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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소설) 호색 -완 - 46편 (46/62)

2026-10-04 14:52:57 조회 6
그리곤 예전 석양을 등진 채 서희와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었던 호숫가를 거닐었다. 그렇게 비담이 혼자 추억을 곱씹으며 걷기를 일다경. 작은 인기척과 함께 살포시 뒤에서 그를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한데...” “괜찮아요. 가가의 품이 이리 따뜻한 걸요. 그런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왜 주무시지 않고...” “하하, 어여쁜 당신이 이리 내 곁에 있으니 오려던 근심걱정도 모두 달아날 것이오. 그저 달콤하고 짜릿했던 옛 생각이 나서 이리 거닐었다오.” “호호, 제가 따귀를 때렸던 그 일이 그리도 달콤하고 짜릿하셨어요?” “에이, 그 정도 일로 달콤하고 짜릿했다 말할 수 있겠소? 물론 붉게 타오르는 석양과 호수를 배경 삼아 그대의 입술을 훔치고 따귀를 맞은 일도 잊지 못할 추억이기는 하나 그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련했던 그 여인의 거친 숨결과 보드랍던 살결...아담하지만 봉긋 솟은 가슴을 지나 매끄럽게 이어진 허리를...으윽!”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비담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은 서희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곳에서 저 말고 다른 여인을...도대체 누구죠?” “하하, 오해하지 마시오. 당신이 소개시켜준 목(木)소저가 생각나 농을 던진 것이니.” “목(木)소저요?” “나뭇결이 곱게 살아 숨 쉬던 그녀 말이오. 내가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호호호, 그녀를 깜박했군요. 이제야 생각났어요. 침상 위에서 목각인형을 붙들고 힘을 쓰시던 가가의 모습. 그런데 애석해서 어쩌죠? 그녀는 이미 가가를 버리고 멀리멀리 떠나버렸는데.” “흐음, 그녀는 떠났으나 이리 내 옆에 남아준 그대가 있지 않소? 뭐 그녀보다 요만큼 매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하하하!” “뭐예요?” 비담이 검지와 엄지를 조금 벌려 익살스럽게 들이대자 서희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허리에 척 손을 올린 채 노려보았다. 하지만 비담은 그러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뻐 보여 순간적으로 입을 맞추고 말았다. “우읍! 가가...이러면 인피면구가. 흐음!” 다리에 힘이 풀린 서희가 입맞춤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비담의 허리를 안았고, 비담은 부드럽고 깊게 그녀를 맛보았다. 그렇게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비담의 입술이 떠나는 순간 서희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고, 비담 역시 옷고름 풀다 새벽닭 울음소리를 들은 새신랑마냥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쩝, 인피면구만 아니었어도...휴우.” “가가, 매영언니에게 부탁해서 역체변용술 꼭 배우고 말 거예요. 우리 조금만 참아요.” 기필코 배우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서희였다. 부흥상회에 잠입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잔뜩 굳은 얼굴의 매영이 급하게 비담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오?” “조석태의 행동을 관찰하던 중 매우 수상한 점을 발견해서 급한 마음에 찾아왔어요.” “수상한 점?” “네, 조금 전 그가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저 역시 잠을 청하러 막 이동하려는 찰나 흑의로 전신을 가린 사람이 그자의 침실로 들어가더군요. 그래서 찜찜한 마음에 좀 더 기다렸더니 역시나 예상대로 곧 흑의의 남성과 조석태가 함께 나오더군요. 그래서 몰래 뒤를 밟았는데 인근 야산의 허름한 창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혹시나 해서 주변을 살펴보니 제법 경계가 삼엄하여 확인만 하고 곧바로 돌아왔습니다.” “당신 말대로 뭔가 냄새가 나는구려...이럴게 아니라 그곳으로 함께 가봅시다.” 매영을 앞세운 비담이 인근 야산에 자리한 창고에 도착한 것은 일다경 후. 매영의 말대로 딱 보기에도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허름해 보이는 창고임에도 불구하고 지키는 이가 여럿 보였다. 비담이 그렇게 창고 주위를 지켜보며 숨어 있기를 일다경. “으으음!!” 한껏 격앙되었으나 어딘가 억눌린 듯한 신음소리가 창고 안에서 흘러나왔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신음소리. 무언가 있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냐?” 신음소리에 이어 들려온 스산한 음성. 분명 조석태의 것이었다. “바른대로 고하지 않겠다? 오냐. 끝까지 버텨보아라. 너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직접 확인해 보마.” “으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반시진에 걸쳐 이어진 비명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멈춘 후 조석태가 걸어 나왔다. “질긴 놈. 어디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해보자. 아무도 들이지 말고 철저히 감시하거라.” “예! 어르신.” 창고 주변을 지키던 이들이 조석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비담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후 서둘러 매영과 함께 부흥상회로 돌아왔다. “어찌할까요?” “음, 아무래도 뭔가 있는데. 조석태를 관찰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소?” “사흘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의 모사는 힘들겠으나 충분히 주변 사람들을 속일 정도는 되요.” “그럼 일을 앞당기는 게 좋겠군요. 오늘 밤 당장 그자의 침실로 들어가죠. 나는 가서 서희를 데려올 테니 당신은 침실 주변을 정리해 주시오.” “알았어요.” 매영의 신영이 꺼지듯 사라졌고, 비담 역시 서희를 데리러 급히 나섰다. 112화 반 시진 후. 잠들어 있는 조석태를 내려다보는 세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비담과 서희, 매영의 눈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비담은 곤히 잠들어 있는 조석태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깨웠다. “으흐음, 헉! 누, 누구. 읍.” 자신의 숙면을 방해받은 것이 못내 못마땅한지 인상을 잔뜩 구기던 조석태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을 지르려 하였으나 비담의 손이 입을 막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쉬잇!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새가슴이라 잘못하면 당신의 목에 위협용으로 대고 있는 비수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거든. 그래, 그래. 그렇게 얌전히 있으면 별 일 없을 테니 우리 쉽게 쉽게 하자고.” 자신의 목에서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빛나는 비수로 인해 조석태는 곧 반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별 거 없어. 그냥 네 몸뚱이랑 약간의 정보.” “나를 납치하겠다는 것이냐?” “아니. 우리는 그런 고단수의 범행을 저지를 정도의 배포는 없어서. 애석하지만 감금하는 선에서 끝내자고.” “후후, 내 재산을 노렸나본데 너희는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 당할 성 싶으냐? 내 뒤에는...” “당신 뒤에 뭐가 있는데?” “가소로운 놈들. 내가 사라지면 련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헉! 려, 련이라고...아뿔싸! 이럴 수가. 그런 무시무시한 단체가 뒤를 봐주고 있을 줄이야. 그런 대단하신 분인지 미처 알아 뵙지 못하고 어설픈 협박을 하며 금품을 갈취하려던 못난 저희들을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후후, 허나 이미 늦었...” “헤헤, 이럴 줄 알았냐? 이런 걸 기대한 거야? 반응을 보아하니 그랬나보네. 그런데 어쩐다...” 말끝을 흐리며 비담이 옆으로 비켜서자 그곳엔 이미 조석태의 모습으로 완벽히 변한 매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헉! 어, 어찌 이런 일이...” “저런. 련에선 이런 거 안 가르쳐줬나 보네. 이리 완벽한 대역이 있는데 과연 당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까? 후후, 내기해도 좋아. 부흥상회는 아무 잡음 없이 잘 돌아갈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자, 그럼 제대로 시작해보자고.” 비담이 물러서자 서희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섭혼미염공을 시전 하였다. 서희의 눈이 보랏빛으로 진하게 물들수록 조석태의 동공은 빛을 일어가며 흐리멍덩하게 풀리고 말았다. “다 됐어요.” “좋아. 그럼 질문을 시작해보자고. 우선 련이라는 단체의 정체가 무엇이냐?” “모릅니다.” “모른다? 그런데 어찌 련이라는 단체를 언급했지?” “정체를 알지는 못하나 매달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기에 그리 대답했습니다.” “정기적인 방문이 있었군. 좋아, 그럼 매달 찾아오는 그자와 어떤 일들이 있었나?” “상회의 수입 중 비자금으로 조성된 자금을 매달 그자에게 상납하였습니다.” “매달 마주하면서도 정체를 모르겠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매번 복면을 하고 있었고, 몸의 형태로 보았을 때 여러 명이 돌아가며 상회를 방문한 것으로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자와 접선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접선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집무실 개인금고에 매달 일정량의 돈을 마련해두면 알아서 꺼내 갔습니다.” “간단해서 좋구나.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다. 방금 인근 야산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에 다녀온 것을 지켜보았다. 그곳엔 무슨 일로 갔던 것이냐?” “어떻게 알았는지 비자금을 관리하던 자가 저의 눈을 속이고 막대한 양의 자금을 빼돌렸습니다. 련의 눈을 피해 모아두었던 자금과 이번 달 련에 상납해야 될 돈까지 포함되어 있었기에 회수할 목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 돈은 찾았느냐?”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놈이 분명 어딘가로 돈을 빼돌렸는데 입을 열지 않고 버텼기에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으흠! 만약 련에 돈을 상납하지 않으면 어찌 되느냐?” “부흥상회는 상계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그럼 가장 가까이 닥친 상납일이 언제이고, 금액은 얼마이더냐?” “매달 초하루에 찾아오고, 금액은 황금 10000냥입니다.” 이지가 상실된 조석태는 비담의 물음에 술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흐음, 황금 일만 냥이라...결코 적은 돈은 아니로군. 초하루면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아무래도 창고에 있는 자가 숨겨둔 돈을 찾아야겠군.’ “후후, 유용한 정보 요긴하게 사용하마. 그럼 협조에 대한 보답으로 목숨만은 살려주지. 조금 누추하겠지만 흑막의 창고에서 지내며 그동안 련의 주구로 활동했던 것을 뉘우치며 여생을 보내도록.” 비담의 신호와 함께 서희가 섭혼미염공을 거두었고, 조석태는 허물어지듯 침상으로 쓰러졌다. 다음날 밤. 비담은 쓰러진 조석태를 처리한 후 서희와 함께 어젯밤 매영과 왔었던 허름한 창고로 향했다. 내일이 련에 상납하는 날이었지만 서희의 섭혼미염공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창고에 도착하자 예의 건장한 사내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지만 비담의 화류선 한방에 모두 무기력하게 픽픽 쓰러졌고, 비담은 산보라도 나온 양 유유자적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 안에는 어젯밤 비명을 질렀을 것으로 짐작되는 한 남성이 피칠갑을 한 채 의자에 묶여 있었다. 모진 고문 속에 군데군데 큰 상처들이 보였지만 다행히 미약하게나마 숨은 쉬고 있었다. 비담은 사내의 상태가 섭혼미염공을 견뎌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당장 황금 만 냥이라는 거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부흥상회에 잠입한 의미가 없었기에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물론 주인의 돈을 중간에 가로챈 부도덕한 놈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에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았다. “부탁해.” 비담의 부탁과 함께 서희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그 순간 사내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자,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양반.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 “으흐음. 내 이름은 왕석기...입니다.” “그래, 내 당신의 주인 되는 부흥상회의 조석태에게 자초지종은 모두 들었지. 도대체 상회의 돈을 얼마나 해먹은 거야?” “화...황...금.....시, 십만...냥입니다.” “와우! 통도 크셔라. 그게 모두 뱃속으로 들어가던가? 그 정도 액수면 탈이 나도 단단히 날 터인데. 흠, 그 두둑한 배짱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드는군. 뭐, 주인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 괘씸하기는 하나 그래도 내 일이 수월할 수 있도록 도왔으니 눈감아주지. 그건 그렇고, 나 역시 그 돈이 꼭 필요해서 중간에 꿀꺽해야 될 것 같은데. 지금 황금 십만 냥이 어디에 있을까? 너무 궁금해 미치겠거든.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할 테니 이 귀에다 대고 시원하게 한번 불어봐.” “도...돈은....먹지 않았기 때문에...지금 제 배...속에 없습니다.” “응?” “그...그리고 후우~” 쩝 왕석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비담은 망연자실 그대로 굳었다가 그만 울상이 되어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113화 왕석기가 섭혼미염공의 최면에 취해 정말로 곧이곧대로 대답한 것은 물론 나아가 비담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는 만행까지 저질렀던 것이다. 처음엔 왕석기의 뜬금없는 행동에 영문을 몰라 당황했던 비담은 곧 자신이 말하는 대로 그가 행한 것임을 알아채고 어휘선택에 심각한 하자가 있었음을 스스로 반성하였다. ‘휴우,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이리 중요한 순간에도 상대의 속을 긁는 평상시의 말투가 튀어나올 줄이야.’ “내가 잘못했으니 사내의 뜨거운 입김이 귀에 닿는 더러운 기분은 그냥 감수하고 넘어가마. 자, 그럼 다시 물을게. 그 돈, 지금 어디에 있을까?” “청...화..루의 소옥이라는 기녀에게...있습니다.” “헉! 뭐, 뭐야? 그럼 황금 십만 냥이나 되는 거금을 모두 기녀 구멍에다 털어 넣었다고? 정말? 사실이라고?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설마...아니지? 그래, 분명 아닐 거야. 세상천지 어떤 미친놈이 여자랑 자겠다고 황금 십만 냥을 쓰겠냐고. 구룡포 뒤집어쓴 그 미친 영감이나 최음제 조제를 취미생활로 즐기는 남궁 늙은이도 그런 짓은 못해.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수위를 다투는 쟁쟁하게 미친 양반들 모두 너 같은 짓은 못해. 그런데 지금 기녀에게 황금 십만 냥을 줬다는 네 말을 정신이 가끔, 아주 가끔 미친 나보고 납득하라고? 자, 지금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제 정신이 아닌 것은 충분히 감안하고, 이해해 줄 테니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줘. 정말 청화루에 있는 소옥이라는 기녀에게 황금 십만 냥을 줬어?” “네...며칠 전에...전달했습니다.” “으악! 정말 미치겠네. 야? 너 지금 내가 시간이 팽팽 남아돌아 너랑 장난치는 것 같냐? 고문당하는 네놈이 심심할까봐 말벗 해주러 온 거 같아? 얌마, 황금 십만 냥이면 기루를 백 개는 사고도 남을 돈이라고. 그런데 달랑 기녀 한 명에게 그런 거금을 줬다고? 그 여자 거기는 황금으로 반짝거리든? 아니면 가슴에서 불로장생의 묘약이라도 콸콸 솟아나는 거냐? 도대체 왜 준거야, 왜!!!” “그녀의 거기는...황금이 아닙니다. 가슴에서...불로장생의 묘약도...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그 소리가 아니잖아!!” “돈을 맡긴 이유는...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크억!!” “안전하긴 뭐가 안전하다는...가만. 뭐라고? 준 것이 아니라 맡긴 거라고? 야!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 보라고.” “이미 죽었어요, 가가.” “하필 중요한 순간에 죽어버리다니. 흠, 어쩔 수 없지. 청화루에 있다는 소옥이라는 기녀를 찾아가는 수밖에.” 영양가 없는 말들로 시간을 질질 끄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듣지 못한 비담이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사내를 지켜보다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섭혼미염공이 풀려버린 서희를 데리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청화루를 향해 어느 정도 달렸을 무렵. 서희가 갑자기 신영을 뚝 멈춰 세우더니 나즈막히 비담을 불렀다. “가가?” “응?” 반사적으로 신형을 멈춘 비담이 서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비담을 부른 서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였다. 비담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님을 직감하고 이내 자세를 바로하고 그녀 곁으로 성큼 다가갔다. 하지만 자신이 곁에 왔음에도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이는 모습이 역력하자 비담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가가, 선화 언니를 어찌 생각하세요?” “이소저? 갑자기 왜 그것을...” “그동안 매영언니가 옆에 있어 차마 여쭤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언제고 용기를 내어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언니에 대한 가가의 마음을요.” “흠, 무슨 얘기를 들은 것이오?” “가가께서 황궁에 가셨을 때...선화 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럼 모두 들었겠군요. 흐음, 변명하지 않겠소. 하지만 변함없는 진실, 그 하나만 믿어 주시오. 신은 나에게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뛸 수 있는 심장을...주셨을 뿐이라오.” “정말 다행이에요...그리고, 고마워요.” 서희는 비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비에 젖은 새처럼 바들바들 품안에서 떨고 있는 서희. 그리고 젖어드는 비담의 앞섶. 비담은 행여 날아갈세라 서희를 더욱 끌어안았다. ‘미안하오. 앞으로 다시는 그대의 고운 눈에 이슬이 맺히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소. 사랑하오...서희.’ 114화 제 12 장 화류선(花流扇)에 깃든 비밀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확인한 후, 비담과 서희는 곧바로 청화루로 향했다. 괜히 시간을 지체했다가 돈의 행방이 묘연해지면 일이 고약하게 꼬여버릴 수 있었기에 서둘러 온 것이다. 청화루에 도착한 비담은 바로 소옥이라는 기녀를 찾았고, 왕석기의 품에서 꺼낸 물건의 증서를 제시하자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뭐라고요? 벌써 보내셨다고요?” “예, 소협. 그 물건은 부탁하신대로 화산파에 계시는 신기검(神奇劍) 오욱 대협께 이미 전달하였습니다.” “언제입니까?” “오늘 오후에 전달했습니다. 아마도 닷새 뒤에 원하시는 대로 오대협께 당도할 것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물건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하여 그러는데 중간에 회수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자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건 저 역시 모릅니다. 점조직으로 구성된 연락책들에 의해 물건이 운송되는지라 한 번 제 손을 떠나면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저를 포함한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저희들이 그동안 이 바닥에서 살아남고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비책이지요.” “정녕 중간에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비담은 단호한 기녀의 표정에서 더 이상 그 무엇도 알아내거나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쉽지만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할 수 없지. 애석하지만 부흥상회의 일은 이쯤에서 손을 떼는 수밖에. 그저 부흥상회라는 밥줄 하나 제거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겠군.’ “이만 돌아갑시다. 아쉽지만 그 돈은 깨끗이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그나마 내일까지 처리할 수 있는 부흥상회의 재산들만 처분하고 빼돌려 사도련에 피해를 입히도록 합시다.” 비담이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고 막 걸음을 떼려던 순간. 뭔가 골똘히 고민하던 서희가 비담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가가?” “말해보시오.” “제 생각에는 그 돈을 회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소?” “제 섭혼미염공에 홀렸던 조석태는 분명 돈을 제 때에 상납하지 않으면 부흥상회가 상계에서 지워질 것이라 했어요. 실수를 한 하부조직에 엄한 문책이 아닌 존재의 소멸이라면 둘의 관계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어요?” “단순한 하부조직이 아니라는 소리군. 그렇다면 상회가 사도련에게 무언가 꼬투리를 잡혔거나 약점이 잡혀 그동안 고분고분 그들의 뜻에 따랐다는 말인데...” “맞아요. 그래야만 조석태 그자가 사도련의 눈을 피해 그만한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이 이해가 되죠. 분명 사도련으로부터 벗어날 방도를 마련하기위해 조심스럽게 자금을 모았을 거예요.” “그럼 더욱 내막을 파헤치자는 것이오?” “네, 가가. 당장 내일은 황금 만 냥만 준비하면 넘길 수 있잖아요? 그 돈은 흑막주님께 잠시 융통할 수 있을 거예요. 우선 급한 불은 그것으로 끄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상회가 돌아가도록 유지하면 될 거예요. 그럼 분명 조석태로 변한 매영언니에게 접근하는 자가 하나 둘 나타날 거예요. 시일이 걸리겠지만 사도련을 향해 조석태가 준비하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예상 외의 큰 타격을 련에 안겨줄 수도 있을 거예요.” “하기야 치밀한 그들의 감시망을 피해 황금 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모았다면 제법 날카로운 발톱을 준비하고 있었을 터. 그럼 비자금을 회수해 조석태의 계획을 도웁시다.” “네, 가가.” 비담은 흑막의 안가로 찾아가 이와 같은 정황을 흑막주 이성보에게 이야기하였고, 이성보는 흔쾌히 황금 만 냥이라는 거금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매영에게도 차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앞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사흘 후. 비담과 서희는 화산 인근의 객잔에 머물며 물건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시간을 아끼며 달려온 보람이 있어 다행히 소옥이 말한 날짜보다 이틀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의 시간은 온전히 오욱을 감시하는데 할애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하루의 여유가 더 있었기에 둘은 느긋하게 객잔에 앉아 차를 들며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었다. “막주님께 전서구가 날아왔다고요?” “네, 흑막의 정보원 하나가 아침에 가져왔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별일 아니에요. 그냥 오라버니께서 어제 흑막의 안가를 출발하셨다는 내용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