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48편 (48/62)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서희는 부녀사이에 있었던 애달픈 속사정에 눈물을 흘렸고, 이내 어느 정도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그 글귀들을 검후님이 남기셨다는 말씀이시죠?” “맞소. 화류선의 설매풍류를 매화와 눈이 있는 곳에서 펼쳐야만 보이도록 안배를 해두셨던 것 같소.” “하아! 슬프지만 너무 아름다워요. 아버님과의 추억을 선물하는 이에게 전하는 선물이라니.” “선물이라...그럴 수도 있겠구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담아 새기셨으니.” “가가, 너무 슬프고 아름답지만 우리는 그러지 말아요. 헤어지고, 만날 날을 기약하며 끝없이 기다리는 일. 저는 검후님처럼 그리 견디지 못할 것 같아요.” “나 역시 못 견딜 것이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오.” “네, 가가.” 화류선에 깃든 비밀로 인해 더 애틋한 마음을 품게 된 서희와 비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오른 것보다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더 소중하였다. 그리고 비담은 상단전에서 조용히 울고 있을 길천에게도 마음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님, 이제 마음의 짐을 편히 내려놓으세요. 글 속에 녹아있는 검후님의 마음을 형님도 느끼셨잖아요. 형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그 소중했던 마음들을요. 그러니 이제 행복한 마음으로 그분을 놓아주세요.’ ‘그래야겠지. 아니 이제는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담아, 고맙고......고맙다.’ ‘별말씀을요. 저 역시 그분께 선물을 받았으니 제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비담은 길천에게 주어진 소중하고 애틋한 지금 순간을 방해하지 않고 싶었기에 조용히 의념을 접었다. 짧은 겨울해가 서산을 넘어간 지 한참 후에야 비담은 서희와 함께 객잔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눈 속을 돌아다니고 여러 가지 일을 겪다보니 둘은 급격히 솟아오르는 허기에 들어오자마자 음식부터 주문하였다. 일각여삼추. 마침내 주문했던 음식들이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하나 둘 탁자 위를 채웠다. 둘은 너무나 구수한 냄새에 이성 따위는 저만치 내팽개쳐 버리고 허겁지겁 식사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때마침 등장한 불청객들로 인해 그들의 우아했던(?) 식사 시간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객잔으로 막 들어서는 5남 2녀, 그중 한 여인과 눈이 마주친 비담이 하던 식사를 멈추고 싸늘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서희 역시 흠칫 놀라 젓가락질을 멈추었고, 이내 비담의 시선을 따라 막 들어서는 젊은 남녀들을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 역시 싸늘히 굳고 말았다. ‘오정회의 시봉세? 하필 여기서 만나다니.’ ‘쩝, 호사다마라 했던가? 넓고 넓은 대륙 다 제쳐두고 하필 여기서 만날게 뭐람. 휴우, 이놈의 팔자 뭐가 순조롭게 진행되지를 않아요. 오늘 하루 참 깔끔하고 우아했었는데 저 잡것들 때문에 화룡점정을 못하네. 에이 빌어먹을 새끼들. 걸리적거리면...다 엎어 버린다.’ 비담은 싸늘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식사에 몰두했다. 알아서 조용히 사라져주기를 바란 채. 한편, 시봉세 일행 중 누구보다 먼저 비담의 존재를 알아챈 제갈현아는 눈에서 독기를 줄기줄기 내뿜었으나, 림에서 주어진 임무를 생각하며 꾹꾹 눌러 참고 또 참았다. ‘모용오라버니와 황보오라버니라면 당장 저 음적놈을 제거할 수 있겠으나 우선은 주어진 임무가 먼저니 참는 수밖에. 밖에 쌓인 눈만 아니라면 음적과 한 객잔에서 지낼 필요도 없을 터인데 하늘이 원망스럽구나.’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가는 제갈현아였다. 그런데 시봉세 일원 중 제갈현아만큼 눈에 독기를 품은 이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하북팽가의 소가주 헌원도 팽철영이었다.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여기서 만나다니. 오냐, 지난번 빚에 이자까지 셈해서 오늘 끝장을 보자. 내 오늘만을 위해 절치부심 세가에서 영약을 밥 먹듯 복용하고 무공을 연마하였으니 해볼 만 할 것이다. 정 힘들면 옆에 계신 형님들이 분명 도와주실 터.’ 하지만 팽철영이 분노하여 막 튀어나가려는 순간 그를 제지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모용천이었다. 팽철영이 의아해하며 눈으로 질문을 던졌고, 애써 담담한 척 고개를 흔들며 거듭 만류하는 모용천이었다. 허나 그 역시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것만은 감추지 못했다. 결국 팽철영은 핏발선 모용천의 눈을 마주하곤 이내 잠잠해지고 말았다. 대형의 분노에 비하면 자신의 분노는 새발의 피였으니까. 일행을 어느 정도 추스른 모용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식사를 하였다. 비담은 껄끄럽긴 하였으나 감히 시봉세의 무력으로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내일부터는 오욱을 감시하느라 정신없을 터이니 그 안에 시봉세는 알아서 사라지리라 여긴 것이다. 다행히 그날 밤, 시봉세와 비담 사이에는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비담은 껄끄러운 마음을 털어내려는 듯 서희와 함께 아침 일찍 화산파로 길을 나섰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 피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119화 화산파에 도착한 비담이 오욱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흑막주 이성보로부터 그자의 인상착의와 정도맹에서의 위치, 신상명세에 대해 세세히 들었기 때문이다. 숨겨진 정체까지도. ‘정도맹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비밀결사대 성격의 조직, 멸사대(滅邪隊). 그리고 그 멸사대주의 오른팔인 오욱. 그렇다면 어째서 부흥상회의 돈을 중간에 갈취한 왕석기가 오욱에게 돈을 건네었을까? 혹시 왕석기 그자도 멸사대원인가? 아니야, 비밀결사대의 성격이라면 무공이 만만치 않을 터. 그리 쉽게 조석태에게 발각되어 고문당하진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단순히 행동대원일 수도 있겠어. 그만한 비밀조직을 운용하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들 테고, 마침 사도련과 연관 있는 부흥상회의 돈이라면 일석이조일 테니까. 후후, 정말 형님 말대로 겉으로 드러난 무림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모두다 무언가를 꽁꽁 숨기고 있는 복마전 같은 곳이야. 나중에 서희랑 알콩달콩 오붓하게 살려면 황제 그 영감탱이랑 사도련만은 반드시 손을 써야겠어. 그나저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비담은 오욱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한 채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무료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점심 무렵, 드디어 기다렸던 순간이 찾아왔다. 오욱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벗어났던 것이다. ‘옳거니. 물건이 도착했구나.’ 비담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서희와 함께 오욱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오욱은 산보라도 나온 양 느긋하게 걸었는데 별달리 이상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을 걷던 오욱이 다시 화산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분명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중간에 그 어떤 돌발행동도 하지 않았기에 비담으로써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어, 어라? 그냥 산보나간 거였어? 분명 돈을 전달받으러 움직인 줄 알았건만. 에이, 좋다가 말았네.’ 가볍게 툴툴거린 비담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오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담이 전각의 지붕 위에 숨어 감시하기를 반 시진, 갑자기 피처럼 붉은 혈의를 입은 일단의 무리들이 화산파가 제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훌쩍훌쩍 담을 넘어 숨어들었다. 어림잡아도 족히 백여 명은 되어보였는데 아직은 비담과 서희가 숨어있는 전각과는 거리가 멀어 둘의 존재를 눈치 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어라? 이것들은 또 뭐지? 그런데 살기가 보통이 아니구나. 아까부터 피부를 찌르르 울리던 정제된 살기의 정체가 바로 이것들이었어. 화산파에 나 말고 또 손님이 방문한 것 같은데...그것도 불순한 목적의 불청객들이 이리도 많이 왔으니 어쩐다? 우선 서희부터 객잔으로 돌려보내야겠다. 괜히 눈먼 칼에 서희가 다치면 곤란하니까.’ 비담은 곧바로 서희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무래도 초대받지 않고 몰래 온 손님이 있는 것 같소. 이곳에 있으면 혹시 다칠지도 모르니 우선 객잔에 돌아가 기다리시오. 나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로 몸을 빼겠소.’ ‘알았어요, 가가. 대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오셔야 해요. 알았죠?’ ‘알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어제의 기연으로 무공이 한 단계 더 올라섰으니 당신이 우려하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당신을 두고 모험을 할 만큼 어리석은 내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음,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 늦기 전에 어서 돌아가시오.’ ‘네, 그럼 조심하세요.’ 서희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겉으론 전혀 내색하지 않고, 곧바로 비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이 남는다고 고집을 부려보았자 괜히 짐만 될 뿐이므로. 서희가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담의 눈이 어느 순간 호승심으로 불타올랐다. ‘검후의 심득을 통해 한 단계 올라선 경지, 과연 어느 정도의 위력이 있을까? 확인해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 미치겠구나. 아니지, 괜히 서희가 걱정할 수도 있으니 자중하는 편이 낫겠어. 우선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손을 써야지.’ 비담은 심호흡을 하여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잠시 눌렀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 혈의를 입은 자들과 한바탕 어우러지고 그들의 정체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미래를 위해 참기로 한 것이다. ‘그나저나 저것들의 정체가 뭘까? 살기를 저 정도로 정제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수련으론 어림없는 일인데 저만한 숫자의 고수들을 키워낼 만한 단체...역시 사도련일 가능성이 농후해. 후후,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나.’ 무슨 목적으로 화산파를 방문했는지 몰라도 일이 묘하게 틀어졌음에는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방문자들이 또 비담의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것들은 또 웬일이야?’ 오욱이 머물고 있는 전각을 향해 어제 객잔에서 마주쳤던 시봉세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비담의 눈이 이번엔 진한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한창 서류를 정리하며 업무에 열중하고 있던 오욱은 예기치 못한 손님의 방문에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래에 무림을 위진 시킨다는 오정회의 시봉세 아니시오. 내 오늘 찾아온다는 기별은 이미 받았으나 워낙 할 일이 많아 준비가 소홀했던 점 양해해 주시오. 자, 이쪽으로 앉으시오.” “무림후학 모용천이 오대협을 뵙습니다.” 떨떠름한 손님의 방문에 오욱의 인상이 잠시 구겨졌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그들을 맞이하고 자리까지 권하였다. 시봉세 일행 역시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린 후 오욱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매화나 감상하자고 찾아왔을 리는 만무하고...그래, 요즘 무림이 하도 뒤숭숭하여 오정회 역시 바쁠 터인데 한적한 화산까지 어인 일로 오신 게요?” “하하, 오대협 말씀처럼 한가하게 매화향기 음미하며 시나 읖조리면 좋으련만 구린내 풀풀 풍기는 무림이 그것을 허락하질 않는 군요.” “코를 마비시킬 정도의 시궁창냄새에 비하면 그래도 매화향기를 가릴 정도의 구린내가 참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서로 바쁠 터 인사치레는 이정도로 하고,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오?” 시궁창냄새라는 말에 팽철영이 발끈하며 일어나려는 것을 모용천이 제지하였다.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모용천은 말로는 기선제압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찾아온 용건을 꺼내었다. “음지에 숨어 칼을 가는 것까진 무림동도로써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도 아니니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사실 자기 밥그릇 지키겠다는 것을 말릴 명분도 없고요. 허나, 사람 사는 세상엔 기본적인 상도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걸 어기고 문란하게 만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앞으론 저희 밥그릇은 넘보지 마십시오. 한 번만 더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면...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찾아와 한다는 말이 고작 밥그릇 이야기요?” “밥그릇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엔 주의로 끝나지만 다음번엔 피를 봐야만 끝날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후후, 알겠소.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니 그만 물러들 가시오. 멀리 나가지 못합니다.” 명백한 축객령. 모용천 일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두말없이 일어나 포권을 한 후 전각을 빠져나갔다. 비담은 전각 위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시봉세가 왜 화산에 나타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후후, 오정회의 밥그릇에 손을 댈 정도로 멸사대가 급했던 모양이구나. 그런데 저 양반 호감이 가네. 성격이 아주 깔끔하고 담백해.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 것들한테 금세 숙이고 들어갈 정도라니. 정도맹의 숨겨진 발톱이라...생각보다 아프겠어.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저자는 꼭 구해야겠군. 그런데 가만, 아뿔싸! 사도련의 목적이 이거였구나. 멸사대 제거. 이 일을 어쩐담. 서희와 약속했는데...그래, 조금 더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도와주자.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섣불리 나설 필요는 없지.’ 120화 그런데 공교롭게도 시봉세가 자리를 뜨고 비담이 막 마음의 정리를 하자마자 의문의 혈의인들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정도맹의 잡졸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라. 화산파의 말코들이 도착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3조는 오욱을 맡아 제거하라.” “복명!” 괴소를 날리며 등장한 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10명의 혈의인들이 오욱이 있는 전각으로 몸을 날렸다. 오욱은 때 아닌 침입자들에 분기탱천하여 검을 뽑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침입자들의 무공은 분노만으로 제압하기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니 끝도 없이 나타나 휘젓고 다니는 자들 중 하나와 붙는다 해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10명이 한꺼번에 덤볐으니. 승부는 너무나 뻔했다. 순식간에 역전된 상황에 오욱은 뒷걸음질 치느라 바빴다.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밀린 오욱은 끝까지 분전하였으나 실력에 따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침입자들은 느긋하게 다가와 쓰러져있는 오욱에게 손을 내밀었다. “멸사대의 비밀장부를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흐흐, 차라리 죽이는 것이 수월할 것이다. 나를 고문해 보았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테니 괜히 헛수고 하지 말고 어서 죽여라.” “시간낭비만 하였군. 모두 쓸어버릴 생각이니 어차피 비밀장부 따위 필요 없겠지. 그럼 잘 가거라.” 혈의인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대기를 갈랐고, 쓰러져 있던 오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욱은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부채가 혈의인의 검을 쳐내는 것이 아닌가. “웬 놈이냐?” “하하, 실례 좀 합시다. 이 양반 나랑 할 얘기가 있어서 지금 저승가면 안 되거든. 나중에 일 끝나면 다시 보내드릴 테니 그 때에 마저 일 보쇼. 그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비담이 몸을 날렸던 것이다. 그리곤 오욱을 옆에 낀 채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놓치지 마라.” 발악하듯 소리치는 외침과 함께 혈의인들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마침 근처에서 멸사대원들을 도륙하고 있던 혈귀대주 마영의 눈에도 그 장면이 포착되었다. 인사불성이 되어 축 늘어진 사내를 끼고 한 마리 비조처럼 날아가는 모습. 3조 조장이 급하게 쫓고 있었으나 경공 하나만으로도 달아나는 자의 무공수위가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깐 스치듯 보았지만 도주하는 자의 경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사실. ‘매우 강한 놈이다. 만약 저것이 유인하는 것이라면 3조가 위험하다.’ “7조부터 9조까지는 이곳에 남아 쓰레기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방금 뛰쳐나간 녀석을 추격, 포위하여 제거한다.” “복명!” 피에 흠뻑 젖어있던 50명의 혈귀들이 동시에 도약하였다. 목표는 하나, 자신들의 먹잇감을 중간에 가로 챈 정체불명의 사내였다. 오욱을 옆에 낀 비담은 방울이 흔들릴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마음 같아선 신나게 싸워보고 싶었지만 옆에 혹도 하나 달려 있었고, 무엇보다 서희의 걱정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호승심을 채우고, 무공을 시험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 지겹도록 부딪힐 사이이기에 인사 정도는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서희가 머무는 객잔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도주하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100명을 상대로 싸우면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나 뒤따라오는 너희 10명 정도는 식후 간식거리도 안 되지. 후후.’ 전속력으로 달리는 와중에도 비담은 주변을 관찰하며 여유만만이었다. 그러다 마침 적당한 공터가 나타나자 그곳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곤 추격하는 자들과의 거리를 대충 가늠해본 연후 적당한 거리를 더 달려 오욱을 내려놓고 바로 혈귀대를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혈귀대 3조 조장 광막참 이수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의문의 침입자가 도주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한지라 전속력으로 따라붙어도 놓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림에 그 누가 있어 우리를 이리 농락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사도련의 최정예 비밀무기인 우리 혈귀대를 말이다. 놈,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속도를 더욱 높인다.” “복명!” 이미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으나 하늘같은 조장의 명령.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담한 공터를 지나칠 무렵, 조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산개하라.” “후후, 늦었어.” 쐐애액 공기를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부채. 그 부채를 둘러싼 푸른색 선강이 너무 아름다웠으나 그것을 감상할 여유 따윈 아예 없었다. 저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초대할 재앙이었으니까. 다급한 조장의 외침과 함께 조원들은 불에라도 데인 듯 화들짝 놀라 흩어졌으나 무정하게도 부채는 그들을 지나갔고, 세 명의 혈귀대원들 목이 둥실 떠오르고야 말았다. 부채는 유려한 곡선과 함께 저만치 서있던 비담의 손으로 다시 돌아갔다. ‘예상은 했지만...정말 엄청나구나. 그저 한 단계 더 올라섰다 여겼건만 위력은 수배가 강해졌어. 히야, 몸이 근질거려 미치겠어. 잠깐이면 별 상관없을 거야. 야호, 너희들 지금이라도 참회하는 게 좋을 거야.’ 비담은 신이 나 자신도 모르게 화류선법을 처음부터 모조리 펼쳤다. 흡사 양떼 사이로 뛰어든 늑대마냥 거칠 것이 전혀 없는 모습. 자신감 충만하다 못해 과잉된 상태로 무림에 첫 발을 내딛은 이수는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이건 악몽이고...재앙이야.’ 그가 멍 때리는 사이 속절없이 당하는 자신의 수하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어린아이 열 명이 어른 한명과 싸워도 저런 광경은 연출되지 않으리라. 이것은 싸움을 넘어 일방적인 구타요 학살일 뿐이었다. 비담은 쉽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음에도 자신도 모르는 흥에 취해 싸움을 즐기고 말았다. 물론 혈귀대원들에게는 본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악몽이었지만. 121화 그런데 비담이 한창 싸움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멀리서 그 모습을 오들오들 떨며 감상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조금 전 오욱을 만나고 돌아가던 시방세 5남 2녀였다. 소름끼치도록 몰아붙이는 비담의 무위에 그들은 입이 벌어진 것도 잊은 채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 저 간악한 음적 놈의 무위가 저 정도라니...’ ‘으윽, 세가에서 그리 영약을 먹고 무공을 연마하였는데...예전에 내가 봤던 수준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어.’ ‘기필코 소미의 한 맺힌 원한을 갚아주겠다 다짐을 하였건만...감히 내 상대가 아니다.’ 시봉세의 제갈현아, 팽철영, 모용천은 저마다 탄식과 함께 울분을 삼키고 말았다. 그들 개개인의 실력으로 눈앞에서 신나게 날뛰는 비담을 제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차라리 몸에 기름을 두르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마음 편하고 살아날 확률도 더 높아 보일 지경이었다. ‘이대로...이대로 저 갈가리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음적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아! 하늘이 원망스럽구나. 그런데...어째서 저 놈 혼자지? 객잔에서 보았던 그 년은? 분명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끓어오르는 원독에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던 제갈현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략이 어느 정도 구체화될 무렵, 그녀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혈의인들이 비담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저만치 보였다. 어림잡아 보아도 무시무시한 자들이 족히 50은 되어보였다. 제갈현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시봉세의 우두머리인 모용천을 나지막이 불렀다. “모용 오라버니, 저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좋은 생각?” “네. 오라버니도 느끼셨을 테지만 우리의 깊은 원한을 저자에게 그대로 되갚아주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솔직히 실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잖아요.” “으음, 그래서?” “그런데 꼭 본인에게 직접 되돌려 줄 필요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