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성인소설) 호색 -완 - 13편 (13/62)

2026-10-04 14:56:00 조회 7
그러기를 약 반 각(약 7분). 다리가 더 튼실한 귀뚜라미가 승기를 잡고 맹렬히 공격을 감행했고, 다른 귀뚜라미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승패가 결정되려고 하자 사람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리며 응원의 함성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다 중간의 심판이 다리가 튼실한 귀뚜라미의 승리를 선언하자 한쪽에서는 엄청난 환호와 함성이 터져 나왔고, 다른 한쪽에선 절망스런 탄식과 한숨이 새어나왔다. 관리인들은 이러한 반응에 무신경한 채 바로 다음 경기를 준비하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또 귀뚜라미를 감별하며 돈을 거느라 정신이 없었다. 경기를 지켜보던 비담도 마음이 동했는지 유심히 다음 출전선수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난주 보림루에서 받은 은자 500냥짜리 전표를 머리가 큰 귀뚜라미에게 몽땅 걸어버렸다. 액수를 받아든 관리인이 놀란 눈으로 비담을 쳐다보았다. “은자 500냥을 전부 거신 게 맞습니까?” “맞소, 저기 있는 머리가 큰 놈에게 모두 걸었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요?”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액수가 너무 큰지라 당황스럽기는 합니다. 이만한 액수라면 집을 한 채 살 수도 있는 큰돈이라서 말이지요.” “판돈에 한도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그냥 모두 걸어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은자 500냥을 모두 걸도록 하겠습니다.” 비담은 고개를 흔드는 관리인을 향해 한번 씩 웃어주고는 이내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오늘 도박장에 온 목적은 선화라는 여인과 접촉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인상을 줄 필요가 있어. 거지 영감의 충고대로 저만한 돈을 잃거나, 혹은 따고 기다리다 보면 분명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인간, 특히나 남자의 심리는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다. 거기에 늘 승패가 숙명처럼 정해지고 한끝 차이로도 좌우되는 무림이라는 첨예한 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남자라면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비담 역시 생각은 저리하고 있었으나 지는 것은 극도로 싫어하는 강호의 남자였다. 비담은 내공을 이용해 안력을 높인 상태에서 귀뚜라미의 세세한 생김새부터 움직임까지 꼼꼼하게 관찰하여 전투력을 측정하였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화기침습도 몰래 운용하였다. 한마디로 자신이 건 귀뚜라미 주변의 공기를 살짝 데워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막을 알리 없는 사람들은 그저 귀뚜라미 경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내 비담이 첫 번째로 돈을 건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머리가 큰 귀뚜라미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기이한 광경에 입을 떠억 벌리고 말았다. 오랫동안 경기를 관리했던 관리인들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방적인 경기에 당황하고 말았다. 분명 비슷한 수준의 귀뚜라미를 섭외하여 경기를 마련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약이라도 처먹었는지 흥분해서 날뛰는 머리 큰 귀뚜라미로 인해 결국 경기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비담은 자신이 건 귀뚜라미가 압승을 거두자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희희낙락 관리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관리인은 어마어마한 액수에 울상을 짓더니 은자 1,000냥짜리 전표를 꺼내 주었다. 비담은 바로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귀뚜라미를 살핀 후 망설임 없이 바로 은자 1,000냥을 다리가 긴 귀뚜라미에게 걸었다. 관리인은 도박의 신이 아닌 이상 비담이 한번은 질 것이라 예상하고 흔쾌히 돈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관리인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담은 신들린 끗발을 자랑하며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렇게 총 다섯 번에 걸쳐 비담이 승리하자 액수는 무려 은자 1,6000냥(황금 1,600냥)까지 불어나게 되었다. 울상을 지은 관리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황금 1,600냥짜리 전표를 내어주며 더 이상 이렇게 많은 액수의 판돈을 걸면 경기를 진행시킬 수 없다며 하소연하였다. “고, 공자님. 이제 이만 한 돈을 거시면 저희들도 경기를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다른 도박판으로 옮겨 주십시오. 저희들도 나름 사정이 있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쩝, 할 수 없지요. 그리 부탁을 하시니 다른 도박을 즐기는 수밖에요. 아무튼 즐거웠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 관리인의 표정이 똥이라도 씹었는지 잔뜩 일그러졌다. 그리곤 비담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사람을 불러 은밀히 속삭였다. “너는 빨리 이와 같은 정황을 상부에 알리거라.” “예.” “휴우, 루에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구나. 제발 선화아가씨가 만회를 해주셔야 할 텐데.” 귀뚜라미 경기의 관리인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상부에서 재빨리 도박장에 선화를 투입하였다. 비담은 지금 주사위의 홀짝을 맞추는 판에 앉아 열심히 돈을 잃고 있는 중이었다. 주사위의 상태를 살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사위에 화기침습을 걸 수도 없어 속수무책 당하는 중이었다. 나름 규칙을 찾아보려 애를 썼지만 수년간 단련된 전문 도박꾼들을 상대로는 방법이 없었다. 상부에 보고가 되고 선화가 투입되기까지의 짧은 시간에 무려 황금 600냥을 탕진하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승부욕과 오기가 발동하여 그냥 놔두었다가는 귀뚜라미 경기에서 땄던 돈의 태반을 날릴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 적절한 시기에 선화가 투입되어 비담의 불운과 불행을 막아주었다. “공자님? 이번엔 저랑 경기를 하시는 게 어떠세요?” 갑자기 도박장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와 비담 앞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비담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방긋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환영을 하였다. “하하하, 저야 아가씨처럼 예쁜 분이랑 경기를 하면 영광이지요. 그나저나 은은히 비치는 속옷의 색이 검정색인 모양인데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뭐라고요? 예의와 염치를 아시는 분인 줄 알았더니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희롱부터 하시는군요. 저는 당신 같은 사람과는 상종하기도 싫으니 그만 물러가 주십시오.” 따~악 도박장을 가득 울리는 따귀소리에 사람들이 모든 행동을 정지한 채 주사위 판이 벌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이내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강 짐작들을 하고 비담을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가끔 도박장을 찾는 사람 중에 도박을 진행하는 여성을 상대로 희롱하는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쯧쯧, 아직도 저런 몰상식한 녀석이 다 있구먼. 돈을 따려고 도박장에 왔으면 돈이나 딸 것이지 왜 수작을 부리고 지랄이야.” “그러게나 말일세. 보아하니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돈 좀 땄다고 제 세상이라도 만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게 없나보지. 그나저나 말세구만, 말세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비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묵고 있는 객잔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비담이 사라진 후에도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 듯 분해하며 한동안 비담을 입에 올린 채 화를 삭이지 못했다. 30화 객잔으로 돌아온 비담은 얼얼한 볼을 만지며 문득 떠나온 서희가 생각이 났다. 자신의 볼에 알싸한 추억과 사랑이란 감정을 선물한 여인. 그렇게 흑막에서 사람이 찾아올 때까지 비담은 서희와의 일들을 회상하였다. 거지영감의 말은 확실했다. 정말로 반 시진(1시간) 후에 흑막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자신이 묵고 있는 숙소를 어찌 알았는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담의 방으로 들어온 사내는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도박장의 선화에게서 모두 들었습니다. 흑막에 연통을 넣으신 분이 공자님이십니까?” “그렇소. 내가 흑막에 부탁할 일이 있어 그리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화류선’이라는 부채의 행방에 대해 알고 싶소. 가능하겠소?” “물론입니다. 저희 500년 전통의 흑막은 단 한 번도 고객을 실망시켜 드린 적이 없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정보료가 꽤 비싸니 그것은 공자님께서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시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오?” “한 시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럼.” 사내는 짧게 시간만 명시한 후 바로 방을 빠져 나갔다. 비담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사내의 모습을 보며 흑막이란 단체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결과물을 확실히 가져온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약속했던 한 시진이 지나자 예의 그 사내가 다시 비담의 방을 방문했다.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정보를 찾았습니다. 단, 직접 흑막의 본단으로 정중히 모셔오라는 막주님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부채의 행방을 찾았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정확히 지금 누구의 손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막주님께서 그 정보를 원하시는 공자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야만 정보를 내어드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가봐야지요. 지금 당장 출발해도 됩니까?” “저를 따라 오십시오.” 비담은 서둘러 사내를 따라나섰다. 개방의 정보력으로도 행방이 묘연했던 부채의 소재를 드디어 흑막을 통해 알게 되자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길천에게 듣기로는 그 부채만이 화류선법의 진정한 오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내는 정중히 모셔오라는 막주의 명대로 비담을 깍듯하게 챙기며 흑막의 본단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하였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의외로 취선루였다. “아, 아니 이곳은...?” “여기가 바로 흑막의 본단이 있는 곳입니다. 취선루주가 바로 흑막의 막주님이십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시지요.” 비담은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급히 사내의 뒤를 따라 취선루로 들어갔다. 사내는 도박장이 아닌 루의 후원 쪽으로 비담을 안내하였다. 그리고는 어느 방 앞에 멈추더니 보고를 하였다. “막주님. 분부하신대로 공자님을 모셔왔습니다.” “공자님을 안으로 뫼시어라.” 방안에서는 걸걸한 사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막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내는 비담에게 들어가라는 시늉을 하였다. 비담은 온통 비밀투성이인 흑막의 막주를 직접 대면하고 부채의 행방도 드디어 알 수 있겠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하였다. 비담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담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널따란 사내의 등이었다. 창문 앞에 서서 묵묵히 도박장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저 남자가 아마도 취선루의 루주이자 흑막의 막주인 그 사람일 것이다. “소생 비담이라 합니다. 이렇게 흑막의 막주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담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네자 등을 보이고 있던 의문의 사내가 천천히 돌아서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하하, 반갑습니다. 저는 흑막이라는 조그마한 단체를 운영하는 흑혈수(黑血手) 이성보라고 합니다. 이쪽에 앉으시지요.” 너털웃음과 함께 비담에게 자리를 권하는 흑막의 막주 이성보는 40대 초반에 기골이 장대한 호한이었다. 비담은 그런 이성보의 첫인상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앉겠습니다. 듣자하니 제가 직접 와야만 정보를 주실 수 있다고 하던데 무슨 연유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화류선’이란 부채의 행방을 찾는 분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그리 한 것입니다. 혹시 결례가 되었다면 용서를 하십시오.” “결례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근데 막주께서는 ‘화류선’이란 부채의 내력에 대해 알고 있으신 것 같은데...제 직감이 맞습니까?” “하하하, 그렇습니다. 저는 그 부채의 내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님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 부채를 찾고 있는 것인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다짜고짜 이유를 말하라고 하시니 조금 당황스럽군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냥 정보에 해당하는 금액만 치르면 정보를 넘겨주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보통의 정보라면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이 부채의 행방에 책정된 정보료는 돈이 아니기에 연유를 물은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면 대체...” “기술입니다. 밤을 화려하게 지셀 수 있는 천고의 기술. 이 정보의 가치는 오로지 그 기술로만 대신할 수 있습니다.” “제게 그 기술이 없다면?” “정보 역시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힘으로 빼앗겠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500년 전통의 흑막을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흑막은 어둠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흑막이 무림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결코 그 정보는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 정보의 암어를 해독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 자결할 테니까요. 대답이 되었습니까?” “정보를 지키는 것이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하다는 말씀입니까?” “정보를 사고파는 상인에게 정보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휴우, 할 수 없군요. 부채의 행방에 대해 꼭 알아야하니 적당히 타협을 하는 수밖에요. 연유가 궁금하다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그 부채를 사용하셨던 분의 전인입니다. 그분의 무공을 익혔기에 그분이 사용하셨던 그 부채가 필요한 것입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비담의 대답을 들은 이성보가 쾌재를 부르며 무언가에 대한 기대와 갈망으로 눈을 반짝였다. “여, 역시. 제 예상대로 그 분의 전인이셨군요. 그렇다면 단순히 무공만 익히신 게...”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 것입니까?”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고 민망하지만 밤에 침상 위에서 화려하게 꽃피운다는 색공 거시기...” “휴우, 익혔습니다.” “오우!! 역시.” 연신 감탄사를 뱉는 거대한 체구의 장한을 보며 비담은 갑자기 회의가 밀려왔다. 좋았던 첫인상은 모두 허당이었다. 어둠의 정보 상인이네 500년 전통이네 하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던 것이 불과 몇 초 전이었다. 그리고 정보가 목숨보다 더 중하다는 말을 듣지만 않았어도 지금처럼 심한 배신감까지는 느끼지 않았을 텐데. 31화 지금 이성보의 눈빛은 마치 평소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눈앞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아이보다 더 간절해 보였다. “혹시 부채의 행방에 대한 정보와 교환한다는 기술이...?” “네, 그것입니다.” “하지만 문외불출(門外不出)이란 말처럼 한 문파의 무공은 함부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를 합니다. 그런 사실을 알만한 분이 어찌 사사로이 다른 문파의 기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입니까?” “아닙니다. 공자님의 무공을 훔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파렴치한으로 저를 보지 말아주십시오. 그냥 무공이나 색공거시기와 관련이 없는 방중술만 가르쳐주시면 됩니다. 선대 흑막의 막주님께 전수해주셨던 그 기술만 가르쳐 주시면 충분합니다.” “선대 흑막주에게 가르쳐준 기술이요?” “그렇습니다. 300년 전, 흑막주셨던 흑조(黑鳥) 기가선 어른께 가르쳐주셨던 그 기술이면 충분히 만족하고 정보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색공이나 무공과는 전혀 별개의 기술이니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부탁하는 이성보를 바라보며 비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휴우, 막주께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소상히 말씀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성보는 비담이 보고 있음에도 버젓이 책장으로 다가가 비밀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금고 안에 보관된 낡은 목함에서 빛바랜 누런 책자를 꺼내더니 비담에게 건넸다. “무슨 책입니까?” “대대로 흑막의 막주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기가선 어른의 비망록입니다. 기막주께서 당시의 상황을 일기 형식을 빌려 기록해 놓은 것으로, 안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도색성 길천 어르신을 만난 일화부터 방중술을 익힌 과정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흑막을 맡게 될 막주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도 함께 적혀있고요.” 비담은 빛이 바랜 누런 책자에 300년 전 도색성 길천의 일화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웠다. “그럼 이 책자에 그 방중술도 적혀있지 않겠습니까?” 비담의 물음에 이성보가 잔뜩 성을 내며 씩씩거렸다. “뒷장을 넘겨보십시오.” 비담은 이성보가 시키는 대로 책의 뒷장을 넘겨 살펴보았다. 책에는 누군가 찢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엥? 후인에게 전한다. 그리고 찢어져있네요?” “그렇습니다. 아마도 기가선 어른께서는 그때 익혔던 방중술을 후인에게 남기셨던 것으로 추측되어집니다. 한데 어떤 개망나니 같은 전대 막주가 흑심을 품고 그 부분을 찢어간 것입니다.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정말 어처구니없고 통탄할 일입니다.” 비분강개하여 외치는 이성보를 보며 비담은 할 말을 잃었다. 방중술을 마치 사문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여기니 적당히 호응을 해주기도 애매했던 것이다. “막주께서는 그게 무척 안타까우신 모양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 좋은 걸 중간에서 꿀꺽한다는 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하긴 중간에서 꿀꺽한 놈이 나쁜 놈이지요. 그나저나 이 책을 좀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읽으십시오. 도색성 길천 어르신은 기가선 막주님께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니 당연히 그 분의 전인이신 공자님도 볼 자격이 충분합니다. 안의 내용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도색성 어르신의 겉모습, 화류선이란 부채로 무공을 시전 했을 때의 모습, 막주님과의 인연 등등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독 한 부분만 찢어진 것을 제외하면 말이지요.” 한이 맺혔는지 으드득 이를 가는 이성보였다. “그럼 좀 살펴보겠습니다.” 비담은 혹여 낡은 책이 상할까봐 조심히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성보의 말처럼 책속에는 기막주와 길천의 일화가 가득 적혀 있었다. 비담이 책을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길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자 재미도 있고 신선했다. ‘오우, 형님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늘 허풍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인 것도 있었구나.’ ‘하하하, 이러니 기가선 막주가 형님을 은인으로 모셨지. 이런 일화가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양반이야.’ 비담은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어 나갔고, 읽으면 읽을수록 길천과 더욱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찢어진 부분의 앞장에 기막주가 후대의 막주들에게 남긴 유지가 눈에 들어왔다. 후대의 막주들께 전하노라. 나는 불치의 병으로 인해 후사를 볼 수 없는 몸이었다. 막역하게 지내던 친우들이 혼사를 치르고, 자손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심한 좌절감을 느끼며 고통과 절망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광명과 기연이 찾아왔다. 바로 도색성 길천 어르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분은 내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셨다. 바로 말라있던 뿌리를 다시 되살려 주셨고,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포기했던 희망과 꿈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때의 환희와 기쁨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구나. 그리고 이 기술들은 놀랍게도 자손을 보는 기쁨에서 한 발 나아가 여인들과 나에게 지극한 쾌락도 선사해 주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왔던 기연과 기쁨을 후대의 막주들에게도 전하노니부디 한낱 욕정이 아닌 지극한 쾌락과 환희를 즐기며 살아가길 바란다. 7대 흑막주 기가선 남김 흑막의 기가선 막주가 남긴 유지를 읽자 비담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뒤를 이을 막주들에 대한 지극한 마음도 느낄 수가 있었다. 어째서 이성보가 찢어진 부분에 그토록 울분을 토했던 것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비담이었다. “기막주님께서 후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우선 존경을 표하고 싶군요. 그런데 이 막주님?” “말씀하십시오.” “책을 읽다보니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제는 저도 단순한 방중술이 아님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찢어진 부분에 적혀있던 방중술을 직접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왜 찾아보지 않았겠습니까? 저를 포함한 전대의 막주들은 백방으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찾아보았지요. 하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작은 단서하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혹시 화류선이란 부채의 소재를 파악하고 계셨던 이유가?” “그렇습니다. 기막주님의 비망록 중에서 방중술 부분이 사라진 이후로 후대의 막주들은 화류선의 행방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그분의 전인과 닿을 유일한 끈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런 내막이 있어 화류선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셨던 것이군요. 막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흑막은 저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들었으니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비록 길천 어르신의 방중술을 익혔다고는 하나 당시의 방중술을 그대로 전해드리는 것이 아무래도 최상의 방법이겠군요. 잠시 방안에 귀기가 강하게 휘몰아칠 것입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기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성보는 드디어 사라졌던 방중술을 복원할 수 있다는 기대에 가늘게 몸을 떨며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