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53편 (53/62)
옥황궁(玉皇宮) 편액 아래 거대한 두 개의 문을 통과하고, 끝없이 펼쳐진 중앙 회랑을 지나 다다르자 그곳엔 황금빛 찬란한 옥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옥좌의 중앙. 면류관을 근엄하게 눌러 쓴 옥황상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냐?” “그러하옵니다.” “길천에게 약조나 잘 지키라 하여라. 인과율을 어겼으니 다른 녀석들이 알게 되면 크게 곤욕을 치를 터.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단속 잘하고.”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길천을 향한 신뢰가 다가오는 싸움에서 가장 큰 변수이기에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만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안다. 그러니 이리 미친 짓도 서슴지 않고 벌인 것 아니더냐. 그만 데려다 주어라.”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동천왕 패도는 상제를 향해 깊게 읍을 한 후 희미한 영혼 하나를 옆에 낀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패도가 사라지는 모습을 담담히 응시하던 옥황상제가 또다시 툴툴거렸다. “상제 체면에 나무 관리나 하는 녀석 따위에게 굽실거려야 하다니. 휴우.” 잔뜩 일그러트린 옥황상제의 얼굴에 주름 하나가 더 늘고 말았다. 133화 바람처럼 사라졌던 동천왕 패도가 다시 나타난 곳은 커다란 황금 복숭아나무 아래였다. 패도는 나타남과 동시에 옆에 끼고 있던 희미한 영혼 하나를 나무 아래에 내려놓으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여기 있네. 자네가 부탁했던 그 영혼.” 패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무의 한 공간이 일그러지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인영의 정체는 길천이었다. “후후, 황금선도(黃金仙桃)가 대단하긴 하네요. 어려운 제 부탁을 이리 수월하게 들어주실 줄이야.” “의뭉 떨지 말게. 그 선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잖은가. 그러니 관리에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아니 되네. 알겠는가? 그리고 열매가 열리면 지체 없이 상제께 진상하는 것도 잊어서는 아니 되네. 참, 노파심에 하는 말이네만 상제의 능력이 아니고선 황금선도의 영력을 감당할 수 없음도 이미 알고 있겠지?” “헤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만 믿고 기다리십시오.” “알았네. 그럼 자네만 믿고 가겠네.” “멀리 안 나갑니다. 살펴 가십시오.” 길천은 거듭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배웅인사를 대신하였다. 그런데 다시 든 길천의 얼굴엔 언제 그랬냐는 듯 사악한 미소가 한가득 이었다. “후후, 늙어빠진 요물들. 만년 동안 해쳐먹었으면 됐지...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게 더 수월하겠구나. 그나저나 정신 좀 차려보아라. 응? 쯧쯧, 영체 역시 엉망이구나.” 길천은 고소를 머금은 채 황금 복숭아나무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황금으로 이루어진 잎사귀 몇 장을 뜯어내 그것을 곱게 갈아 희미한 영체 위로 뿌렸다. 잠시 뒤. 놀랍게도 황금빛 가루가 스며들자 영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음소리. “으음.......” “담아? 이제 정신이 드느냐?” “혀, 형님?” “그래. 나다, 나야.”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해 길천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커졌다. 놀랍게도 영혼의 정체는 비담이었다. 서기처럼 영체의 주위를 감싸던 황금빛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선명해진 비담의 영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이내 덥석 길천을 얼싸 안았다. “형님.” “그래, 담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누.” 둘은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길천은 그런 비담의 등을 토닥이며 계속 ‘그래’ ‘그래’ 만을 되뇌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는지 격한 포옹을 푼 비담의 영체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형님, 그런데 이곳은 어디입니까? 제 상단전은 아닌데......” “여긴 내 집이지.” “네? 형님의 집이라고요? 그럼 이곳이 선계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신선들이 머무는 도가의 성역. 인간들의 말을 빌리자면 별천지,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지.” “그, 그럼.......제가 죽었다는...?” “흐음. 네 짐작이 맞다. 인간세상하곤 작별을 고한거지.” “어, 어쩌다...” “역시 내 예상대로 전혀 기억하질 못하는구나.” “그러게요. 시커먼 암흑 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요. 가만 그러고 보니 화산파에서 어떤 양반을 구해내 옆구리에 끼고, 객잔으로 돌아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뭐죠? 혹시 형님께선 뭔가 알고 계시나요?” “서희.” “네? 서희가 무얼? 으윽. 뭐, 뭐죠? 이 떨림은......” 서희라는 이름을 되뇌이던 비담의 영체가 급격히 요동쳤다. 그러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다가 힘겹게 한 자 한 자 뱉어 냈다. “서...서희. 그래요. 서희가 간악한 놈들에게 짓밟힌 채......싸늘한 모습으로 누워있었......크아악!!!” 비담의 영체가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이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길천은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비담이 진정되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비담의 영체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지한 것이다. 다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온 비담이 말문을 열었다. “이제 기억이 나네요. 서희가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전신의 귀기를 개방했어요. 그리곤 영혼의 끈을 놓아버렸지요. 맞아요. 그랬어요.” “네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냐. 다 안다.” “그나저나 죽는 것도 별 거 아니네요. 그리고 이리 죽고 보니 이승에서 겪었던 삶에 대한 미련도 희미해지고. 많이 애석하지만 그냥 담담히 받아들여야죠.” “흐흐, 별 거 없기는. 다 잘난 이 형님 덕분에 그리 느끼는 거지.” “네? 그럼 별 거 있어요?” “당연하지. 너 이 황금나무 보이냐?” 길천이 자랑스레 황금 복숭아나무를 가리켰다. 비담은 그동안 길천과 이야기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나무를 그제야 돌아보았다. “엥? 무슨 나무가 이리 화려하데요? 그나저나 이거 팔면 값은 얼마나 나가려나? 근데 선계에서도 물건 사고팔고 그래요?” “야, 이 새끼야. 귀하디 귀한 나무보고 팔아치울 생각부터 하냐?” “에이, 그럼 저걸 어디다 써요? 보아하니 황금이라 불쏘시개로도 못 쓰고, 열매 하나 변변히 열지 않겠구먼.” “야, 임마. 저거 황금선도가 맺는다는 황금복숭아나무야. 천계 최고의 보물이라고.” “예? 열매가 열린다고요? 아무리 선계라도 그렇지...무슨 누런 금속에서 열매가 열린데요?” “예전부터 누누이 말하지만 제발 어휘선택 좀 신중히 해라. 신성한 나무 앞에서 부정 타려고 그리도 주절주절 떠들면 어떻게 해?” “흠흠, 그리 대단한 나무인줄 몰랐죠. 원래 겉모습이 요란하면 실속이...” “쉬~잇!!! 조용히 해. 아니 그냥 그 입 닫아.” “알았어요. 조용히 할게요. 그나저나 그리 대단한 물건이에요?” “무, 물건? 흐으, 더하면 내 입만 아프지. 뚫린 입이니 그냥 너 편한 데로 나불거려라. 아무튼 이 물건, 아니 황금 복숭아나무님 덕분에 네가 이리도 멀쩡히 영체 상태로 있는 거야.” “아, 답답하게. 예전 버릇 또 나오신다. 그러니까 왜 그런지 속 시원히 빨리 말해달라고요.” “흠흠.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서. 알았다. 속 시원히 말해주마. 원래 육체에서 혼이 빠져나오면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간다. 들어봤지?” “뭐 저자에 떠도는 이야기 중에 그런 말들이 있었죠. 물론 믿진 않지만. 그래서요?” 134화 “그렇게 영혼이 염부로 끌려가면 염라대왕 앞에서 재판을 받지. 그리곤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와 선행에 따라 판결을 받는다. 그런 다음 현세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 망각의 샘물을 마신 후 판결에 따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해되지?” “망각의 샘이요? 그걸 마시면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그런데 형님은 모두 기억하고 계시지 않나요? 예전 도색성이라 불리며 강호를 주유했던 것부터 초하련 궁주님과의 일, 그리고 저와 함께 했던 일까지 모두요.” “그건 내가 염부에 끌려가지 않았기 때문이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육체적인 힘이나 정신적인 힘이 있다면 바로 선계에 자신의 영역을 보장받는다. 인간세상에서 말하는 우화등선, 신선이 된다는 뜻이야.” “아! 그렇군요. 도색성이었던 형님의 능력 덕분에 우화등선을 하신 거군요. 험험, 그렇다면 저 역시 탁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우화등선을 하였다는...” “놀고 있네. 내가 이 황금나무를 이용해 네 영혼을 빼돌렸거든. 그래서 염부에 끌려가지도 않았고, 더불어 망각의 샘도 마시지 않은 거거든.” “빼돌려요? 그게 가능해요? 그럼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형님께서 직접 염라대왕하고 한 판 붙어 이기신 거예요?” “흠흠, 당연히 ‘염라대왕하고 한 판 붙어 이겼지’ 라고 말했으면 좋겠으나 영력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인데 무슨 수로 신선 나부랭이가 개기겠냐. 그게 아니라 저 나무님을 이용해 위에 있는 옥황상제 힘 좀 빌렸다. 너 좀 빼달라고.” “아! 협박하셨구나.” “크흠, 협박이라니. 협상. 그냥 협상한 거야.” “그게 그거죠. 아무튼 정리하자면 제가 죽어 염부로 끌려가야 하는데 형님께서 저 나무를 이용해 옥황상제를 협박했다. 그런데 옥황상제랑 염라대왕은 힘이 비슷해서 그게 가능했다. 그래서 내 영혼 역시 재판도 받지 않게 되었고, 더불어 망각의 샘인지 뭔지 마시지 않아 기억도 온전히 가지고 있다. 맞죠?” “협상이래도.” “알았어요. 그런데 옥황상제가 그리 함부로 영혼을 빼돌려도 되요?” “물론 안 되지. 큰 사단이 나지. 인과율에 어긋나서 다른 왕이나 무장, 문신들이 알면 크게 곤욕을 치를 거야.”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저 나무의 정체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부탁을 들어줬단 뜻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누차 말했잖아. 천계 최고의 보물이라고. 만년에 한 번 열리는.” “네? 만년에 한 번 열린다고요?” “그래. 정확히 만년에 한 번 열린다.” “대, 대체 무슨 과일이기에 만년에 한 번 열려요? 대체 정체가 뭐에요?” 비담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황금복숭아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만큼 만년이라는 시간이 안겨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길천은 새삼스레 나무를 쳐다보는 비담을 바라보며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크크크, 놀라긴. 그나저나 입이나 좀 닫아, 이놈아. 그러다 신성한 나무에 침 떨어질라. 그리고 그 정도로 놀라면 내가 너무 허탈하지 않느냐. 흠흠, 아무튼 이 황금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을 황금선도라 부른다. 황금선도의 진정한 정체는......” “정체는?” 비담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길천의 입만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길천은 서둘러 좌우를 두리번거린 후 비담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황금선도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옥황상제임을 증명하는 힘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옥황상제의 힘이요?” “쉿!! 목소리가 너무 커.” 길천은 서둘러 비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다시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로 비담의 말을 수긍해주었다. “그래. 옥황상제가 지닌 힘의 근원. 그 힘의 근원을 품고 있는 영력덩어리란 말이다.” “괴, 굉장하네요. 그럼 저 열매를 먹으면 옥황상제와 맞먹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형님 완전 횡재하셨네요. 기연 중에서도 최고의 기연이 넝쿨 채 굴러들어 왔네요. 그런데 천계 최고의 보물을 앞에 둔 형님 표정은 왜 그러세요? 꼭 뭐 씹은 표정이신데......” “그게 그림의 떡이니까 그렇지. 천고의 보물이면 뭐하냐. 먹지를 못하는데.” “네? 왜 못 먹는데요?” “먹으면 뒈져.” “죽는다고요? 이미 죽었는데 새삼스레...” “그런 의미의 죽음이 아니야. 존재의 완벽한 소멸. 정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지.” “어, 어째서요?” “방금 말했듯이 엄청난 영력을 지닌 과일이다. 그것을 감당할 그릇과 힘을 갖추지 못하면 그릇 자체가 터져나가는 것이지. 아마 천계에서 이정도 영력을 감당하고 제어할 수 있는 존재는 상제 하나일 것이야. 그러니 그림의 떡이 아니고 무엇이겠냐?” “황금선도니 뭐니 해도 결국 빛 좋은 개살구네요. 그럼 상제가 저 열매의 주인이란 소린데...어째서 형님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은 거죠? 어차피 자신밖에는 감당할 존재도 없는데.” “그야 당연히 나를 믿지 못하니 그렇지. 행여 내가 객기라도 부려 덥석 열매를 먹어봐라. 그럼 상제는 닭 쫓던 멍멍이 되는 거거든.” “그럼 상제가 이리로 와서 열매가 열릴 때까지 지키면서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리 귀한 과일이고 형님도 믿지 못하면서 천하태평 기다리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상제 입장에선 당연히 그리하고 싶겠지. 허나 이곳 천계의 법도가 그게 아니거든. 각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채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신들을 간섭하거나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것이 불문율이다. 상제 역시 그 법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마음은 굴뚝같지만 저리 맥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운 좋게도 내가 관리하는 이곳에 이 나무님이 탄생할 지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느냐. 크흐흐흐, 천운이지. 암, 천운이고말고. 덕분에 협상을 통해 너의 영혼도 내가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럼 이 귀한 나무가 우연히 형님 구역에서 자랐다는 말씀이세요?” “어디 보자...그렇지. 아마 망할 너의 사부 녀석이 강제로 날 끌고 갔을 그 무렵이구나.” “형님께서 저랑 만났던 때라면...한 10년쯤 전이네요.” “그래, 그 무렵 한창 이 나무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지. 내가 원체 호기심이 왕성한 편이라 이리 신기한 물건...아니 나무님이 떡하니 나타났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열심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비밀을 밝혀낸 그 순간. 개 끌리듯 끌려간 거지. 너.한.테. 물론 그림의 떡이란 사실을 알고 별 미련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어. 알고 있지?” “흠흠, 새삼스레 10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뭐 하러 꺼내세요. 아무튼 그때는 본의 아니게 죄송했지만 형님도 알다시피 제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저 역시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잖아요. 그리고 전화위복도 되었으니 좋게 생각하자고요.” “미꾸라지 같은 녀석. 허나 네 말대로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건 그렇고 궁금하지 않으냐? 도대체 왜 만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리는지?” “그야 엄청난 보물이니 그 정도 시간은 걸려줘야...” “후후, 눈치 없기는. 이 고매하고 잡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지식을 섭렵한 형님이 그런 뻔한 대답이나 듣자고 질문을 던졌겠냐?” “그, 그럼 뭔데요? 도대체 뭐가 있는데 그러시는 겁니까?” “만년지투.” “네? 만년지투요? 그런데 아까부터 뭐가 자꾸 만년 만년 하는 거예요? 이놈의 동네는 만년이 누구네 집 멍멍이 이름도 아니고 걸핏하면 만년...어라? 잠깐만요. 그럼...” “이제야 감을 잡는구나. 그래, 만년지투. 천계의 정체된 흐름을 만년에 한 번씩 갈아엎는 화끈한 축제.”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뭐 그런 자연의 이치인가요?” “그래, 천계라 해서 그 지고한 자연의 이치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잘 돌아가는 것 같은데...엎을 만한 것이 있나요?” “후후, 당연히 있지. 바로 영력을 지닌 존재들. 무릇 사람 사는 인간계에도 흥망성쇠라는 것이 있듯이 이곳의 영체들 역시 정체되어 있으면 불만이 가득 쌓이거든. 그리고 너무 정체되어 있으면 발전이란 것도 없고.” 135화 “아! 그래서 만년지투 인지 뭔지가 열리는군요. 그런데 그게 왜 화끈하다는 거예요?” “말 그대로 투쟁이다. 먹고 먹히는 싸움. 강한 존재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소멸시키고 그 힘을 흡수하여 더욱 강하게 태어나는 것이지. 한마디로 천계의 질서가 새로이 정립되는 것이야. 물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평상시엔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년지투가 벌어지는 기간엔 이 모든 것이 용납된다. 일종의 청소 및 정리정돈인 셈이지.” “흐음, 그거 보기보다 무섭네요. 그럼 그렇게 정립된 질서는 또다시 만년동안 유지되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물론 내가 이곳에서 지낸 세월이 300년 밖에 되지 않아 장담할 순 없지만 그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잘 유지되더구나.” “그럼 형님 말씀대로라면 영력이 약한 존재는 무조건 소멸될 처지네요.” “자연에 존재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과 같은 이치에 따르면 당연히 그렇지. 허나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법 아니더냐? 너 역시 무림의 생리를 잘 알 터.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지.” “방법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후후, 천하제일고수도 눈먼 칼에 뒈질 수 있듯 떼로 덤비는 데에는 장사 없는 법이지. 약한 존재들은 나름 자신들의 세를 구축해 자신을 보호하면 된다. 줄을 잘 서서 똘똘 뭉치면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군요. 하지만 소멸 대신 얻는 성과는 당연히 미미하겠죠?” “아무래도 얻은 영력을 나누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후후, 원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큰 과실을 얻는 법. 그래서 아마도 두 부류로 나눠질 듯싶구나. 큰 위험을 감수하고 도박을 걸어보는 영체와 그저 소멸을 방지하기 위해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무리들로.” “그럼 형님은 어느 쪽이세요?” “나야 당연히 후자지.” 길천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비담은 어깨까지 당당히 편 채 말하는 길천으로 인해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하, 도색성 어쩌면서 강호를 주름잡았던 패기는 어디다 내팽개치고 몸을 사린다는 말씀을 그리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히 하세요? 조금 부끄럽지 않으세요?” “부끄럽긴. 전혀. 그리고 너도 생각을 해봐라. 자그마치 만년이다. 상제는 둘째 치고 하다못해 천 년 전에 들어온 영체들도 수두룩한 곳이 이곳이야. 그런데 고작 300년 밖에 안 된 햇병아리가 기침소리나 낼 수 있겠냐? 하하, 내가 아무리 설쳐보았자 그놈들 입장에선 하품밖에 안 나와요.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쳐부수는 게 빠를 거다.” “에이, 그래도 무림에서 방귀 꽤나 뀌었던 형님과 전데...가만, 만년이라 하셨죠? 그럼 만년 전에 이곳에 들어온 영체는 무공의 무자도 전혀 모른다는 뜻 아닌가요? 내공 역시 모를 테고...” “어, 어라? 듣고 보니 네 말이 맞구나. 무공의 탄생이야 아무리 길게 잡아도 고작 2천년 정도일 테니 나머지 영체들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더불어 내공심법과 초식의 정교화, 다양한 무공이론 발전과 역사는 길게 잡아야 수백 년이니 그 수는 더 줄어들 테고.” “거 봐요. 그럼 형님도 모험을 걸어볼 수 있잖아요. 계란이 바위보다 단단하면 금세 부술 수 있다니까요.” “후우,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야. 이곳에서 힘의 우열을 가늠하는 것은 지닌바 영력이다. 무림에 머물 때처럼 내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경천동지할 내공심법이나 정교한 초식 역시 이곳에선 하등 쓸모없는 무용지물이야.” “하아, 답답하시긴. 제발 고정관념 좀 버립시다. 거 영력이란 게 힘의 근원 맞죠?” “그, 그렇지.” “그럼 육신에 내공이 돌아 내가고수로써의 위용을 보이는 거랑 영체에 영력인지 뭔지가 도는 것이랑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요?” “허나 영체엔 혈도가 없지 않느냐?” “혈도가 무슨 필요 있어요. 그냥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잖아요. 없으면 임의로 영체에 만들면 되는 거고. 안 그래요?” “영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기운인데 실체화된 내공의 기와 같겠느냐?”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 연구한답시고 사방천지를 쫓겨 다닌 우리 귀문은 뭐가 됩니까? 어디 귀신이 눈에 보여서 연구했나요? 그냥 가설을 바탕으로 연구하다 보니 상단전이란 것도 열게 되었고, 그러다 형님과 같은 원영신도 받아들이게 된 것 아닙니까. 어디 제 말이 틀려요?” “음, 구구절절 네 말이 맞구나. 그럼 영력을 내공처럼 여기고 제어해보란 말이지?” “그렇죠.” “그런데 정말 그게 가능할까? 괜히 섣부른 판단으로 실행에 옮겼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그마치 만년의 영력을 얻는 일이잖아요. 그만한 모험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강호의 숱한 기인이사들도 천하제일고수가 되겠다며 기연과 영약에 목숨을 거는데 이미 죽은 마당에 뭐가 두려워 영혼을 사리시는 거예요?” “하지만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거랑 그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느냐?” “만년에 한번 찾아오는 기회인데 그냥 남 주기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리고 막무가내로 해보자는 뜻은 아니에요.” “막무가내가 아니라고?” “그럼요. 가끔씩 제가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어서 문제지만 형님도 알다시피 아주 생각 없이 행동하진 않잖아요. 당연히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지요. 그리고 아주 신빙성 높은 정황증거들도 여럿 있고요. 물론 가설이긴 하지만 저 촉 되게 좋다는 것 형님도 인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