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15편 (15/62)
가볍게 이성보를 배웅한 길천은 내공을 이용해 취기를 다스릴 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그리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정중히 인사를 올린 이성보가 방을 빠져나가자 길천은 기다렸다는 듯 선화를 품에 안았다. 선화 역시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 위해 길천을 끌어안고 급박하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천이 막 선화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주무르려는 순간. 콰앙 옆방의 문이 부셔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런 썅! 오냐오냐 해줬더니 감히 내 위에 올라타? 감히 계집 주제에 겁 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죄, 죄송합니다. 소녀는 단지 대협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아가리 닥치지 못할까? 이곳의 책임자가 누구냐? 어서 썩 내 앞에 나타나 사죄하지 못할까?” 소란의 주인공은 하북 팽가의 소가주 혼원도 팽철영이었다. 잔뜩 치켜 올라가 역 팔자를 그리며 꿈틀대는 눈썹이 그의 분노가 작지 않음을 대변해주었다. 사건의 발단은 간단했다. 내부 수리를 마친 취선루의 기녀들이 남자를 다루는 기술이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다는 소문을 듣고 평소 여색을 밝히던 팽철영이 찾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병적일 정도로 심한 남성우월주의자인 팽철영에게 그 짓을 할 때 여인이 남자 위에 올라탄다는 것은 대단한 수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내막을 알 리 없었던 기녀는 길천에게 배운 방중술대로 체위를 바꾸다가 그만 팽철영 위에 올라타고 만 것이다. 몸을 덮쳐오는 희열에 잠시 이성의 끈을 놓고 있었던 팽철영은 어느 순간 기녀의 출렁이는 가슴을 올려다보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몸이 식어버렸고, 대신 그 자리엔 불같은 분노만 가득 차올랐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팽철영은 다짜고짜 기녀를 들어 문을 향해 던져버렸고 놀란 눈으로 용서를 비는 기녀를 향해 윽박지르는 중이었다. “소녀의 잘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사오나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아악!” 쫘악 “너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른다?” 기녀는 애처롭게 떨며 용서를 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팽철영의 따귀였다. 기녀의 뺨이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팽철영은 일반인 그것도 여인을 상대로 무공을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아 순수한 완력만으로 따귀를 쳤으나 위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고 깔아뭉갰다는 생각에 더 과하게 힘을 사용한 것도 작용을 하였다. 그런데 팽철영의 눈에 기녀가 아직도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오냐오냐 봐주었더니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드는구나. 네 년의 상태를 보아하니 루주라는 작자는 보지 않아도 뻔해. 오늘 단단히 가르침을 줄 것이니 알아서 새기거라.” “아악! 악!” 퍽, 퍼억 인정사정없이 가녀린 여인의 몸을 구타하는 팽철영의 눈빛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점점 커져가는 복도의 소란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이 하나 둘 구경을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쳐 날뛰는 팽철영의 모습에 잔뜩 주눅이 들어 말릴 생각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일방적인 구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구타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 발만 둥둥 구르는 사람들 틈으로 드디어 거나하게 취한 길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어떤 개호로새끼가 달짝지근한 휴가를 방해하는 거냐? 마지막 밤이라 조용히 넘어가려 했는데 말이야, 딸꾹.” 아직도 손에 남아있는 선화의 보드라운 가슴의 감촉에 입맛을 다시며 술에 취한 길천이 툴툴거렸다. 팽철영은 자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욕을 내뱉는 주정뱅이 사내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35화 기절하여 축 늘어진 기녀의 몸을 한쪽으로 팽개친 팽철영은 저벅저벅 길천을 행해 다가왔다. 엄청난 분노로 인해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이 더욱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방금 나에게 말한 것이냐?” “꺼억!” 팽철영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길천의 트림이었다. “아! 미안허이. 내가 하도 오랜만에 술을 즐겼더니 몸이 통제가 안 되는구먼. 방금 뭐라 그랬나?” “후후, 아무리 천박하고 가진 것 없는 미천한 놈이라도 제 목숨 소중한 법은 알아야하거늘. 다시 한 번 묻겠다. 방금 나에게 욕을 한 것이 네놈이냐?” “지랄하네. 딸꾹. 좁디좁은 복도에서 생생하게 들어놓고 도대체 꼭 확인을 하는 저의가 뭐냐? 허리에 칼 차고 다니는 놈들은 이래서 문제야. 그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는 꼴이라니. ‘네, 제가 당신에게 개호로새끼라고 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싸우면 덜 미안해지냐? 형님이 오늘 간만에 기분 좀 내고 달릴 거니까 빨리 끝내자. 여기는 좁아서 그렇고 후원으로 가서 붙을까? 딸꾹.” “허어!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따위 망발을 늘어놓는 것이냐? 가문의 어른들께서 일반인을 해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계시지만 수틀리면 오늘 네 목숨 거두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도 덤빌 생각이냐?” “당신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정체를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지. 너의 정체는 개.호.로.새.끼 잖어? 그치? 정확하게 맞췄지? 나 이런 거 잘 맞춰. 히히, 딸꾹. 사내가 얼마나 칠칠치 못하면 여자나 때리고 말이야. 가운데 달고 다니는 그 물건이 아깝다, 새끼야.” “으음.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상관없다. 팽가를 모욕한 너의 죄를 물어 목숨을 거둘 것이다. 너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고 말았다.” 으스스하게 울려 퍼지는 팽철영의 목소리에 복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나 술에 취해 호기롭게 나섰던 청년의 목이 댕강 날아가는 끔찍한 장면이 모두의 머릿속에 이 순간 그려지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힘겹게 걷는 길천의 등을 보며 팽철영은 일순 어이가 없었다. 대관절 중원 오대세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하북 팽가를 옆 동네 강아지쯤으로 여기는 태도도 우스웠지만 전혀 무공을 익힌 흔적도 없으면서 당당히 앞서 걷는 만용에 기가 찼던 것이다. ‘술에 취해 자기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위인이 왜 나서서 화를 자초하는지 모르겠군. 가문의 존장들이 무서워 함부로 죽일 수는 없으나 평생 폐인으로 살게끔 만들어줘야만 직성이 풀릴 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 네 자신을 원망하거라.’ 취선루의 후원에 당도한 길천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체내의 내공을 이용하여 취기를 몰아내었다. 순식간에 진하게 퍼져나가는 주향에 팽철영은 당황하고 말았다. “뭐, 뭐지? 무공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팽철영은 최소 절정급 이상의 무인이 아니고서는 체내의 내공을 이용하여 취기를 몰아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팽철영을 더욱 긴장하게 만든 것은 취기를 정화하여 몰아내는데 걸린 시간이다. 눈앞의 젊은이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취기를 몰아내었다. 자신의 상식으로 가문의 가주인 자신의 아버지도 저토록 빨리 취기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최하 화경 급의 고수임이 분명했고, 오히려 선을 넘은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팽철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길천의 신위를 목격한 팽철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누, 누구십니까?” 팽철영은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기어 들어가는 전형적인 소인배의 모습을 보이며 어느새 경어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너 왜 그러냐?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것이라 그러던데 혹시 그거냐? 몸으로 진하게 대화를 나누자는데 갑자기 웬 존댓말?” “그게 아니라 왜 정체를 숨기고 저를 모욕하셨는지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대관절 누구시기에 입에 담기도 민망한 욕을 제게 하신 겁니까?” “꼴에 명문가의 자손이라 유세하는 거냐? 뭐 다행히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니 목숨은 거두지 않으마. 괜히 목숨 값을 받아낸다며 떼로 덤비면 골치 아프니까 가볍게 몸이나 풀자. 덤벼.” 불량스럽게 손을 까딱까딱 거리며 비아냥거리는 길천의 모습에 팽철영은 화가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나름 명문가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이 효과를 발휘하였고, 그것이 팽철영에게 여벌의 삶을 선물하고 있었다. 물론 팽철영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당신에게 덤빌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를 모욕한 것에 대한 사과는 받아내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정파 나부랭이들은 정이 안가요. 화끈하게 몸으로 대화를 나누자는데 뭔 말이 그리도 많은지. 임마? 네가 먼저 기녀를 두들겨 팼잖아? 그러니까 나도 너에게 욕을 하고 두들겨 패겠다는데 뭐가 잘못됐냐?” “그럼 제가 왜 여인을 때렸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다짜고짜 욕을 하고 싸움으로 해결하자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만.” “휴우. 근사하게 모든 절차 다 밟아가며 밟히겠다는데 그 정도는 눈감아 줘야지. 주둥이만 산 팽가의 꼬맹아, 힘없고 연약한 아가씨를 왜 개 패듯 때리셨나? 조금이라도 덜 맞고 싶으면 신나게 나불거려야 할 거야.” “듣자듣자 하니 말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오? 보아하니 나랑 연배도 비슷한 것 같은데 어찌 그리도 말을 함부로 한단 말이오? 당신의 무공이 높다는 것은 인정하나 예의를 갖춰 주었으면 좋겠소.” “그건 인간일 때나 적용되는 것이고. 개보다 못한 놈한테 갖출 정도로 여분의 예의를 들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멍멍이보다 못한 자네가 이해하게. 그리고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게. 자네의 몇 대조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나랑 무난하게 말을 섞을 수 있는지 따지려면 골치만 아프니까 그건 그냥 넘어가고. 그나저나 빨리 말 안 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기다리는 거야. 누구처럼 숫자를 세야만 주둥이를 열래?” “가, 감히 팽가의 소가주인 나를 이리도 핍박하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오? 오늘은 내가 약세를 인정하고 잠시 물러가겠지만 언젠간 반드시 오늘의 치욕을 되갚아 주겠소.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오.”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팽철영을 가만히 두고 볼 길천이 아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길천의 입매가 더욱 휘어지며 짙어지더니 바로 팽철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디서 꼬랑지를 말고 도망가려고. 난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줬어. 나중에 딴소리하면 아주 팽가네 기둥을 사정없이 뽑아버릴 테니 알아서 하고, 오늘의 가르침에 더 이상 토를 달지 말거라.” “흐익!” 팽철영은 빛의 속도로 달려드는 길천을 보며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서둘러 도를 뽑는다고 뽑았으나 채 반도 뽑지 못하고 길천과 마주치고 말았다. 길천은 팽철영의 도병을 쥐고 다시 도갑에 그대로 밀어 넣어 버렸다. 쾅 길천은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팽철영의 몸을 들이받았다. 팽철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아가 볼썽사납게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길천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공중으로 도약하여 쓰러져 있는 팽철영의 몸을 무릎으로 내리 찍었다. 빠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팽철영의 정강이뼈가 그대로 부러져나갔고, 곧 후원은 팽철영의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아아악!!!” “명문가의 자손이라 뼈가 튼실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실하구만.” 길천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팽철영의 복부를 다시 냅다 걷어차 버렸다. 퍼억 “으윽!”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팽철영이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팽철영은 태어나서 오늘과 같은 수모와 고통은 정말 처음이었다. 칼을 잡은 이후로 가문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로 기대와 질시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던 팽철영이기에 지금 이 순간 몸의 고통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 더욱 치욕스러웠다. 36화 길천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팽철영과 같은 유형의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설프게 손을 보든 제대로 손을 보든 저런 유형의 사람은 꼭 후환을 남기는 법이었다. 특히나 명문가의 후광이라는 달콤한 열매에 길들여진 망나니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고 편견과 그릇된 사고방식을 마치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에 확실히 손을 봐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백약이 무효한 게 현실이기는 하였지만. 길천은 답답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팽철영의 머리채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항복하려고? 에이, 싱겁게 그러지 말고 좀 더 버텨봐. 사나이는 모름지기 강단이 있어야 대접을 받는 거야. 아직 서너 군데 뼈가 더 부러져야 끝날 거니까 기대하라고. 그리고 왜 아가씨를 때렸는지 잘난 네 녀석의 주둥이로 떠들기 전까진 끝낼 생각이 없으니까 그것도 참고하도록.” 쫘~악!! 길천은 팽철영의 얼굴이 보기 사납게 부어오를 때까지 계속 좌우로 따귀를 때렸다. 길천의 손아귀에 잡힌 팽철영은 마치 어두운 밤길에 사나운 호랑이를 만난 동물처럼 속수무책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당했다. “마, 말하겠습니다.” “엥? 벌써 말하려고? 이제 슬슬 손맛도 좋아져 재미가 붙고 있는데 조금만 더 참았다가 말하면 안 될까?” 아쉬움이 역력한 길천의 말에 팽철영은 그만 질리고 말았다. 자신도 무림에서 악독하기로 유명했지만 눈앞의 젊은이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정하듯 부탁하는 표정이나 말투가 진심이라 은연중 부르르 몸을 떠는 팽철영이었다. “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낱낱이 말하겠습니다.” 몇 대 때리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길천은 진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쩝, 할 수 없지. 굳이 말하겠다는데 기회는 줘야겠지. 그래, 어째서 아가씨를 때렸는가?” “그, 그게 저 년이 감히 교합을 하는 도중에 제 위에 올라타서...” “고작?” “고작이라니요. 감히 여자 주제에 남자 위에 올라탄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허어, 당연히 말이 되지. 네 녀석의 허리를 부러뜨려 줄까? 평생 그 짓 할 때마다 여자가 올라타도록? 도대체 어떤 영단을 잘못 쳐 먹으면 그런 부작용이 생기는 거냐?” “부작용이 아닙니다. ‘남자는 하늘’ 이게 당연한 것입니다. 감히 여자 주제에.” “휴우, 마지막 밤을 뜨겁게 보내려 했건만 삐딱한 개망나니 바로잡는데 할애하는 수밖에. 오냐, 한바탕 어우러지자는데 뭘 더 망설이겠냐. 네 놈이 어느 구멍을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인지 단단히 각인시켜주마.” 길천은 상단전에 머물며 관찰한 비담의 평소 행실 중에 꼭 따라 해보고 싶었던 구타의 기술들을 상기하며 복날 개를 패듯 팽철영을 패기 시작했다. 그날 밤, 밤새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정체 모를 비명에 낙양의 개들은 영문도 모르고 숨소리마저 죽인 채 악몽 같은 밤을 지새웠다. 취선루의 후원. 한바탕 폭풍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그곳엔 만신창이가 된 사내 하나만 널 부러져 있었다. 가끔 미약하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아직 목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았으나 꼴은 말이 아닐 정도로 엉망이었다. 한때는 진열대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을 최고급 비단은 군데군데 보기 사납게 찢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남아있는 핏자국이 처참했던 구타의 현장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개운한 표정으로 탁탁 손을 턴 길천은 어느새 동녘으로 뿌옇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쓰러져 있는 사내를 다시 한 번 걷어찼다. “니미럴,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망나니 교육시키느라 모두 허비하고 말았구나. 진탕 술 퍼먹고 선화랑 침상에서 오붓하게 뒹굴기에도 모자랄 시간을 냄새나는 사내놈에게 헌납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담이를 구슬려 한번 제대로 노는 수밖에.” 휘적휘적 걸어가는 길천의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제 쓰러진 사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 살아있을까?” “에이, 그걸 말이라고 하나. 분명 죽었을 거야. 아무리 칼을 차고 다니는 무사라고 하더라도 밤새 무자비하게 얻어 터졌으니 목숨이 붙어 있지 않을 거야.” “어? 아니야. 자세히 봐봐. 조금씩 꿈틀거리는데?” “정말이네. 이럴게 아니라 어서 관리인에게 말해 의원을 불러야겠어. 허허, 그나저나 맷집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젊은이군. 얻어터지는 꼴을 봐서는 관 하나 짜겠구나 싶었는데 말이야.” “그러게 왜 여자를 때려서 저런 참변을 당하는지 모르겠군. 무사들 중에 미친놈이 많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여자가 올라탔다고 때리는 게 말이나 되는가?” “쉬잇! 목소리 좀 낮춰 이 사람아. 괜히 누워있는 젊은이에게 봉변당하지 말고.” “흠흠, 날이 꼴딱 샜으니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젠장! 기녀랑 그 짓도 제대로 못했는데 말이야. 조금 아쉽기는 하군.” “대신 신나는 싸움 구경을 했잖은가. 우리가 언제 저런 진귀한 구경을 해보겠는가. 아무튼 박진감 하나는 최고였어. 그렇게 시원하게 날아가는 장면은 돈 주고도 구경하기 힘들 거야.” 취선루의 관리인들이 나타나 부산스럽게 후원을 정리하는 동안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어떻게 흐른 지도 모를 만큼 호쾌하고 통쾌한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기녀를 사기 위해 사용한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길천은 약속했던 사흘이 모두 지났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상단전에 머물고 있는 비담을 깨웠다. 상위의 원영신인 자신은 비담의 상단전에서 마음대로 구경하며 머물 수 있었지만, 아직 영력이 약한 비담에겐 무리였다. 그래서 비담은 그냥 영체의 상태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동생? 아직 자고 있나?” “으흐음. 아! 형님이세요?” “흐흐, 나 말고 누가 또 동생을 깨우겠는가. 그나저나 약속했던 사흘이 모두 지난 모양이야.” “지났으면 지난 것이지 ‘지난 모양이야’는 또 무슨 말입니까?” “쩝, 어떤 개호로새끼의 정신머리 좀 고쳐놓느라 하루를 허비한 게 너무 아쉬워서 그랬지. 아무튼 자네와 했던 약속은 철썩 같이 지켰네.” “개호로새끼요? 설마 무슨 사고치신 거예요?” “아닐세. 절대 사고치지 않았어.” 비담의 영체가 빛나며 순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자 결국 길천은 팽철영과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내 말을 믿어주게. 하늘에 맹세코 절대 사고치지 않았어. 단지 약속한대로 이막주에게 방중술을 전해주었는데 고맙다며 한사코 술을 대접하겠다고 그러지 뭔가.” “형님이 술상을 내오라고 시킨 것은 아니고요?” “허허, 귀신 잡을 일 있나? 귀신 체면이 있지 내가 어찌 인간에게 술을 구걸한단 말인가. 자네도 나를 겪어봐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기야 고결하고, 우아하고, 고상한 형님 성격에 미.천.한.인.간.따.위.에.게 술을 구걸하진 않으셨겠죠.” “흠흠, 당연하지. 아무튼 이막주가 준비한 성의를 감안하여 못이기는 척 술을 마시고 있는데 글쎄 그 개호로새끼인 팽가의 꼬맹이가 옆방에서 기녀를 패고 난동을 피우지 뭔가. 그래서 무림의 선배로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따끔하게 교훈을 준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네. 정말이야.” “팽가의 꼬맹이요?” “하북에 있는 팽가의 소가주라나 뭐라나 하는 녀석일세. 보기보다 허약해서 별로 손봐줄 것도 없었네. 식후 간식거리도 아니었으니 자네는 신경 쓰지 말게.” “알겠습니다. 형님 얘기를 듣고 보니 별일도 아니네요.” “그렇다니까. 정말 별일 아니었어.” “그나저나 막주가 부채의 행방에 대해 알려주던가요?” “그건 내가 거나하게 취해서...아, 아니 오늘 아침에 찾아오면 알려준다고 하였네. 뭐 하는가, 어서 서둘러 막주를 만나러 가야지. 바쁜 사람 기다리게 하면 못써.” 말이 잘못 튀어나와 자신의 만행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던 길천이 다급히 비담의 영체를 상단전의 궁전에서 쫓아내 버렸다. 개운치 않은 느낌에 비담은 한사코 버텼으나 워낙 완강하게 밀어내는 길천의 영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다. 비담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길천이 크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37화 “설마 담이가 나중에 팽가랑 부딪치진 않겠지? 하기야 강호가 얼마나 넓은데 다시 만나겠어. 그리고 워낙 심하게 얻어터져서 사실 담이의 그림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녀석이니 별일 없을 거야. 휴우, 역시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하더니 딱 그 말이 맞았어.” 의자에 벌러덩 앉은 길천이 이내 코를 골며 깊은 숙면에 빠졌다. 사실 영력이 높은 길천에게도 지난 사흘간의 기행은 알게 모르게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사흘 만에 다시 자신의 육신을 되찾은 비담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막주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이성보는 이미 지난밤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보고받은 후라 안절부절 못한 채 비담을 맞이하였다. “어르신, 어쩌자고 팽가의 소가주를 건드린 것입니까? 기녀와 있었던 일은 제가 잘 무마하면 되었을 것을 어르신께 혹여 불상사라도 생길까 걱정입니다.” “예? 아! 그 일은 모두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별일 아니라고 하셨는데.” “호, 혹시 비담공자님?” “예, 접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원래 머물렀던 장소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사흘 동안 혹시 무슨 문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