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58편 (58/62)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천마와 검제에게 앞서 세 영체에서 일어났었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어떠냐? 예전 무림에 있을 때랑 똑같지?” 둘을 향해 길천은 느물느물 웃으며 물었다. 눈을 뜨고 자신의 내부를 살펴보던 천마와 검제 둘은 똑같이 벅찬 희열을 느꼈다. 어줍지 않게 영력 덩어리나 생성해서 날릴 때하곤 차원이 달랐다. “내가 잘난 덕분에 자네들이 이런 호사도 누리는 게야. 그리고 조금 전에는 내가 조금 흥분했으이. 그래도 동시대를 살았던 친우였는데 그리 매몰차게 깎아내리니 내 기분이 어땠을 지 짐작해보게. 많이 섭섭했으이. 자네들에게 함부로 대한 의제는 내가 크게 나무라고 잘 타일렀으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지랄 맞아 욱하는 성격이 가끔 있어서 그렇지 본성은 아주 순박하고 착한 아이라네. 그리고 서희라고 천마 자네의 먼 후손인데 그 아이랑 인연도 닿아있으니까 아마 앞으론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걸세.” “고맙네, 도색성.” “흐흐,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가지고 고마워하고 그러나. 그런데 한 가지 조금 걸리는 게 있으이.” “뭔가? 어서 말해보게. 우리 사이에 거리낄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서 속 시원히 말해보게.” 검제는 방금 당한 수모는 깨끗이 잊은 듯 열성적으로 길천의 말에 호응하였다. “사적으로야 예전처럼 지내도 상관없는데 앞으로 내가 상제의 자리에 앉으면 지켜보는 눈이 많을 거란 말일세.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야 예전의 일들을 추억하며 즐겁게 지내도 하등 상관없네만 다른 이들이 보고 있는 공적인 자리에선 주군과 신하로서 지내야한다는 것이지. 아마 많이 불편할 터인데 그래도 괜찮겠는가?”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공과 사는 명확히 구분해야지. 이리 우리를 내치지 않고 대접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인데 무얼 더 바라겠는가?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후후,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네. 대신 내가 왕 자리 하나씩은 약조함세.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지 뭐. 동서남북 중 자넨 어디가 좋은가?” “벌써 그래도 괜찮겠는가?” “자네들도 내 영력을 봐 놓고 그러나. 상제랑 붙어도 끄떡없으니 어서 말해보래도?”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천마가 이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예전 천마신교가 자리하던 곳이 서쪽이니 나는 서쪽으로 하고 싶네.” “응응, 자네 좋을 대로 하게. 그럼 검제 자네는?” “그럼 나는 동쪽으로 하겠네.” “좋아, 좋아. 그럼 서천왕은 천마 자네가 맡고, 동천왕은 검제 자네가 맡게. 북천왕은 담이 녀석한테 맡기고, 마지막으로 하련이는 남천왕을 주면 되겠군. 이걸로 왕의 자리까지 모두 내정했으니 이제 문신과 무신들을 규합해 보세.”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을는지 걱정이 되네만.” “친구 좋다는 게 뭔가. 걱정하지 말래도. 담이 녀석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영체가 소멸되면 그 영력은 고스란히 우리들이 나눠가질 수 있다네. 상제가 어찌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서쪽과 남쪽을 마저 돌며 성에 안 차는 것들은 소멸시키고 필요한 놈들은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되네. 그럼 아마도 많은 힘이 쌓일 걸세.” “고마우이, 정말 고마우이.” 검제가 길천의 손을 덥석 잡으며 거듭 사의를 표했다. 길천은 천마의 손까지 끌어와 셋이서 함께 손을 맞잡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머지않아 이곳 천계에도 우리들의 세상이 다시 도래할 걸세. 밝은 미래를 위해 힘차게 출발해보자고.” “그러세. 하하하하!!!” 비담은 셋의 웃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은근슬쩍 끼어들어 자신이 욱해서 그런 것임을 거듭 사과하였다. 천마와 검제는 방금 전의 상황이 떠올라 잠시 움찔했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의기투합하였다. 그러다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던 길천의 제안으로 넷은 시공을 초월해 모두 의형제의 결의를 맺게 되었고, 곧 형 동생 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145화 수천의 영체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광활한 벌판. 그 벌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새로이 등장한 무리의 수는 정확히 300이었다. 그 무리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몇몇 인물들이 언덕 아래 보이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후우!! 드디어 돌고 돌아 천계의 중앙에 당도했구나.” “그러게요. 동조할 세력까지 규합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네요.” “그래도 이만하면 꽤 성공적이지 않느냐. 다행히 아직 서로 붙기 전에 도착했으니 시간도 적절히 맞추었고.” “다 형님의 복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숫자가 꽤 되네요? 이곳까지 오면서 소멸시킨 영체의 수도 만만치 않았는데 말이죠.” “아마도 염부의 영체까지 모여 있어 그럴 거다.” “그렇군요. 그동안 소멸된 영체의 수도 적지 않을 텐데 예상보단 많네요.” “후후, 걱정할 것 없다. 우리도 그만큼 강해졌으니.” “헤헤, 제가 언제 걱정했다고 그러세요? 걱정은 저 아래에 있는 저 녀석들이 해야죠.” 옆에서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검제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툭 던졌다. “비아우가 말한 만년지투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구먼.” “만년지투의 의미? 자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린가?” 언덕 아래의 상황을 지켜보며 길천과 비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천마(구자혁)가 불쑥 끼어든 검제(비천검 설표)를 돌아보며 반문했다. “햇빛이 비치지 못할 정도로 숲이 울창하면 어린 나무들은 자라지 못하는 법. 적절히 가지치기를 해줘야 새로운 생명들이 자라나지 않겠는가. 불현듯 저기 모인 수천의 영체들을 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툭 나온 말이라네.”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구먼. 만년 동안 정체된 채 계속해서 영체들이 이곳 천상계에 쌓여만 갔을 테니 저런 식으로 흔들고 정리를 해줘야겠지. 그래야 다가오는 만년을 준비할 수 있을 터. 그럼 자네 생각엔 언제 만년지투가 끝나리라 보는가?” 이번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비담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마도 소제의 생각으론 누군가 승자가 결정되어야 만년지투가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도전하는 쪽이든 응전하는 쪽이든 말이죠.” “나도 담이 말에 십분 공감하네. 이곳까지 오면서 곰곰 생각해보았는데 어느 정도 무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적절한 수의 영체들이 소멸되었을 걸세. 그걸 바탕으로 대규모의 무리가 만들어지면 이제 그들끼리 진하게 한 판 붙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지. 여기서 승자가 결정되면 비로소 만년지투 역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걸세.” “그럼 길천 형님과 비 아우의 말을 종합해 보면 만년지투가 얼마 안 남았단 뜻이군요?” “얼마 안 남은 것이 아니라 이번이 마지막 쟁투일걸세.” 길천이 사뭇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길천의 말을 들은 천마와 검제, 하련 역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눈치였다. 비담은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자 서둘러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들으신 데로 이번이 가장 중요한 마지막 전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가 부족하나마 작전을 좀 짜봤습니다. 우선 만년지투에 참여한 염부와 천계의 대치상황을 보니 매우 단순합니다. 진영이랄 것도 없이 서로 마주본 상태로 대치하고 있고, 형님들도 알다시피 영체는 따로 보급이 필요 없죠. 따라서 저희 역시 가장 단순한 전략으로 치고 들어간다면 아마도 큰 혼란을 야기함은 물론 어부지리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한 전략? 그게 뭔가?”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바로 소수정예란 점입니다. 개개의 영체가 지닌 영력이 저쪽의 영체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제가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성동격서(聲東擊西)를 이용한 분란의 조장입니다. 우선 길천 형님과 설표 형님, 구자혁 형님이 247의 영체를 데리고 보이는 곳 왼쪽에 있는 염부의 후방에 조용히 매복해 계십시오. 그럼 소제가 하련이와 함께 나머지 48을 데리고 천계의 뒤쪽을 쳐 그대로 관통하겠습니다. 그렇게 유인한 천계 쪽 영체들을 염부 쪽으로 끌고 가 서로 부딪히게끔 만드는 거죠. 그런 연후에 소제가 이끄는 별동대는 신속히 전장을 이탈해 형님들이 계신 곳으로 합류하겠습니다. 그리고 혼란을 틈타 가급적이면 강한 영체들을 노려주세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혼란을 틈타 먹음직스러운 대어만을 노려라?” “바로 그겁니다. 뭐 운이 좋으면 상제나 염라대왕도 노려볼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건 욕심일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조금 눈에 띈다 싶은 강한 놈들 위주로 소멸시켜 주세요.” “오냐, 알았다. 그럼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지금 당장 시작하자.”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먼저 빙 둘러 염부의 후방으로 이동하세요. 제가 나머지 인원들에게 작전을 설명한 뒤 저 역시 출발하겠습니다.” “그럼 신호는 무엇으로 할까?” “후후, 따로 신호를 주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겪어봐서 아시겠지만 사고방식들이 워낙 단순해서 이런 간단한 계략에도 손쉽게 걸려들 것입니다. 대치하고 있는 양 진영에 변화가 생기고 혼란이 야기되면 ‘시작했구나.’ 여기시면 됩니다.” “알았다. 그럼 먼저 가보마.” “다시 한 번 당부 드리지만 너무 욕심내지 마세요. 형님들의 영력이 막강하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포위를 당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조심하마. 너도 절대 무리해선 안 된다.” “예. 그럼 잠시 뒤에 뵙죠.” 무리의 수장 격이라 할 수 있는 5명은 이내 서로의 눈을 바라본 후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는 것으로 결의를 대신했다. 그런 다음 비담의 말대로 영체들을 차출하여 작전에 대해 소상히 설명한 후 각자 위치로 이동하였다. 길천 일행이 먼저 숨죽인 채 조용히 이동할 그 시각. 비담은 하련을 포함해 자신 앞에 서 있는 영체들을 쭈욱 한차례 둘러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작전은 매우 단순하지만 위험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임무이기에 그만큼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따라서 지금 선택된 너희들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고, 그렇기 때문에 난 너희들을 철썩 같이 믿는다. 그럼 세세한 작전 계획을 설명하겠다. 너희들도 보다시피 천계 진영의 가운데에 상제를 포함한 다수의 고위 영체들이 포진해있다. 그들을 피해 천계 뒤쪽을 급습해 갈지(之)자 형태로 휘젓는다. 그런 다음 최대한 고위 영체들을 피해 천계 진영을 관통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염부 쪽의 별동대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저들의 분노와 혼란이 가중될 테니까. 적절하게 한마디씩 염장을 지르며 교란시켜라. 그럼 저들이 우리 뒤를 맹렬히 추격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꼬리에 달린 그놈들을 끌고 염부 쪽으로 유인한 후 신속히 전장을 이탈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다. 그런 연후 염부 뒤쪽에 포진하고 있는 본대에 합류해 함께 힘을 합쳐 고위 영체들을 사냥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번 작전의 성패는 속도다. 욕심이 나더라도 결코 독자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 더불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한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 역시 용납하지 않겠다. 끝으로 내 허락 없이 허무하게 소멸되는 것 역시 용납하지 않겠다. 이상!! 혹시 작전에 대해 궁금한 점 있나?” “......” 침묵으로 각오와 결의를 대신하는 영체들이었다. “좋다. 그럼 그대들의 무운을 빌며 작전을 시작하겠다.” 비담은 한차례 크게 고개를 끄덕인 후 조용히 천계 진영의 뒤쪽으로 방향을 잡아 이동했다. 비담은 면밀히 주위를 살피며 작은 변수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반 시진 후. 비담이 이끄는 별동대는 목적했던 천계의 진영 후방 깊숙이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비담은 예리한 눈으로 천계진영을 한 차례 둘러본 후 작전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마지막 대규모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어서인지 역시나 예상대로 경계가 느슨하구나. 하련이는 내가 조금 전에 부탁한대로 가장 후미에서 낙오한 녀석들을 수습하고, 강한 영체를 만나 고전하는 녀석들을 도와주거라.” “네, 숙부님. 저만 믿으세요.” “그래, 너를 믿고 돌진하마. 그럼, 화끈하게 놀아보자.” “호호, 좋아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비담이 이내 허공에 부채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 부채는 비담의 손짓에 따라 천계 진영의 후방에 위치한 영체들의 머리 위로 까마득히 치솟더니 이내 작은 점으로 화해 사라졌다. 일 초, 이 초, 삼 초......십 초. 슈우욱 콰콰쾅 작은 점으로 변했던 부채가 어느새 엄청난 크기로 변해 천계 진영 후방의 위쪽 모서리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후후, 그럼 가볼까.” 비담의 신형이 아래쪽 모서리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물론 비담을 따르는 별동대 역시 한 마리 비조가 되어 그의 뒤를 쫓았다. 146화 염부와의 대규모 전투 준비에 여념이 없던 천계 진영. 진영의 후방에서 날벼락처럼 터진 굉음으로 인해 일순간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무슨 일이냐?” 상제와 함께 전투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던 서천왕 후성의 음성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소장이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무장 혁도월은 짜증이 잔뜩 배인 서천왕의 물음에 다급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았는가?” “아무래도 염부 쪽에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아직 정확하진 않으나 소수의 영체들이 저희 쪽 후방에 침투하여 혼란을 조장하고 있사옵니다.” “벌써?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여겼거늘. 그래, 그 수가 얼마나 되는가?” “대략 오십 정도라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오십이라...상제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후후후, 아마도 그놈들은 우리를 낚기 위한 미끼일 게야. 우리의 이목을 그쪽으로 쏠리게 한 후 우리의 전방을 칠 요량이겠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소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그럼 예서 이리 망설이지 마시고 저희 역시 응전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걸어온 싸움 피한대서야 말이 안 되지. 그쪽 잔챙이들은 혁장군에게 맡기고 우린 바로 염부의 전면으로 들어가세.”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그럼 상제의 지엄하신 황명 그대로 받들겠나이다.” 서천왕은 염부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곧바로 모든 영체들에게 염부가 위치한 진영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한참 천계의 진영 후방을 교란하고 있던 비담. 갑자기 모든 영체들이 썰물 빠지듯 염부 쪽으로 돌격해 가버리자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뭐냐?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야?” “마치 저흴 피해 저쪽으로 도망가는 모양새인데요?” “그러게.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는데 맥 빠지게 이 무슨 경우야? 고작 오십 쳐들어왔다고 저리 도망갈 일은 없고. 방향으로 보아하니 염부 쪽하고 시원하게 한 판 붙을 심산인가 본데. 그건 그렇고 왜 우린 휑하니 내팽개치고 가는 거지? 우리가 너무 우스워보였나?” “자존심 상하세요?” “당연하지 짜샤. 너 같으면 안 그렇겠냐? 나름 별동대라며 비장하게 침투했는데 이게 무슨 닭 쫓던 멍멍이 신세냐고. 그나저나 궁금해 미치겠네? 도대체 뭐지?” 비담은 자신의 임무도 망각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때 제법 묵직한 음성이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비담을 깨웠다. “그 궁금증 내가 해결해주지.” 묵직한 음성의 주인은 백여 명의 영체를 이끌고 비담 앞에 나타난 혁도월이었다. “누구쇼?” “나? 폐하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무장 혁도월이라 하네. 그러는 자넨 누군가? 보아하니 염부 쪽에서 보낸 영체 같은데 그대들의 작전은 이미 들통 났으니 그만 정체를 밝히게.” “작전이 들통 났다?” “제법 머리를 많이 썼더군. 허나 영민하신 폐하께서 이미 자네들의 알량한 수를 모두 꿰뚫어 보셨네. 그래서 모두 허사가 되었으니 그만 포기하게.”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우리 작전이 뭐요? 정말로 상제 그 양반이 우리의 노림수를 꿰뚫어 본 거요? 그런데 그런 양반이 저쪽으로 돌격하는 저의는 또 뭐요? 웬만하면 적에게 이런 거 묻고 싶지 않은데 정말 궁금해서 그러니 이해 좀 해주쇼.” “하하, 궁금한 걸 묻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네. 뭐 정 궁금하다면 대답해줌세. 자네들이 속한 염부 쪽에서 소수의 인원을 보내 우리 쪽을 흔들어 놓고, 시선을 이쪽으로 분산시킨 다음 정면을 치려는 속셈이었겠지. 하지만 우리가 모시는 상제께서는 그러한 수를 미리 내다보시고 먼저 공격을 하신 게지. 다시 생각해도 그 지닌바 능력의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대단한 분이시지.” “흐음. 그러니까 댁의 말을 정리하면 상제 그 양반이 고작 50밖에 안 되는 인원이 쳐들어온 것을 가지고 당신네들의 시선을 붙잡기 위한 노림수라고 생각했다는 거요? 정면을 치기 위해서? 정말 당신네들이 지닌 능력의 끝을 가늠할 수가 없구려. 이건 진심이오.” 비담은 저도 모르게 푸욱 한숨을 쉬고 말았다. 단순해도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경천동지할 계략도 아니건만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알아서 미리 걸려주다니. 엄청난 고생과 위험 속에 염부 쪽으로 유인하여 펼치려던 성동격서의 작전은 별 노력이나 위험부담 없이 알아서 펼쳐진 셈이었다. 정말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단순함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칭찬한 것으로 오해한 혁도월은 의기양양 박장대소까지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리 자책할 필요는 없네. 누군들 상제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정말로 궁금해서 그러는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읍시다. 혹시 상제를 보좌하는 참모 중에 녹림왕이 있는 거요?” “녹림왕? 그런 왕은 듣지 못했는데. 서천왕, 북천왕, 남천왕 전하는 계시지만 그런 왕은 없는데.” “아닙니다. 그만합시다. 더 말을 나누다간 나까지 이상해지겠네. 어디 보자...어림잡아 100정도 되니 두당 둘씩 잡으면 되겠군. 얘들아! 그냥 하던 대로 이것들 치워버리고 본대에 합류하자. 그리고 조금 전에 비장하게 말했던 거 머릿속에서 지워버려라. 쪽 팔린다. 그럼 시작하자.” 비담은 한없이 밀려드는 허무함을 분노로 승화시켜 폭발시켰다. 분노에 의해 생성된 부채의 수가 정확히 120개. 그 부채는 10개씩 짝을 이뤄 화류선법 1초식부터 마지막 12초식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지며 혁도월 일행을 휩쓸었다. 그저 영력을 생성해 날리고 쏘는 수준의 영체들이 감당하기엔 현묘한 무리가 담긴 화류선법은 재앙 그 자체였다. 혁도월을 비롯한 천계 쪽 영체들은 나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떻게든 피해보려 애를 썼지만 그들이 감당하기엔 불가항력이었다. 그렇게 와르르 와해된 진영은 남은 별동대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한두 번 맞춰본 솜씨가 아니란 걸 시위라도 하듯 일사분란하게 적들을 섬멸하는 별동대였다.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 소멸되지 않은 천계의 영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앞으론 계획이고 나발이고 그냥 화끈하게 붙는 게 좋겠구나. 괜히 분위기만 무겁게 잡았다가 이게 무슨 낭패냐고.” 비담은 툴툴 거리며 별동대를 이끌고 염부 쪽 후방으로 이동하였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신나게 싸우고 있으리라. 비담의 예상대로 그가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한참 격렬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비담은 그렇게 자신 앞에 펼쳐진 장관을 한마디로 평했다. “개싸움이 따로 없네.” 비담의 평대로 치열한 전투의 현장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적아의 구분이 모호했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사방팔방 영력덩어리를 쏘며 달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담은 천상계의 우아한 전투장면을 기대했던 자신이 한없이 측은해짐을 느꼈다. ‘마지막 쟁투라고 하기에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무림에 적을 둔 어린아이들이 싸워도 저것 보단 낫겠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비담은 이내 전장에서 시선을 뗀 후 길천의 본대를 찾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리저리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가장 화려한 무공의 초식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염부의 후방에 길천 일행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싸움이라면 모름지기 저 정도는 되어야지. 지금 생각하니 정말 다행이구나. 저 양쪽 무리에 껴 있지 않아서.’ 비담은 크게 한숨을 쓸어내린 후 별동대와 함께 길천이 자리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한창 싸움에 열중하고 있던 길천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휘파람까지 불며 기세등등이었다. 그러다 자신 옆에 당도한 비담을 발견하곤 치하의 말을 건넸다. “고생했다, 담아. 네 덕분에 이리도 수월하게 적들을 유린하는구나.” “소제가 듣기엔 너무 과분한 칭찬이네요.” “아니야. 그리 위험을 무릅쓰고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니 들을 자격이 충분해.” “알겠습니다. 바쁘니까 그냥 넘어가죠. 그런데 염부 쪽 영체들 상태는 어떻습니까?” “상태? 보다시피 우리가 겪었던 영체들과 별반 차이가 없구나.” “질질 끌 것 없이 이번 전투로 끝장을 보죠.” “서로 맞붙어 정신없으니 예상대로 영력이 강한 놈들만 각개격파하면 금방 끝날 듯싶구나.” “그럼 저번에 연습한 것처럼 5개조로 나누어 시작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오늘 끝장을 보는 거야. 모두 조별로 모여 사냥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