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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소설) 호색 -완 - 42편 (42/62)

2026-10-04 14:52:57 조회 4
무려 반 시진 동안 이어진 춤은 그렇게 모두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며 마무리가 되었다. 춤이 끝났음을 알리는 징소리와 함께 그동안 숨죽이며 지켜보았던 수많은 하객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다. 황제 역시 춤을 준비한 무희들을 향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말과 함께 묵직한 하사품을 내려주었다. 황제의 하사품을 받기 위해 대표로 황제 앞에 나선 비담은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신 비담, 삼가 황제폐하의 생신을 감축 드리옵나이다. 아울러 분에 넘치는 상품을 내려주셔서 소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아름다운 춤을 진상하기 위해 그동안의 노고가 눈에 선하구나. 짐이 이토록 즐겁게 웃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모쪼록 충심을 다해 준비한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비담이 정중한 자세로 하사품을 받은 그 순간. 비담의 귓전으로 황제의 모기의 날갯짓처럼 작은 웅얼거림이 날아들었다. “이제 본 공연을 시작하지. 짐은 이쯤에서 빠져줄 터이니 알아서 지휘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역시 약조를 지켜주십시오.” “후후,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지.” 홍무제는 밝게 웃으며 비담의 등을 두드려준 후 금의위의 호위를 받으며 내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사품을 전달하다가 느닷없이 내전으로 사라지는 황제의 모습에 수많은 하객들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고, 곳곳에 잠입해 초조함을 달래며 기다리던 무림인들 역시 ‘아차’하는 심정에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사전에 황제의 어명을 하달 받은 예부상서 조인문은 약속에 따라 혼란에 빠진 연회장을 서둘러 정리하였다.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에 하객들이 연루된다면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어 뒷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았기에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조인문의 지휘 아래 외국에서 방문한 사절단과 하객들은 하나 둘 연회장을 빠져나갔고, 비담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연회장 곳곳을 살피며 간자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였다. 잠시 후.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연회장엔 이제 대소신료들만 남아 휑한 바람마저 불었다. 이황자 주성은과 승상 후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기에 더더욱 고조되는 초조함과 긴장에 절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한 이황자 주성은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째서 아바마마께서는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내전으로 드신 것이며 사전에 조율이라도 한 듯 당황하는 기색 없이 하객들을 인솔하는 예부상서의 모습은 또 어찌 이해하란 말인가? 대관절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하는 게 순서지 않겠는가?” 예부상서 조인문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선 이황자를 향해 웃음을 날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조인문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연회장의 큰 문이 쿵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버렸다. “가, 감히 저자가...?” “휴우, 이제 정리할 시간이 되었군요. 나름 재미도 없는 연회를 즐기시느라 수고들 하셨습니다. 재미있는 본 공연은 지금부터 시작이니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뭐, 뭐라? 본 공연? 감히 인명부에 먹물도 마르지 않은 임시관리 주제에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망발을 늘어놓는 것이냐?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어서 저 애송이 녀석을 잡아들이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나를 잡으라고? 누가 잡혀 나갈지는 좀 더 두고 보기로 하고. 자 무대가 마련되었으니 각자 통성명해야 되지 않겠어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서로 인사 나누십시오. 참, 오붓한 분위기 연출을 위해 제가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딱!’ 비담은 손가락 두 개를 튕겨 신호를 보냈고,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철시(鐵矢)를 장착한 연노를 든 동창과 금의위의 무사들이 담과 전각의 지붕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잡아도 족히 수백을 헤아리는 무사들이 연회장의 사람들을 겨눈 채 무력시위를 하였다. 대소신료를 비롯해 아직 연회장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그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키며 눈만 이리저리 굴리느라 바빴다. “쯧쯧, 다 큰 어른들이라 부끄러워하시긴. 그리고 이만한 큰일을 작정하고 준비한 어른들이 그리 겁이 많아서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뭐 아무튼 시간 관계상 제가 직접 나서서 소개를 하지요. 우선 불철주야 황제의 위를 넘보기 위해 승상을 등에 업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림의 사특한 세력까지 끌어들인 우리 이황자 주성은.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주시죠.” “저, 저놈이...” 활을 겨눈 무사들 때문에 이만 부득부득 가는 이황자였다. 101화 비담은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이황자를 향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것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럼 다음으로 권력의 떡고물 좀 주워 먹겠다고 제 무덤인지도 모르고 기어 들어온 우리 정파 나부랭이들. 뭐 태자마마가 이미 빠져나갔으니 끈 떨어진 연이겠으나 그래도 소개를 안 하면 섭섭해 하겠죠. 어디 계십니까? 오정회에서 나온 검황 이하 그 나부랭이들...? 아 저기 계셨군요. 하도 주도면밀하게 변복을 하고 숨어계셔서 제가 미처 알아 뵙지 못했네요. 자 나서서 인사 한마디 하시죠?” “비 공자...자네가 설마...우릴 배신하겠단 뜻인가?” “후후, 배신이라뇨. 그리 말하면 듣는 배신자 섭섭합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용해 먹으려던 것은 그쪽이었으니까 주거니 받거니 이제 비긴 겁니다. 자, 이제 통성명도 끝났으니 거룩하신 황제폐하의 명을 받자와 정리를 할 것이니 마지막 유언들 남기십시오. 물론 그놈의 잘난 피 덕분에 이황자님은 열외니 한쪽으로 빠질 기회를 드리죠. 뭐 아랫것들이랑 운명을 같이 하네 어쩌네 하시면 저도 말릴 생각은 없으니 알아서 하셔도 무방하나 이왕이면 기회가 있을 때 빠지시는 게 신상에 이롭지 않을까 사료되옵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 평생을 지내셔야 되겠지만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옛말처럼 기회가 있을 때 잡으십시오. 정확히 셋을 세겠으니 결정하십시오. 그 뒤엔 눈먼 화살세례만 퍼부어질 것이니...” “후후후, 저런 화살 나부랭이로 우리를 어찌 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저런 화살 나부랭이론 감히 여러분들을 어찌 할 수 없죠. 하지만 무기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위력이 결정되는 법. 동창과 금의위에서 가리고 가려 뽑은 고수들이 아낌없이 내공까지 주입하여 날릴 것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참, 그리고 연노라는 걸작품이라 무서운 속도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퍼부어질 것이니 눈먼 화살들 알아서 피하십시오.” “동창과 금의위라...그럼 모두 알고 계셨단 말인데. 후후, 노망나고 이빨 빠진 뒷방 늙은이인줄 알았더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군.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뭐라 구시렁거리는지 잘 안 들리네요. 좀 크게 말씀하시던지 아님 그냥 좀 닫아주세요. 참, 그리고 도성을 향해 다가오던 군졸들은 바쁜 일이 있어 다시 국경지역으로 돌아갔으니 참고하시고요.”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승상, 어찌 된 일이오? 승상과 내가 비밀리에 준비한 사병들이 다시 돌아가다니...” 승상 후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와 사병들을 잠시 물리고, 거삿날을 뒤로 미루자 했던 것은 이황자 주성은이었다. 국경 쪽 병사들이 자신들의 뒤를 노린다는 첩보를 입수하였으니 그쪽부터 막자 하였던 게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이황자가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다. “다, 당연히 이황자님의 분부대로 사병을 뒤로 물리지 않았습니까? 국경 쪽의 움직임이 다급하다며 거사를 잠시 미루자는 말씀을 하셨던 것은 이황자님이십니다. 저희들이 극구 말렸으나 바득바득 우기시지 않았습니까?” “제, 제가 말입니까? 전 승상을 찾아간 일도 병사들을 뒤로 물리란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그럼 오늘 이리 당한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을 거사일로 잡지 않았던 것은 모두 이황자님의 분부에 따른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내 행세를 하였단 말인가...” “아닙니다. 저희들도 이만한 큰일을 준비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였사옵니다. 틀림없는 이황자님이셨습니다. 암호도 한 치 어긋남이 없었고, 행동이나 말투, 억양과 버릇까지 모두 틀림없는 이황자마마셨습니다.” “과인은 찾아간 일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거참 시끄럽네. 내가 시켜서 찾아간 거야. 왜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같은 편끼리 그리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싸우는지. 내가 미리 보낸 선물이야. 변장이라면 대륙 최고인 기인을 알고 있거든. 깜박 속아 넘어갔으니 그만들 좀 싸우라고. 그럼 셋을 세요. 하나! 둘!...” “잠깐. 그럼 련의 인물들이 모두 모인 것 역시...너의 짓이냐?” “당연하죠. 저기 승상아저씨의 표정을 보니 가관이네요. 참 이상했을 거예요. 거사를 미루잔 양반이 뜬금없이 전 무사들을 연회장에 집결시키라 하였으니. 조금만 생각하면 앞뒤도 맞지 않고 참 희한하고 이상한 일인데 전혀 의심 없이 명령을 수행하는 꼴이라니. 정말 권력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안 보이나 봐요. 이 무대를 내어준 것은 황제이나 직접 연출하고 마무리할 사람은 나니까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으면 시작하죠. 셋! 어라? 전 기회를 드렸는데 안 피하시네요. 역시 대가리라 의리가 태산을 넘나들 정도로 크시네요. 그럼 이제 작별의 시간이니 남은 할 말이나 석별의 인사는 저승 가는 길에 천천히 나누시도록.” “잠깐!” 손가락을 튕기려던 비담은 다급하게 들려온 외침에 잠시 일련의 동작들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리를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검황 남궁헌수였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남궁헌수의 얼굴은 오히려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왜요? 할 말이 있거든 저승 가시는 길에 오붓하게 나누시라니까...” “현아와 소미를 납치했다는 그 말...사실인가?” “물론 사실이죠. 납치한 당사자가 저기 있는 저놈들이 아니라 저라는 것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어떻게 죽고 싶으냐?” 남궁헌수의 입에서 한 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으스스한 말이 튀어나왔다. “후후, 아직 사태파악이 안 되시나 보네요. 납치한 당사자가 저라니까요? 증손녀와 제갈현아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으시다면 철저히 저를 보호하셔야 될 거예요. 제가 만일 이곳에서 비명횡사라도 당하는 날엔...곱디고운 두 처자와는 영영 이별하셔야 될 테니.” 비담의 말에 남궁헌수는 침음성을 삼켰다. 저 악적의 손에 증손녀와 제갈현아가 붙잡혀 있다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터졌지만 죽이는 것은 둘째 치고 곱게 죽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는 지금의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럼 대충 상황파악은 한 것 같으니 시작하죠.” ‘따악!’ ‘쐐애액, 슝, 슈웅. 퍼버벅. 퍽퍽. 피융!’ 비담이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화살비가 빗발치듯 쏟아져 연회장을 집어삼켰다. 무공을 익힌 강호의 고수들은 호신강기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자신의 무기를 꺼내 화살들을 쳐내느라 정신없었고, 보법을 밟아 피하느라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이미 이번 역모와 관련이 없는 관리들과 하객들은 연회장을 빠져나갔기에 화살을 쏘는 무사들은 손속에 일말의 사정도 두지 않은 채 거침없이 퍼부었다. “으악!” “커억!” 여기저기 무공을 모르는 신하들부터 희생양이 되어 쓰러졌고, 무정한 화살은 관통한 것으로도 부족해 땅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련의 무사들과 오정회 측 무사들은 급급히 신형을 뽑아 올렸으나 화살을 쏘던 무사들 뒤로 칼과 창을 든 무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상대하는 바람에 탈출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비담은 화살비를 요리조리 피하기도 하고, 부채로 쳐내기도 하면서 련과 오정회의 무사들을 거침없이 유린했다. 화살을 막기에도 급급했던 무사들은 선강을 머금고 날아오는 부채에 속절없이 목숨을 내주었고, 가끔 눈먼 화살이 비담을 향해 날아들었으나 검황 남궁헌수에 의해 모두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비담을 따라다니는 남궁헌수의 속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으나 증손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남궁헌수를 향해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썩은 미소를 날려준 비담은 곧바로 이황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지랄 맞은 역모의 주동자이긴 하나 저자가 이곳에서 죽으면 그걸 핑계로 나를 옭아맬 구렁이 영감이다. 그 시커먼 속내를 내가 모를 줄 알고? 어떻게든 이황자 저놈을 살려두어야 돼. 나중에 삶아 먹든 죽이든 황제가 알아서 하도록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방패역할까지 해주려면 무조건 살려야 해.’ 102화 비담은 무공이 약한 이황자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며 따라다녔다. 눈앞에 거치적거리는 놈들은 부채를 이용해 모두 베어버렸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비담이 바득바득 쫓아오는 것으로 오해한 이황자는 사력을 다해 피했고, 그로인해 이황자 측이 갖춘 진용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물론 그로인해 더욱 많은 희생이 뒤따르고 말았으니 겁 많고 생각 없는 우두머리가 무리에 끼치는 악영향을 몸소 여실히 보여주고 실천한 셈이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눈으로 가늠할 수 있는 수가 남게 되자 조준사격을 하는 무사들로 인해 비담과 이황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한 것을 넘어 정말 ‘이곳에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몸과 마음을 좀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옥 같았던 일식경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연회장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이는 오로지 비담과 이황자 주성은, 그리고 검황 남궁헌수 뿐이었다. 이황자 측에 붙었던 관리를 비롯해 련에서 온 무사들, 더불어 남궁헌수가 데려온 오정회의 무사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차디찬 바닥에 누워 있었다. 물론 금의위와 동창의 무사들 역시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한 무사들로 인해 피해를 입고, 희생자가 나왔으나 그 수와 희생은 미비한 편이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내공과 심력을 소모한 비담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검황 남궁헌수를 바라보았다. “헉헉, 영감 덕분에 목숨은 건졌네요. 여차하면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로 아찔했는데 다행이네요.” “흐음, 네 놈을 예전 세가에서 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구나. 네 놈의 생명, 잠시 연장되었을 뿐이니 희희낙락 좋아하기엔 이르지.” “휴우, 이제야 한숨 돌렸네요. 그나저나 저에게 쌓인 원한이 많은가 본데 저도 살려니 어쩔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잠시 연장된 이 생명 좋은 일 하며 쓸 테니 너무 심려치는 마시고요. 그럼! 두 번째 막을 올려볼까요?” 비담은 자신의 손에 멍하게 붙들려 있던 이황자 주성은의 목에 선강을 잔뜩 머금은 부채를 가져다 대었다. 장내를 정리하려던 금의위와 동창의 무사들은 뜬금없는 비담의 행태에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뭘 그리 놀란 토끼눈을 뜨고 그러세요? 에이, 너무 순진한 얼굴로 당했다는 그런 표정 지으면 제가 재미없잖아요. 보아하니 우리 거룩하신 황제폐하께서 저의 목까지 가져오라 분부하신 모양인데 그분의 뜻대로 선선히 목을 내어드릴 순 없죠. 여기 계신 이황자의 목숨이 아깝다면 저만치 물러서는 게 좋을 걸요?” 선강을 머금어 푸른빛이 감도는 비담의 화류선이 영활한 뱀의 혀처럼 이황자의 목 언저리에서 날름거리며 맴돌았다. 순간 방심한 금의위와 동창의 무사들 얼굴이 변의 빛깔로 물들었다. 비담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은 후 검황 남궁헌수를 돌아보았다. “하하하, 이런 곳인 줄도 모르게 접수하려 하시다니...정말 꿈도 야무지게 꾸셨군요. 이리 큰 사단이 벌어졌는데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고 있고, 심지어 목격까지 한 우리들을 순순히 살려두실 양반이 아니지요.” “그, 그럼?” “살인멸구. 황제가 가장 즐겨 쓰는 수법이라 하더군요. 괜히 철혈 어쩌고 그러겠어요? 아, 무림에선 늙은 생강이 맵네, 어쩌네 그러면서 늙은 황제가 더 무서운 건 왜들 그리 모르는지 한심한 작자들 같으니라고. 아무튼 태자 운운하며 저를 안심시켰던 것부터 왈가닥 공주가 끈질기게 버티는 것을 보고 진즉에 눈치 챘죠. 뭐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각설하고, 아무튼 여기서 살아나가야 증손녀 얼굴이라도 볼 거 아닙니까? 힘닿는 데까지 저를 한 번 더 도와주시는 게 어떨는지...” “내가 어찌하면 되느냐?” “그래도 머리회전이 빠르시네요. 간단합니다.” 비담은 석상처럼 굳어있는 남궁헌수에게 전음을 날렸다. ‘황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사들을 잔뜩 깔아 두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일이 새어나가면 곤란하니까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전 이황자를 인질로 잡고 있어서 운신의 폭이 좁습니다. 물론 이 혹을 달고 다닐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고요. 그래서 말인데 이황자를 넘겨드릴 테니 훌륭한 방패를 얻었다 생각하시고, 당신이 시간을 좀 벌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간단하게 말해 뭐가 흔들릴 정도로 이 녀석과 함께 열심히 달리시면 됩니다. 제가 도주할 서쪽의 반대편인 동쪽을 향해서 말이지요. 도주에 성공하려면 중간에 그 녀석을 던지는 게 좋을 것입니다. 뭐 이건 그냥 제 생각이니 참고만 하시고. 참, 더불어 정 위급하면 숨겨두었던 그 화탄 꺼내서 사용하면 되잖아요. 몇 개 숨겨놓은 거 다 아니까 알아서 살아남자고요.’ ‘지금 나보고 미끼가 되라는 것이냐?’ ‘역시 머리가 비상하시네요. 깔끔한 정리 감사드립니다. 증손녀 얼굴이 아른거리지 않으세요?’ ‘이, 이놈...감히...’ ‘후후, 제가 지금 선택이 아닌 강요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전 그리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니까요. 참,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인데 만에 하나 목숨을 부지하시거든 남궁소미가 겁탈 당했던 낙양의 백마사 그 숲으로 일주일 후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 정각에 오십시오. 물론 혹이 딸려 있으면 두 여인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으니 혼자 오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신호와 함께 달리면 됩니다. 하나! 둘! 셋! 지금.’ 비담은 섬응탄 하나를 꺼내어 무사들을 향해 집어 던졌고, 곧바로 이황자 주성은의 머리채를 붙잡아 남궁헌수에게 던짐과 동시에 서쪽으로 몸을 날렸다. 갑자기 머리채가 붙들려 훨훨 날아간 주성은의 구슬픈 비명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끄~악!!” ‘퍼~엉!!!’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연회장은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비담에게서 이황자를 넘겨받은 남궁헌수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내공을 용천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비담이 몸을 날린 서쪽의 반대편인 동쪽을 향해 신형을 쭉 뽑아 올렸다. 그런 다음 얄미운 비담의 말처럼 뭐가 흔들릴 정도로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담이 보이면 넘고, 전각이 보이면 지붕을 타고, 인공연못은 수상비의 경공까지 사용하여 정말 죽기 살기로 달렸다. 섬응탄의 여파로 우왕좌왕하던 무사들은 둘로 나누어 추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황자와 함께 도주한 남궁헌수의 뒤로 더 많은 추격자들이 붙었음은 당연지사였다. 비담 역시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경공을 펼쳐 구인철이 안배해 둔 장소로 달렸다. 악몽 같았던 두 달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지막 황궁의 담을 넘는 순간 침을 카악 뱉는 비담이었다. ‘썩을 황제, 망할 황궁. 내 다시 이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멍멍이 아들이다.’ 카악~퉷!! 103화 제 11 장 부흥상회(富興商會) 불야성을 이룬 도성의 야경이 아스라이 보이는 언덕 위. 숨을 몰아쉬던 비담은 조금 개운해진 얼굴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휴우, 대충 따돌린 것 같은데. 그나저나 황제한테 뭘 받아먹으면 저리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거지? 아주 죽자 사자 쫓아오는 저것들 떼어놓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아무리 늙은이에게 받아먹은 게 있고, 무서워도 그렇지 너무 지독하게 훈련시켰어. 때로는 쉬엄쉬엄 일해야 부러지지 않는 법이거늘. 가만, 여기 어디쯤에다 숨겨두기로 하였는데...” 툴툴거림을 멈춘 비담은 이내 보물을 찾는 어린아이마냥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비담의 눈이 반짝 빛나며 의문의 상자 하나를 발견하였다. “찾았다. 형님 덕분에 질긴 목숨 또 이어가는구나.” 비담은 교묘하게 풀을 엮어 표시해둔 장소의 바위 틈 사이에서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이내 상자 안의 내용물을 꺼내 살펴보았다.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육식동물의 발톱처럼 생긴 쇠갈퀴 한 쌍이었다. 비담은 물건을 꺼내 무게와 중심을 가늠해본 후 망설임 없이 팔에 장착하였다. 그런 다음 바로 근처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후후, 나무를 숨기려거든 숲에 숨기고, 사람을 숨기려거든 사람이 많은 저자거리에 숨기라 하였지. 허나 반대의 경우도 사람 돌아버리게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