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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소설) 호색 -완 - 51편 (51/62)

2026-10-04 14:52:57 조회 4
그렇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숨은 조력자(?)들을 얻게 된 비담의 행보는 거칠 것 없이 모용세가로 이어졌다. 봄의 기운이 완연한 포근한 오후. “아~~하~~~암!!” 모용세가의 정문 앞을 지키던 장필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난 후 춘곤증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하품으로 인해 눈물이 그렁 맺힌 그의 눈에 의문의 점 하나가 세가를 향해 곧장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잉? 저, 저게 뭐지? 눈에 뭐가 들어갔나?” 장필수는 자신이 너무 졸려 헛것을 보았다 여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점으로 보이던 물체가 미끄러지듯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장필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런데 눈을 비비는 그 짧은 순간에 의문의 점은 어느새 다가와 그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장필수는 너무 놀라 뒤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최근 무림을 피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살인귀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장필수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버렸고, 이내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급격히 떨려왔다. 덜덜덜 덜덜덜덜 “혀...혀.....혀......혈......안......광마.” “모...용...세...가...지운다.” 혈안광마가 된 비담은 쓰러져 있는 장필수는 무시한 채, 높다랗게 걸려있는 모용세가의 현판만 응시하며 기계적으로 말을 뱉었다. 장필수는 악몽이어도 괜찮으니 제발 이 순간이 꿈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다. 하지만 이런 장필수의 소원은 길게 이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이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으~~~~~~~~아~~~악!!!” 콰광. 우지끈. 처참한 비명소리에 이어 무언가 요란하게 깨지며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비담이 장필수의 몸을 들어 그대로 현판을 향해 던져버렸던 것이다. 비담은 조각조각 부서져 떨어지는 현판을 잠시 바라본 뒤 이내 뚜벅뚜벅 모용세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땡땡땡땡 “혈안광마가 나타났다. 혈안광마가 나타났다.”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급격히 세가 안에 퍼지고, 그와 동시에 무사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챙겨 분분히 정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세가의 일반 식솔들을 제외한 모용세가의 전 무사들이 혈안광마 비담 앞에 집결하였다. 물론 가주인 천응검(天鷹劍) 모용선 역시 무사들의 선두에 서서 비담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가가 무림에 세워진지 어언 수백 년. 그 숱한 세월 수많은 위기를 겪었으나 모두 이겨내고 당당히 지금의 자리를 지켜온 우리다. 비록 하북팽가가 저자의 손에 무너졌다고 하나 우리는 그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니, 보란 듯이 이번의 위기도 이겨내고 말 것이다. 단 일인에 불과한 혈안광마...기필코 저자를 죽여 세가의 저력이 어떠한지 만천하에 보여주고 증명하리라.’ 모용선은 자신의 대에서 모용세가가 사라지는 끔찍한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의 살인귀는 반드시 이곳에 뼈를 묻으리라. 혈안광마를 노려보며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의지를 다지는 모용선. 하지만 그렇다고 가주인 모용선이 하북팽가가 당한 전례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팽가가 아무런 대비 없이 급습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들의 전력을 모조리 분쇄하고 파괴한 혈안광마였기에 모용선은 충분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유운성쇄(流雲星鎖) 흐르는 구름과 별들마저도 모두 가둬버린다는 대 일인 합격진. 무려 200명의 세가 무사들이 한 명의 적을 향해 펼치는 죽음의 그물. 자유로이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 위에 떠있는 별마저도 가둘 수 있다는 거창한 이름. 그만큼 세가에 닥친 위기가 절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용선은 그만큼 자신하고 있었다. ‘현명한 선조들께서는 이와 같은 상황까지 염두 해두셨다. 엄청난 무위를 지닌 한 사람에 의해 세가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 않으셨던 거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검진이 내 대에 이르러 쓰이게 되어 씁쓸하기는 하나 세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 모용선은 뚜벅뚜벅 걸어오는 혈안광마를 향해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후, 곧바로 검진의 발동을 명령했다. “유운성쇄를 펼쳐라.” 모용선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200명의 무사들이 일사분란 비담을 향해 몸을 날리더니 그대로 검진을 형성하였다. 128화 시퍼렇게 날이 선 수백 개의 검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빛났다. 하지만 그것은 반짝이는 검으로 만들어진 사신의 그물이었기에 누구하나 아름답다 말하는 이는 없었다. 비담은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수백 개의 검들을 무신경하게 바라보다가 그대로 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200명의 검사들은 자신들을 향해 빛의 속도로 쇄도해 오는 비담의 모습에 순간 움찔하였으나 검진의 위력을 믿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비담과 유운성쇄의 첫 격돌이 이루어졌다. 콰쾅 흡사 포탄이라도 터지는 듯 어마어마한 굉음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방진이 비담의 힘을 상당부분 흡수, 분산하였기에 검사들이 받는 충격은 미비하였다. 애초 강력한 힘을 지닌 일인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방어와 수비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검사들은 첫 번의 격돌로 용기백배하여 잠재되어 있던 두려움을 밀어내고 다시 이어질 공격에 대비하였다. 비담은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 화가 난 듯 더욱 강하게 밀어 붙였다. 쾅, 콰쾅, 쾅쾅.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리는 땅과 대기. 연이은 폭음이 들렸으나 검진은 요지부동 그 자리를 고수하였다. 검사들 역시 이제는 완전히 안정을 되찾은 모습으로 비담에게 조소까지 던지는 여유를 보였다. ‘휴우, 하북팽가가 처참하게 무너졌다는 소식에 어떤 괴물일까 잔뜩 긴장하였는데 생각보다 별로군.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된다니까. 그나저나 저 괴물만 없애면 우리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겠지. 히히.’ 그런데 검사들이 진의 탁월함에 취해 혈안광마가 주었던 공포를 극복하려는 찰나 거듭된 실패로 결국 폭발해버린 비담이 자신의 귀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촤아악 끼기긱 철판을 못으로 긁는 듯한 뾰족한 소리가 연이어 터지더니 비담의 장삼이 거칠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비담의 눈이 더욱 핏빛으로 물들며 붉어지더니 머리카락 전부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승리를 예감하며 달콤한 환상에 빠져있던 모용선은 오싹한 한기가 장내를 잠식해가자 급박한 경고성을 토해냈다. “모두 조심하라. 자신의 자리를 절대 이탈하지 말고 저자의 공격에 대비하라.” 검사들은 가주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지 않아도 피부에 와 닿는 소름끼치는 기운에 이미 긴장하며 대비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기운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힘이었기에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킨 채 비담을 응시하였다.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귀기를 몸에 두른 비담이 다시 한 번 빛의 속도로 쏘아져나갔다. 쿠르릉 쾅쾅 조금 전보다 한결 커지고 굵어진 광음과 함께 유운성쇄의 한쪽이 일그러졌다. 다행히 검진이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검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고, 여기저기 입가에 피를 흘리는 낭패한 그들의 모습을 통해 가벼운 충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나...무식한 힘이라니. 어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신으로 이런 힘을 낼 수 있단 말인가. 흡사 만근 거석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정도 충격은 아닐 텐데. 으으윽.’ ‘광마의 힘이 약해지면 공격을 하려 했건만 이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만에 하나 진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모용선은 거듭 진을 향해 돌진해가는 비담을 바라보며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애초 유운성쇄의 무서운 점은 사냥감을 지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올가미에 걸려 발악하면 할수록 힘이 빠지는 사냥감. 그리하여 지칠 대로 지친 사냥감에게 연쇄공격을 퍼붓는 것이 진의 기본 구성이었다. 물론 방어에 치중한 진이었기 때문에 공격력이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견고함과 퍼부어지는 압력으로 인해 본신의 힘을 모두 소진한 대상에게는 사신의 손짓처럼 무시무시한 연환공격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용선의 고민과 상관없이 비담은 무식하게 돌진을 시도하여 끊임없이 방진에 부딪쳐갔다. 마치 새끼 새가 자신의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퍼버벙 쾅쾅 어느새 비담의 몸통 박치기도 백번을 넘어섰고, 그의 몸에 직격당한 방진의 형태가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 천고의 방어검진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모용선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유운성쇄가 깨지면 우리의 힘만으론 역부족이다. 저런 무식한 힘을 상대하려면 그분들께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 저자의 힘도 진 때문에 많이 소진되었을 터. 그분들이라면 충분히 제압하실 수 있을 것이다.’ 모용선은 결심이 서자 곧바로 자신 옆에 있는 유성대주 모용창에게 은밀히 전음을 날렸다. 전음을 모두 들은 모용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몸을 날려 장내에서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유성대주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던 모용선의 시선이 다시 비담에게로 향했다. ‘그분들께서 나서주신다면...너는 끝이다.’ 콰콰쾅 맑고 푸른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 뇌성이 이어지길 반각. 혈안광마는 성난 소처럼 무식하게 유운성쇄를 향해 돌진, 또 돌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회를 넘어설 무렵, 진이 한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말았다. “크아악!!” 진을 구성하고 있던 검사들이 피를 토하며 저 멀리 나동그라지고, 혈안광마는 진이 부서졌음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이미 기진맥진 축 늘어진 검사들을 닥치는 대로 유린하였다. 여기저기 처절한 비명과 함께 검사들의 육신이 갈가리 찢어졌다. 나름 힘이 남아있던 검사들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검을 휘둘렀으나 자신의 생명만 재촉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모용선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검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침음성을 삼키고 말았다. ‘대일인 방어진으로는 최고라 자부했던 유운성쇄가 이리 허망하게 부서질 줄이야. 도대체 혈안광마의 무위가 어느 정도이기에...그나저나 세가의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어서 그분들께서 오셔야 할 텐데.’ 모용선은 세가의 전력을 유지한 채 하급무사들만으로 시간을 벌었다. 이미 방어진이 깨어진 마당에 세가의 혈족들마저 희생당하게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하늘이 도우려는지 혈안광마는 이지를 상실한 사람마냥 그저 닥치는 대로 눈앞의 무사들만 도륙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용선이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어느 순간. 멀리서 희끗한 그림자 둘이 연기처럼 다가와 그의 앞에 내려섰다. 희끗한 그림자의 정체는 하얀 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신선풍의 두 노인이었다. 모용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돌며 두 노인을 향해 극진히 허리를 접었다. “모용가주 모용선이 청송, 백송 두 어르신을 뵙습니다.” 소매에 청색의 띠가 아름답게 수놓아진 노인이 장내의 풍경에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인사는 됐네. 그나저나 저 놈이 요즘 강호를 피로 물들이고 있다는 혈안광마인가 보군.” “맞습니다. 어찌나 날뛰는지 도저히 저희들의 힘만으론 역부족인지라 결례를 무릅쓰고 어르신들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어차피 저자를 제거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우리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게. 그나저나 백송,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혈안광마의 행동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던 하얀 문사건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129화 “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군. 마기나 사기처럼 요사스러운 기운과 일면 비슷해 보이는데 정확히 일치한다 말할 수도 없고. 저돌적인 움직임과 요사스러운 기운에 잠식당해 검사들이 두려워하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으나 무공수위와 움직임 자체는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고 불안정하니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제압할 수 있겠군. 허나 그래도 유운성쇄를 혼자의 힘으로 분쇄한 괴물이니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해 자네와 내가 합공을 하세나. 길가에 싸질러 놓은 누군가의 똥을 치우다 옷에 묻는 것만큼 기분 더럽고 난감한 일도 없으니.” “후후, 직접 똥을 치우러 나선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옷을 망쳐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지. 그럼 시작하세.” 백송의 말을 철썩 같이 믿는 청송인지라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곧바로 큰 노호성과 함께 미쳐 날뛰는 혈안광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백송 역시 뒤질세라 하얗게 빛나는 자신의 애검을 뽑아 들고는 곧바로 전장 한 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이놈!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미쳐 날뛰느냐. 그동안 네놈이 저질렀던 악행에 대한 징벌로 고이 죽여줄 것이니 억울해하지 말고 저 세상으로 가거라.” 청송의 손이 푸르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큼지막한 장강(掌?)이 형성되어 비담의 등을 향해 폭사되었다. 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혈안광마의 몸이 2장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청송은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적중했음을 느끼고 만면에 희희낙락 미소를 지었으나 그것도 잠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서는 혈안광마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부르르 입가를 경련하며 돌아서는 혈안광마의 얼굴이 무척 화가 난 것을 대변해주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충격이나 상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려 팔성의 공력을 담은 청운장(靑雲掌)에 맞고도 저리 멀쩡하다니. 백송이 말한 기운의 정체가 외공이란 말인가? 허나 발경의 묘리를 운용했으니 내부가 진탕되어야 마땅하거늘 어찌 저리도 태평한 모습이란 말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금의 상황을 납득하지 못한 청송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어느새 시위를 떠난 살처럼 몸을 날린 혈안광마의 주먹이 청송의 가슴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네 이놈!!” 돌아가는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백송이 청송의 정신을 일깨우려는 듯 큰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혈안광마를 향해 그대로 검을 내리 그었다. 혈안광마는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주변을 잠식하며 쪼개려는 듯 다가오는 검강에 달려오던 탄력과 관성을 무시한 채 크게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목표물을 잃어버리고 애꿎은 허공에 검을 휘두른 백송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멍하게 서있는 청송을 다그쳤다. “정신 차리시게. 적을 앞에 두고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자네도 보았는가? 어찌 인간의 육신으로 팔성에 달하는 청운장에 맞고도 멀쩡할 수 있으며, 더불어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단 말인가?” “허허, 이사람 지금 제정신인가? 우리는 저놈을 제거하기 위해 이곳에 나온 것이지 저놈의 무공을 견식하고 품평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란 말일세.” “허나...저놈의 움직임에서 수십 년째 답보 상태인 지금의 경지를 넘어설 수 있는 단서가 잡힐 것도 같은데 이 기회를 어찌 놓친단 말인가?” “그럼 우선은 저놈을 없애고 그 다음에 지금의 상황을 복기하면 되지 않겠는가? 경계를 부수고 넘어선다는 것이 무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내 모르는 바는 아니네만 그래도 우선은 살아야 그것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자네도 방금 겪어봐서 알겠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저놈의 움직임이나 몸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네. 일견 단순 무식해 보이는 움직임이지만 직접 격돌해보니 우리의 오판이었음이 확실하네. 순간이었지만 동물을 능가할 정도의 감각과 움직임, 거기에 힘까지 겸비한 녀석일세. 결코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될 녀석이야.” 백송의 눈빛이 더욱 차갑고 깊게 가라앉았다. 혈안광마에게 가졌던 처음의 가벼운 마음은 이미 저만치 던져버린 상태였다. 혈안광마는 무엇이 불만인지 작게 그르렁거리며 두 노인을 직시하였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무사들과는 무위나 분위기 면에서 사뭇 달랐기에 이지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중을 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성을 상실한 채 미쳐버린 혈안광마의 진중함이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 자신을 경계하며 선뜻 공격을 가하지 않는 두 노인에게 화가 난 듯 곧바로 다시 돌격을 감행하고 있었으니까. 부아앙 콰쾅 거북한 소리와 함께 공기가 찢어질 듯 터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들 눈앞에 나타나 주먹을 뻗는 혈안광마의 모습에 청송과 백송은 기함을 하며 사력을 다한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최대치로 끌어올린 내공으로 인해 아랫배의 단전이 따끔거리고, 온몸 여기저기의 근육들이 저릿하게 아려올 정도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녀석의 주먹에 어디 한 곳이 온전치 못했을 아찔한 상황. “크아악!!” 혈안광마는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 것에 분노한 듯 더욱 크게 울부짖으며 청송을 향해 재차 몸을 날렸다. 청송은 자신을 목표로 성난 멧돼지마냥 달려드는 혈안광마의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훤히 드러난 그의 허점을 향해 자신의 성명절기인 청운장의 최후초식을 사력을 다해 날렸다. 콰콰쾅 연이은 폭음과 함께 혈안광마의 몸이 저만치 날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입가로 가는 혈선만 내보일 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대로 몸을 일으켜 달려드는 혈안광마였다. 청송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으며 다시 황급히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허, 도대체 저런 괴물이 여태껏 어디 숨었다가 이제야 나타났단 말인가.’ 콰쾅, 주르륵. 청운장이 적중할 때마다 실 끊어진 연처럼 저만치 날아갔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혈안광마. 오히려 피하며 때리는 청송이 지칠 지경이었고, 실제로 그의 호흡은 처음에 비해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허억! 허억!” 멀쩡하게 서있는 벽을 향해 내리 주먹을 날리는 기분이 이와 같을까. 차라리 벽이라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은 없으니 그나마 심력의 소모가 적을 테지만 눈앞의 괴물은 단순하긴 하지만 오금이 저려올 정도의 공포스러운 공격을 끊임없이 날리니 귀찮은 것을 떠나 자신의 수명이 단축되는 짜증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백송의 검이 하얗게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혈안광마의 뒤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찌이익, 그그극 철판을 못으로 긁는 듯한 거북한 소리와 함께 혈안광마의 신형이 조금 전과는 달리 눈에 뛰게 부르르 진동하며 떨렸다. 충격이 만만치 않은 듯 조금 전과 달리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혈안광마. 그리고 잠시 뒤 이어지는 귀곡성. “크르르륵! 끼요옷!” 살아남아 싸움을 관전하고 있던 모용세가의 모든 사람들이 소름끼치는 소리에 저마다 자신의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혈안광마의 전신을 감싸듯 흐르는 무거운 자줏빛의 광채. 분위기 역시 무식하게 날뛰며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고개를 이리저리 모로 꺾으며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혈안광마의 핏빛 눈동자가 더욱 진하게 물들자 그 눈빛을 마주한 청송과 백송은 돌덩어리라도 얹은 듯 가슴 한편이 무거워짐을 느꼈고, 둘의 뇌리를 똑같이 지배하는 한 가지 생각. ‘무언가 잘못 건드렸다.’ 130화 청송과 백송은 급격히 어두워진 낯빛으로 혈안광마를 응시하였다. 하지만 두 노인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혈안광마의 눈빛은 본연의 검은 빛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방금 전까지 혈풍을 불러 일으켰던 살귀와 동일인물인지 짐작하기 어려울정도로 담담한 기운만이 그의 전신을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돌변한 혈안광마의 신색에 청송과 백송 두 노인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지켜보며 짧은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군. 방금 전까지 미쳐 날뛰던 그놈이 맞는가?” “흠, 그러게나 말일세.” 얼떨떨한 표정으로 혈안광마를 응시하는 그 순간. 혈안광마의 입에선 긴 장탄식과 함께 씁쓸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후~우. 쯧쯧,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리 슬프고 억울했더냐. 그나저나 선천지기까지 끌어다 쓰고 영혼마저 스스로 유폐시켰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혈안광마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먼 하늘만을 응시한 채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채워져 있던 살기와 귀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장내는 이내 무거운 침묵과 당혹스러움으로 채워졌다. 청송과 백송 역시 돌변한 혈안광마만 응시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렇게 순간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질 찰나. 먼 하늘만 응시하고 있던 혈안광마의 눈이 돌연 청송과 백송을 향해 돌려졌다. 그리곤 이어지는 장탄식. “흐~음. 너희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 여기서 그만 마무리 하자꾸나. 마음 같아선 담이를 이 지경으로 내몬 너희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직성이 풀리겠다만 시간과 능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구나. 그럼...슬슬 마무리를 짓자.” 푸념처럼 이어지던 독백이 끝나자마자 혈안광마는 곧바로 몸을 띄웠다. 그리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멍하게 서있던 청송을 향해 자줏빛 장강을 쏟아 내었다. 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이어지는 장강의 물결. 청송은 살을 에일 듯 밀려드는 자줏빛 장강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나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