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57편 (57/62)
쯧쯧, 30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변한 게 없어요.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같은 편에 서서 싸운다는 점이군.” “어라, 아는 놈들이에요?” “알지, 너무나 잘 아는 놈들이라 그게 문제지. 저기 길쭉하게 대나무처럼 생겨서 이리 덤벙 저리 덤벙 뛰어다니며 영력 날리는 놈은 검제고, 그 옆에서 눈을 있는 데로 부라리며 쉴 새 없이 떠드는 시커먼 놈이 천마 녀석이지.” “네? 검제 어르신과 천마 어르신이요?” “드디어 찾은 것 같구나. 후후, 저것들은 세월을 그리 쳐 먹고도 어째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 흐흐흐,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나. 암, 안 변하고말고. 그나저나 저것들 이대로 두었다간 누구하나 다칠 지도 모르니 그만 구경하고 내려가자.” 무엇이 즐거운지 입이 함지박만 해진 길천이 서둘러 전장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현장에 도착한 길천은 엄청난 영력을 담아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만!!!”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으로 인해 전장은 얼어붙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고함 속에 실린 힘이 너무나 막강했기에 자신들도 모르게 굳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얼떨떨하게 서있던 무리에서 퍼뜩 정신을 차린 수장들이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누구시기에 저희들의 투쟁을 막으시는 겁니까?” “정당하게 이루어진 전투입니다. 그런데 대체 그만하라 하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역시 무림이든 천계든 힘이 있고 볼 일이야. 다짜고짜 반말하고 영력부터 날렸을 터인데 이리 고분고분 존대까지 해가며 물어오잖아. 뭐, 갑자기 싸움을 중단시킨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가 급한 볼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 좀 해달라고. 야!!! 거기 뒤에 서있는 천마랑 검제? 나 알아보겠냐?” 보잘것없는 영력으로 인해 무리의 끝자락에 서있던 천마와 검제는 갑자기 자신들의 별호를 부르며 살갑게 물어오는 정체불명의 영체 때문에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너 아는 놈이냐? 기생오라비처럼 반들반들 생겨서 기억이 날 법도 한데 영 모르겠네.’ ‘글쎄...나도 처음 보는 놈인데.’ 둘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과거를 들춰보아도 저처럼 무지막지한 영력을 지닌 존재와 통성명했던 기억은 없었다. “허어! 고작 300년 지났다고 그새 나를 새카맣게 잊어버리다니. 괘씸한 놈들.” 그런데 그 장면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비담이 참다 참다가 그만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 천외삼성이라면서요? 근데 왜 저 두 분이 형님을 못 알아보는 거예요? 저 두 분을 보아하니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인데요? 정말 그 당시 사람들이 세 분을 합쳐 천외삼성이라 불렀다는 게 사실이에요?” “허흠!!! 다, 당연하지. 우리 셋을 합쳐 천외삼성이라 불렀다니까. 아, 미치겠네. 이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냐? 정말 기억 안나? 이래도?” 길천은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전신을 두른 황금갑주를 없애고, 이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손엔 영력으로 형성된 부채를 쥔 채 특유의 걸음으로 전장 한 복판을 거닐었다. 간절한 눈빛을 가득 담아. 그때 검제와 천마의 입에서 동시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감탄사의 어감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아!!! 그 녀석이네. 부채 하나 달랑 들고 여자들 등쳐먹으며 돌아다녔던...가만, 별호가 뭐였더라...?” “아!!! 나도 어렴풋이 생각나는구먼. 어디쯤에선가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그래, 항주에 머물 때 음란마귀가 활보한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했던 적이 있었지. 맞아, 맞아, 저 모습을 보니 또렷이 기억나는구먼. 그러게...별호가 뭐였더라? 무슨 색귀? 무슨 색마? ‘복숭아 도(桃)’ 자가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뭐, 뭐시라? 음란마귀? 무슨 색귀? 색마? 아!! 뒷목이야.” “크하하하하하. 내 언젠가 형님 허풍이 들통날줄 알았다니까요. 그러게 좋게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서 쪽팔리게 이게 무슨 봉변이에요. 그나저나 이거 살인멸구, 아니 살영멸구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목격자가 이리 많으니. 푸하하하하.” “야!! 이 새끼들아. 늬들 다 뒈지고 싶냐? 도색성. 엉? 도색성이라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별호는 길거리에 내던지고 꼭 그따위로 말하고 싶냐?” “맞다! 도색성. 여자 등이나 치고 다니는 주제에 거창하게 색성(色聖)이라 칭하고 다니던 건방지고 음란한 놈.” “그러네. 이제 생각났으이. 맞아, 그런 건방지고 음란한 녀석이 우리와 동시대에 살고 있었지. 그때 많이 봐줬었는데 말이야. 원래 별호에 ‘색’자 들어가는 놈들 치고 정상적인 놈이 하나도 없어서 손봐줄려 했는데 당시 여자들이 극구 말리고 호소하는 바람에 그냥 조용히 넘어갔더랬지. 이런 데서 또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 더 이상은 못 참아. 세력이고 나발이고 오늘 여기서 모두 끝장을 보자. 담이 너도 목격자니 조용히 사라져줘야겠다. 그리고 하련이는...조금만 고민을 더 해보자.” 길천의 영체주변으로 미증유의 거력이 용솟음쳤다. 143화 배까지 움켜쥐며 박장대소하던 비담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길천의 상태가 영 불안정한 것이 정말로 모두 죽여 입을 막겠다는 의지가 보였던 것이다. 비담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길천을 말렸다. “혀, 형님? 그만한 일로 이리 화내실 것까지야...” “뭐? 그만한 일? 네 눈엔 이게 보통일로 보이냐? 저것들이 나를 우습게 여겨도 유분수지 음란마귀에 색마까지 등장한 마당에 내가 참게 생겼냐? 너도 알다시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색귀, 색마인 거 알고 있지? 말리지 마. 오늘 다 깡그리 죽여 버릴 테니까.” “아이, 그러면 계획이 어긋나잖아요. 세력을 규합하여 상제가 되시겠다는 당찬 포부는 어디다 던져버리시고 이리 흥분하시는 거예요? 그만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이제 슬슬 상제로서의 위엄과 체통을 보이셔야죠. 저리 보는 눈도 많은데.”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거기서 열심히 나를 변호하고 감싸줘도 모자랄 판에 대놓고 크게 웃어? 전부 용서 못해. 크아악.” “소제가 잘못했으니 그만 진정하세요. 그리고 여기서 몽땅 소멸시키면 뭐가 남아요? 형님의 화야 풀리겠지만 남는 게 없잖아요. 어차피 형님 아래서 만년 동안 구르실 분들인데 두고두고 화풀이 하시면 되잖아요. 그게 더 남는 장사에요.” “크흠. 만년 동안이라...알았다. 이제 진정되었으니 그만 놔.” “진짜 진정되신 거 맞으시죠?” “진정됐다니까. 네 말대로 앞으로 내 밑에서 만년동안 있을 녀석들이니 훗날을 기약해야지. 흐흐, 모두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비담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으나 애써 무덤덤한 신색을 유지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 정도 배포와 아량을 겸비하신 형님은 역시 상제로서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참, 그나저나 천마와 검제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쩌실 생각이세요?” 순간 나머지로 전락해버린 영체들이 긴장 속에 길천의 입을 주시하였다. 자신들의 운명이 길천의 의지에 달려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흐흐, 어차피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영력의 절대량엔 변함이 없다. 인간계에 있을 때나 쪽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였지...가만...아니지, 꼭 그렇지만도 않지. 예전에도 절대고수의 수가 중요했으니 결국 마찬가지구나. 뭐 복잡하게 생각하면 골치만 아프니까 그냥 하던 데로 하자. 야!! 천마랑 검제? 죽기 싫으면 얼른 옆으로 빠져라. 언제 맘 변해서 확 싸잡아 소멸시킬지 모르니까 얼른 얼른 알아서 옆으로 기어나가.” ‘형님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빠져나가세요. 가만히 그리 넋 놓고 계시다가 진짜 소멸되십니다.’ 갑자기 길길이 날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힘을 개방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려했던 길천의 행동으로 인해 멍하게 있던 천마와 검제는, 다급하게 들려오는 전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슬금슬금 전장 밖으로 이동하였다. 만년지투가 벌어지고 있는 천계에서 힘은 곧 진리이자 법이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아무런 군소리 없이 눈치껏 옆으로 빠진 것이다. 물론 천마와 검제 둘 모두 자존심이 무척 상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예전 무림을 활보하던 때의 자신들이 아니듯 지금 이곳에 있는 도색성 길천도 예전에 몇 번 보았던 그가 아니었다. 명실상부 상제의 영력에 버금가는 아니 이미 앞질렀을지도 모르는 힘을 지닌 어마어마한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누군가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전세가 역전된 과거의 절대고수들을 바라보며 비담은 다시 한 번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씨알도 안 먹힐 다짐을 하였다. 누구보다 자신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비담이었기에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형님? 나중에 저분들도 상제랑 싸워야하니까 의식부터 진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야 영력도 높아질 테고 형님에 대한 충성도도 올라가고요.” “필요 없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다. 지들이 뭐 한 게 있다고 넙죽 공짜 영력을 나눠 주냐? 그리고 소멸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언감생심 영력까지 축내서야 말이 안 되지. 그건 됐으니 그만 신경 쓰고, 저것들이나 정리하자.” 길천은 아직도 앙금이 남았는지 비담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 한 후 그대로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비담도 날카로워진 길천의 신경을 더 이상 긁지 않고 바로 뒤따라 몸을 날렷다. 하련은 방금 일어난 소란쯤이야 별거 아니란 듯 그저 묵묵히 영력으로 형성된 검을 들고 늘 해왔던 대로 준비 자세를 취했다. 길천은 화풀이라도 하듯 지닌바 모든 힘을 쏟아 부어 공중에 부채 하나를 띄웠다. 그렇게 형성된 거대한 부채는 남아 있던 영체들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지상을 향해 활강하는 독수리처럼 내리 꽂혔다. 콰콰쾅 큰 폭음과 함께 잘게 터져 나간 영력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대비를 하고 있었으나 워낙 막강한 힘과 속도로 날아왔기에 대부분의 영체들은 구멍이 숭숭 뚫리는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비담은 타격을 입고 비틀거리는 수많은 영체사이를 한 마리 미꾸라지처럼 파고들어 휘저었다. 화류선법에 바탕을 둔 정교하고 화려한 초식들이 전장 한 복판을 수놓았는데 그동안 비담 역시 영력을 계속 쌓아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거듭되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체들 역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자신이 생성할 수 있는 최대치의 영력덩어리를 만들어 길천과 비담을 향해 쏘아 보냈다. 하지만 유려한 보법과 신법을 겸비한 둘에겐 콧방귀가 나올 정도로 한심하고 단순한 허점투성이 공격이었다. 갑자기 흥이 돋는지 길천은 길게 휘파람을 한차례 분 후 부채로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박투로 전환하여 종횡무진 전장을 누볐다. 비담 역시 길천의 행동에 자극받아 영력으로 형성된 부채를 없앤 후 주먹을 힘껏 말아 쥔 채 타격으로 영체들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파파파파박, 퍼퍼퍼퍼벅, 투투툭, 퍽퍽. 언제 그랬냐는 듯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신나게 뛰어다니는 둘을 보며 하련은 짧게 혀를 차면서도 이내 웃음 짓고 말았다. ‘쯔쯔, 정말 못 말린다니까. 그래도 좋아. 그래서 더 좋아. 호호.’ 하련 역시 휘두르던 칼을 살포시 없앤 후 으스러져라 주먹을 말아 쥐고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먹잇감을 물색하였다. 그렇게 세 명이 만들어낸 거친 풍랑에 영체들은 휘청거리는 조각배처럼 그저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며 하나 둘 뿌옇게 흐려지다 종래에는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한결 요란해진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우자 멍하니 구경하던 천마와 검제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엔 우리도 저랬는데. 300년 전 온 천하를 발아래에 둔 채 강호가 좁다하며 온 사방을 누비고 다녔을 때가 있었는데.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눈 깜짝할 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마지막 수장의 비명과 함께 장내는 말끔히 정리되었다. 길천과 비담, 하련은 스윽 한 바퀴 둘러본 후 개운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채보다 이게 나은데요?” “안 그래도 기분이 상당히 꿀꿀했는데 조금 풀리는구나.” “호호, 역시 호쾌한 맛은 손맛이 제일이에요.” 어른 주먹 세 개는 들어갈 정도로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는 천마와 검제. 자신들보다 월등히 높은 상위의 영체 수십을 순식간에 찜 쪄 먹은 세 괴물. 도대체 저것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저토록 강하단 말인가. 짧은 품평을 뒤로 하고 길천은 휘적휘적 천마와 검제를 향해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명령조로 짧고 강렬하게 말했다. “부럽냐? 그럼 꿇어.” “대관절 갑자기 꿇으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말인가? 호오!! 말이 좀 짧다.” “허, 허나 예전 동시대에 강호를 주름잡았던 동지로서...” “지나간 과거야. 돌릴 수 있으면 돌리든가.”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그리 우리를 홀대하고 막 대하는 것은 강호의 예법 상 크게 어긋나는 일 아닌가? 저기 어린친구들도 보고 있는데...” “요란하고 실속도 없는 불필요한 겉치레지. 억울하면 힘을 키우든가. 그리고 방금 전까진 색귀 어쩌고 그러면서 날 냠냠 맛나게 씹었잖아? 그건 예법에 들어맞고? 아무튼 구차하게 긴 말 할 필요 없고, 우리랑 함께 만년 동안 천계를 노닐며 화끈하게 살고 싶거들랑 눈 딱 감고 무릎 한 번 꿇어. 그게 싫으면 소멸되면 되는 거고. 고상하게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데 짐 싸들고 다니며 말릴 생각 없으니까 어서 선택해. 꿇을래? 아님 뒈질래?” “만 년?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 귀찮아 죽겠네. 확 쓸어버려? 기분 좋아서 좋게 말하니까 내가 우스워 보이냐? 지금 이 상황 감이 안 와?” ‘어서 꿇으세요. 나중에 제가 차근차근 설명 드릴게요. 안 그러면 진짜 소멸되실 지도 모른다고요. 그러니 무조건 꿇으세요, 어서요, 천마 어르신.’ 비담의 다급한 전음이 천마의 고막을 쩌렁쩌렁 울렸다. 천마는 영문도 모른 채 하는 수 없이 길천 앞에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넌 왜 안 꿇어? 꼿꼿한 그 다리 내가 분질러주랴?” 길천의 시선이 이번엔 멀뚱멀뚱 서있는 검제를 향하였다. “커흠, 무슨 말을 그리 험악하게 하나...하십니까. 꿇습니다. 꿇어요. 자, 보십시오, 벌써 꿇었지 않습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검제의 두 무릎은 순식간에 땅에 닿아 있었다. 길천은 짐짓 험악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표정을 풀더니 두 사람의 머리에 차례로 짧은 빛을 쏘아 보냈다. 144화 의식이 끝난 후. 비담은 할 말이 있다며 천마와 검제를 데리고, 길천에게서 조금 떨어진 장소로 이동하였다. 길천과의 거리가 적당히 벌어지자 비담은 그제야 천마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마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비담이라 합니다.” “어르신?”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영력을 지닌 존재가 갑자기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접자 천마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길천과 거리를 둔 이유가 기강을 잡거나 훈계일 것이라 지레짐작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움이 배가 됐던 것이다. “하하, 그리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천마 어르신은 모르시겠지만 300년 뒤 먼 후손 중에 저와 미래를 약속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녀와 저 둘 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죽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어르신을 대하는 것이니 그리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지닌바 영력의 차이가 이리 큰 데 제가 어찌...?” “물론 길천 형님 앞에서는 이리 대접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게 말씀을 좀 가려서 살살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뭐 아무튼 지나간 일이니 그건 어쩔 수 없고 앞으로도 이리 사적인 자리에선 어르신으로 모실 것이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 그리고 너?” 비담은 멀뚱히 서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검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나를 부른 것이더냐?” “귓구멍이 막혔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봤자 거기 너밖에 더 있냐? 정신 안 차릴래?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눈치나 살살 보고 말이야.” “크흠, 천마에게 어르신이라 칭했으니 당연히 그 지기인 나에게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줌이...” “지랄하네. 어디서 공짜 마차를 얻어 타려고 그래? 억울하면 누구처럼 후손을 잘 두던지, 아님 지닌바 능력이 탁월하여 대접을 받던가.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 무림에서의 배분이니 하는 그딴 쓰잘데기 없는 것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동동 흘려보내라. 앞으로 최소 만 년 동안은 이곳에서 미우나 고우나 뒤엉켜 지낼 것이니 서열정리는 확실히 해 두자고. 그리고 한 번만 더 ‘나’ 라며 반말을 서슴없이 뱉고 대접 운운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 성질머리 고약하니까 알아서 처신 잘 해라, 알았어? 엉? 왜 대답이 없어? 검제 너 죽고 싶냐? 빨리 대답 안 해?” “예. 아, 알겠습니다.” 검제의 꼿꼿했던 허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접혀졌다. 비담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지막 일침을 놓았다. “아! 그리고 앞으론 우리 도.색.성. 길천 형님께 주군이라 부르고 지근거리에서 보필 잘해라. 오늘처럼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한다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무엇을 기대하고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잘근잘근 씹어 먹어줄 테니까 알아서 미리 잘 모셔. 알았어?” “네,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럼 이쯤 해두고,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한 번만 얘기할 거니까 잘 들어. 어르신은 잠깐 이쪽에 앉으시지요. 넌 서서 들어, 임마. 어른들 얘기하는데 어디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엉덩이를 붙이려들어? 정말 정신 안 차릴래? 확 그냥.” 비담이 손을 들어 내리치는 시늉을 하자 검제는 그만 새우처럼 움찔 몸을 말고 말았다. 그리곤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만만치 않았는지 눈물까지 찔끔 맺혔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천마마저 동화되어 같이 부르르 떨고 말았다. “이곳에서 300년이나 지냈으면 알아서 주제파악 정도는 했을 터인데 눈치가 없는 건지, 꽉 막힌 건지. 아무튼 좋게 말하는 건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부턴 진짜 내리친다. 흠흠,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만년지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터이니 잘 들어. 어르신도 유심히 잘 들으세요. 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알겠습니...아니 알겠네. 흠흠.”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검제를 돌아보는 천마였다. 오묘한 표정으로. 비담은 황금선도와 만년지투에 얽힌 비사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듣고 있던 천마와 검제 입장에선 기함을 할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둘은 요 근래 당했던 여러 가지 변화와 일련의 사태들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비밀 하나 더 말씀드리죠.” “아직도 뭐가 남았는가?” “후후, 당연히 남았죠. 어떻게 길천 형님이 황금선도의 영력을 흡수했는지, 저와 하련의 영력이 일취월장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렇구먼. 그게 아직 남아있었군.” “이제 한 배를 탔으니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뭐,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영체를 예전 육신이라 생각하고, 영력을 내기라 생각하면 됩니다. 과거 무림에서 활동하던 당시처럼 심법을 이용해 영력을 돌리시면 됩니다. 그럼 과거처럼 영력의 수발이 자유로워져 훨씬 효율적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설명 드렸듯 만년지투 기간엔 다른 영체를 소멸시키면 그 영력들이 고스란히 구성원들의 수에 맞춰 나눠집니다. 그래서 저와 하련이의 영력이 강해진 것이고요. 자! 그럼 더 이상 시간 지체하지 마시고 한 번 해 보세요.” 비담의 말에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천마가 이내 자세를 고쳐 잡고 정좌하여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였다. 검제 역시 비담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이내 천마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똑같이 영력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비담은 이내 길천을 호출하였다. 서로 담소를 나누던 길천과 하련은 비담이 부르자 한달음에 달려와 둘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어찌 됐느냐?” “형님이 시키신 데로 처리했습니다.” “잘 했다. 자존심이 강한 녀석들이니 회유하려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섞을 수밖에.”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됐을 것 같은데요?” “흐흐, 모르는 소리. 저것들 자존심이 얼마나 쌘 데. 네 말대로 천주이성이니 뭐니 하며 100년 가까이 무림에서 떠받들려졌는데 한 번은 확실하게 깔아뭉개야지. 그래야 만 년 동안 지내기가 수월할 게다. 이제 깨어나는 데로 슬슬 당근을 줘야지.” “형님이 하도 부탁하셔서 들어드리긴 했는데 영 적성에 안 맞아 못하겠네요. 다음부턴 저한테 이런 거 시키지 마세요. 아주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 참느라 애먹었잖아요.” “한 번이면 족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나저나 얘기는 모두 해줬겠지?” “네. 다 알고 있으니 두 분 깨어나시면 형님이 마무리하세요.” “오냐, 알았다.” 길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 영력을 제어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천마와 검제를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