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52편 (52/62)
“크아악!!!” 엄청난 비명소리와 함께 청송의 신형이 무려 3장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백송의 절규. “청~~~~~~~~송!!!!” 비명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백송이 다급히 청송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보기 흉할 정도로 가슴이 함몰된 청송은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백송은 부릅뜬 눈으로 거듭 청송을 끌어안고 흔들었으나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조금 전까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것이 한바탕 꿈인냥 너무나 허무한 지기의 죽음. “어...어찌 이럴 수가...” 멀리서 아무런 감응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던 혈안광마는 지기의 죽음에 절규하는 백송을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예의 그 장강을 펼쳤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구나.” 콰콰콰~쾅 또 다시 이어지는 죽음의 물결. 허나 백송은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평소 냉철하기로 유명한 그였기에 어느새 자신의 애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장강의 물결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혈안광마는 차분히 가라앉은 백송의 기도를 보며 그만 탄식을 뱉고 말았다. “흐음. 요행은 한 번으로 족하단 말인가. 참으로 애석하구나. 담이와 나를 위해 둘은 데리고 가야할 터인데... 조금만 더 힘과 시간이 남아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백송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혈안광마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곤 원한이 가득 배인 음성으로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하였다. “절대 용서치 않겠다. 청송이 외롭지 않도록 함께 따라 가거라.” 백송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최후초식인 ‘백운첩영(白雲疊影)’을 펼쳤다. 그러자 하얀 운무로 변한 검강들이 중첩되며 장내를 가득 메웠고, 모아진 기운들이 거대한 검의 형상을 이루어갔다. 백송은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검이 또렷한 형상을 이루어내자 그대로 혈안광마를 향해 쏘아 보냈다. 혈안광마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백색의 거대한 검을 바라보며 툴툴 웃었다. “후후, 아쉽지만 여기까지구나. 미안하다, 담아. 그리고...고마웠다.” 혈안광마는 득도한 고승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전신의 내공을 끌어 모았다. 그리곤 거대한 검에 맞서 있는 힘껏 손을 내밀었다. 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장내에는 기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충돌한 지점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나간 기의 여파에 멍하게 싸움을 관전하던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주르륵 밀려나거나 휘청 쓰러지고 말았다. 무리한 내공의 사용으로 시커멓게 죽은피를 한 모금이나 뱉어낸 백송 역시 감당할 수 없는 기운에 풀썩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찾아든 정적. 뽀얀 먼지가 장내를 뒤덮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수선했지만 이내 시원하게 불어온 바람에 일목요연 처참했던 현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움푹 패여 들어간 거대한 구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한 사내. 가주 모용선은 자신의 가문을 위협했던 희대의 광마가 시체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흐음, 정녕 하늘이 우릴 도왔구나. 아차! 백송 어르신은?” 모용선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얼른 시선을 돌려 백송을 찾았다. 구덩이의 가장자리. 힘없이 풀썩 무릎을 꿇고 앉은 백송의 모습이 들어왔다. 모용선은 다급한 마음에 급히 신형을 날려 그에게 달려갔다. 허나 모용선의 얼굴은 백송을 부축함과 동시에 그만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어, 어찌 이런...” 백송 역시 이미 시체가 되어 부축과 동시에 그의 고개가 힘없이 한쪽으로 꺾였기 때문이다. 모용선은 자신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낯선 광경에 그만 넋이 나가 하염없이 백송의 시신만 쳐다보며 ‘어떻게’ 라는 말만 거듭 되뇌었다. 하지만 모용가의 가주라는 자리는 그렇게 넋이 나간 채로 마냥 슬픔과 통한에 젖어 있는 것을 허락지 않는 엄중한 위치였다. 이내 신색을 회복한 모용선은 멍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무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두 분 어르신을 정중히 모시고 장내를 수습하라.” “알겠습니다, 가주. 헌데 혈안광마의 시신은 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혈안광마라는 말에 순간 모용선의 몸이 움찔 떨렸다. 허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차분한 어조로 명을 내렸다. “무림공적 따위에게 차릴 예 따위는 없으나 우선은 그 역시 수습한다.” “허, 허나 저 악마에게 빼앗긴 가솔들의 원혼이...” “안다. 허나 비통함을 달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우선은 잘 수습하여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콰쾅 침중한 어조로 이어지던 모용선의 말은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흡사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울려 퍼진 엄청난 폭음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 모용선의 다급한 외침에 무사들은 폭음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분분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유성대원 하나가 다급히 뛰어와 부복한 채 보고하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백의 혈의 복면인들이 세가의 동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허어! 혈안광마의 참사가 겨우 수습되었거늘. 누군가 어부지리를 노리고 지금의 때를 기다렸구나. 모두 듣거라. 세가를 침입한 자들에게 돌려줄 것은 참담한 응징뿐이다. 나를 따르라.” 모용선은 세가를 향한 거듭되는 위협과 침입에 그만 꼭지가 돌고 말았다. 그래서 앞뒤 가리지 않고 전 무사를 이끌고 동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모용선이 몸을 날린 것과 동시에 장내에 의문의 그림자 하나가 뛰어 들었다. 온몸을 흑의로 꽁꽁 둘러싼 의문의 그림자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 후 덩그러니 놓여있던 혈안광마의 시신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한 점 망설임 없이 혈안광마의 시신을 들쳐 업고 서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131화 제 14 장 회자정리(會者定離) 똑. 똑. 똑.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동굴 안 연못에 동그란 파문을 일으키며 울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안. 규칙적으로 울리는 물방울 소리를 배경 삼아 한 인영이 시체처럼 반듯이 누워 있고, 그 옆엔 웅크린 그림자 하나가 말없이 그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방울 소리만 아니라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 그림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석상처럼 굳어 있는 그림 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동굴의 일부라 여겼던 그림자 하나가 거짓말처럼 입을 열어 고요했던 정적을 깨트렸다. “오셨어요?” “그래...흐음...아직 그대로더냐?” “네.” 짧은 문답 후 또다시 이어지는 긴 침묵. 새로이 파문을 일으켰던 정체불명의 인영은 긴 침묵이 답답했던지 또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서희야...이제 그만 그를 놓아주는 것이...” “...........싫어.” “하지만...이러다 너마저...” “됐어요. 그만 하세요, 오라버니.” 고저 없이 울려 퍼지던 음성에 진한 슬픔이 묻어 나왔다. 인철은 말없이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서희의 등을 쓸어보았다. 놀랍게도 슬픈 음색의 주인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서희였다. 시봉세에 의해 윤간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던 비운의 여인. 그로인해 비담은 이지를 상실한 채 혈안광마가 되지 않았던가. 인철은 죽은 듯 누워 있는 인영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후우, 천우신조로 미약하게 숨은 붙어 있으나...도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죽은 듯 누워있던 인영의 정체는 바로 비담이었다. 하지만 둘의 침묵이 말해주듯 그의 상태는 매우 위태로웠다. 구사일생 모용세가에서 구인철에 의해 목숨을 건졌으나 과도한 선천지기의 사용과 전혀 몸을 돌보지 않았던 혈안광마의 행적으로 인해 이미 육체는 만신창이였고, 영혼 역시 스스로 유폐하여 주인 없는 허수아비 상태였다. 인철은 기식이 엄엄한 비담과 애처롭게 흔들리는 자신의 여동생을 말없이 그저 바라보다 이내 옆에 덩그러니 앉았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둘을 지켜주고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지켜보던 인철의 눈에 동굴 천장의 물방울이 들어왔다. 주르륵, 똑. 주르륵, 똑. 무엇이 그리 슬픈지 쉼 없이 흐르는 물. 그리고 물방울. 인철은 한참을 그렇게 응시하였다. 그러다 스르르 감긴 그의 눈에서도 똑같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눈물방울. 그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과거의 저편으로 되돌아갔다. 인철은 마냥 신이 났다. 맹으로 돌아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빙소저와 오붓하게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으니.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신나게 하고 기쁘게 했던 것은 아버지의 내락이었다. 전전긍긍하다 어렵게 꺼낸 이야기. 아버지는 빙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개탄하였고, 자신이 내비친 진심에 대해서도 여과 없이 믿어주고 받아주셨다. 그리고 한 발 나아가 비담과 서희가 돌아오는 대로 합동 혼례를 치르자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인철은 그 순간이 마냥 꿈인 듯 얼떨떨해 자꾸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었다. 그래서 한달음에 낙양으로 달려갔다. 누구보다 축하해줄 자신의 동생과 매제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하지만 자신의 동생과 매제는 화산으로 떠난 후였다. 괜찮았다. 실실 웃음이 나왔다. 화산으로 찾아가면 그 뿐. 맹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전서응에 급전을 적어 화산으로 날렸다. 큰 선물이 있으니 기대하라고. 물론 둘에겐 아직 비밀이다. 그렇게 쏜살같이 달려간 화산. 어라, 그런데 중간에 서희를 만났다. 나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그저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어찌 알고 나왔느냐 물었더니 서희는 내 주위를 맴맴 돌던 전서응을 보고 달려왔단다. 그랬구나, 맹에서 키우는 이 녀석을 서희가 모를 리 없지. 먼발치에서도 또렷이 보였으니 알아챌 수밖에. 우리 둘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가로이 걸었다. 아직 서희에겐 비밀이다. 담이 그 녀석과 함께 있을 때 폭탄선언을 할 것이다. 깜짝 놀랄 둘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흐흐, 얼마나 살 떨리게 유쾌하던지. 서희는 종알종알 잘도 떠든다. 매제와 오붓하게 화산으로 유람을 왔단다. 뭐, 신혼여행이라나. 크크, 그 여행 나도 곧 있으면 할 테니 하나도 안 부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변하여 내가 방해했다며 쌍심지를 켠다. 하지만 넓은 아량으로 웃어 넘겨주었다. 곧 있을 폭탄발언으로 시원하게 날려줄거니 그 정도 징징거림은 웃으며 받아준다. 그러다 담이는 어디가고 혼자냐 물었다. 담이는 급한 일이 있어 아직 화산파에 머무른단다. 잘 마무리하고 곧 온다하였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그러며 무엇을 상상했는지 얼굴이 발그레 물든다. 허허, 눈꼴시려워 못 보겠으나 그것도 웃으며 받아준다. 그렇게 서희가 묵고 있다는 객잔을 향해 한참 걸었다. 얼마 남지 않은 지근거리. 불현듯 들려오는 엄청난 굉음과 정체불명의 기운. 나는 화들짝 놀라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 역시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던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둘의 가슴은 순간 서늘해졌다. 객잔이 있는 방향. 그곳에서 들려오는 정체모를 굉음과 사이한 기운. 예감이 좋지 않다. 가만, 그런데 이 기운은...언젠가 담이가 내 보였던 그 기운과 비슷해 보인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렸다. 서희 역시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내 뒤를 따랐다. 우린 객잔을 향해 달리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괜스레 입이 방정일 것을 저어했기 때문에. 그렇게 도착한 객잔 앞은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 시체, 시체. 피가 하얀 눈밭을 물들였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팔과 다리, 그리고 몸통과 머리. 그냥 한 폭의 지옥도였다. 누가 대체 이리도 끔찍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서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그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동생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곳을 지나 객잔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들어간 객잔 안. 그런데 그곳에도 역시 보아서는 안 될 끔찍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피로 물든 침상 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매영의 시신. 그 끔찍한 광경 앞에 서희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 부흥상회에 있어야 할 매영언니가 저리 싸늘히 누워있냐며. 어째서, 도대체 왜, 무슨 연유로. 그런데 우리 둘을 더 기함하게 만들었던 물건이 매영의 음부 위에 놓여 있었다. 저건...저 물건은...담이의 화류선. 그럼 담이가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방금 전 정체불명의 괴기스러운 기운의 주인이 담이었단 말인가. 답답하다. 가슴에 천근거석을 올려놓은 것처럼 답답하다. 도대체 이곳에서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매영의 시신과 담이가 연관이 있는 것인가? 밖에 있는 수많은 시체와 담이가 관련된 것인가? 나는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의문들로 인해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지금 까지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허나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나는 서둘러 매영의 시신을 수습한 후 화류선 역시 서희에게 넘겼다. 그리곤 다시 벼락에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떤 후 곧바로 다시 지옥도 속으로 몸을 던졌다. 만에 하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담이가 저 안에 있다면...말도 안 된다며 거듭 자책하며 미친 듯이 시체더미를 뒤졌다. 다행히 담이는 없었다. 정말 다행히. 그러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물론 수많은 의문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지만 담이를 우선 만나야겠다. 그러면 이 끔찍하고 답답한 상황이 풀릴 것이다. 그렇게 서희와 나는 미친 듯이 그를 수소문했고 행적을 쫓았다. 하지만 끝내 담이의 행적을 찾을 순 없었다. 미치기 일보직전. 흑막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불현듯 등장한 혈성 하나로 인해 전 무림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그의 별호는 혈안광마. 그로 인해 하북팽가가 멸문했단다. 끔찍하게도 그 악마는 모두 찢어 죽였단다. 마치 객잔 앞에서 보았던 수많은 시체들처럼...가만..............설마.............설마..............에이.......설마........하지만 신기루처럼 행적이 묘연한 담이. 우연처럼 같은 시기에 등장한 혈안광마. 객잔 앞에서 보았던 장면들. 하지만 그런 천인공노할 악마 같은 짓을.......설마......아닐거야........ 그러던 그때 흑막주로부터 다급한 전갈이 또 날아들었다. 혈안광마의 행선지가 모용세가로 이어진다고. 장담은 할 수 없으나 십중팔구는 그곳이 목적지라고. 서희와 나는 밀려드는 불안감과 끔찍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모용세가로 찾아갔다. 그리고.......그곳에서 다 죽어가는 담이를.......우리......담이를 보았다. 그리고 때마침 등장한 혈의 복면인들의 혼란을 틈타 무작정 담이를 업고 그곳을 뛰쳐나왔다. 132화 구인철은 감았던 눈을 조용히 다시 떴다. 그리고 복잡한 심경을 두 눈 가득 담아 죽은 듯 누워있는 비담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의혹과 고뇌. 왜 자신의 매제는 이지를 상실한 채 그리도 끔찍한 혈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찢어 죽이고, 유린하고 짓밟았을까. 도대체 무슨 연유로. “휴우.” 구인철의 입에서 또다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늘어나는 한숨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구인철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이내 동굴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밖으로 걸어 나온 구인철을 맞이한 건 밤하늘에 총총 떠있는 별들이었다. 그는 그저 무심히 하늘을 올려보며 또다시 밀려 나오는 긴 한숨을 속으로 집어 삼켰다. 그렇게 무심한 듯 서 있기를 한 식경. 구인철 앞으로 새까만 인영 하나가 솟아오르듯 나타났다. 전신을 흑의로 뒤덮은 자의 정체는 흑천대의 막내 20호였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바로 부복하며 구인철에게 한 장의 봉서를 건넸다. “흑막주가 보낸 전갈이옵니다. 대주님.” “흠...혈안.....비담의 일은 전하였더냐?” “네. 대주님. 아마도 그에 대한 답신인 듯하옵니다.” 구인철은 서둘러 봉서를 열어보았다. -비담 공자님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어찌 그런 참담한 일이 생겼는지 슬픔으로 가슴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립니다. 분명 대주님의 말씀대로 수많은 의혹들이 산재하기에 저 역시 최선을 다해 당시 상황을 조사해 보겠습니다. 아울러 주제넘지만 은공의 목숨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리 소식을 급히 전하는 연유는 열흘 전 벌어졌던 모용세가의 참사에서 새로운 정보들이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의문의 혈의인들의 정체는 사도련의 혈살대로 밝혀졌습니다. 모용세가의 참사를 기점으로 사도련이 전면에 나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곧 제 2차 정사대전이 일어나리라 확신합니다. 곳곳에서 속속 올라오는 정보를 취합해본 결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정회 역시 두 개의 큰 축을 잃었기에 경각심과 응집력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곧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부탁하신 안가는 흑천대원에게 알려드렸습니다. 모쪼록 비 공자님의 상세가 하루속히 회복되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읽은 구인철의 얼굴이 순간 구겨지고 말았다. 정사대전. 늘 준비를 하며 지냈지만 막상 이리 닥치니 씁쓸했다. 그리고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비담이 저리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때에 하필 정사대전이 벌어지다니. 그렇게 몇몇 누군가의 야심과 허황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될는지. 구인철은 받아야할 혈채가 있었기에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다음 조용히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2 차 정사대전이 일어날 듯싶구나. 미안하다. 꼭 곁에서 지켜주려 했건만...” “아니에요. 상공은 반드시 제가 회복시킬 터이니 걱정 마시고 서둘러 맹으로 떠나세요.” “그래. 너의 정성이 하늘에 닿는다면...담이는 분명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곳에서 녀석을 돌보기엔 너무 열악하고 위험하다. 그래서 특별히 막주님께 부탁하여 안가 하나를 마련하였으니 그곳으로 옮기거라. 장소는 밖에 있는 녀석이 안내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제발 네 몸 역시 잘 돌보고 마음을 굳건히 하거라. 돌보는 네가 강건해야만 녀석이 깨어날 때까지 버티며 지킬 수 있을 것이야. 그럼, 이만 가보마.” “네. 오라버니도 조심하세요.” 구인철은 울컥 밀려드는 슬픔을 지우려는 듯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짧은 전음만 흑천대원에게 남긴 채. - 부탁한다 20호는 아스라이 사라지는 구인철을 향해 허물어지듯 부복하며 자신의 가슴에 강하게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 복!!!명!!! 장백산에 마련된 흑막의 안가. 사경을 헤매는 비담과 서희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동굴을 떠난 지 정확히 열흘 후. 황제와 오정회의 칼날이 비담을 향해 있고, 또한 그의 상태가 위중하였기에 부득불 이민족이 사는 이곳까지 쫓기듯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흑막주의 배려와 흑천대원의 노력으로 무사히 도착하였다.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서희는 그 바람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채 멍하니 골짜기 건너만 바라보았다. 끼익 20호는 아담한 초옥의 문을 열고 나와 걱정스레 물었다. “아가씨...산이 깊어 바람이 제법 찹니다. 그만 들어가심이...” “......조금만 더......있을 게.” “허나......네, 알겠습니다.” 20호는 그저 말없이 흩날리는 서희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온전히는 아니나 어느 정도 아가씨의 심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쫓기듯 이곳 변방까지 공자님을 모시고 온 것으로도 모자라, 이 근방에서 제법 실력 있는 용한 의원조차 전혀 손을 쓸 수 없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하였으니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셨을까. 정말 하늘의 보살핌으로 비공자님이 깨어나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만. 정말 답답하고 애석하구나.’ 20호는 그렇게 걱정 가득한 눈으로 한동안 더 서희의 곁에 머물다 다시 초옥 안으로 들어가 비담을 보살폈다. 아마도 아가씨는 오늘 역시 쉬이 들어오지 않으리라. 아니,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리라. 상상조차 하기 싫은 두려운 현실과 상황이 자신 앞에 펼쳐지는 것을 피하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자 소리 없는 절규. 그렇게 장백산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의 밤은 깊어만 갔다. 잔뜩 웅크린 희뿌연 물체 하나. 온 사방을 가득 메운 어둠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 물체를 집어삼키려는 듯 넘실거렸다. 희뿌연 물체는 거친 풍랑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어둠이라는 높은 파도에 그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점점 어둠이라는 괴물에 잠식당해 사라질 찰나. 한 줄기 눈부신 섬광이 번개처럼 그 물체를 향해 쏘아졌고,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의문의 물체 역시 함께 사라졌다. 솜처럼 하얀 대지. 끝없이 펼쳐진 하얀 대지의 정체는 놀랍게도 구름이었다. 잔잔한 물결조차 일지 않는 광활한 운해(雲海)의 끝자락. 인간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루거각 한 채가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구름 위에 지어진 건축물,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건물의 중앙 편액엔 용사비등한 필체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