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9편 (9/62)
특히 언니의 슬픔은 더했다. 동생이 계속 위로하였으나 자신의 미모를 탐낸 녹림왕의 욕심으로 이번 일이 발생했다는 것에 대해 심한 자책을 하고 있었다. 묵묵히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비담은 안타까운 마음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딸꾹산적(비담이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함)’을 앞세우고 산채 견학에 나섰다. 친절한 딸꾹산적의 도움으로 임성필의 비밀창고까지 거덜 낸 비담이 세 여성을 대동한 채 다시 창고로 돌아온 건 늦은 밤이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곳에서 쉬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산채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불편하고 싫겠지만 하룻밤만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 세 여인은 임성필에게 강제로 끌려와 혼인을 맺은 둘째, 셋째, 넷째부인이라고 하는군요. 내일 함께 마을로 갈 것입니다. 참, 그리고 내일은 공연을 마친다는 의미에서 징을 울릴 것이니 모쪼록 힘을 비축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징을 울린다는 말에 네 여인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고, 오직 한 여인만 스산한 눈빛으로 손가락과 손목을 풀었다. 아침이 밝았다. 어제 서산으로 넘어갔던 해가 오늘 다시 동쪽에서 떠오른 것일 뿐 전혀 새로운 변화는 없었건만, 산채에서 하루를 보낸 여인들에겐 오늘의 아침이 무척이나 생소하고 밝아 보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산채에서 일꾼까지 자체 조달한 비담이 그동안 산적들이 모은 재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여인들과 함께 임성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경공을 사용하여 어제는 미친 듯이 달려왔지만 오늘은 사람 수도 불어나고 그럴 필요성도 전혀 없었기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여인들은 임성필이라는 훌륭한 재료를 바탕으로 거의 난도질을 하고 있었고, 산적들은 그저 비담의 눈치만 살피며 전전긍긍 하였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질 무렵. 어제 비담이 한 시진(2시간)만에 주파했던 거리를 일행은 한나절이 걸려 도착했다. 임성필을 비롯한 산적들은 어제의 모습 그대로 나무에 묶여 축 늘어져 있었다. 방울이 터진 놈들은 고통으로 인해 축 늘어져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점혈을 당해 축 늘어져 있었다. 이제 길었던 공연의 막을 내리기 위해 비담은 진무문의 소저를 불렀고, 다른 일행들에게도 주목할 것을 요청했다. “자, 이쪽으로 와서 자세를 잡으십시오.” 비담의 요청에 진무문의 소저는 땅에 떨어진 몽둥이를 잡고 휘두를 자세를 취해 보였다. “둘째, 셋째, 넷째 부인과 소저의 언니 분께서는 행동을 유심히 보셨다가 그대로 따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산적이 있으면 그대로 해도 무방하니 마음껏 골라서 그 동안의 억울함과 분노를 날려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하세요.” 비담의 시작신호와 함께 여인의 손에 들린 몽둥이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임성필의 낭심을 향해 파고들었다. “으~~~~악!!!” 지켜보던 여인들은 소저의 시범에 눈을 반짝 빛내며 그대로 몽둥이를 이어 받아 똑같이 휘둘렀다. 그동안의 울분을 토해내듯 거칠고 호쾌한 몽둥이질이 이어졌다. 전투적인 자세로 사내 여섯을 골로 보내버린 여인들이 후련한 듯 손을 탁탁 털었다. 비담은 선택받은 여섯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과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은 ‘딸꾹산적’ 만 데리고 그대로 마을로 내려가 버렸다. 뒷날의 이야기지만 구슬픈 비명이 밤새 온 산을 울린 그날 이후 사람들은 가급적 그 산을 피해 멀리 돌아갔다고 한다. 마을로 내려온 비담은 녹림에서 빼앗은 재물을 처분해 조그마한 장원을 하나 마련하고 ‘진가장’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처음 만났던 소저를 비롯해 여인들, 그리고 극구 남아서 여인들을 보살피며 남은 생을 헌신하겠다는 산적들을 모두 함께 살도록 해주었다. 비담이 진가장을 떠나는 날. 언니는 동생과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고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준 비담을 배웅하며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지난 밤, 간절한 자신의 마음을 비추었으나, 자신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았으며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팔자라는 정중한 거절의 답을 받았던 것이다. 베풀어준 은혜가 너무도 커 끝내 여인 역시 비담을 잡을 수가 없었다. 비담은 그렇게 모두의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장안을 향해 길을 떠났다. 20화 제 4 장 침묵의 꽃, 서희(瑞喜) 장안에 도착한 비담은 우선 사부의 묘부터 찾아갔다. 봉분도 없는 묘는 수북하게 자란 잡초들로 뒤덮여 있었다. 비담은 손수 잡초들을 제거하며 다시 한 번 사부의 염원을 되새기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그렇게 묘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비담은 흑막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장안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객잔에 짐을 풀었다. 비담은 객잔의 2층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모처럼 한가로이 차를 즐겼다. 그런데 비담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상인 세 명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꺼낸 사람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비담 역시 호기심에 내공을 운용하여 귀를 쫑긋 세웠다. “자네, 그 얘기 들었는가?” “무슨 얘기 말인가?” “아, 중원 5대 거부에 들어간다는 조대인 있지 않은가?” “장안의 모든 상권을 쥐고 흔든다는 부흥상회의 조석태 어른을 말하는가?” “아, 그래. 그리고 그 어른이 어디 장안의 상권만 쥐고 흔드는가? 요즘은 섬서를 비롯해 사천성과 감숙성의 상권까지도 장악했다고 하더군. 거기서 일하는 상인중에 나랑 친분이 두터운 녀석이 있는데 재물이 어찌나 많은지 자신도 정확히 모르겠다 하더군. 뭐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자네들도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이번에 그 조대인이 계집을 하나 첩으로 들였잖은가?” “그거야 우리도 들어서 알고 있지. 어찌나 아름다운지 서시나 양귀비는 근처에 왔다가 부끄러워 도망간다는 소문이 돌아 그로인해 장안이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그 첩 이야기는 왜 꺼내는가?” 주위를 한 번 더 두리번거린 상인은 더욱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자네들만 알고 절대 비밀로 해야 하나. 글쎄 그 상인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 조대인이 새로 들인 첩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잔다고 하더군.” “하하, 당연한 소리를 뭐 하러 입 아프게 떠드나? 새로 들인 첩이 그토록 아름다운데 잠이 오겠는가?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허물었다, 쌓았다, 허물었다’를 반복하면 잘 시간이 부족할 테지.” “그게 아니니까 문제란 말일세. 글쎄 새로 들인 첩의 미모가 빛이 날 정도로 출중하면 뭐하나? 세상에 둘도 없는 목석이라 안을 수가 없는데.” “엥?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글쎄 목석도 그런 목석이 없다고 그래. 실어증이 걸렸는지 하루 종일 방긋방긋 웃기만 할뿐 한마디도 안하고, 밤에는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도무지 꼼짝을 안한다고 하더라고. 조대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방법이 없어 손을 놓았데요. 아, 자네들도 생각을 해보게. 꽃이 아무리 예쁘면 뭐한가? 꽃잎을 꽉 닫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는데 자네들 같으면 속에서 열불이 나지 않겠는가? 품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니 조대인 심정도 말이 아닐 거야.” “흐흐, 정말 조대인의 심정이 말이 아니겠어. 거금을 들여 기껏 첩으로 앉혀놓았더니 품지도 못하고 관상용으로 바라만 봐야하니. 그나저나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강지처가 최고인거야. 우리 마누라는 내가 들어가면 양다리를 활짝 벌리고 대환영인데 말이야. 뭐 외모는 많이 딸려도 그렇게 사는 게 차라리 속편하고 좋지. 안 그런가?” “휴우, 난 그냥 바라만 봐도 좋으니 한번 구경이나 했으면 소원이 없겠구먼. 매일 펑퍼짐한 마누라 궁둥이만 보니 영 의욕이 없단 말이야.” “어차피 그림이 떡이야. 그런데 그러고 끝인가? 다른 이야기는 없어?”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빨라 좋단 말이야. 아,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가 그냥 맥 놓고 가만히 있겠는가? 당연히 포상금을 걸었지. 어떤 수단과 방법도 상관없으니 그 첩을 안게 해주는 사람에게 막대한 돈을 준다고 하였다네. 한마디로 누가 먼저 개시를 해달라는 소리지. 조대인은 잘 닦아놓은 길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이고.” 꿀꺽 갑자기 침을 삼킨 두 상인이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이 나왔는가?” “성공한 사람이 나왔으면 내가 이야기를 꺼냈겠는가? 장안에 내로라하는 의원부터 온갖 잡놈들이 시도를 한 모양이야.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엄청난 미인도 품고 거액의 포상금도 받고.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쓸쓸히 돌아갔데.” “저, 정말인가?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어?” “괜히 목석 중에 목석이라 했겠는가? 별 지랄을 다해도 구멍이 절대 안 열린데. 뭐가 열려야 밀어 넣든 끝장을 보든 할 게 아닌가.” “근데 조대인도 정말 대단한 양반이네. 아무리 첩이랑 자고 싶어도 그렇지 그렇다고 숫처녀인 첩을 그렇게 함부로 돌리나?” “조대인도 이제 거의 포기한 모양이야. 아 그리고 얼마나 복장이 터졌으면 그런 방법까지 썼겠는가? 굳게 닫힌 문이라 뭐 볼 것도 별로 없다고 그러던데 나는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가네.” “그나저나 포상금이 얼마라 그러던가?” “글쎄 얼핏 듣기로는 황금 1000냥이라 들은 것 같네만.” 푸웁, 푸악. 상금을 들은 상인 둘이 목을 축이려 넘기던 찻물을 시원하게 뿜고 말았다. 그리고 사레에 걸린 듯 기침을 쏟아냈다. “에이, 이 사람들이 더럽게...” “콜록, 콜록. 미, 미안하네. 바, 방금 황금 1000냥이라 그랬는가? 자네가 잘못 들은 건 아니고?” “쉬잇! 목소리 좀 낮추게. 그리고 아직 귀가 멀 정도로 늙지는 않았다고. 얼핏 듣기는 했지만 분명 황금 1000냥이라 그랬네. 왜? 한번 도전해 보게?” “됐네. 미인도 탐이 나고, 돈도 욕심이 나지만 예쁜 꽃일수록 큰 가시를 숨기고 있는 법.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네.” “하하,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가끔 보여주는 자네의 이런 모습이 무척 존경스럽단 말이야. 잘 생각했네. 안 그래도 도전을 하겠다고 하면 내가 두 팔 걷어붙이고 말릴 생각이었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도전했던 사람들이 모두 폐인이 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어서 그래.” “저, 정말인가? 아니 어쩌다 폐인이 된 게야? 혹시 무슨 요사스런 술법에라도...” “후후, 그게 아니라 사지육신은 멀쩡한데 꼭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정신적인 폐인이 되었데. 그 첩의 얼굴을 본 후론 다른 여자는 여자로도 안 보여서 도저히 품을 수가 없다는구먼. 글쎄 아무리 지랄 발광을 해도 물건이 서지를 않는데요. 그러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기껏 미인 한 번 쳐다보고 안아본 죄로 평생 그 짓을 할 수 없다니. 그 소문이 퍼진 후로 요즘엔 도전하는 사람도 거의 사라진 모양이야. 그러니 조대인도 이제 포기를 한 모양일세.” 이야기를 듣던 상인 둘은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공포에 젖었다. 한창 계집을 품을 나이에 더 이상 물건이 서지 않는다? 생각만 해도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어쩐지 그만한 거금이면 진작 소문이 날 법도 한데 너무 잠잠하더라니. 다 그런 이유가 숨어 있었구먼.” “아무튼 행여 도전할 생각이라면 진즉 깨끗하게 포기하고 접게. 이건 10년 우정을 걸고 하는 충고니까 단단히 새겨들어.” “알았네. 그건 그렇고 저번에...” 분위기를 주도하던 상인은 조대인의 이야기가 끝이 났는지 화제를 돌렸고, 비담 역시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호오! 천하에 그런 여인이 있단 말이지? 목석 중에서도 상 목석이라. 한번 도전해볼 가치가 있겠어. 그리고 중원에서 꽤 명성이 자자한 거부라면 정보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생각하고 관리를 할 터. 분명 흑막이란 단체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이럴게 아니라 부흥상회인지 뭔지를 한번 방문해 봐야겠어.’ 비담은 남은 차를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점소이에게 작은 은덩이 하나 쥐어주고 부흥상회의 위치를 알아낸 후, 휘적휘적 상회를 향해 걸어갔다. 21화 대륙 상권의 5분의 1을 쥐고 흔드는 부흥상회(富興商會). 막대한 부를 자랑하듯 건물 역시 으리으리하게 컸다. 비담은 태어나 이렇게 큰 규모의 장원은 처음 보았기에 그만 현판을 바라보며 입을 떠억 벌리고 말았다. 단순히 돈이 많을 거라고 짐작은 했으나 이건 뭐 한 쪽 담장의 길이만 해도 족히 100장(약 300m)은 되어 보였다. 부흥상회의 규모에 정신을 못 차리고 쳐다보던 비담에게 한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뉘시오?” “예?” “아 누군데 여기서 넋을 놓고 있냔 말이오?” “그러는 댁은 뉘시오?” “나는 부흥상회에서 일하는 상인이오만. 아까부터 쭈욱 지켜보았는데 여기서 뭐하는 게요?” “아! 여기서 일하는 분이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비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비담이 갑자기 정중히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네자 상인 역시 무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정쩡하게 포권을 취하고 말았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 “하하, 한 가지 청이 있어 상회를 방문하였습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소문을 듣자하니 이곳에 말을 하지 못하는 꽃이 한 송이 있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 꽃을 피우는 자에게 막대한 상금도 준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비담의 이야기를 들은 상인이 비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불쌍한 눈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 보아하니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인생 망칠일 있소? 어디서 풍문을 듣고 한 몫 단단히 잡고 싶은 마음에 찾아온 모양인데 내 당신이 동생 같아 하는 말이니 고깝게 듣지 말고 새겨들으시오. 원래 먹음직스러운 떡이 크게 체하는 법이라오. 뭐 굳이 도전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으나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니 애 저녁에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시오. 인생을 그리 망치고 싶으면 차라리 도박을 하란 말이오. 이런 데에 기웃거리지 말고.” “하하하, 충고의 말씀 감사히 받겠습니다. 뭐 모든 책임은 제가 질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조대인께 저를 안내해 주십시오.” “허허, 그리 알아듣게 설명을 했건만. 좋소, 나중일은 알아서 감당하시오. 젊은 나이에 물건이 안서도 나는 책임 못 지오.” “아무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저으며 결국 상인이 비담을 안내하였다. 상부의 지침 상 첩과 관련된 일은 무조건 회주인 조대인께 직통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정문을 지나 회주가 있다는 집무실로 안내를 받으며 비담의 눈은 더욱 커졌다. “뭐, 뭡니까? 장원 안에 숲이랑 인공호수까지 있습니까?” “후후, 많이 놀랐을 거요. 이만한 장원을 태어나 처음 구경했을 테니. 요즘 들어 그 세를 더욱 확장하고 있으니 조만간 장원의 규모가 더욱 커질 것이오. 어쩌면 대륙 제일의 상회로 불리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아니 꼭 그렇게 될 것이오.” 상인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런 큰 상회에 상인으로서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장원의 내부를 구경하며 한참을 걸었어도 아직 집무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비담이 슬쩍 물었다. “아, 아직도 멀었습니까? 한참을 걸어 온 것 같은데...” “다 왔으니 그리 조바심내지 마시오. 모두들 왜 그런지 모르겠소. 눈앞의 돈에만 환장하여 멀리 내다볼 줄을 모르니. 쯧쯧.” 비담이 들으라는 듯 마지막으로 툴툴거리는 상인이었다. “자, 여기가 어르신의 집무실이오. 안에 기별을 넣으면 어르신께서 금방 나오실 것이니 여기 앉아 차라도 마시며 기다리시오.” 으리으리한 내부의 정경에 비담은 기함을 하였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진귀한 도자기며 그림으로 아예 도배가 된 집무실이었다. 그리고 기둥 사이사이로 얇은 금박을 입혀 햇볕에 반사되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아니 고급스러움을 넘어 사치의 극을 보여주는 듯 했다. 비담의 반응을 익히 짐작한 듯 상인이 차를 준비해 달라는 주문과 함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비담은 도대체 돈이 얼마가 있어야 이렇게 살 수 있는지를 상상하며 할 말을 잃었다. 돈에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조대인이란 상인에겐 정말 통용되는 말일 것 같았다. 그렇게 비담이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비쩍 마른 중년인이 헐레벌떡 집무실로 들어왔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진 청포장삼을 입은 중년인은 들어오자마자 비담을 찾았다. “호, 혹시 내 첩과 관련된 일로 방문하셨다는 분이...?” “예, 접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담이라고 합니다. 부흥상회의 조석태 어른이신지?” “그렇습니다. 제가 조석태입니다. 어디까지 알고 오신 겁니까?” “거리의 풍문이 비교적 소상하여 알만큼은 다 알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어떤 불상사가 생겨도 제가 알아서 감당하겠습니다.” “휴우,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찾아오는 사람이 뜸해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이리 귀인이 방문해주시니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게 되었군요. 뭐 소상히 들으셨다니 더 이상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오.” 마음이 급했던 조석태는 비담을 바로 자신의 첩이 있는 후원으로 안내하였다. 후원 역시 인공연못에 대리석 정원, 각종 희귀한 꽃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뽀송뽀송한 전각 앞에 당도한 조석태가 문 앞에 서있는 시녀에게 첩의 근황을 물었다. “아가씨는 어찌 하고 있느냐?” “별다른 차도는 없사옵니다. 여전히 하루 종일 그저 웃으시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허허, 용하다는 의원에게 다 보여도 병명조차 알 수가 없으니 이리 답답한 노릇이 어디 있단 말이냐. 알았으니 아가씨를 모시는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계속 신경을 쓰거라. 귀인, 이쪽으로 드시지요.” 무슨 중한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조석태와 시녀의 표정이 돌덩이라도 얹은 듯 무거워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상에 앉아 웃음을 짓고 있는 미녀가 보였다. 비담이 보기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였는데, 스스로 자체발광이라도 하는지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한 떨기 붉은 장미꽃처럼 고결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의 분위기가 줄기줄기 발산되고 있었는데 몇 개의 단어로 표현하기엔 전체적인 농도나 색이 너무나 요염하고 짙었다. 그린 듯 초승달 모양으로 아름답게 휘어진 눈썹하며 그 아래 자리 잡은 맑고 그윽한 눈빛, 오똑한 콧날에 앵두 같은 입술까지. 뽀얀 피부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미인도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생생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살아있는 진짜 초절정 미녀였다. 거기에 방글방글 미소까지 짓고 있으니, 아마 열두 마차 분량의 사내들이 와도 그들의 애간장은 순식간에 녹아 내릴 것이다. 그리고 몸매 또한 마치 혼을 불사르는 장인의 손길이라도 닿은 듯 숨이 멎을 정도로 완벽하고 환상적이었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확실하게 나온 정직하고 착한 몸매로 흠을 잡을래야 잡을 곳이 전혀 없는 무결점 그 자체였다. 소문은 으레 과장되게 마련인데 정말 사람들의 말처럼 서시나 양귀비가 와도 따귀 석대는 기본으로 얻어맞고 돌아갈 미모였다. 조석태는 잠시 무단으로 자리를 비운 자신의 영혼을 다시 불러들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담에게도 조석태의 안타까운 심정이 그대로 전달될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한숨이었다. 같은 남자였기에 조석태의 절절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이름은 서희(瑞喜)라고 합니다. 이곳에 온지 벌써 한 달이 지났건만 항상 저렇게 웃고만 있답니다. 부디 귀인의 노력으로 닫혀 있는 서희의 마음을 열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닫힌 마음이 아니라 몸이겠지.’ “알겠습니다. 대인의 시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됩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볼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아무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밀린 업무가 많아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조석태는 자신의 영혼이 또 무단이탈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부탁의 말만 남기고 서둘러 집무실로 돌아가 버렸다. 비담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웃음만 짓고 있는 서희 옆으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그리곤 마주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하하, 어여쁜 아가씨? 이름이 서희라고 했던 가요? 뭐가 그리 좋아 하루 종일 웃는지요? 제게도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헤헤, 헤.” “하하하, 정말 아가씨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을 모두 잊을 수 있겠네요. 답답하게 이리 방안에만 있지 말고, 우리 연못가라도 산책합시다. 허락을 하신다면 방긋 웃어보세요.” “헤, 헤헤.” “승낙을 하셨습니다. 자, 저와 함께 나가시지요.” 비담은 해맑게 웃는 서희를 데리고 후원에 조성된 연못을 거닐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답 없이 계속 웃음만 짓는 서희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도 해주며 일방통행의 말동무도 해주었다. 22화 한참을 그렇게 서희와의 산책에 빠져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던 비담이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하늘가로 붉은 노을이 번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