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61편 (61/62)
구인철이 흑천맹으로 떠난 지 대략 100일. 비담은 지상에서 벌어질 참담한 살육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그래서 둘은 서둘러 초옥으로 돌아와 흑천대원과 함께 흑막이 있는 낙양으로 길을 나섰다. 낙양 취선루의 한 별실. 비담과 흑막주 이성보의 눈물겨운 상봉이 이어진 후 비담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무림의 정세에 대해 물었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많이 안 좋습니다. 그동안 사도련이 비축한 힘을 너무 간과한 것이 큰 실수였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패착은 오정회와 정도맹이 본의 아니게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1 차 정사대전과는 양상이 많이 다른데 말이죠.” “양상이 다르다니요?” “이번엔 황제가 움직였습니다.” “황제가요?” “그렇습니다. 아주 작정하고 무림을 지우려는 듯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럼 오정회와 정도맹, 흑천맹과 사도련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허나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느라 애써 무시하고 있지요.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집 안 싸움 하느라 큰 도둑이 들어오는 것도 무시한다?” “그런 셈이지요. 뭐 사도련이야 하루 속히 무림을 일통해 황제에 대항하겠다는 심산이고, 사도련의 계책에 의해 내분과 내홍을 겪으며 힘이 약화된 오정회와 정도맹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 건너 불구경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지요. 오로지 흑천맹이 전면에 나서서 분전하고는 있으나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사도련주란 자 보통이 아니군요.” “치밀하고 간사한 자지요. 1차 정사대전부터 지금의 사태까지 모두 그 자의 작품입니다.” “그럼 지금 전면에 나서서 싸우고 있는 것은 흑천맹 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나마 구인철 대협의 활약 덕분에 지금껏 버틴 것이지요.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란 말씀이시군요. 그럼 결국 황제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눈치 보는 저것들을 움직이게 해야겠군요.”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강 건너에 불이 났다 생각하니 저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불 제가 화끈하게 옮겨 붙여야지요. 그래서 말인데 저번에 말씀하셨던 오정회의 치부에 대한 자료들을 두 부씩 필사해 주십시오. 더불어 정도맹과도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습니다.” “허나 정도맹에서 공자님을 쉽사리 만나줄 지 의문입니다.” “미래를 담보로 훌륭한 미끼를 던져주면 아마도 덥석 물것입니다.” “미끼요?” “오정회의 치부와 사도련의 말살 말입니다. 그것을 준다면 작금의 상황을 고려하여 아마도 움직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련의 견제가 만만치 않아 정도맹이 쉽게 뚫을 수 있을는지 걱정입니다. 그리고 공자님을 믿어줄는지도...” “아마도 지금의 여건상 저를 쉽게 믿진 못하겠지요. 그래서 든든한 조력자 하나를 대동할 생각입니다.” “조력자라면...” “화산에서 구해줬던 그 아저씨 있지 않습니까?” “아! 제가 보호하고 있는 오대협 말씀이시군요.” “막주님께서 신경써주신 덕분에 가능한 일이지요. 그 양반이 지닌 황금 십만 냥과 함께 정도맹을 찾아간다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성사될 것입니다.” “작금의 위기를 타파할 묘책이십니다. 정말 공자님의 말씀대로만 된다면 궁지에 몰리는 것은 되려 사도련이 되겠군요. 그런데 사도련의 세가 생각보다 강한데 괜찮을까요?” “사도련의 힘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동시에 움직여야겠지요. 그래서 무엇보다 막주님께서 지닌 정보의 힘이 중요합니다. 더불어 신속하게 정보를 교환해야만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 지 명확해졌습니다. 그럼 공자님께서 부탁하신 일들 신속히 처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준비가 되는 데로 알려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공자님을 돕겠습니다.”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비담은 이성보의 손을 한 차례 굳게 잡아주었다. 이성보 역시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방을 나섰다. 나흘 후. 오정회의 장로회의가 긴급 소집되었다. 안건은 비담이 하루 전 보낸 각 세가의 치부책. 모두의 시선이 탁자 중앙에 쌓여있는 책자를 향한 채 굳어있었다. 오정회의 실질적 수장인 벽력수(霹靂手) 황보영운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사태를 어찌하면 좋겠소?” “대체 오정회 관리를 어찌 하셨기에 저런 것이 공공연히 나돈다 말입니까? 회주께선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세요.” 천무신검(天武神劍) 모용수가 거칠게 쏘아보며 말했다. “지금 나를 탓하는 것이오? 보다시피 저 책자엔 각 세가의 치부가 모두 기록되어 있소. 그것이 어찌 내 잘못이란 말이오?” 방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대노한 음성이 장로들의 귀를 후벼 팠다. “자자, 우리끼리 싸워봤자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그만들 합시다. 그리고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 어찌 주워 담을지 의논하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래, 림주께선 무어라 하시던가요?” 검황 남궁헌수의 중재로 방안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별 수 없다 하십니다. 그 자가 원하는 데로 움직이는 수밖에. 우선 오정회와 은송림의 모든 힘을 동원해 사도련의 뒤를 치는 방법밖엔 없다 하셨소. 그런 다음 저것을 보낸 자를 색출하여 원본을 찾아내고 살인멸구하는 것이 최선이라 하셨습니다.” “흠, 현재로썬 가장 최선책이군요. 헌데 고작 치부책 하나 때문에 우리가 움직이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크지 않겠소? 피해 역시 만만치 않을 터인데 말이오.” “고작 치부책 하나라 하셨소? 저것이 세상에 공개되면 어찌 되는지 상상이나 해보신 게요? 우리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물건이란 말이오.” 회의에 참석한 장로들의 마음이 또 다시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중 유독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섬응탄 제조에 앞장섰던 제갈가였다. 삼대구족이 죽을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화탄. 절대 새어나가선 안 될 비밀이었다. “그만들 하십시오. 솔직히 오늘 회의는 여러 장로님들의 의견을 듣는 다기 보다는 림주님의 뜻을 전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그만 노여움들 푸시고 어찌 움직일는지 상의합시다.” 황보영운이 소란스러운 장내를 정리하였다. 장로들 역시 불가피한 선택임을 깨달았기에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회의는 비담이 통보한 방법과 기한을 맞추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흘러갔다. 그렇게 비담은 오정회와 은송림이라는 훌륭한 꼭두각시를 얻게 되었다. 오정회가 비담의 뜻대로 움직일 그 시각. 비담은 신기검(神奇劍) 오욱을 대동한 채 정도맹의 정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153화 정도맹의 별실 안. 비담은 오욱 덕분에 정도맹의 수뇌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비담은 가지고 갔던 오정회의 치부책과 황금 십만 냥을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후 함께 할 것을 종용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정도맹의 수뇌부는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더불어 오욱을 구해준 일, 멸사대가 확보하려했던 황금 십만 냥을 돌려준 일을 통해 비담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정사대전 후, 흑천맹을 중심으로 한 사파연합과 자신들 정도맹을 중심으로 정파연합을 구성하여 무림을 양분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회의가 끝나고 비담은 서둘러 흑천맹의 본대가 있는 섬서성으로 향했다. 흑막주로부터 구인철이 위기에 몰렸다는 사실을 들었기에 비담의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 도착한 섬서성. 비담은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할 여가도 없이 곧바로 구인철을 만났다. 다행히 사도련과의 대규모 전투 전이었기에 무사히 재회할 수 있었다. 구인철은 자신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비담을 덥석 끌어안았다. 흑막주와 서희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듣고도 믿지 못할 정도의 기사였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만 같았다. 비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자신을 껴안는 구인철에게 좋으면서도 짐짓 볼멘소리를 하였다. “켁켁, 형님 저 이러다 다시 죽어요. 숨 막힌단 말입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하하하, 서희보다 더 하십니다. 그만 풀어주세요.” “흠흠.” 비담의 거듭된 요청에 드디어 진한 포옹을 풀어준 구인철이었다. 자리를 옮긴 둘은 그동안 못다 나눈 이야기들을 나누며 회포도 풀고, 모든 의문도 해소하였다. “그러니까 자네 말을 요약하면 오정회와 정도맹이 사도련의 동쪽과 서쪽을 친다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정확히 시간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겠으나 이미 확답을 받았으니 멀지 않아 작전은 실행될 것입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랍군.” “놀라실 것 없어요. 정의니 무림의 미래니 하는 숭고한 뜻이 아니라 자기들 밥줄 때문에 그러는 것이니까요. 되려 정의와 무림의 미래를 짊어진 채 고군분투하는 것은 사파로 매도당한 흑천맹 아닙니까. 천상계에서도 겪었지만 세상사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고맙네. 그럼 앞으로 우린 어찌하면 좋겠나?” “시간을 벌어야죠. 살살 약을 올리면서 유인도 하고요. 앞으로 열흘이면 이 망할 상황은 역전됩니다. 분명히.” “저쪽의 전력이 만만치 않네. 열흘의 시간을 확보한다...정녕 그게 가능하겠는가?” “여길 보세요.” “이게 뭔가?” “사도련의 무덤이 될 곳이죠. 막주님에게 구한 섬서성 화강현의 지도입니다. 이곳을 보시면 천혜의 요새인 사릉협이 있습니다. 지형이 호리병 형태로 되어 있어 입구가 매우 좁고, 주변을 깎아지른 절벽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나는 새조차 쉬었다 넘어야 할 정도로 험난한 곳입니다.” “그럼 자네 말은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가자는 것인가? 그 안에 갇히면 피할 곳이 없어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형님과 제가 입구만 지킨다면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한 번에 열 명 이상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협소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신 안에서 버틸 식량과 물이 필요한데 그 부분도 이미 막주님을 통해 넉넉히 조달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독 안에 든 쥐라 생각하고 방심하겠군. 그러다 뒤에선 황제가 압박하고 더불어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오정회와 정도맹마저 동시에 협공을 가한다. 그런데 쉽사리 해결할 것 같았던 우리 흑천맹은 안에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제거하려고 발버둥 치나 자네와 나 때문에 그것 역시 여의치 않다. 사도련주가 초조해 미쳐버리겠군.” “아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갈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렇게 버티다가 오정회와 정도맹의 공격에 맞춰 함께 밀고 나가면 됩니다. 황제는 무림의 세력들이 서로 상잔하기를 기다릴 것이니 우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사도련의 세를 분쇄한 연후에 함께 힘을 모아 황제에 대항하면 모든 그림은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하하하!!! 좋아. 가능성이 충분해. 그럼 사도련을 뒤에 달고 사릉협으로 가세.” “예, 형님.” 구인철은 오랜만에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정사대전의 끝이 보였던 것이다. 둘은 그렇게 흑천맹의 모든 세력을 이끌고 마지막 전장으로 향하였다. 이틀 뒤. 사도련주 극현도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정녕 스스로 들어갔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함정이나 매복의 가능성은?” “주변을 꼼꼼히 살펴봤으나 그런 것은 발견되지 않았사옵니다.” “그렇단 말이지.” “아마도 궁지에 몰려 불가피한 선택을 한 듯싶사옵니다.” “배수진을 말함이더냐?” “마지막 발악이지요. 아마도 입구가 좁다는 사실을 적극 활용할 심산인 듯하옵니다.” “결국 이리 되었구나. 후후후, 그동안 용케 버텼으나 이제 정말 끝이로구나.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쓸어버려라.” “복명.” “흐흐흐, 그 안에서 버티며 원군을 기다릴 생각이겠지. 허나 너흴 구원해줄 원군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잘 가거라.” 사릉협 입구에 수북이 쌓인 시체. 비담과 구인철은 덤덤한 시선으로 그 시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오늘로 열흘째구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그나저나 이젠 괴물이 되어버렸구나.” “하하, 정 부러우시면 형님도 저처럼 죽었다 살아나세요.” “됐다. 그런 끔찍한 경험은 너 하나로 족해. 참, 막주님께 기별이 왔다고?” “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하시네요.” “휴우, 다 끝나가는 구나. 더 이상 이런 의미 없는 피는 손에 묻히지 않아도 되겠어.” “다행이죠.” “누군가의 그릇된 욕심으로 숱한 생명들이 사라진 것은 애석한 일이나 앞으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실히 마무리를 짓는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제가 호법을 서겠습니다. 마지막 전투를 위해 힘을 비축하셔야죠.” “알았다. 그럼 부탁하마.” 구인철은 털썩 자리에 앉아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마지막 전투를 위해. 한 시진 후. 콰쾅 쾅쾅 요란한 폭음 소리가 협곡 전체를 울렸다. “도착했네요. 우리도 시작하죠.” “그래, 마무리 지으러 가보자.” 둘의 신형이 바람처럼 내달렸고, 그 뒤를 흑천맹의 전 무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154화 극현도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아니 불편한 정도를 넘어 미칠 지경이었다. 다 잡았다 여긴 흑천맹의 반격은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오정회와 은송림, 더불어 정도맹까지 들이닥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극현도가 그쪽의 감시를 게을리 한 것도 아니었다. 작은 변수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썼는데. 그래서 지금의 충격이 배가 된 것이다. 금선탈각의 계. 오정회와 정도맹은 자신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껍데기만 남겨 놓았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진퇴양난, 사면초가. 극현도는 자신의 인생 최고의 위기를 맞은 셈이었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당할 순 없지. 승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법.’ 사도련주 극현도는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싸우라는 명을 하달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 비담은 싸우는 와중에도 매의 눈으로 전장을 살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싸움을 최소한의 피해로 일찍 마무리하겠다는 계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우두머리의 제거였다. 잘 훈련받은 정예군사가 아닌 무림인들의 특성상 명령체계만 무너뜨리면 사상누각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경향을 보였다. 물론 사도련처럼 련주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조직은 조금 더 버티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뇌부가 무너지면 조직이 와해될 소지는 충분했다. 그런 비담의 눈이 반짝 빛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한 시진 가량 이어진 전투. 비담의 손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사도련 고수들의 수가 100을 넘어설 무렵. 드디어 비담은 사도련주 극현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극현도는 패색이 짙은 전장을 바라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그리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 앞에 버티고 선 비담을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운명처럼 자신의 원대한 꿈을 짓밟은 이가 비담이란 사실을 느낀 것이다. “정확히 30년. 내 인생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모두 사도련에 바쳤다. 그렇게 련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 무림 일통의 꿈이 이루어지려는 찰나였는데...”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죠. 사도련에 인생을 바친 게 아니라 허황된 꿈을 실현시키겠단 탐욕에 자신의 꿈과 인생을 허비한 거죠. 자, 보세요. 덕분에 이렇게 죽지 않아도 될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잖습니까?” “대의를 위해서 흘린 피는 숭고한 것이다.”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했네요. 그 꿈 얼마나 허무하고 허황된 것인지 산산이 깨 부셔 드리죠.” 비담의 화류선이 투명하게 물들었다.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지법을 펼치기 위해 극현도의 손가락 역시 검게 물들었다. 먼저 공격을 가한 것은 구지신마 극현도였다. 파파팟 대기를 뚫고 아홉 줄기의 검은 광선이 비담의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비담의 신형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못 박히듯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극현도는 자신의 지강에 비담의 몸이 뚫려 넝마가 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아홉 개의 지강은 허무할 정도로 비담의 몸을 지나쳤다. 마치 허공을 지나치듯 아무런 제약 없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극현도는 비담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아니 극도로 기감을 확장했으나 전혀 느껴지지도 않았다. 당황한 극현도의 손이 다시 한 번 다섯 차례 움직였다. 총 45 개의 지강. 허나 그가 발출한 지강은 이번 역시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 채 의미 없이 소멸되었다. ‘이형환위를 펼쳤다면 잔상이라도 남아야 하거늘. 저 녀석은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유령과 싸우는 것인가? 어째서 내가 펼친 지강에 번번이 뚫렸음에도 저리 무사하단 말인가?’ 하지만 극현도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왔기에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콰쾅 방금까지 극현도가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파였다. 극현도의 머리끝이 쭈뼛 솟아올랐다. 지금껏 승승장구하며 천하가 좁다하고 활보하였던 자신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격.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기에 더욱 무서웠다. 만약 자신의 육감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한 채 피하지 않았다면...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극현도는 이곳이 전장 한 복판임도 잊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비담을 응시했다. “후후, 이 양반 표정 보니 많이 놀란 모양이네. 하기야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니 당황할 법도 하지. 이제 시작이니 마음 단단히 먹으쇼.” 비담의 손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에 맞추어 엄청난 공격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극현도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방을 향해 막무가내로 지강을 쏘았으나 역부족이었다. 비담은 오래 끌 생각이 없었기에 최후에 깨달은 심득을 바로 펼쳤다. 투명하게 변한 부채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한 순간 극현도의 육신과 영혼을 잘라 버렸다. 투둑. 심연에서 들리는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에 극현도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귀신이라도 본 듯 크게 치떠진 눈만이 그의 분노를 대변하였을 뿐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크게 떠졌던 눈은 이내 공허하고 칙칙하게 색이 바랬고, 곧 생명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쿵. 허황된 꿈을 꾸었던 간웅의 몸이 땅위로 쓰러졌다. 비담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죽으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육신이 쉴 그 정도의 땅만 필요할 뿐이거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다투는지. 부귀, 명예, 권력 모두 부질없소이다. 죽으면 다 내려놓고 가야할 허망한 뜬구름이요.’ 잠시 극현도의 시체를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찬 비담은 이내 전장 한 복판으로 뛰어들어 사도련의 남은 수뇌부를 격살하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살육의 장을 빨리 끝내기 위해. 그렇게 꼬박 하루의 시간이 흐르고. 사도련은 패색이 짙어지자 결국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흑천맹에 투항하였다. 모래 위에 지은 성. 하나로 뭉친 거대한 파도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비담과 구인철은 참담하게 변한 전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래야죠.” “이제 마지막 싸움만 남았군. 황군은 어디쯤이라 하던가?” “하루거리라 하더군요. 이곳 싸움이 마무리 되었으니 이제 본색을 드러내겠죠.” “그래, 끝이 보이는군.” 구인철은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핏빛으로 선명하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하루 뒤. 황실의 고수로 이루어진 황군과 무림 연합의 일대 격돌이 시작됐다. 비담은 황제가 다시는 무림을 넘보지 못하도록 가장 선봉에 앞장서 적들을 유린했다. 황군은 기진맥진 지쳐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맹렬히 돌격하였으나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무림 연합의 고수들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비담은 비참하게 죽은 매영의 복수를 위해 전투가 마무리될 즈음 오정회와 은송림의 고수들 역시 은밀하게 제거해 버렸다. 그렇게 피비린내로 점철되었던 2차 정사대전과 황군과의 싸움이 끝을 맺었다. 그 뒤 황제는 화병이 나 몸져누웠고, 얼마 후 병상에서 시름시름 앓던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 정도맹은 오정회의 치부를 이용해 이미 구심점을 잃어버린 오정회의 근간을 뿌리 채 흔들며 정리, 흡수하였다. 흑천맹 역시 사도련의 남은 세력을 끌어들여 명실상부 사파연합의 맹주로 우뚝 섰다. 그렇게 반년이란 시간이 정신없이 흐르고, 무림은 정도맹을 중심으로 한 정파연합과 흑천맹을 중심으로 한 사파연합으로 양분되어 평화를 되찾았다. 이 평화가 얼마나 흐를는지 장담하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표면적으론 무림의 평화가 다시 찾아왔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흑천맹의 대 연회장.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무림의 평화를 되찾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구인철과 비담의 혼례가 있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