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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소설) 호색 -완 - 56편 (56/62)

2026-10-04 14:52:57 조회 2
동쪽 끝에 다다랐는데도 천마 어르신과 검제 어르신의 그림자도 볼 수 없으니.” “흐흐,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무에 걱정이냐. 막다른 길에 다다랐으니 방향을 틀어 찾아보면 되지. 그럼 어디로 가볼까? 북쪽? 아니면 남쪽?” “음...이럴 땐 부채점이 최고지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어디보자.” 비담은 자신의 영력으로 만들어낸 부채를 쫙 펼친 후 바닥에 대고 세웠다. 그러더니 그대로 손을 떼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던 부채는 비담의 왼쪽 방향으로 픽하고 쓰러졌다. “저쪽이면...북쪽이네요. 가시죠.” “후후후, 예전 버릇이 또 도졌구나. 그냥 북쪽으로 가고 싶다하면 될 것을 뭐 하러 그런 수고로움을 사서 하는지. 영력으로 만들어낸 부채니 당연히 네 의지를 따를 것 아니더냐?” “그냥 재미죠. 안 가실 거예요?” “간다, 가. 인석아.” 툴툴 웃던 길천이 이내 비담의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얼마나 달렸을까. 돌연 그들의 눈앞에 무언가에 급히 쫓기듯 달려오는 영체 하나가 들어왔다. 길천과 비담은 상황파악을 위해 잠시 제자리에 멈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영체를 바라보았다. “달려오는 모양새로 보아 무언가에 쫓기는 모양인데...어, 어라? 여인인데요?” “여인? 어디보자...여인 맞구나. 담아?” “네?” “뭐해? 안 튀어나가고?” “엥? 제가요? 힘이 남아도는 건 형님이시잖아요.” “야 임마! 어디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으려들어. 흐흐, 만에 하나 네 녀석이 정 힘에 부치면 지원사격일랑 든든하게 해줄 터이니 걱정 말고 튀어나가렴. 도와 달라 가슴 절절하게 외치는 여인의 음성이 안 들리느냐?” “그저 치마만 두르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우리들에게 여인이란 보배 같은 존재니라. 비록 죽었을지언정 끝까지 꽃을 보호하는 사명을 등한시해서는...” “그만 좀 하세요. 간다잖아요. 힘이 철철 넘치는 소제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 늙으신 몸 잘 보존하시면서 천천히 따라오시구랴. 그럼 소제는 지엄하신 차기 옥황상제의 황명을 수행하기위해 이만 갑니다요. 헤헤헤.” “저, 저놈이...” 장난스레 웃던 비담의 신형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비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천은 눈에 쌍심지를 켰으나 이내 피식 웃고는 그 뒤를 급히 쫓았다. 서로 마주 보며 달려오는 상황이었기에 비담과 여인의 거리는 급속도로 좁혀졌다. 그렇게 서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여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마도 비담을 자신의 뒤를 쫓는 무리와 한 패라 여긴 듯했다. 그렇게 여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둘의 거리는 더욱 좁혀져 사라질 찰나. 여인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비담을 향해 영력 덩어리를 쏘아 보냈다. 슈우욱 비담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영력 덩어리가 확실히 보였지만 짐짓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듯 유연한 동작으로 피해버렸다. 그런 다음 여인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서로가 교차되어 지나친 순간. ‘헉!!! 너무 예쁘잖아. 선녀인가?’ 그 짧은 순간 여인의 전신을 훑어본 비담의 평가였다. 비담은 서희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세상에 다시없을 거라 확신했던 지난날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우물 안 개구리였어.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저놈들인가?’ 비담의 눈에 바람처럼 달려오는 영체 셋이 들어왔다. 비담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세 영체를 향해 다짜고짜 부채를 날렸다. 영력으로 형성된 부채의 수가 물경 수백에 달하자 정신없이 여인을 쫓아오던 영체들은 그만 아연실색 당황하고 말았다. 슈슈슉 핑핑핑 슈슈슉 투두두두두두두둑 펑펑펑 퍼엉 펑펑 퍼버버버 펑펑가죽북 터지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 영체는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신없이 흔들렸다.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세 영체를 뚫고 지나간 부채들이 자신들의 소임을 끝마치고 사라질 무렵 세 영체 역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상황을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비담은 손을 탁탁 턴 후 여인이 멍하게 서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아직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여인에게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소저, 어디 다치신 곳이라도...엥?” 비담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긴장으로 인한 떨림으로 치부하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불현듯 여인의 시선이 한 곳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의 시선이 고정된 곳엔 길천이 서있는 것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길천 역시 벼락에라도 맞은 듯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본 채 떨고만 있는 두 사람. “뭐, 뭐지? 이 상황은...” 비담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문부호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둘의 모습이 너무나 비장해서 차마 끼어들 엄두가 나진 않았다. 그렇게 속으로 삭히며 끙끙 앓고 있는 비담이 안타까웠던 것일까. 드디어 잔잔하던 대치 상황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바로 여인이 자석에 끌리듯 한 발 한 발 길천을 향해 다가갔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놀라운 건 길천 역시 여인의 행동에 전염이라도 된 듯 똑같이 한 발 한 발 다가선다는 점이었다. ‘아주 묘한 분위기야. 이거 무언가 곧 터질 것 같은데...으악!!! 뭐, 뭐야?’ 상황을 지켜보던 비담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되었다. 왜냐하면 조심스럽게 다가서던 둘이 어느 순간 질주를 하는가 싶더니 서로를 와락 껴안았기 때문이다. 둘의 포옹은 일정거리를 두고 있는 비담에게 전달될 정도로 가슴 절절했다. ‘뭐, 뭐야? 형님의 정인인가? 가만...그러고 보니 이곳에선 서로 교류가 없다 하셨지. 그렇다면 분명 인간 세상에 계셨을 때 사귀셨단 말인데...어째서 한 번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 형님 성격상 저토록 고운 처자와 사귀었으면 으레 자랑삼아 구구절절 떠드셨을 텐데...가슴 절절한 걸 보면 보통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아!!! 답답해!!! 궁금해 미치겠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비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쭈뼛쭈뼛 둘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하!!! 형님? 누구신데 이리 눈물겨운 상봉을 하시는 거예요? 저에게도 소개 좀 시켜주시죠?” “형님? 제 목소리가 안 들리시나요? 여보세요? 아!!! 정말 미치겠네. 그만 좀 하시고 이 상황 좀 말씀해 달라니까요. 제가 웬만하면 참겠는데 무려 한 식경(30분)이나 지났다고요.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냐고요?” 자신의 질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무려 한 식경 동안이나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두 남녀 때문에 비담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바락바락 소리치고 말았다. 그제야 둘에게서 비담이 기대하던 반응이 나타났다. “험험, 네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그래, 뭐라고?” “휴우, 이 고우신 소저가 누구시냐고요?” “아!!! 큰 충격에 그만 정신을 놓았구나. 암!!! 당연히 너에게 소개시켜 줘야지. 이 아이가 바로...” “바로...?” 비담은 자신이 기대했던 대답을 드디어 들을 수 있겠다는 흥분에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길천의 입만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141화 길천은 애가 타는 비담의 속을 모르는지 축축하게 젖은 음성으로 끊어질 듯 느릿느릿 말을 뱉었다. “이 아이가...바로...내가 말했던......소중한 내 딸......하련이란다.” 말을 하다 감정이 복받쳤는지 끝말은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매우 작았다. “네? 누구시라고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랑하는 내 딸...하련이.” “예!!! 형님의 딸이라고요? 그, 그럼 설마...300여 년 전 ‘검의 여제’로 불리셨던 북해빙궁의 초하련 궁주님?” “이리 오렴, 하련아.” “네, 아버지.”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가 다소곳한 자세로 둘을 향해 다가왔다. 급작스러운 부녀상봉이 얼떨떨했는지 그녀 역시 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아직도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이 그녀의 눈부신 미모를 오히려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여기 멀대 같이 서서 눈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는 친구는 이 못난 애비의 의제란다. 이름은 비담이고. 여긴 자네도 익히 들었던 내 딸 하련이.” “소녀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사옵니다. 비 숙부님.” 하련은 날아갈 듯 우아한 자세로 비담에게 절을 올렸다. 비담은 하늘같은 무림의 대선배를 향해 지극히 정중한 자세로 포권을 취하려다 그만 아연실색 당황하고 말았다. “헙!!! 제게 이러시면 제, 제가...몸 둘 바를......이 일을 제가 어찌 감당하라고...형님? 형님!!! 제발 어떻게 좀...” “아차차!!! 이곳에서 300년의 세월을 보냈더니 그만 시간에 대한 개념을 상실했구나. 어찌한다...” 생각할수록 복잡했기에 길천은 그만 끙 앓고 말았다. ‘내 색공과 무공 전부를 담이에게 전수했으나 엄연히 처음부터 사제지간의 연을 맺진 않았으니 같은 사문의 오누이처럼 서로 정답게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그렇다면 10여 년의 세월을 함께 지내며 나와 의형제의 연을 맺었으니 당연히 숙부라 불러야하는데 그 역시 서로의 나이차를 생각하면 영 그림이 이상하고...반대로 담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리 하련이는 배분 상 300여년이나 앞서 살았던 무림의 대선배란 말인데...아! 복잡해. 무슨 놈의 족보가 이리 꼬였담. 할 수 없지. 이럴 땐 정면 돌파가 최선책이니 부딪혀보자.’ “하련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이쪽으로 와 앉거라. 담이 너도 이쪽으로 와 앉고.” 길천의 부름에 비담과 하련은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길천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망설이다 이네 10여 년 전, 비담과 처음 만나게 된 부분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두 시진 후. 구구절절 이어지던 길천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휴우, 이렇게 된 거란다. 그래서 말인데 둘 사이의 애매한 관계를 어찌 정리했으면 좋겠느냐? 가감 없이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때론 웃기도 하고, 때론 울기도 하며 장황한 이야기를 들은 하련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놨다. “행적으로 미루어 두 분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맺고 계시네요. 이미 죽어 육신이 사라졌는데 인간 세상에서의 배분과 세월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소녀의 짧은 소견으론 제가 아버지를 대하듯 비 숙부님으로 모시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 하오나 형님? 이리 곱고 젊으신 따님에게 연배나 경험에서 한참이나 어리고 부족한 제가 어찌 숙부소리를 듣는단 말입니까?” “듣고 보니 나 역시 하련이의 생각이 옳은 것 같구나. 만년지투가 지향하는바 역시 강자존을 통한 새로운 질서 확립과 위치 아니더냐. 말 그대로 살아 숨 쉬던 세상이 바뀌었으니 과거의 일들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느냐. 하련이 말대로 지금까지 쭉 그래왔던 것처럼 의형제 간으로 지내고 그에 합당한 예를 받는 게 좋겠어.” “두 분의 생각이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쩝, 그나저나 많이 아쉽네요. 이리 곱고 아리따운 분을 누님으로 부르며 따르고 싶었는데.” 소저나 누님으로 칭하고 싶었던 간절한 비담의 바람은 결국 자신이 숙부가 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300살이나 드신 귀여운(?) 질녀를 얻게 된 비담은 수많은 아쉬움들을 애써 가슴에 묻은 후 화제를 화류선으로 돌렸다. “저, 저기 하련아? 아!! 어색해.” “호호, 편하게 말씀하세요, 숙부님. 제게 뭐 하문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큼큼, 다름이 아니라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인데... 북해빙궁의 염천에 꽂아져있던 형님의 화류선 말이다, 혹시 네가 한 일인지 궁금해서 말이야.” “아! 아버님의 화류선 말이군요. 네, 맞아요. 제가 그곳에다 꽂아 두었어요. 어머니가...아니 설후가 제게 걸었던 수법의 부작용으로 이지를 상실한 채 떠돌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잠깐 정신이 돌아왔었거든요. 그때 어렵사리 아버님의 유품을 구해 제가 얻었던 최후심득과 함께 그곳에 두었었지요.” “그랬구나. 형님의 얘기를 듣고 그저 짐작만 했었는데...그런데 ‘설매풍류’라는 초식을 써야만 부채가 뽑히게끔 안배해 두었던데...?” 비담의 질문을 받은 하련의 시선이 점점 따스하게 물들더니 이내 길천을 향했다. 하련의 시선을 받은 길천 역시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아스라이 멀어진 기억 저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곤 둘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붉은 매화 밭. 그곳에서 추었던 그 춤을. 춤이 끝난 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럼요. 아버지와 단 둘이 나누었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인 걸요.” 비담은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예전 자신이 북해빙궁에서 추측하였던 데로 초하련 궁주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짐을 덜고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의형을 보며 비담은 다시 한 번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형님이 마음의 짐 때문에 그동안 많이 괴로워하셨는데 정말 잘 됐어. 아, 나도 서희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부둥켜안고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비담의 마음 한구석이 쓰디쓰게 아려왔다. “그런데 아버지?” “왜 그러느냐?” “무림인이라면 누군가의 내력에 대해 묻는 것이 큰 결례임을 알지만...저기 혹시 방금 비담 숙부님께서 사용하셨던 힘 있잖아요...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숙부님이 이곳 천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럼 저보다 영력이 약하실 텐데 어떻게 저를 쫓던 그놈들을 한 방에 날리셨는지 무척 궁금해서요.” “하하하, 그게 뭐 어려운 질문이라고 그리 조심스럽게 묻느냐. 그거 별로 어렵지 않다. 너 역시 할 수 있는 일이야.” “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요?” “너 역시 무림에서 활동하였으니 당연히 어렵지 않지. 영력도 생각하기 나름이니라. 그것을 예전의 내기라 생각하고 똑같이 운용하면 된단다.” “그, 그게 가능한가요?” “나도 담이에게 듣기 전까진 생각조차 못해봤단다. 그런데 해보니 오히려 더 잘 되더구나. 영체를 예전의 육신이라 여기고, 영력을 내기라 생각하고 일주천 시켜보니 자연스럽게 흐르더구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발상의 전환을 이루면 충분히 가능해.” “믿기지가 않아요.” “여기 확실한 증거가 둘씩이나 있지 않느냐. 그럴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시작하는 게 좋겠구나. 못 나눈 이야기들이야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어서 시작하자.” “네. 해볼게요.” 하련의 얼굴엔 놀람이 가득했지만 자신의 아버지와 숙부를 철썩 같이 믿었기에 곧바로 자세를 잡고 앉았다. 길천이 굳이 자세를 잡지 않아도 된다 말하려다 비담의 눈총에 급히 입을 닫았다. 두 시진 후. 하련의 영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짐과 동시에 기의 소용돌이가 한바탕 몰아쳤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후아!!!이거 정말 대단한데요. 어째서 그동안 생각조차 못한 것인지.” “후후후, 생각 못하는 게 당연하지. 이미 죽어 영체로 존재하기에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하하하, 졸지에 이상한 생각이나 하는 놈으로 전락해버렸네. 그래도 뭐 알을 깨고 나오려면 이리도 굴러보고, 저리도 굴러보고 해야지. 안 그런가? 아름다운 우리 질녀는 어떻게 생각해?” “호호, 당연한 말씀을요. 숙부님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세요.” “하하하, 우린 뭔가 통하는군.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그나저나 진심으로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숙부님. 이 모든 성취가 다 숙부님의 혜안 덕분이지요.” “우리 예쁜 질녀는 고약한 아버지를 하나도 닮지 않았어. 그래서 더 좋아. 누구처럼 이상한 놈 취급도 안하고 말이지. 그런데 ‘혜안’이란 그 단어 차~암 어감도 좋고, 듣기도 좋구먼. 누군가랑은 생각하는 급이 달라, 암! 아주 다르고말고.” “흠흠, 미안하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내가 잘못했으니 그만 하자.” “흠흠, 형님도 어휘선택을 하실 때 신중을 기해서...” “한 발만 더 나가면 부채구경 실컷 시켜주마.” “하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그건 그렇고 다시 화기애애해졌으니 그 의식인가 뭔가 해야 되지 않아요? 그래야 하련이도 안전하고 영력도 흡수할 수 있고요.” “이런...깜박 잊고 있었구나. 하련아? 이리로 와 무릎을 꿇고 앉으려무나.” “의식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간단한 의식이니 끝나고 모두 설명해주마. 어서 앉으렴.” “네, 아버지.” 하련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길천은 비담에게 한 것처럼 똑같이 하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팟 이번에도 역시나 짧은 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이 일었고, 나타남과 동시에 하련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142화 간단한 의식이 끝난 후, 길천은 만년지투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긴 이야기를 들은 하련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년지투라니...이곳에서 지낸 300년 동안 너무나 평화로워 그런 게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어요.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그 녀석들이 저를 공격할 수 있었던 거군요.” “그래, 내가 황금선도를 취한 순간 만년지투는 시작된 거란다. 아마도 많은 영체들이 당황하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모두들 적응하고 있을 게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세요. 황금선도의 영력을 모두 흡수하시다니 말이에요.” “말 그대로 기연이었지. 여기 있는 담이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거야.” “호호, 결국 아버지께 진짜 기연은 비 숙부님이셨네요.” “그렇게 되나? 듣고 보니 네 말도 맞구나. 하하하.” 둘은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담 역시 함께 웃었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은 예감에 웃음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이제 다시 움직이시죠, 형님.” “어이쿠, 내 정신 좀 보게. 딸아이를 재회한 기쁨에 시간가는 줄 몰랐구나. 그래, 네 말대로 두 늙은 구렁이들 잡으러 그만 가보자.” “네? 두 늙은 구렁이요?” 하련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반문했다. “방금 말했듯이 세를 규합해야 화끈하게 상제랑 한판 붙을 수 있잖니. 그래서 천마랑 검제 녀석을 섭외하기로 하였단다.” “아! 천마와 검제를 칭하셨던 거군요. 전 또 정말 구렁이를 잡으러 가시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요.” “그 둘은 늙은 구렁이가 딱이지, 암 딱이야. 어서 가자.” 길천은 기분이 좋은 지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앞장 서 걸었다. 비담은 못 말리겠단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그 뒤를 쫓았고, 하련 역시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물고 그 둘의 뒤를 따랐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아버지에 든든한 숙부까지. 방금 전 존재의 소멸 위기까지 내몰렸던 악몽은 어느새 큰 행운과 기쁨으로 바뀌었다. 한 달 후. “형님, 북쪽을 다 뒤졌는데도 안 보이네요?” “뭐가 걱정이냐. 그럼 서쪽으로 내려가면 그 뿐. 가자.” “후후, 걱정도 안 되세요?” “엥? 갑자기 무슨 걱정?” “동천왕도 소멸시키고, 동쪽과 북쪽을 돌며 이리 난장을 피우셨는데 상제가 언제 쫓아올 지 걱정도 안 되시냐고요?” “까짓것 나타나면 붙는 거지.” “오우! 자신감으로 충만하시네요. 긴장을 놓으면 위험하다 어쩌다 그러신 게 어저께 같았는데 말이죠.” “너도 오면서 겪어보았잖아. 애들이 전부 힘도 못쓰고 비실비실 한 거. 그리고 그동안 돌며 모은 영력도 만만치 않고. 삼분지 일로 나누었는데도 말이지.” “그렇긴 하네요. 저와 하련이 역시 많이 강해졌죠.” “그게 다 잘나신 형님과 애비를 두어서 그런 거야. 푸하하하하!!”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럼 방향을 틀어 아래로 내려갑시다.” “흠흠, 쑥스럽구먼. 그래 어서 서둘러 내려가자.” ‘하여튼 두 분 다 못 말린다니까. 호호.’ 하련은 둘이 옥신각신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이런 게 가족이리라.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 그렇게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슈슉, 펑펑. 슈슈슉 펑펑펑.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근거리에서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빛들이 난무하였다. 호기심이 동한 셋은 서둘러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셋은 치열하게 싸우는 두 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30 대 30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똑같은 수로 나뉜 두 무리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요란한 소음과 난무하는 빛의 정체가 바로 이 싸움 때문이었는데 근래 이동하며 본 것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싸움이었다. “저 봐라, 저 봐. 저것들은 죽어서도 죽어라 싸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