가 어떤 음모나 계략을 꾸미고 있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어찌 보면 궁주 역시 설후가 남겨놓은 그릇된 기록에 의거하여 이번 일을 계획했을 것이니 그녀 역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설후라는 궁주가 뿌려놓은 것이지 후인들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음봉각에 도착한 비담은 궁주의 소개로 구음절맥에 걸렸다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파리한 안색에 병색이 완연한 것이 딱 봐도 그냥 환자였다. 어째서 길천이 300년 전 초하련 궁주에게 측은지심을 가졌었는지 이해가 되는 비담이었다. “이 아이가 바로 구음절맥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빙루(氷淚)입니다. 제가 12년 전 무림에 나갔을 당시 역병이 창궐했던 호북성 무한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떠돌던 빙루를 거두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우선 데려왔으나 구음절맥에 걸렸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고, 그 외에 이름이나 나이, 다른 신상명세를 하나도 몰랐기에 그냥 빙루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병은 점점 더 깊어져 이제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부디 공자님께서 그 분의 후인이라면 이 아이의 천형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으음, 궁주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 여인의 처지가 정말 참담하군요. 역병에 부모를 모두 잃은 것도 견디기 힘들었을 터인데 거기에 천형의 굴레까지 짊어져야 하다니.” “치료가 가능하겠습니까?” “잘은 모르겠으나 조금 더 살펴본다면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제가 필요한 것들은 추후 궁주님께 도움을 청할 것이니 우선은 둘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음봉각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출입을 철저해 통제해주시기 바랍니다. 궁주님도 알다시피 치료과정 자체가 조금 화끈한 터라...”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궁주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두 볼이 발갛게 물들더니 모기만한 소리로 비담의 요구조건을 수락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음봉각에 출입하는 궁의 제자들은 제가 철저히 단속할 것이니 염려 놓으시고 치료해 주십시오. 빙루의 목숨은 이제 공자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럼 공자님께서도 100일의 시간을...?” “아닙니다. 구음절맥에 걸렸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개개인의 상태나 체질에 따라 여인들마다 치료의 시간은 다릅니다. 그것도 나중에 제가 보고를 드릴 것이니 지금은 그만 물러가 주십시오. 한시가 급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럼 공자님만 믿겠습니다.” 황급히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궁주의 뒷모습을 보며 비담은 어이가 없었다. ‘허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제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상상하며 볼이 빨갛게 물드는 사부라니. 이놈의 집구석도 제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구나.’ 고개를 좌우로 흔든 비담이 빙루의 모습을 살피며 길천에게 의념을 전달했다. 빙루는 죽은 듯 침상에 누워있었기에 강신귀공을 운용해도 별 무리는 없어보였다. ‘형님? 초하련 궁주의 증상과 여기 빙루의 증상이 같습니까? 정말 구음절맥에 걸린 여인입니까?’ ‘음, 구음절맥에 걸린 여인이 맞구나. 헌데 한 가지 하련이와 다른 것 같은데...’ ‘그게 무엇입니까?’ ‘이 아이는 타고난 구음절맥이 아닌 것 같구나. 얼핏 보기에도 하련이와는 차원이 달라.’ ‘예? 차원이 다르다고요?’ ‘그래. 하련이는 선천적으로 순수한 음기가 강했고, 체내에 가득하여 구대혈맥이 막혀있는 상태였지. 그래서 오성은 뛰어났으나 몸은 말도 못할 정도로 유약했고 절명할 운명이었지. 허나 저기 누워있는 저 아이는 후천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혈맥이 막혀있는 상태란다. 보기엔 혈색이 안 좋아 보여도 절명할 팔자로는 안 보여.’ ‘정말이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후천적으로 구음절맥에 걸릴 수도 있는 거예요?’ ‘당연히 걸릴 수 있단다. 궁주의 말대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 울분과 슬픔에 혈맥이 막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로 인해 혈맥이 막혀 구음절맥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 거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련이의 절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라는 거지.’ ‘그럼 치료방법도 훨씬 간단하겠군요?’ ‘하련이에 비하면 저 아인 치료할 것도 없는 상태야. 겉으로 보이는 증상은 같으나 병의 뿌리는 완전히 다르니까 네 녀석의 내공을 이용하여 막힌 혈도만 뚫어주면 정신을 차리고 곧 일어날 것이다.’ ‘그럼 이 같은 정황을 궁주는 몰랐단 말이에요? 그 정도의 고수가 어찌...’ ‘사람이란 족속이 원래 그런 거란다. 아무리 날고 기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 욕심에 취하면 두 눈과 두 귀가 머는 것은 물론 머리 역시 자신이 믿고자 하는 방향으로만 생각을 진행시키지. 아마도 궁주는 저기 누워있는 아이가 구음절맥에 걸린 아이라 철썩 같이 믿고 싶었을 것이고, 만약 운이 하늘에 닿아 나의 무공을 전수받은 전인이 자신의 대에 찾아온다면 무림을 호령할 수 있다는 멍청한 꿈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럼 형님 말대로 저 여인을 깨우면 모든 내막을 들을 수 있겠네요.’ 의념을 접은 비담이 서둘러 빙루에게 다가가 맥을 짚기 시작했다. 한 줄기 자신의 내공을 여인에게 밀어 넣어 막힌 혈맥을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음,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없어. 아마도 충격으로 혈맥이 막힌 이후 궁주에 의해 바로 빙궁으로 끌려와 죽은 듯 누워있었던 모양이야. 그나저나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긴 하나 12년 동안 이렇게 누워있는 여인을 보살핀 정성이 대단한데.’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혹여 약해질 대로 약해진 빙루의 혈맥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비담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무려 한 시진(2시간)에 걸쳐 진맥을 마친 비담이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막힌 혈맥을 모두 찾아내었다. “휴우, 예상보다는 혈맥이 많이 상해있지 않아 다행이구나. 앞으로 사흘의 시간이면 충분히 막힌 혈맥들을 뚫을 수 있겠어.” 비담은 다행이란 표정으로 죽은 듯 누워있는 창백한 빙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이곳까지 끌려와 저리 누워있는지는 몰라도 길천이 초하련 궁주를 사랑했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어 자신 역시 정성을 다해 저 여인을 치료해주고 싶었다. 사흘 후. 비담의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본시 구음절맥과 비슷한 증상만 보였을 뿐 치료 자체가 난해한 중병이 아니었기에 이변이 없는 한 빙루는 오늘 깨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거기에 약해진 기력만 보충한다면 수개월 내로 다시 평범한 자신의 삶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으음!” 다시 혈색을 되찾아 발그레한 빙루의 입술을 비집고 미약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빙루가 깬 것을 확인한 비담 역시 사흘간 한숨도 못자 붉게 충혈 된 눈을 들어 조금씩 가쁜 숨을 몰아쉬는 빙루를 응원하였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린 빙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물었다. “누, 누구시죠?”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은 많이 쇠약해진 몸부터 돌보십시오.” “혼절한 기억밖에 없는데 제가 며칠이나 누워있었나요?” “하하, 그것 역시 차차 알게 될 것이니 그만 묻고 한숨 더 주무십시오.” 빙루는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비담이 시키는 대로 다시 눈을 내리 감았다.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숨소리를 내뱉는 빙루의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비담은 마지막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의식을 회복한 빙루의 모습을 확인하자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 기대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고 먼저 잠에서 깬 빙루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자신의 침상에 기대어 잠이 든 비담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성이 자신의 침실까지 들어온 것도 의문이었고, 이제는 죽는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생명이 아직 붙어 있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순간 삶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렸는데. 이렇듯 깨어나니 다시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구나. 그나저나 쓰러진 저분께서 내 생명을 구해주신 것 같은데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곤히 잠든 분을 깨워 물어볼 수도 없고. 휴우, 내게 힘이 있었다면 궁주를 비롯한 파렴치한 년들을 모두 잡아 죽이련만. 하늘에 계신 부모님을 뵐 낯이 없구나. 그래도 이리 건강을 되찾았으니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일러. 오늘과 같은 기적을 또 바랄 수는 없겠지만 분명 노력한다면 좋은 방법이 생길 거야.’ 입술을 앙다문 빙루의 표정이 사뭇 비장해 보였다. 빙루가 회한을 곱씹으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무렵. 곤히 잠들었던 비담이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하암!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이거 간호를 한다는 것이 함께 잠이 들고 말았네요.” 비담은 곤히 잠들고 만 자신의 모습이 멋쩍었던지 머리를 긁으며 딴청을 피웠다. 43화 빙루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공자님께서 저를 치료해 주셨나요?” “그렇습니다. 부족한 실력이긴 하나 아가씨의 상태가 워낙 위중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치료를 하였지요.” “빙궁은 금남의 구역이라 알고 있는데 어찌 이곳까지 들어오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하하, 화류선을 찾겠다고 하니 그냥 들여보내주던 걸요? 태어나 이처럼 지극한 환대는 처음 받아보았습니다.” “예? 화류선의 주인이셨습니까?” 화들짝 놀란 빙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려 하였다. 그동안 빙궁의 고위인사들에게 어떤 언질과 교육을 받았는지 반사적으로 취하는 행동이었다. “빙루가 삼가 화류선의 주인을 뵙습니다. 저를 치료해 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런지 모르겠사옵니다.” 빙루의 급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비담이 서둘러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이제 기력을 회복하신 것 같으니 저와 대화를 좀 나눠볼까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비담을 멀뚱히 쳐다보던 빙루가 자세를 바로한 채 고개를 숙였다. “무엇이든 하문하십시오. 성심을 다해 은공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쩝, 뭐 은공이라 하시면 제가 면이 서지를 않는데. 아무튼 그게 편하시다면 호칭이야 그냥 넘어가죠. 그나저나 어찌 빙궁에 오셨는지 여쭤 봐도 실례가 안 될 런지요? 궁주에게 듣기론 역병에 부모님을 모두 여윈 당신이 불쌍하여 데려왔다고 하던데...그게 사실입니까?” “궁주가 은공께 그리 말하던가요?” 빙루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날조했다고는 하나 화류선의 주인에게까지 그리 말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비분강개한 빙루의 반응에 비담은 옳거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까?”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입니다. 제가 12살이 되던 해에 마을에 역병이 돌아 마을사람들 태반이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저희 부모님께서도 역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계셨지요. 하지만 천운인지 부모님께서는 점점 회복을 하셔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 궁주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이 나타나 부모님과 마을의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죽였습니다. 한 폭의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잔인한 장면에 충격을 받은 저는 그만 혼절을 하였고, 그 후론 깨어보니 이곳이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으나 마을 사람들 모두를 죽이려고 찾아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정말 그녀들은 지옥에서 막 튀어나온 야차보다도 무서웠습니다.” 당시의 악몽을 되살리며 빙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의 목숨은 취하지 않고 여기로 데려와 보살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빙궁의 목적이 마을사람들 전부의 말살이라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혹시 은공께서는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저를 치료하기 위해 그녀들이 어떤 언질을 주진 않았나요?” “그것은 당신이 구음절맥이란 희귀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충격으로 혼절하면서 병을 얻은 것 같습니다. 얄궂게도 부모님을 잃고 얻은 그 병으로 인해 여태 목숨을 보존하신 겁니다.” “구음절맥이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빙루를 보며 비담은 궁주의 의도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초하련 궁주처럼 빙루 역시 살인병기로 키우려는 시커먼 궁주의 의도를. “정확히 말씀드리면 구음절맥과 비슷한 증상의 병입니다. 단순히 혈맥이 막혀 생긴 병으로 크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12년이란 세월동안 억지로 침상에 누워 보내야 했기에 기력이 많이 쇠했던 것일 뿐입니다. 후후, 빙궁의 궁주는 다시 한 번 날개를 달고 싶었겠으나 그녀의 무지몽매한 계획은 한바탕 꿈이었음을 곧 깨달을 것입니다.” “은공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냥 혼잣말을 한다는 것이 당신의 심기를 어지럽혔군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비담은 길천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하여 빙루에게 들려주었다. 비담의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빙루는 자신을 살인병기로 이용하려 했다는 궁주의 의도에 몸서리를 쳤으나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만약 진짜 구음절맥이란 희귀병에 걸리고 은공이 그러한 내막을 모르고 자신을 치료하였다면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무림에 벌어졌을 것이다. 250년 전의 그날처럼. 설산검후(雪散劍后) 초하련의 또 다른 별호는 설혈귀(雪血鬼)이기도 하였으니까. 설산검후 초하련은 죽기 한 달 전, 의문의 폭주와 함께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지나는 길을 모두 시산혈해로 만들어 버렸었다. 다행히 은거기인들이 폭주하는 그녀를 빨리 제압하여 흉흉한 소문은 돌지 않고 마무리되었으나 무한 지방에 살았던 빙루는 누구보다 자세히 그러한 끔찍한 전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우는 아이도 멈추게 한다는 설혈귀의 전설을 말이다. 비담의 상단전에서 자신의 딸이 말년에 그와 같이 미쳐 날뛰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전해들은 길천은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아마도 세뇌의 부작용으로 인해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으리라. 비담 역시 설혈귀의 전설을 처음 접한 터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길천이었다. 침통한 표정의 비담을 향해 빙루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저 설혈귀가 빙궁의 초하련 궁주라는 말을 했을 뿐인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제가 은공께 무슨 실수를 했나봅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노여움을 푸십시오.” “아! 아닙니다. 당신 때문이 아니라 궁주를 비롯한 망할 년들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정말 나소희인지 뭔지 하는 궁주를 가만히 두면 안 되겠군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설혈귀의 이야기도 쏙 빼놓고 제게 들려준 것이 아닙니까. 정말 무림을 전복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끔찍한 계획을 세울 순 없습니다. 그런 부작용을 알면서도 뻔뻔한 얼굴로 내게 치료를 부탁하다니.” 비담이 무서운 얼굴로 주먹을 그러쥐자 그의 안위가 걱정이 된 빙루가 말리고 나섰다. “은공?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십시오. 궁주를 비롯한 그녀의 친위대는 무공이 정말 막강하고 잔인할 정도로 무섭습니다. 은공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나 혼자의 힘으로 그녀들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옵니다.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 훗날을 도모하시는 게 현명한 방법이옵니다.” “아닙니다. 썩은 나무는 뿌리까지 완전히 없애야만 숲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법. 설후가 남겼다는 기록부터 궁주를 비롯한 모든 재앙의 뿌리를 제거해 버리겠습니다.” “하, 하오나?” “당신이 무얼 걱정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있고, 저들은 무방비한 상태에서 뒤통수를 맞을 것이니 승산이 높습니다. 그나저나 당신의 거취가 걱정이군요. 제가 한바탕 빙궁을 들쑤셔 놓으면 평범한 당신이 이곳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저, 저기 외람된 부탁이오나 혹시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저를 데리고 나가주시면 안 될까요? 부모를 죽인 원수들과 함께 지낼 수는 없사옵니다. 은공께 짐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니 부디 저를 데리고 나가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은공.”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당신을 데리고 나갈 것입니다. 추후 당신의 결정을 존중하여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약조를 해주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무조건 하겠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한 편의 연극을 통해 월척을 낚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미끼가 필요한 법이지요. 제가 모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처녀의 몸으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어렵겠지만 저들의 염탐꾼이 와있는 동안 거짓으로 교합하는 척 신음소리를 내주십시오. 가능하겠습니까?” “성심을 다해 신음소리를 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사냥감을 물색하고 등급을 정해 썩은 부분을 도려냅시다.” 비담은 빙루를 치료하는 것처럼 연극을 꾸며 시간을 벌었다. 가끔씩 일의 진행을 살피기 위해 궁주의 친위대가 귀를 기울였지만, 그때마다 신들린 듯 연기를 하는 빙루로 인해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번 비담은 빙루의 입을 통해 궁주를 비롯한 악질적인 그녀의 친위대 목록을 작성하고 옆에다 살(殺)이라고 표시하였다. 길천과 빙루를 봐서라도 그녀들을 용서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죽음의 명단 작성이 끝나자 비담은 길천과 상의를 하였다. 죄질은 약하지만 색정에 눈이 먼 여인들의 처리가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 무공이 높아졌다는 설후의 기록만 맹목적으로 믿는 어리석은 여인들이었다. 무지 밝히는 여인들이기도 하였고. 장시간 상의를 한 끝에 비담은 ‘천와주’를 시전하기로 길천과 합의를 보았다. 함부로 목숨을 취할 수는 없었기에 순음지기를 깨서 잠재적 화근을 미리 뿌리 뽑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계획이 갖춰지자 드디어 웅크리고 있던 비담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표는 잠재적 화근의 제거였다. 근 한 달여 만에 궁주와 마주앉은 비담이 웃으며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44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무탈하게 잘 지냈지요. 그런데 빙루를 치료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을 터인데 급히 저를 찾아온 연유라도 있으신지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하하, 아닙니다. 치료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 제게 부탁하실 일이라도...” “부탁은 아니고 빙루의 1차 치료가 마무리되어 중간에 시간이 남아 이리 들렀습니다. 빙루는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해야 2차 치료를 할 수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시간이 남아서 말인데 저번에 제게 부탁하신 일을 해드리려고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부탁했던 일이라면 빙궁의 여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는 말씀이신지?” “그렇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처녀성이 깨진 설후궁주님의 빙백신공이 더욱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알 수는 없으나 지극한 환대를 받은 마당에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해서 이리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끝을 흐리는 비담이었다. 궁주는 비담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난색을 표하자 그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뒤에 말을 재촉하였다. “왜 그러십니까?”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제가 도색성 길천 어르신의 무공과 색공을 이어받은 전인이 맞기는 하오나 워낙에 특별한 방법을 통해 그것들을 익힌 터라 실전된 부분도 있고, 당시 길천 어르신께서 빙궁을 방문한 연후에 창안하신 기술도 있어 빙궁의 여인들에게 혹여 부작용이나 해를 끼칠까 저어되어 많이 망설여집니다. 궁주님의 생각은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부작용이 심각한 것입니까?” “기대를 많이 하고 계셨을 궁주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무척 송구스럽군요. 아직 정확한 부작용은 확인된 것이 없으나 쾌락의 강도가 매우 높아진 대신 무공을 회복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지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최악의 경우 무공이 전보다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도색성 길천 어르신께서 사용하셨던 색공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이런 사단이 벌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아쉽게도 그 부분은 실전이 되어 제가 익히지를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런 일로 죄송해하시면 오히려 듣는 제가 미안해지니 거두어주십시오. 그럼 지극한 쾌락을 얻는 대신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는 말씀인데 혹시 더욱 무공이 고강해질 수도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