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40편 (40/62)
미리 알았다면 공주마마께 그런 결례를 저지르는 만행 따위는 벌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성심을 다해 모셨을 것인데...” “그것을 염려한 희령이가 사전에 말린 것이지. 아바마마께 진정한 선물을 드리려면 똑같이 구슬땀을 흘리고 싶다 하더군. 특별대우를 받으며 춤을 배우기는 싫었던 게야. 그래야만 가치가 있는 법이라며 밝게 웃는 동생의 모습이라니...어떤가 속이 꽉 차지 않았는가?” ‘속이 꽉 차긴 하였어도 그것 때문에 제가 고달프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변신괴물로도 부족해 잠입공주라니...에효, 이놈의 팔자. 어째 편하게 하루하루가 잘 흘러간다 싶더니만.’ “곧 오늘이라도 당장 죽을 사람처럼 그리 울상을 짓지는 말게.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얼굴이 생명이지 않는가? 그러다 주름 생기네. 아직 한 달이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으니 용기를 가지게. 그리고 혹시 아는가? 눈앞에 자신의 생명을 구원해줄 줄이 떡하니 나타날지.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생명력과 힘을 얻는 법이라네.” “알겠습니다, 태자마마. 소신이 옹졸하여 한 치 앞만 내다보았군요. 소신 태자마마의 위로와 당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암, 그렇게 나와야 훌륭한 신하라 할 수 있지. 곧 죽어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설령 윗분들께 대드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히 자시의 소신대로 밀고 나가는 용기, 그런 기백이 있어야만 사내라 할 수 있지. 그래서 말인데 나 역시 한 번 제대로 물 먹여줄 용의가 있는가? 자네가 약조만 지킨다면 자네를 구원해줄 한줄기 빛이 되어줄 수도 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소신 알아듣지를 못하겠습니다. 지금 공주마마를 저 지경으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태자마마에게 물을 먹이다니요? 소신의 목은 열 개가 아니라 단지 하나일 뿐입니다. 소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몰라도 들어드릴 수 없사옵니다.” “그래? 이거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는가? 아무래도 동창의 제독을 제대로 굴리고 촌구석에 쳐 박든지 해야 되겠구먼. 어디서 그따위 정보들이나 물어오고 말이야. 이번 기회에 아바마마께서 내게 품으신 어설픈 기대를 무참히 꺾어 근엄하신 용안이 잔뜩 일그러지게 만들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였는데. 할 수 없지. 피 튀기는 궁의 한복판에서 집안싸움이나 일삼으며 형제들 골로 보내고 피로 얼룩진 용상에 떡하니 앉아 평생을 자네 하나 괴롭히는 낙으로 사는 수밖에.” “무슨 말씀을 그리 살벌하게 하시는지요? 누가 들으면 제가 공주님을 괴롭힌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로 용상에 앉겠다는 말씀으로 들리옵니다.” “자네가 이곳에 들어온 목적 제독에게 들어 모두 알고 있다네. 그 사람이 융통성이 없기는 하여도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거든. 형제들 아귀다툼 하는 꼬락서니도 보기 싫고, 손에다 철부지 동생들의 뜨거운 피 묻히기도 싫어서 그동안은 쉬쉬하며 참았네만 쉬이 고집을 꺾을 양반이 아니시거든. 뭐 이만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선 가면을 몇 개씩이나 구비하며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너무 고집불통이시지 뭔가. 내 그리 황제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 읍소를 하였건만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나는 그분처럼 살 자신도 없고, 그리 살기도 싫은 사람이네. 그놈의 정이 뭔지 동생들 때문에 뛰쳐나가지 못했을 뿐 지금이라도 당장 이 답답한 궁을 벗어나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일세.” 순간 비담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쩔쩔매며 태자 주은명의 비위나 맞추던 하급관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비담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태자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정녕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하십니까? 누구나 꿈에서라도 바라마지 않는 자리이나 하늘의 아들이 아니면 허락되지 않는 자리. 그 숭고한 자리를 이리 걷어차고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냐 묻는 것입니다.” “후후, 이제야 자네의 본 모습을 보이는구먼. 조금은 나를 인정했다는 뜻이니 흡족하군. 숙부들이 하나둘 피를 흘리며 사그라지는 모습, 황권을 강화한다는 미명 아래 외숙들 역시 차디찬 바닥에 쓰러지는 처참한 광경을 보며 자란 나일세. 그 자리가 모두가 떠받들고 우러러보는 지고한 자리이지만 그만큼 외롭고 피로 얼룩진 자리이지. 나는 그것을 대물림하기 싫다네. 삼황자라면 성정이 온화하고 지혜로우니 불협화음 없이 제국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야. 나보다 냉정한 구석도 많으니 쉽사리 휘둘리지도 않을 테고. 이제 내 본심을 헤아렸는가? 아니면 아직도 부족한가?” “모두 동창이 물어온 것입니까? 그리고 하필 왜 저를 선택하셨는지 궁금하군요.” 비담의 말에 선예당 한쪽 기둥사이에서 먼지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96화 “후후, 자네가 이해하게. 융통성이 없어 사람을 쉬이 사귀지 못해 저럴 뿐 가진 바 능력이나 충심은 제국을 채우고도 남을 인사니까. 차차 나중에 안면을 트고 말을 섞다보면 저 사람의 진가를 알게 될 것이네. 참,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나 궁금해서 그런가? 자네도 이미 짐작했다시피 거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고 보면 되네. 평화로운 황실의 분위기에 취해 길들여지다 보면 이황자 성은처럼 그런 멍청한 짓이나 벌이게 되지. 자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이곳은 복마전이나 다름없지. 끊임없이 암투가 벌어지고, 조금이라도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별의별 일들이 매일 벌어지는 곳. 자네는 그런 이곳에 전혀 물들지 않은 신선한 물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고여 있는 물은 썩는 법이니 이번 아바마마의 생신축하연에 맞추어 신선한 물을 대고 싶은 일념뿐이라네. 물론 그 과정에서 신선한 물을 따라 나 역시 흘러나가고 싶다는 소박한 속내를 숨기지는 않겠네. 이제 됐는가?” “후후, 소박해 보이지는 않으나 태자마마의 속뜻은 알겠습니다. 그럼 무림정파랍시고 깝죽대는 저것들과도 손을 끊으실 작정이시군요?” “자신들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권력의 떡고물이나 주워 먹겠다 달려드는 미련한 놈들이지. 저것들에게 휘둘려서야 동생들 볼 면이 서겠는가? 철부지 성은이야 이미 발을 담갔으니 조용히 타이르는 수밖에.” “그래도 저를 너무 신뢰하시는 것 같군요?” “기둥위에 숨어있는 동창을 우습게보아선 곤란하지. 내 마음만 먹으면 자네 속옷이 몇 장 있는지, 어떤 여인과 몇 번 동침을 했는지도 쉬이 알아낼 수 있음이야. 처음부터 권력에 눈이 멀었다면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내 동생의 존재를 알고도 그리 굴리진 않았겠지. 아직 철이 없기는 하지만 아바마마께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 아이이니 적당히 굴리게. 그러다 토라지면 나 역시 감당하기 힘들다네.” “알겠습니다. 무슨 연유로 공주마마께서 끝까지 버티시는지 알 순 없으나 앞으론 적당히 하죠. 그리고 태자마마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사라지려 했는데 전면에 나서서 설레발치는 수밖에요. 썩어 고여 들어가는 더러운 물이 얼마나 정화될는지 장담할 순 없으나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우이. 어려운 부탁인데도 이리 선뜻 응해주니 찾아온 보람이 있구먼. 그나저나 이젠 내가 자네의 부탁을 들어줄 차례로군. 뭐든지 말만 하게. 내 힘이 닿는 일이라면 성심을 다해 노력할 터이니.” “됐습니다. 차라리 어린아이 볼에 붙은 밥풀을 띠어 먹는 게 낫지요...” “자네 뭐라 중얼중얼 거리나? 잘 안 들리니 어려워말고 크게 말해봐.”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저 혼잣말을 했으니까요. 이미 얻을 것은 다 얻었으니 괘념치 마시고 차나 한 잔 들고 가십시오. 약조한 것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런가? 난 큰맘 먹고 찾아왔는데 보기보단 소탈한 성정을 지녔군. 혹시 나중에라도 내게 부탁할 일이 생각나거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게. 뭐든 자네의 소원이라면 한 가지 들어주겠네.”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지금 당장은 없으니 그럼 나중에 생각이 나는 대로 말씀드리지요. 마침 차를 구하러 나갔던 관리가 돌아오는군요. 태자마마의 입맛에 맞을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접하겠습니다.” 관리가 부리나케 구입해온 용정차를 마시며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자 주은명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담백한 성정의 비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으려 하였고, 결국 비담이 무희들의 훈련을 핑계 삼아 조심스럽게 축객령을 내리고서야 아쉬운 듯 자신의 처소인 동인궁으로 돌아갔다. 태자 주은명의 등장으로 인해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희들은 비담이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동자세를 취하며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비담은 그동안 무희들을 굴리며 나름 소소한 삶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사라진다 생각하자 밀려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빌어먹을 노인네. 구렁이 수십 마리를 삶아 먹은 길천 형님보다 더하다니까. 어찌 태자가 오늘 나타날 것이라 알아맞힐 수 있는 거지? 정말 귀신같다니까. 괜히 어설프게 내기를 해가지고 내 금쪽같은 재미를 날려버리게 생겼으니. 휴우, 그래도 내기는 내기니 따르는 수밖에.’ “그동안 수고해준 여러분들의 노고에 본 교관은 큰 감명을 받았다. 기초체력단련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고 내일부터 진짜 제대로 된 춤을 전수해 주겠다. 그동안 본 교관의 깊은 뜻도 모르고 힘들다며 징징대던 여러분들은 춤을 배우는 순간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과 나비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경악할 것이다. 앞으로 내가 전수하는 춤을 바탕으로 진정한 무예(舞藝)가 무엇인지를 깨닫길 바라며 오늘 훈련은 이것으로 끝마친다. 해산!” 아직 한참의 훈련시간이 남았음에도 서둘러 해산명령을 내리는 비담으로 인해 무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술렁술렁 거렸다. 야차 같던 비담의 얼굴이 선동(仙童)으로 보인다며 자신의 볼을 꼬집는 무희도 여럿 보였다. 비담은 무희들이 소란을 떨던 볼을 꼬집던 상관하지 않고 선예당 안으로 사라졌다. 비담이 사라지고 나서야 실감이 났던지 그제야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한 달간의 고생을 깡그리 날려버릴 정도의 달콤한 휴식에 무희들은 치솟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날 밤. 선예당 자신의 숙소에 머물고 있던 비담은 익히 예상했던 귀빈의 방문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신 비담, 삼가 황제폐하를 뵙나이다.” “하하, 첫날 노망난 늙은이 어쩌고 하며 바락바락 대들던 패기는 어디가고 이리 고분고분 예를 갖추는가?” “그때는 신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죽을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같은 황궁 안에서 그리 평상복을 입고 잠행을 하시면 어느 누가 황제폐하인지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신의 무례를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니오라 엄연히 폐하께도 책임이 있는 것이옵니다.” “허허, 팔불출 아비가 딸 얼굴이 보고 싶어 잠행을 나섰다 그리 알아듣게 설명하지 않았는가?” “지엄하신 군주가 야밤에 그리 나돌아 다니시면 곤란하지요. 제발 저처럼 힘없는 하급관리의 처지도 생각해 주십시오. 이거 오금이 저려서 함부로 나랏밥 먹겠습니까?” “하하하, 자네의 입담은 여전하구만. 내기에서 진 속상함을 그렇게라도 풀고 싶은 모양인데 오늘은 짐이 한 발 양보하지.” 사실 옆집 할아버지처럼 소탈하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노인은 철혈의 대제로 불리며 한때 대륙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황실의 진정한 주인, 홍력제(洪力帝) 주형호(周炯浩)였다. 공식적인 업무는 아니었던지 금의위의 영반만 대동한 채 늦은 밤, 선예당에 나타난 것이다. 비담은 낮에 태자 주은명에게 대접했던 용정차를 손수 끓여 홍력제에게 대접하고 맞은편 자리에 앉아 예의 떨떠름한 표정을 유지한 채 황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호오, 이런 궁벽한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품 있고 훌륭한 차로군. 입만 걸걸한 줄 알았더니 제법 차를 보는 안목도 지니고 있었군. 그나저나 짐에게 손수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차 같지는 않고...낮에 태자가 다녀갔던 게로군.” “폐하의 예상대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한 시간에 태자가 오셨지요. 그나저나 폐하께서 바라시던 대로 눈에 넣으셔도 아프지 않을 공주마마가 고생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만족하시는지요? 제가 그토록 강하게 길러야한다 간하였사온데...” “허허, 자네도 나중에 혼례를 치르고 자식을 얻어 보게.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이 눈앞에서 떠는 재롱에 무너지지 않을 부모가 얼마나 되는지. 그건 그렇고 태자를 직접 만났으니 이제 짐의 제안에 답을 주겠는가?” “휴우, 답을 드려야지요. 그런데 답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그게 무언가?” “왜 뜻을 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연한 것을 묻는군. 짐 역시 일국을 다스리는 황제이기 전에 자식을 둔 부모일세.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짐의 치적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며 황궁을 뛰쳐나가려 한다는 사실을 짐이라고 왜 몰랐겠는가. 허나 여린 성정을 어떻게든 다듬어 황제의 재목으로 키워보려 노력했으나 짐이 잘못 판단하였던 거지. 무조건 억누르려 하다 보니 엇나가고 말았던 게야.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예전 같지가 않구먼. 저 아이가 입었을 상처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을 보니. 화려하기 그지없는 새장에 갇혀 세상을 경영했다 착각하며 산 세월을 저 아이에겐 물려주고 싶지 않더군.” “그럼 이황자가 무림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사전에 알고 계셨던 것이옵니까?” “후후, 그 녀석으로 인해 태자가 자극을 받으면 여린 심성이 고쳐질까 싶어 그냥 내버려두었네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것을 이용해 뛰쳐나가려 할 줄은 짐도 예상하지 못했지. 그로 인해 짐의 마음이 돌아섰으니 태자의 작전이 보기 좋게 성공한 셈이군.” “소신이 만약 폐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저번에도 말했듯 무림을 지워버려야지. 감히 황권에 도전한 그놈들을 곱게 내버려둘 짐이 아니라네.” 97화 “어쩌자고 그리 멍청한 짓을 서슴없이 벌일 수 있는지. 도대체 생각이 있는 작자들인지 의심스럽네요.” “원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법. 자네 같은 사람이 무림의 수장이라면 별 문제 없이 돌아갈 터인데. 어때? 탐나면 그리 만들어줄까? 나에겐 그만한 힘과 능력이 있다네.” “됐습니다. 그런 고리타분한 자리에 앉아 뭐 하겠습니까? 벌써 인생 종치기엔 제 앞날이 창창한지라 사양하겠습니다.” “정 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고. 그럼 짐의 딸은 어떠한가?” “첫날부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가만 안 놔두겠다던 그 왈가닥 아가씨요? 사양하겠습니다. 괜히 이번 일에 슬쩍 끼워서 저에게 떠넘길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번 일은 무림인들의 과욕이 저지른 불상사니 이것만 깨끗이 해결하면 셈이 끝나니까요.” ‘사도련주 이 망할 놈의 새끼. 나중에 면상 한번 제대로 보는 날엔 가만 안 둔다. 왜 너저분한 그 녀석의 뒤치다꺼리까지 내가 해야 하냐고. 그리고 오정회 이놈들도 정신 나간 작자들이지. 놀아날 장단이 없어 그놈들 손에 놀아나나. 멍청한 놈들. 소화시키지도 못할 달콤한 열매 따 먹자고 스스로 소중한 울타리를 부수다니. 하여튼 정이 안가요.’ “그럼 폐하의 제안대로 따를 것이니 무림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마음 같아선 무림이 뒤집어지던 어쩌던 상관하고 싶지 않으나 제가 몸담고, 숨 쉬며 살아가는 소중한 곳이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네요. 그나저나 폐하는 정말 무서운 분이시네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자식과 관리들을 싸잡아 족치려 하시다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은 허언이 아니지. 짐 역시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은퇴하여 조용히 남은여생을 즐길 생각이라네. 그러기 위해선 눈에 거슬리는 화근을 미리 잘라버리는 게 최우선이지. 그러니 알아서 잘 처리해주게.” “알겠습니다. 여우들 좀 족치려다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네요. 이번 기회에 폐하의 뜻대로 깨끗이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제대로 흐려놔야만 물 안의 뭇 생명들이 보호받을 수 있음을 명심하게.” “깔끔한 비유 감사드립니다. 소신 역시 무림인이기에 탐탁지 않으시다는 거 알고 있으나 제대로 성심을 다해 휘저을 것이니 맡겨 주십시오.” ‘휴우, 오정회 놈들이랑 이황자를 미는 사도련 놈들이랑 신나게 싸움 붙여놓고 조용히 내빼려 했더니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수밖에. 아주 다 죽었어, 이것들. 그나저나 앞으로 태자마마 모실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하구나. 무림이 대체 뭐라고 동경을 하셔서 팔자에도 없는 길잡이를 하게 만드는지. 그나마 철부지 공주는 합세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비담의 시름이 깊어질수록 황제의 미소는 짙어져갔다. ‘어설픈 미꾸라지 덕분에 일이 쉽게 해결되는군. 승상이 쥔 병권도 만만치 않고, 더불어 무림과의 마찰까지 고려하느라 어찌 손을 써야하나 고심하던 차에 알아서 굴러들어온 복덩이야. 저놈이 나서서 시선을 분산시켜준다면 손쉽게 그 녀석들을 제거할 수 있겠어.’ 황제와의 떨떠름한 협상을 잘 마무리한 비담은 다음날부터 무희들에게 제대로 된 선무(扇舞)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화류선법의 움직임 중에서 적절한 동작들을 추려 매끄럽게 이은 것이다. 한 달간의 지옥훈련을 성공적으로 견뎌낸 무희들은 비담이 요구하는 동작들을 무리 없이 소화하였다. 비담은 100명의 무희가 하나의 커다란 주제에 맞추어 융화되도록 유도하였고, 호되게 당한 무희들은 하나의 가르침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배웠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은 쏘아 놓은 화살처럼 지나갔고, 드디어 홍력제의 생신축하연이 내일로 다가왔다. “그동안 본 교관을 믿고 열심히 따라와 준 여러분들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제 춤은 모두 완성이 되었고, 드디어 내일이면 그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한 선무를 황제폐하께 진상할 수 있게 된다. 오늘 마지막 연습을 하며 맞추었던 대로 내일도 실수 없이 잘 해주리라 믿고 오늘은 그만 해산하도록. 참, 부채와 의상을 점검하는 것 잊지 않길 바란다.” 하나같이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얼굴로 상기된 무희들이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고, 비담은 그 중 제갈현아와 남궁소미에게 자신을 찾아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전날 매영의 결정적 제보가 있었기에 오늘 미리 손을 쓰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이권과 세가의 미래를 위해 서슴없이 화탄을 제조한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사용할 생각까지 하다니. 그것도 허허벌판이 아닌 황궁의 한복판에서 위험천만한 화탄을 사용한다는 것이 제정신 박힌 사람이 벌일 수 있는 일이냔 말이다. 아주 무림을 시궁창에 처박을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지. 예부터 손에 왕창 움켜쥔 놈들이 더 가지기 위해 사족을 못 쓴다더니 딱 사도련과 오정회 놈들을 두고 하는 말이군. 내일이면 황궁 안이 발칵 뒤집혀 모든 것이 깨끗이 정리될 터. 오늘밤 골빈 저년들 손보는 것을 시작으로 화려한 막을 올려야겠어.’ 그날 밤. 제갈현아와 남궁소미는 선예당 비담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내일 벌어질 거사에 대해 최종점검을 하고 마지막 조율을 하기위해서 자신들을 부르는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별다른 경계심 없이 찾아왔다. 비담은 자신의 처소를 방문한 제갈현아와 남궁소미에게 우선 용정차부터 권하였다. 그런 다음 밝게 웃으며 그녀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두 달 동안 본의 아니게 함부로 군 점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다행히 두 분 소저께서 노력해주시고 참아주신 덕분에 별다른 의심 없이 무사히 내일을 맞이하게 되었네요.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무림을 좀 먹는 세력들이 일거에 소탕되고, 다시 평화가 깃든다면 모두 두 분 소저의 공입니다.”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기울인 노력에 비하면 저희들이 한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나저나 저희들이 할 준비는 모두 끝마쳤으니 이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런데 다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최고급 용정차인 듯한데...저희들에게 이리 선뜻 내어주셔도 괜찮습니까?” “하하, 괜찮습니다. 그동안 고생해준 아가씨들을 위해 마련한 저의 조그마한 성의니 괘념치 마시고 드십시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희들을 보자 하셨는지요? 내일의 거사 전까지는 가급적 조심하는 게 좋을 듯싶사온데...” “별 뜻은 없습니다. 다만 일의 성사 여부를 떠나 오늘밤이 지나면 다시 뵙기 힘들 것 같아 제 마음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듣고 보니 공자님의 말씀이 맞네요. 모쪼록 헤어짐이 아쉽기는 하나 앞으로 하시는 일들이 잘 풀려나가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목적을 숨긴 채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차를 음미하는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몸의 이상을 먼저 알아챈 것은 제갈현아였다. 급속히 호흡이 가빠지며 점점 상승하는 체온으로 인해 정신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몽롱하게 풀려가는 동공 속에서 모든 사물들이 급기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