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11편 (11/62)
그리고 곧바로 천와주를 시전 해버렸다. 흡정색공(吸精色功) 탐화(耽花)의 장(場) 궁극기 천와주(穿渦柱) “발현.” “아~~~~악!!” 비담의 허리가 맹렬히 돌아가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비밀의 화원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서희는 뜨거운 불기둥이 밀고 들어오는 아픔에 쾌락의 절정에서 잠시 현실로 돌아왔다가 또 다시 아지랑이처럼 솟는 열기에 그만 넋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대자연이 태초부터 안배해 두었던 본능대로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온몸을 흔들고, 돌리고, 움직일 뿐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아! 아! 아! 아!“ 서희는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규칙적인 신음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니 의식할 수조차 없었다. 천지만물이 곧 자신이었고, 자신이 곧 천지만물이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진정한 무아지경의 세계에 초대된 느낌. 수많은 요정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장난을 치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서희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이 정지해버린 것이다. 자신의 몸 위에서 비 오듯 땀을 쏟고 있는 사내의 진지한 표정도 멈췄고, 방안을 휘감던 뜨거운 열기도 그대로 멈췄고, 촛불의 일렁임도 멈추고 심지어 떨어지는 땀방울도 공중에 멈춰있었다. ‘이게 뭐지? 왜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춰있는 걸까? 나는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지? 아! 사내의 모습이 낯이 익어. 가만히 보니 참 늠름하게 잘 생기셨네. 표정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도대체 내 안에서 용솟음치는 이 느낌의 정체가...........으, 으, 으,으, 으, 으아~으아! 으아아~~~악!!!!!’ 서희의 마음속 마지막 외침은 곧 폭풍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아~~~~~~~~~~~~악!!!!!” 그리고 시간은 다시 원래의 흐름을 되찾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렁이는 촛불, 떨어지는 땀방울, 다시 움직이는 사내. 서희는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힌 채 그대로 굳어 버렸고, 내부에서는 활화산이 터지듯 대폭발을 일으켰다. 마치 태초의 자연이 천지를 창조하고 모든 만물을 꽃 피우던 것처럼. 비담은 거세게 경련하는 서희의 몸을 안고 그대로 버텨주었다. 그리고 무려 반 각(약 7분)의 시간동안 서희의 경련은 계속되었다. 서희는 용케 기절하지 않고 다시 태어난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비담은 그런 서희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보듬어주었다. ‘불가능이라 여겼던 ‘4단 절정’, 그 꿈의 경지를 나에게 선물한 여인.’ 비담의 모험은 보기 좋게 성공하였다. 절정의 파도가 끝난 서희는 그제야 한쪽으로 픽 쓰러지며 정신을 놓았고, 비담은 그런 서희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입가에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띠운 채 서희는 비담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창문을 통해 은은하게 들어오는 달빛이 서희의 아름다운 나신을 밝게 비추었다. 비담은 곤히 잠들어 있는 서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슬며시 쓸어주었다. ‘정말 고맙소. 공허했던 나의 마음을 그대가 채워주는구려.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데 4단 절정이 비단 그대에게 기쁨을 선사했을 뿐 아니라 내게도 이리 큰 기쁨을 주는군요.’ 비담은 서희의 몸을 옆으로 돌리고는 살짝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행여 잠들어 있는 서희가 깰까봐 조심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의자에 앉은 비담은 바로 강신귀공을 펼쳐 길천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하, 형님? 보셨습니까? 저 이런 놈이에요.’ ‘어라? 어째 대답이 없으십니까? 원영신이라 잠을 자는 것도 아닐 테고.’ 비담이 거듭 부르자 그제야 길천의 의념이 전달되었다. ‘안 잔다 이놈아. 그나저나 부러운 녀석. 그래, 기분이 어떠냐? 꿈의 경지라는 4단 절정을 밟아본 소감이?’ ‘하하, 뭐 별거 있겠습니까? 그래도 3단 절정보다 확실히 화끈하고 짜릿하긴 하네요. 물론 저야 엄청난 색기를 취하고, 색공이 한 단계 올라선 것 이외에는 별다른 성과는 없지만요.’ ‘별다른 성과? 그거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나도 밟지 못했던 4단 절정을 밟았다고 지금 나 놀리는 거 맞지?’ ‘아닙니다. 제가 어찌 색공의 창시자인 형님을 놀리겠습니까? 그냥 너무 기분이 좋아 겸양을 좀 떨었던 거죠. 히히.’ ‘뭐 아무튼 축하한다. 너랑 나랑 사제지간이 아니기에 ‘청출어람’이란 말이 조금 안 어울리긴 하다만 그래도 색공을 창안한 나의 경지를 뛰어 넘었으니 당연히 축하는 해줘야지. 그런데 어떻게 ‘천와주’를 생각해 낸 거냐?’ ‘제가 매번 덤벙덤벙 거려도 보기보다 성실하고 항상 생각하는 놈입니다. 예전에 보림루에서 루주를 상대로 천와주를 사용했잖습니까?’ ‘그치. 사용했었지.’ ‘그때 영감을 받았죠. 강도만 잘 조절하면 4단 절정의 신경지를 개척하는데 정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요.’ ‘알아듣게 말해.’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저를 보는 형님의 기분이 이런 거였구나. 음...잠시만 이 기분 좀 음미할게요.’ ‘지랄한다. 빨리 말 안 해?’ 25화 ‘하하, 알았습니다. 보채지 좀 마세요. 아무튼 우선 형님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능력에 존경을 표하며 그럼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천수’나 ‘역어’는 아직 모르겠지만 ‘천와주’ 역시 ‘적시’처럼 또 다른 기능이 숨어 있습니다. 물론 색공의 창시자니 형님은 아시겠죠?’ ‘그게 뭔데?’ ‘아! 모르셨구나. 사실 여인이 3단 절정에 이르면 안에서 파도가 계속 중첩되면서 쌓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천와주’의 강도를 반으로 줄이면 파도의 힘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더군요. 3단에 이른 그 힘과 ‘천와주’ 절반의 힘이 비슷하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힘이 맞물리면서 여인의 물건에 상처도 주지 않고 파도의 힘을 배가 시켰던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누군 그것을 몰라서 시도를 안 했겠냐? 워낙 여인에겐 위험한 일이고 강도의 차이가 미세하게 나니까 그걸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 시도를 못한 거지. 그나저나 그 강도를 어찌 맞춘 거냐?’ ‘뭐 그거야 저의 천재적인 자질로 훌륭히 극복해냈죠, 하하하. 아, 으르렁거리지 마세요. 농담이었어요. 사실은 보림루에서 터득한 능력이에요. 제가 백날 생각도 없이 그냥 기녀들 구멍만 팠겠습니까? 다 이것저것 연구도 해보고, 실험도 해보고, 직접 시도도 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 감각을 익힌 것이죠.’ ‘어떤 감각? 설마...’ ‘맞아요. 여인이 절정에 올랐을 때 뿜어내는 색기의 강도를 파악하는 감각이요.’ ‘허억. 그게 가능한 일이냐?’ ‘물론 처음엔 저도 불가능하다 생각했는데 열쇠는 ‘천와주’가 쥐고 있었어요. 보림루주에게 두 번 연속 제가 ‘천와주’를 시전 한 것 기억하시죠?’ ‘물론 기억하고 말고.’ ‘두 번째 ‘천와주’를 시전 할 때 저의 물건에 반응하는 파도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루주의 파도가 생각보다 오래 몸속에 남아있었던 게 저에게는 천운이었던 셈이죠. 아마도 루주가 익힌 방중술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뭐 자세히는 모르겠고요. 아무튼 거기서 영감을 얻은 것이죠. 색기를 취하는 순간 ‘천와주’를 시전하면 색기의 강도와 파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이러한 가설을 바탕으로 최음제에 취해 사경을 헤매던 여인과 교합했을 때에도 절정의 순간 ‘천와주’를 잠깐 시전 했었죠. 물론 워낙 순식간이라 형님은 모르셨겠지만 확실하게 색기와 파도의 강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4단 절정’이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판단한 것입니다.’ ‘자, 잠깐만. 색기를 취하는 순간에는 ‘취정의 장’에 있는 ‘흡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천와주’와 동시에 기술을 사용한다는 게 말이 되냐? 그게 가능한 일이야?’ ‘그게 바로 ‘천와주’에 숨겨진 놀라운 기능이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무척 놀랐는데 ‘흡기’와 ‘천와주’는 충돌을 하지 않더라고요. 서로 동시에 사용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형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전혀 모르셨던 모양인데 아무튼 정말 대단한 기술임에는 분명합니다.’ ‘흠흠,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색공인데. 그나저나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여자를 안는다더니 자네의 운이 하늘을 찌르는구먼. 사실 ‘천와주’에 그런 기능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나도 전혀 몰랐는데 동생의 노력과 성실한 자세가 그런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게 만든 거야. 축하하네, 아우님.’ ‘고맙습니다. 사실 저야 형님께서 잘 차려놓은 식탁에 젓가락만 얹었을 뿐이죠. 이 모든 기술과 색공은 형님께서 만든 걸작이니 형님이 축하를 받아야죠. 하하하, 축하드립니다.’ ‘그리 말해주면 나야 고마울 따름이고. 아무튼 색공을 계승 발전시켜준 자네가 대견하고 고마우이. 그나저나 자네 지금 뭐하고 있는가?’ ‘형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죠.’ ‘허허, 그리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뭘 말입니까? 차릴 정신이 아직 더 있습니까?’ ‘당연하지. 쯧쯧, 자네는 강호의 생리에 대해 배우려면 아직 한참이나 멀었어.’ ‘아, 뭔데 그럽니까? 속 시원하게 빨리 말해주십시오.’ ‘저기 곤히 자고 있는 무지 예쁜 년 보이나?’ ‘보입니다. 그리고 너무 년이라 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저랑은 만리장성을 쌓은 여인인데.’ ‘그거야 자네 사정이고. 아무튼 이제 생각을 한 번 해봐야하지 않겠어?’ ‘자꾸 뭘 생각하라는 거예요?’ ‘이런 답답한 친구를 보았나. 저년의 정체 말이야, 정체. 자네도 머리가 있으면 한번 생각을 해보게. 실어증이고 뭐고 다 연극이었고, 거기다 고도의 섭혼술까지 쓰는 년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중원 5대 거부에 든다는 놈의 첩으로 들어왔겠는가? 단순히 돈이나 뜯으려고 들어왔겠는가? 팔자를 고치고 싶었으면 진즉에 고치고도 남았을 년이 바로 저년이란 말일세. 저만한 미모에 저 정도의 섭혼술이면 황궁에 들어가 황제를 홀리는 것이 백번 빠르고 크게 남는 장사지. 헌데 뭐 하러 냄새나는 중늙은이 첩으로 왔겠냐고. 다 뭔가 노림수가 있으니까 그런 거야. 곱상하게 생긴 저년 분명 무서운 년일 걸세. 내 감각이 지금 줄기차게 외치고 있다네. 어서 튀라고.’ ‘저, 정말입니까? 정말 감각이 그리 외치고 있어요?’ ‘당연한 소릴 왜 자꾸 입 아프게 물어. 모르긴 몰라도 배후가 구리고 만만치 않은 년이라고. 잘못 건드렸다간 평생 쫓겨 다니는 비참한 신세가 될 지도 몰라.’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세요. 지들이 아무리 용을 써봐야 저를 어찌 이긴다고.’ ‘이런 멍충아. 천축에 사는 코끼리라는 거대한 짐승도 수천마리의 개미에게는 목숨을 빼앗기는 거야. 내가 분명 말했지? 강호라는 바닥은 온갖 음모와 함정이 도사리는 음험한 곳이라고. 눈치를 보아하니 저년에게 마음을 뺏긴 모양인데 당장은 깨끗이 포기하고 단념해. 저년이랑 알콩달콩 시간을 보냈다간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은 잡아먹히고 말거니까. 자네의 애틋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사내라면 가끔은 돌아가기도 해야 하는 법. 무조건 직진한다고 해서 사내다운 것이 아닌 거야. 때로는 유연하게 돌아갈 줄도 아는 게 진짜 사내라는 것만 명심하고 지금 당장은 한 발짝 물러서게.’ ‘그, 그럼 형님 말씀은...’ ‘그래. 배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덥석 물지 말란 말이야. 자네 같으면 저렇게 곱게 자란 처자가 어떤 놈팡이에게 순결도 빼앗기고 당해서 돌아왔는데 식구들이 가만히 두겠는가? 만약 내 딸이 저런 꼴을 당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그 놈팡이새끼를 아작을 내야 그나마 속이 풀리겠지. 저년 부모의 심정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우선은 몸을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위험요소가 모두 사라지고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그때 진정한 너의 여자로 받아들여. 지금 가까이해서 괜히 너의 모든 신상정보를 미주알고주알 다 까발리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떠나는 게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냐?’ ‘하, 하지만 너무 비겁하지 않습니까? 진정 사랑한다면 어떤 고난이나 위협이 있더라도 함께 하는 것이...’ ‘물론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저 정도 수준의 섭혼술을 익힐 만한 문파가 어디겠나?’ ‘서, 설마?’ ‘이제야 대충 감을 잡는구먼.’ ‘정녕 천마신교의 여인입니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십중팔구 맞을 거다. 너도 대충 알겠지만 그쪽 사람들이 욱하는 지랄 맞은 성격으론 천하제일이거든. 그리고 어린 나이에 저 정도 수준의 고급무공을 익혔다면 수뇌부와 연관이 있는 년이야. 아니면 식솔이던가. 아무튼 무슨 비밀임무를 맡아 여기 첩으로 들어왔는지 몰라도 엄청난 거물이 틀림없어.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오늘밤 사뿐히 즈려 밟아 놓았지? 그러니까 내 말대로 사지육신 멀쩡할 때 튀란 말이다. 우선은 시간을 벌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취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형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지나가는 장대비는 잠깐 피하는 것이 현명하니까요. 그쪽에서 제 말을 듣기도 전에 칼부터 들이밀 테니 우선은 한 발 물러서서 훗날을 기약하죠.’ ‘그래. 너무 서운해 하지 마라. 내가 보니 저 여인은 이제 너 아니면 안 된다. 나중에 반드시 다시 인연이 이어질 것이다.’ 길천은 비담의 속상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을 끝으로 다시 잠잠해졌다. 비담은 강신귀공을 거두고 쓸쓸한 눈빛으로 잠든 서희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생긴 사랑이라는 감정을 외부요인에 의해 억지로 숨겨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하고 속상했다. ‘미안하오. 그대를 이리 두고 떠나려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구려. 하지만 내게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에 그대의 배경을 우선은 감당할 자신이 없소. 훗날 우리의 인연이 이어지면 오늘의 비겁한 선택은 반드시 사죄를 하리다. 사랑하오, 서희.’ 비담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이에 불과했지만 평생을 함께 하고픈 연인의 감정이 이미 비담의 가슴에 싹텄던 것이다. 비담은 살며시 서희의 입술에 입을 맞춘 후 자신의 부채를 꺼내 서희의 머리맡에 두었다. 사랑의 징표로 남겨줄 가장 아끼는 물건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26화 한 달 후. 감숙성 기련산에 있는 흑천맹(黑天盟)의 정문으로 일단의 무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어둡고 칙칙한 흑의로 전신을 감싼 무사의 수는 도합 21명. 하나같이 잘 벼려진 도를 연상케 할 만큼 날카로운 기세를 흘렸는데 무리의 선두에는 수장으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미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고집스러운 눈빛, 굳게 다문 입매와 딱 벌어진 어깨가 남자의 성격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암시해 주었다. 그리고 흑천맹 내에서도 신분이 꽤 높았는지 남자와 마주치는 무사들이 하나같이 깍듯이 검례를 취했다. 맹주전에 도착하자 남성은 자신을 따라온 무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보고는 내가 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만 대로 복귀하거라.” “예, 대주님.” 스무 명의 목소리가 마치 한 사람이 낸 듯 똑같이 울려 퍼졌다. 대원들이 돌아서자 사내는 거칠 것 없이 맹주전으로 들어가 맹주의 집무실 앞에 섰다. “흑천대주 구인철이 맹주님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어오너라.”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열심히 서류를 들여다보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흑천대주를 얼싸 안았다. “하하하, 드디어 네가 돌아왔구나. 도대체 이게 몇 년 만이냐?” “소자 구인철 아버님께 문후 여쭈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하하, 나야 서류더미와 씨름하는 것 외에 별다른 일이야 있었겠느냐. 그래 그동안 잘 지낸 게야?” “아버님의 염려 덕분인지 무탈하게 잘 지냈고, 뜻한 바도 이루고 돌아왔습니다.” “저, 정말이냐? 그럼 네가 천마 조부님의 무공을 완성했다는...” “정확히 5년이 걸렸군요. 맞습니다. 10대조 할아버님이신 구자혁 조부님의 ‘천마신공’을 대성하고 막 폐관을 풀고 나오는 길입니다.” “이, 이럴 수가. 정말 장하구나. 정말 장해.” 아들의 성취에 고무된 흑천맹주가 거듭 탄성을 발하며 껴안았다. 드디어 가문과 맹의 염원이 아들의 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일종의 도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마신교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이루어진 성과였기에 더욱 값진 열매였다. 사실 기련산은 산세가 험하고, 가파른 협곡이 많아 예로부터 ‘악마의 산’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발길이 전무한 산이었다. 그런 곳에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고 천마신교를 중심으로 마도방파를 흡수하여 마도천하를 꿈꾸며 30년 전 탄생한 집단이 바로 흑천맹이었다. 힘의 논리, 즉 강자존의 법칙이 가장 강하게 적용되는 집단을 이끌자면 우두머리는 그만큼 힘이 있어야했다. 그래서 형식상 천마신교의 전대 교주였던 구을목이 흑천맹주의 직을 겸하게 되었다. 흑천맹은 그렇게 마도천하를 꿈꾸며 거창하게 출발하였다. 이에 큰 위기를 느낀 정파무림계에서 구파일방이 중심이 된 정도맹(正道盟)을 만들었고, 점차 세를 불리고 있던 오대세가 역시 황보세가를 중심으로 독자적 무력집단인 오정회(五正會)를 결성하면서 흑천맹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25년의 세월은 강산의 모습을 바뀌게 만들었고, 초창기의 결속 역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형식적인 맹주의 느슨한 감시를 틈타 결국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흑천맹 산하의 사도문파들이 자신들의 세를 규합하여 떨어져 나가면서 사도련(邪徒聯)을 창설한 것이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년 전, 드디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사도련의 탈퇴로 약화되고 정신이 없었던 흑천맹의 본단을 정도맹과 오정회가 연합을 하여 기습한 것이다. 당시 천마신교의 교주였던 구을목이 최선을 다해 버텼으나 결국 운명을 달리하며 이른바 1차 정사대전은 정파무림계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정파무림계 역시 승리라는 상처뿐인 영광만 얻었을 뿐 실질적인 열매는 사도련이 모두 챙겨갔다. 마도의 새로운 하늘은 자신들이라며 지쳐있는 정파무림연합의 뒤를 쳤고, 덕분에 흑천맹도 그 명맥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흑천맹은 결국 눈물과 통한을 삼키며 마도무림의 주도권을 사도련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5년 전에 벌어진 1차 정사대전의 여파로 흑천맹의 세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맹주까지 운명을 달리하며 주도권까지 넘겨주자 결국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한 위기를 수습하고 흑천맹을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한 것이 천마신교의 신임 교주였던 구관천이었다. 구관천은 과감히 교주의 직을 광명좌사인 양통에게 넘겨주었고, 와해될 위기의 흑천맹을 되살리는데 5년의 세월을 매진하였다. 그리고 정파무림계가 안겨준 치욕과 사도련에서 받은 굴욕을 되갚아주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구인철로 하여금 비밀리에 폐관하여 천마 구자혁의 무공을 익히도록 안배하였다. 거듭된 위기로 무너진 맹을 되살리기 위한 일종의 도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5년 동안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이 드디어 오늘 천마의 무공을 대성하여 돌아왔으니 그의 도박은 대성공을 한 것이다. 그래서 구관천이 느끼는 지금의 기쁨과 반가움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인양 구인철도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려 하였다. 구인철은 자신의 이런 속내를 내보일 수 없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말썽꾸러기 여동생의 안부를 서둘러 물었다. “그런데 아버님. 서희는 잘 지내고 있는지요?” 아들의 물음에 구관천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말도 마라. 내가 그 녀석 때문에 요즘 골머리가 아프구나.” “혹시 서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글쎄 두 달 전에 사도련의 자금줄과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이 되는 부흥상회에 첩자가 한 명 필요했단다. 그런데 서희가 어디서 듣고 왔는지 자신이 하겠다며 내게 부탁을 하더구나. 그래서 위험한 일도 아니고 기특한 마음에 덜컥 승낙을 하였지. 한 달 동안은 임무를 잘 수행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못하겠다며 맹으로 돌아와서는 누굴 찾아야 한다며 무사들을 내어놓으라는 거야. 내가 누구냐고 그렇게 물어도 묵묵부답 대답을 해주지 않더구나. 나도 답답한 마음에 이유를 말하기 전까지는 내어줄 수 없노라고 엄포를 놓았고, 급기야 그 녀석이 혼자 가겠다며 애비 속을 뒤집지 뭐냐. 그래서 할 수 없이 처소에 가둬두고 맹 밖으로의 외출을 금지시켜 놓았단다.” “그 녀석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외출금지는 너무한 처사가 아니신지...” “너는 서희를 5년 전에 보고 그때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으니 잘 모를 것이다. 아마 지금의 서희를 본다면 왜 아비가 그리 조처했는지 납득할 것이다. 그 녀석 지금쯤이면 구월각의 담을 넘으려 씩씩하게 시도하고 있을 게다. 도대체 무엇에 홀리면 그렇게 되는지 통 알 수가 없구나. 아무튼 탈출을 감행하고 있을 것이니 가서 회포도 풀고, 오누이의 정도 나누어라.” “하하, 그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