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16편 (16/62)
“그, 그게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하고, 명확하고, 자세하고, 일목요연 소상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몸의 주인이니 당연히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리 망설이시는 것입니까?” “그게 어젯밤 팽가의 소가주가 루를 방문해 기녀와 동침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자님도 알다시피 저는 정보를 사고파는 상인입니다. 무림인들은 잘 모르는 평소 녀석의 악행이나 치부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이 저입니다. 처음엔 죽어도 받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가문 어쩌고 지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받고 말았습니다. 오정회에 막강한 입김을 행사하는 팽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입니다. 남성우월주의를 무슨 영광의 훈장이라도 되는 양 떡 하니 달고 다니는 망나니 같은 그 녀석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하필 어르신께서 선화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는 그 순간에 말이지요.” “무슨 사고를 쳤는데요?” “아, 글쎄 이 미친놈이 기녀가 자기 위에 올라타서 그 짓을 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기녀를 다짜고짜 패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야 모든 정황을 알고 있었지만 팽가 그 후레 잡놈들이 떼로 달려들어 난장을 피울까 염려되어 그냥 꾹 눌러 참았지요. 하지만 정의로 똘똘 뭉치신 어르신께서 그와 같은 광경을 목도하고 그냥 지나치실 분입니까?” “아니죠. 당연히 그처럼 좋은 건수를 그냥 지나치실 어른이 아니지요. 똥개가 양질의 똥을 그냥 지나칠 순 없는 법. 그건 말도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래서요?” 비담이 길천을 똥개에 비유하자 적절한 비유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이성보가 화들짝 놀라 급히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흠흠, 아무튼 어르신께서 그 순간 나타나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셨습니다. 정말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갈 정도로 통쾌한 구타의 현장이었습니다.” “에이, 별일도 아니네요. 내심 걱정했는데 그분께서 알아서 잘 처리하셨네요. 저라도 그런 놈과 면상을 마주했다면 그분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나저나 그놈 숨은 붙어 있습니까?” “무, 물론 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팽가의 후환이...” “거 보십시오. 형님은 너무 정이 많은 게 탈이라니까. 나 같으면 진짜 죽여 버렸을 텐데. 아님 고자로 평생을 살게 만들던가. 별일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중에 따지러 오면 전부 잡아 족치면 그만이니까. 그나저나 약속대로 화류선의 행방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대체 그놈의 무기 지금 어디에 자빠져 있습니까?” “정말 괜찮겠습니까? 팽철영 그자는 오정회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지원한다는 ‘시봉세’에 속해 있는 자인데...” “허허, 시봉세인지 시방새인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래 구타는 떼로 덤빌 때 더 감칠맛이 나는 거니까 먼 훗날의 기쁨일랑 잠시 접어두고 어서 그 망할 놈의 부채가 지금 어디에 있는 지나 가르쳐 주십시오.” “휴우, 공자님께서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화류선은 지금 북해빙궁의 신물로 있습니다. 무슨 연유로 그곳까지 흘러들어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빙백신공(氷白神功)과 동급의 대우를 받는 보물로 모셔져 있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확실합니다. 수 백 년에 걸쳐 흑막의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소모시켜 얻어낸 정보입니다. 제 목을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애매한 것에 목까지 걸진 마시고. 아무튼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떠나시게요?” “하하,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참 많은 몸입니다. 엉덩이 무겁다며 반길 사람 하나 없으니 지체하지 말고 떠나야지요.” 이성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막 방을 나서려던 비담이 안타까움에 울상이 된 이성보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참, 팽가라고 하였나요?” “네.” “혹시 그놈들이 이번 일로 막주와 루에 책임을 묻거들랑 그냥 모른 채하십시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어찌 은인께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저 역시 은인께 닥칠 고난과 역경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말씀 입에도 올리지 마십시오. 듣기 거북합니다.” “후후, 저에게 모두 떠넘기라고 한 것은 저를 배신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막주님이 건재해야 저도 마음껏 양질의 정보를 얻을 것 아닙니까. 지금은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으나 나중에 저를 위해 많이 바빠지실 것이니 이번에 제가 드린 호의는 그때 가서 계산을 하자는 것이지요. 막주님께서 봉변을 당하면 계산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 하오나?” “저런 놈들 떼로 덤벼도 제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정 힘에 부치면 도망가면 그뿐.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은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모쪼록 몸조심하시고 언제든 제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면 연락을 주십시오. 만사 제쳐 놓고 은인의 귀와 입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막주님의 말을 들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힘이 생기는군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순간이 되면 꼭 연통을 넣겠습니다.” 비담은 이성보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화류선이 잠들어 있다는 북해빙궁을 향해 출발했다. 38화 제 6 장 북해빙궁(北海氷宮) 열흘 후. 낙양의 풍화객잔에 머물고 있던 구인철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나선 흑천대원들을 기다리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2층에 앉아 바쁘게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실로 5년 만에 느껴보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떠올리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지며 구인철의 얼굴이 무섭게 찡그려졌다. 찻잔의 찻물이 파문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놈, 감히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어렵게 낙양까지 쫓아왔건만 그새 어디로 도망갔단 말이지. 잡히면 정말 곱게 데려가진 않을 것이야.” 비담의 일정과 상관없이 무조건 자신을 피해 어딘가로 도망갔다 여기는 인철이었다. 차갑게 식은 찻물만큼이나 마음이 급속도로 차가워진 인철이 화를 삭이고 있을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흑천대원들이 하나 둘 풍화객잔에 들어섰다. 객잔에 머물며 차를 즐기고 음식을 먹던 사람들은 살벌한 기도의 흑의남성들이 계속해서 들어오자 영문도 모른 채 바싹 긴장하며 서둘러 음식을 처리하고 자리를 피했다. 20명의 흑천대원들이 모두 모이자 넓었던 객잔의 2층은 텅 비어 버렸고, 오로지 구인철과 흑천대원만 남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영업방해를 했음에도 구인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두려움에 벌벌 떨던 점소이가 마지못해 다가왔다. “저, 저기 주문을 하시면 제가 신속히 내어 오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주문을 받는 점소이의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로 비장해보였다. 인철은 흑천대원들의 면면을 둘러보더니 짧게 주문하였다. “소면 20그릇.” “네? 아, 네.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조촐한 식사가 마무리되자 흑천대원들은 하나 둘 입을 열어 비담에 대한 정보를 인철에게 보고하였다. “비담은 열흘 전에 낙양을 떠난 것 같습니다. 낙양에 머물렀던 기간은 나흘 정도로 추정되며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 방문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나흘간의 행적은?” “첫날은 취선루의 도박장을 방문해 도박을 하였고, 황금 1000냥을 땄다고 합니다.” “도박?” “예, 대주님. 무슨 내막이 숨어있는지 모르겠으나 연속해서 큰돈을 걸었고 승승장구해서 그처럼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런 망할 새끼가. 자고로 남자는 술과 도박, 여자를 조심해야 하거늘 서희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도박에도 손을 댔다? 정말 가만두면 안 될 녀석이구나. 나중에 서희가 마음고생을 하기 전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놔야 되겠어. 계속!” “그렇게 도박을 하다 황금 600냥 정도의 손실을 보았고, 새로 투입된 여직원을 향해 희롱의 말을 건네 쫓겨났다고 합니다.” “어떤 말이냐?” “‘은은히 비치는 속옷의 색이 검은색인 모양인데 잘 어울린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뭣이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 대주의 모습에 대원들은 조용히 구인철의 눈치만 살폈다.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았는지 구인철이 다시 자리에 앉아 다음 보고를 재촉했다. “휴우, 5년 폐관을 하면서도 이런 시련은 없었건만.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계속하거라.” “첫날의 일정은 거기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대원은 보고가 끝났는지 자리에 앉았고 기다렸다는 듯 다른 대원이 일어나 비담의 다음 행적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는 취선루에서 사흘간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직원을 희롱했음에도 다시 취선루에 간 것을 보면 그곳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비밀이라...그게 뭐라 생각하느냐?” “아마도 낙양을 방문한 목적과 일맥상통할 것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취선루에 머물다 바로 떠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취선루를 족치면 되겠구나. 그전에 사흘간 뭘 하며 지냈다고 하더냐?” “그게 기녀들을 상대로 방중술을 전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방중술? 확실한 것이냐?” “확실하진 않사옵니다. 허나 녀석이 방문한 기간 동안 문을 닫은 적 없다는 취선루가 내부수리를 목적으로 하루 동안 문을 닫았다는 정황과 그 사이 기녀들의 방중술이 일취월장했다는 상황을 조합해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옵니다.” 쾅 구인철의 앞에 있던 탁자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나갔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인철이 홧김에 내려친 것이다. 객잔의 기물이 허망하게 부서져 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객잔주인의 마음도 부서져 나갔다. “그럼 네 생각엔 녀석이 사흘 간 여인들과 뒹굴었다? 기술을 전수해 준다는 핑계로?” “그렇습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십중팔구 정확합니다.” “이런 개새끼가 있나. 도박으로도 부족해 기녀들을 옆에 끼고 희희낙락 사흘 동안 뒹굴며 여색을 탐했다? 도대체 그 녀석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럽구나. 서희 같은 아이를 팽개치고 도망가서 한다는 수작이 고작 도박과 계집을 탐하는 것이라니. 휴우, 그나마 술 쳐 먹고 깽판은 안 부려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나름 위안을 찾으려는 구인철을 향해 가장 끝에 앉아 있던 대원이 안절부절 못하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보고를 하였다. “저, 저기 대주님?” 거듭된 보고에 정신이 붕괴될 정도로 무너진 인철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귀찮은 듯 물었다. “뭐냐?” “그, 그게 그것까지 한 것 같습니다.” “뭘 했다는 말이냐?” “술을 쳐 먹고 깽판을 부린 거 말입니다.” “뭐시라? 이런 우라질 개새끼가 보자보자 하니 구만리 같은 서희의 앞길을 막은 걸로도 부족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가며 하는구나. 나 말리지 마라. 잡히면 그냥 죽여 버린다.” “진정하십시오, 대주님.” 20명의 대원들이 모두 덤볐음에도 불구하고 인철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길길이 날뛰며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부수는 인철의 행동에 객잔의 2층은 전쟁터처럼 변하고 말았다. 주인은 그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떨구었다. “대주님? 고정하십시오. 깽판을 친 대상을 들으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것입니다. 제발 고정하고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지금 도박에 여자, 술까지 쳐 먹고 깽판을 친 녀석의 만행을 듣고도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절대 그딴 녀석에게 안겨주기 위해 금이야 옥이야 키운 동생이 아니란 말이다. 저리 비키지 못해? 말리면 늬들도 다 죽는다.” “시봉세의 팽철영을 손봐주었답니다.” 마지막 보고를 하던 대원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평소 차분한 모습의 대주지만 한번 꼭지가 돌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큰 사단이 벌어졌던 전례가 많았기에 극약처방으로 무작정 소리를 지른 것이다. 역시나 고함을 친 효력이 금새 발동하며 구인철이 탁자의 나무다리 하나를 쥔 채 그대로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방금 누구라 그랬느냐?” “손을 봐준 대상이 오정회에 속한 시봉세의 팽철영이라 그랬습니다.” “팽철영이면 하북 팽가의 소가주라는 그 망나니 녀석 말이냐?” “그렇습니다. 어찌나 호되게 당했는지 앞으로 두 달은 요양을 해야 칼을 쥘 수 있다고 하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하는 짓이 밉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는 있었구나. 그런 망나니를 손봐줄 정도면 영 맹탕은 아니었어. 아무튼 취선루로 가자. 여기 망가진 기물 값은 알아서 변상하도록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하태평으로 걸어 나가는 대주를 보며 대원들은 막내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정말 미쳐 날뛰는 대주는 통제 불능이었고, 자신들 스무 명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39화 평소엔 차분하고 사리분별력이 뛰어나신 분이 꼭 여동생의 일과 연관이 되면 쉽게 흥분하고 마치 딴 사람이 된 듯 행동하였다. 크게 가슴을 쓸어내린 대원들은 오열하는 주인의 손에 큼지막한 은자 열 덩이를 쥐어주더니 금세 구인철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비담은 자신으로 인해 낙양이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것도 모른 채 드디어 열흘 만에 북해의 언저리에 도착하였다. 비교적 상세히 알려준 이성보 덕분에 헤매지 않고 곧장 당도할 수 있었다. “흐음, 오지게도 춥구나. 나야 뭐 한서불침의 몸이라 상관은 없지만. 그나저나 경치 하나는 끝내 주는구먼.” 하얗게 펼쳐진 설원을 보며 비담은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경치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비담의 감각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여러 개의 기운이 잡혔다. “호오, 마중까지 나오셨어?” 잠시 후. 눈처럼 하얀 백의를 입은 일단의 여인들이 나타나 칼을 겨눈 채 잔뜩 경계하며 비담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여기는 빙궁의 영역이다. 감히 금남의 구역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가 무엇이냐? 바른대로 말하여라.” “‘화류선’이란 부채 찾으러 왔습니다.” “헉!! 드디어...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뭣들 하느냐? 어서 궁주님께 보고를 드리거라.” “엥? 그냥 화류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뭐 다른 거는 안 물어보셔도 되요?” “필요 없습니다. 어서 서둘러라.” “흐음, 절차가 간소하고 빨라서 좋긴 하지만.” 분분히 하얀 눈처럼 몸을 날리는 여인들을 감상하며 비담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로 바라보는 여인들 때문에 비담은 어디에 시선을 고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전쟁에 나갔다 십년 만에 돌아온 서방님을 기다리다 만난 아낙도 저런 눈빛과 표정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아무튼 화끈거림을 억지로 참으며 기다리기를 한 식경. 일단의 여인들이 빛의 속도로 날아와 비담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하였다. “빙궁의 여인들이 은공의 후인을 뵙습니다.” 공손하고 지극한 환대에 비담은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토록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백의를 걸친 중년의 미부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빙궁의 궁주로 있는 소설수(素雪手) 나소희라 하옵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궁으로 드시지요.” 만년설도 녹여버릴 만큼 화사한 미소를 지닌 여인의 정체는 바로 빙궁주 나소희였다.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인 아니 잔인할 정도로 배척하는 빙궁의 여인들임을 감안할 때 직접 궁주가 나서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정말 파격적인 일이었다. 비담도 어느 정도 빙궁에 대한 정보를 이성보의 입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잔뜩 긴장을 했던 것이 사실이라 쏟아지는 관심과 환영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곳을 찾은 목적이 화류선을 찾는 것이기에 나중에 길천이나 빙궁주 나소희의 입을 통해 자세한 내막을 듣기로 하고, 우선은 화류선이 잠들어 있는 빙궁으로 이동했다. 끝없이 하얗게 펼쳐진 설원을 따라 한참을 걷자 주변의 경관과 교묘하게 어우러진 작은 둔덕이 보였다. 전혀 건물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언덕 아래에 바로 세외 신비방파인 빙궁의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극한의 오지이다 보니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던 신세계였고, 길천과 인연이 닿은 비담 역시 처음으로 밟아보는 미지의 세계였다. 조그마한 얼음 문을 통과하자 아래로 향한 계단이 보였고, 그 계단을 따라 계속 내려가자 조금씩 주변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담은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여 구경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호오, 극한의 추위에 맞서 살아가는 여인들이라 여겼건만 지하에는 이토록 별천지가 있었구나.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정도 기온이라면 땅속에서도 제법 지낼 만 하겠는걸.’ 지하로 갈수록 끝없이 이어진 통로는 점점 넓어졌다. 그런데 지하로 내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수정이 동굴 곳곳에서 영롱하게 빛나며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해 주어 어둡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더불어 여기저기 동굴의 구석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한 비담이 궁주인 나소희에게 물었다. “저기 궁주님? 지하로 내려와 어두울 줄 알았는데 곳곳에서 빛나는 수정으로 인해 전혀 어둡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밖은 살을 애일 듯 추위가 몰아치는데 이곳은 마치 봄날이라도 되는 양 훈훈한 것이 저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김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호호, 공자님께서는 이곳이 처음이라 많이 궁금하시겠군요. 300년간 외부의 손님이 들어오지 않아 설명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설명할 기회를 주셔서 영광이네요. 공자님께서 예측하신대로 이곳이 훈훈한 까닭은 바로 ‘염천(炎泉)’이 있기 때문입니다.” “염천이요?” “그렇습니다. 자연의 조화로움은 실로 오묘하여 인간의 지성으로 판단하기엔 한계가 있죠. 음과 양은 본디 서로 조화를 이루어 균형을 맞추는 법. 극한의 냉기가 가득한 절지가 바로 이곳 북해입니다. 한쪽으로 편향된 극음지기를 순화시키기 위해 자연은 지하에 염천이라는 거대한 난로를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일반 온천에 비해 그 순도가 매우 높고 강렬하여 일반인들은 이용하기 힘들지만 이곳에 터전을 잡고 수백 년을 살아온 저희들에겐 정말 보물 같은 장소지요. 나중에 꼭 공자님을 모시고 갈 것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저기 하얗게 올라오는 수증기의 정체 역시 염천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 비밀이 숨어있는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벌써부터 따뜻한 온천욕이 기대가 되는군요.” “차차 아시겠지만 부채를 가져가시기 위해 염천에 몸을 담그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기 빛나는 수정은 ‘빙회석(氷廻石)’이라 불리는데 수천 년 동안 쌓인 극음지기가 이곳 염천의 열기와 압력에 의해 석화된 것입니다. 강도는 말할 것도 없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받아 서로 반사되어 저토록 영롱한 빛과 색을 내는 것입니다. 저것 또한 자연의 신비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몰론 유사시엔 적을 향한 가장 악랄하고 무서운 무기로 변하기도 하지요.” “무기요? 그럼 저기 매달려 있는 수천 개의 빙회석이 모두 함정이란 말씀이십니까?” “네, 무서운 함정으로 돌변하지요. 여태껏 한 번도 발동된 적은 없으나 아마도 빙회석이 모두 쏟아져 내리면 이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화경 급의 고수라 해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의 장소가 되는 것이지요. 빙회석은 검강으로도 벨 수 없는 강도를 지녔으니까요.” “호오, 정말 그 정도의 강도를 지녔다니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나저나 정말 한 번도 발동된 적이 없었나요?” “물론 300년 전, 은공께서 방문하셨을 때 발동 직전까지는 갔었지요. 일이 화끈하게 잘 마무리되어 나중에 유야무야 발동이 멈추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도색성께서 참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셨네요. 그 양반이 왜 여기까지 흘러들어와 무슨 일로 화끈한 마무리를 지었는지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헌데 저는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검강으로도 벨 수 없다는 빙회석을 도대체 무슨 수로 한꺼번에 떨어트린다는 것인지.” “호호호, 참 호기심이 많으시군요. 극비 중에 극비인 사항이라 함부로 발설할 수 없습니다. 허나 공자님께서 화류선의 진정한 주인이라 확인이 되면 모든 것을 가르쳐드릴 것이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십시오.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의 원리만 알고계신다면 매우 간단한 일이니까요.” 비담은 고드름, 고드름을 입으로 되 뇌이며 궁주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가 확 밝아지며 큰 공동이 보였고, 그곳에 여러 개의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길을 따라 빙궁의 여인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비담이 지나가는 속도에 맞춰 깍듯이 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