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39편 (39/62)
내가 구해온 해소제가 아니고서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벗어날 방법은 요원하니 알아서 견뎌내. 후후, 지금에 와서 그런 불쌍하고 억울하다는 눈빛 보내봐야 소용없어. 내 그리 입을 열 기회를 줬음에도 꾹 다물고 끝까지 버틴 것은 너희들이니까. 지금도 이리 기회를 주건만 모두 입을 굳건히 다문 채 버티고 있잖아? 내참 가소로워서. 누가 이기나 끝까지 가보자고.” ‘야! 이 미친 작자야. 네가 아혈을 풀어줘야 입을 열어 말을 할 것 아니야? 도대체 우리랑 무슨 철천지원수를 지었기에 이리도 핍박하는 것이냐? 제발 부탁이니 아혈 좀 풀어주라고.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나리~!!!!!’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붓고, 애원하며 절규했으나 무정한 비담은 실실 웃으며 덕지덕지 옻나무 액을 무희들의 얼굴에 발라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혈이 제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약한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새어나오며 남은 스무 명 여인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온몸을 찢어발기고 싶을 정도로 가려움이 밀려들었으나 항아리에 묻혀 손쓸 방도가 전혀 없었다. ‘슬슬 신호가 오는구나. 앞으로 일각.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미쳐 돌아버릴지도 모르니 적당히 끝내야겠어. 이정도 당했으니 이제 내 말이라면 흡사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것이다. 후후, 이게 끝이라 생각지 말거라. 나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기엔 아직 멀었으니.’ 남은 스무 명의 무희들은 일각동안 정말 생지옥을 경험하였다. 도저히 그녀들의 상식으론 현세에 도래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비담은 적당히 시간을 재다가 무희들을 놀리며 약을 올렸다. 물론 시시각각 더해지며 엄습하는 고통으로 인해 그녀들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정말 깡다구 하나는 끝내주는 여인들이구만. 비명소리 하나 지르는 자가 없다니. 어라? 이상하네. 아차차, 이거 그러고 보니 내가 아혈을 풀어주는 걸 깜박했구나. 그놈의 방귀냄새 때문에 내 정신마저 혼미해져서 나도 모르게 그만. 어쩐지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기에 이상하다 여겼는데 미안.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이 멍청한 것들아.” 바닥에 쓰러진 80명의 무희들은 어이를 상실한 채 비담을 두려운 듯 쳐다보았다. 미쳐도 저리 미치면 방법이 없겠다 싶어 속으로 끌끌 혀를 차면서도 행여 들킬세라 표정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대관절 입을 단단히 막아 놓고 미리 말하지 않았다 탓하는 것은 어느 나라 개소리인지. 비담은 차근차근 스무 명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이 답답이들아. 뭐 아무튼 이제 포기할 자들은 해소제를 원한다 크게 외치거라. 그럼 없던 일로 눈감아주마. 물론 셋을 세기 전에 말해야 인정할 것이야. 그럼. 하나! 둘!...” “저,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어서 해소제를 주십시오.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스무 명의 입이 동시에 열리며 해소제를 외쳤다. 그 간절함이란 마른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할 정도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셋을 외치기 전 모두 굴복하겠다 약조를 하였으니 약속대로 해소제를 내어주마. 앞으로 다시 한 번 개기는 날엔 이 꼴을 세 번은 더 당해야 할 것이니 다른 마음 먹지 않길 바라마. 자, 이것을 입안에 넣고 삼키거라.” 비담은 온갖 동물의 쓸개즙과 결합된 해소제 한 알씩을 무희들 입에 넣어 주었다. 내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쓴 약을 삼키는 게 고역이었으나 온몸에 수천마리의 개미가 달라붙어 간질이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담은 모두 약을 삼키는 것을 확인한 후 바로 남은 항아리 스물도 시원하게 깨버리고 짧은 규칙 몇 가지만 나열하곤 이내 선예당 안으로 휘적휘적 사라졌다. “앞으로 선예당에서 두 달 동안 나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환영한다. 규칙은 간단하다. 앞으로 황제폐하의 생신축하연에 진상될 춤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서 외출을 금하고 합숙을 하겠다. 그리고 어떠한 외부인사와의 접촉도 금한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엔...알아서 상상하도록. 오늘 펼친 몇 가지 수는 내가 가진 비책들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깨어진 항아리조각들과 모래들 역시 반시진 안에 치운다. 곧바로 춤을 배우기 위한 기초체력단련을 마당에서 실시할 것이니 다치기 싫으면 알아서 말끔히 치우도록. 이상!” 자기 할 말만 딱 끝내고 매정하게 돌아서는 비담을 바라보며 무희들은 무슨 징그럽고 흉측한 벌레를 보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저런 괴물과 두 달을 함께 지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여기저기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반 시진 후. 다시 나타난 비담은 말끔하게 정리된 마당의 모습에 흡족한 듯 100명의 무희들을 둘러보며 훈련의 시작을 알렸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모습, 아주 좋아. 지금처럼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면 멋진 춤을 황제폐하께 헌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춤을 배우기 위한 예비 훈련을 시작하겠다. 황궁 밖에서 그동안 어찌 지내오고 자신이 어떤 춤을 추며 인정받았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니 깡그리 머릿속에서 지운다. 앞으로 내가 가르쳐줄 춤을 익히기 위해선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이다. 고로 지금부터 체력단련의 시간을 갖겠다. 10열종대로 선다, 실시!” “실~시!!”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무희들은 마당이 떠나가라 복창하며 서둘러 대열을 갖추었다. 비담은 모든 체력단련의 기본이 되는 기마자세를 주문했고, 무려 한 시진 동안 기마자세를 유지하느라 무희들은 땀을 비 오듯 쏟았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득달같이 달려와 채근하고 협박하는 비담으로 인해 요령도 피울 수가 없었다. 비담은 점점 높아지는 무희들의 신음소리를 즐기듯 유유자적 대열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만!” “하아!!” 그만이라는 말에 무희들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제 감각마저 무뎌진 허벅지와 다리를 주무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닥에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괴물 같은 선예정랑의 눈치를 보느라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오늘 단련은 이것으로 마친다. 춤의 기본은 허리와 하체의 힘. 뿌리가 튼튼해야만 무성한 잎을 피워내듯 춤 역시 기본이 되는 하체가 튼튼해야만 유려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는 춤을 꽃피울 수 있다. 내 말 명심하도록. 그럼 오늘은 그만 숙소에 돌아가 쉬고, 내가 말한 대로 그 어떤 외부인사와의 접촉이나 외출은 금지다. 앞으로 한 배를 타게 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며 친분을 쌓는 시간을 가지도록. 그럼 해산!” 비담은 옆에 서있는 하급관리에게 눈짓을 보냈고, 쪼르르 달려온 관리는 100명 무희들을 인솔하여 숙소로 안내하였다. 94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가 축 쳐진 무희들은 애꿎은 하늘만 원망하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제 죽으나 사나 두 달을 이곳에서 견뎌야만 해방될 수 있었기에. 비담이 선예당에 마련된 자신의 숙소에 머물며 이것저것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하루사이에 얼굴이 누렇게 죽어버린 제갈현아와 남궁선미가 면담을 요청했다. 비담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둘에게 차를 권하며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주위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자중하셔야 될 분들이.” 비담의 말에 제갈현아는 바로 볼멘소리로 화답했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희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알다시피 황궁에 들어온 것은 단순히 암약하는 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일이 터지면 춤이고 나발이고 모두 소용없는 것인데 이토록 죽자 살자 매달리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좀 적당히 하면 안 될까요? 그리고 저희를 한사코 남은 스물에 끼워 괴롭히는 저의가 대체 무엇입니까?” “허허, 그리도 무사안일 해서야 어찌 큰일을 도모하려는 것입니까? 적을 속이기 위해선 자기 자신부터 속이라는 병법서의 지침대로 저는 아군부터 속인 것이지요. 조금 괴로우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허나 오늘 제가 벌인 일련의 효과로 인해 이 안에 숨어들어온 저들의 눈을 속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아직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순 없으나 분명 냄새를 맡은 간자들이 무리에 섞여 있습니다. 저 역시 소저들을 괴롭히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을뿐더러 무척 가슴이 아프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라의 안위를 위하고 오정회의 번영을 위해 하는 일이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하루 속히 그 간자들을 색출하여 오늘과 같은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저, 정말입니까? 그리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시켰건만 저들의 간자가 숨어들어왔다니...” “아직은 제 짐작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저들 역시 손쉽게 황궁에 들어올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무임승차라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오늘 하루 제가 그리도 매섭게 대하고 굴렸건만 역시나 독종들답게 묵묵히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 견디더군요. 물론 그 과정에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소저들께 모질게 대한 점 용서해주십시오. 저로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임시방편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시키고, 외출 역시 삼가 하였으나 얼마의 효과를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죄라도 지은 듯 거듭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비담의 진심어린 행동으로 인해 화를 내러 왔던 제갈현아와 남궁소미는 더 이상 추궁하기가 멋쩍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나라의 안위와 오정회의 앞날을 위해서라는데 뭐라 더 따진단 말인가. “휴우, 공자님의 깊은 뜻도 헤아리지 못하고 속 좁게 군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앞으로 간자들이 색출될 때까지 계속 이 짓을 해야 하나요?” “면목 없고 죄송하지만 그래야 될 듯싶습니다. 저 역시 춤을 핑계 삼아 더욱 모질게 단련하며 압박을 가할 것이니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본의 아니게 소저들을 대하더라도 제 진심이 아님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어쩔 수 없죠. 간자들이 섞여 있다니 더욱 행동을 조심하며 견디는 수밖에. 오늘의 경거망동은 잊어주십시오. 이리 공자님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역시 저들에겐 좋은 먹잇감일 테니 앞으론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멀리 나가지 못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후후후, 네까짓 것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다. 앞으로 두 달 동안 마음껏 괴롭히다 종래에는 자근자근 내 아래에 짓밟혀 울며불며 애원하고 사정하게 만들어주마.’ 비담은 남아있는 차를 후루룩 마시며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음침하게 웃었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모두 비울 무렵. 비담의 예상대로 또 한 명의 무희가 그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번엔 매영인가? 도대체 어떤 무희로 변신하여 섞여 있었는지 궁금하군.’ “들라하라.”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무희 하나가 비담의 앞에 떡하니 나타나 바로 울음부터 쏟아냈다. 물론 마지막 정예 스물에 끼어있던 얼굴이었다. 비담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무희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 채 지켜보았다. “흑흑, 저에게 이러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토록 뜨거운 밤을 함께 지새우며 서로의 몸을 탐했으면서도 변한 저를 못 알아보시고 그리 막 대하시다니...” “누가 너보고 여기 들어오래? 바득바득 우겨서 여기 들어온 건 너야. 왜 이제 와서 징징 짜며 귀찮게 구는데? 너 자꾸 그리나오면 확 그냥 안 보는 수가 있어. 나는 그리 질질 짜는 거 무지 싫어한다고 얘기했잖아.” “훌쩍! 알았어요. 안 울면 되잖아요.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토설했는데 아직도 그리 미우세요? 이제는 좀 따뜻하게 한 번 안아주시면 안돼요?” “내가 누차 말했지. 난 너한테 관심 없다고. 그냥 목숨 부지하게 해줬으면 알아서 떠날 것이지 왜 끈덕지게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네. 네가 나한테 한 짓은 최소 사망이야.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목숨을 살려주었으면 ‘고맙습니다.’하며 물러가도 시원찮을 판에 왜 자꾸 안아 달라 떼를 쓰는 거냐? 내가 무슨 자선사업가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모양인데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지. 확 궁에서 쫓아내기 전에 숙소로 안 돌아가? 그리고 궁에 끌고 들어왔으니 네가 한 약속이나 잘 지켜. 내가 부르기 전에 한번만 더 먼저 찾아왔다가는 동침이고 나발이고 물 건너 간 줄 알아. 알았어?” “알았어요. 다시는 먼저 찾아오지 않을 테니 노여움 푸세요. 대신 약속대로 그년들과 무희들 감시하는데 최선을 다할게요. 그럼 공자님도 저를 안아 주겠다 하신 그 약속 꼭 지키셔야 돼요?” “알았으니 그만 나가봐. 그리고 걸리는 날엔 알아서 조용히 뒤집어쓰기로 한 것도 잊지 말고.” 무심하게 손을 내저으며 쫓아내는 비담의 행태에 매영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며 선예당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시커멓게 타들어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주르륵 쏟아내었다.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며 그리 빌었건만 용서해주시질 않는구나. 하기야 내가 되었더라도 쉬이 용서할 순 없었겠지. 이제와 지난날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쪼록 공자님께서 내 마음을 받아주시는 날까지 성심을 다해 보필하고 매달리는 수밖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이 매영의 뻥 뚫린 마음을 위로해주듯 빛을 흩뿌렸다. 비담은 매영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 씁쓸한 마음을 꺼내었다. ‘나 역시 당신을 이리 모질게 대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당신이 말한 대로 꿈으로 가득했던 꽃다운 나이에 짐승 같은 사내에게 겁탈을 당하고 세상 모든 사내를 적으로 돌렸다는 말과 아픔도 이해 못하는바 아니라오. 허나 그러한 변명이 여태껏 저질러온 당신의 과오를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며 속죄하겠다는 당신의 가슴 절절한 외침에 담긴 진심을 알기에 그것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기회를 드렸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낙인찍히듯 평생을 안고 가야할 상처로 인해 괴로워할 매영을 생각하며 비담은 심심한 위로의 말을 마음속으로 건네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가 일찍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었기에 진원지기의 흡수를 멈출 수 있었고, 그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기는 비담이었다. 비담은 매영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잘못은 그것으로 깨끗이 셈을 끝내기로 하였고, 앞으로 무림을 위해 일조함으로써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와 잘못, 후회들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 매영과의 일을 겪으며 색공의 위력을 여실히 깨닫게 된 비담이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매영의 상처를 치유하고, 어루만지며, 보듬어 줄 수 있었던 데에는 색공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담은 다시 한 번 망치로 얻어맞은 듯 깨달음을 얻었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요란했던 황궁에서의 첫날밤이 무사히 지나가고, 다음날부터 비담의 만행은 가일층 강도를 더해갔다. 첫날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무희들은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길 정도로 구르고 또 굴러야만 했다. 오로지 춤을 배우기 위한 기초훈련이라는 명목 하에 선착순, 뜀뛰기, 기마자세, 한 발 들고 오래 버티다 낙오자는 또 보충수업을 받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우아한 몸짓과 기품 있는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오로지 치열한 생존만이 그녀들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비담에게 찍힌 스무 명의 고달픔이란 설명조차 불허했다. 그냥 죽지 못해 버틴다는 말이 그나마 비슷할 정도로 그녀들의 생존기는 눈물겨웠다. 95화 그렇게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덧 황궁에 들어온 지 한 달이 훌쩍 지났고, 이제 무희들의 눈빛은 흡사 잘 벼린 칼을 든 무사들처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비담은 무희들을 굴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춤은 언제 배우냐며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하였으나 비담은 그저 천하태평 무희들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그리고 이정도 고통이나 단련은 아무것도 아니라던 무희들이 더욱 높아진 강도에 혀를 내두르며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그녀들을 구원해준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자신의 처소인 동인궁(東仁宮)을 잘 벗어나지 않기로 유명한 태자 주은명이 선예당을 방문한 것이다. 비담은 입안의 혀처럼 굴며 철저히 권력에 아부하는 모양새를 연출하며 무희들의 혀를 차게 만들었고, 그러한 원성은 비담의 눈 흘김 한방으로 순식간에 무마되었다. “누추한 이곳까지 태자마마께서 직접 왕림해 주시니 소신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아직 황제폐하께 진상할 춤이 외부에 공개되어선 곤란한 입장이라 괜찮으시다면 소신을 따라 자리를 옮기심이 어떠신지요?” “그런가? 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군. 그럼 자네 말대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나 역시 아바마마의 생신축하연에 선보일 춤을 미리 엿본 치졸한 사람이 되기는 싫으이.” “치졸하시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다만 제 뜻은 그날의 감흥을 위해 잠시 아껴두셨으면 좋겠다 간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노여움을 푸시고...” “하하하, 내 듣기론 정말 괴짜 같은 사내가 하나 들어와 요 근래 궁 안이 소란스럽다 하여 심심하던 차에 구경이나 할까 들렀는데 이제 보니 괴짜가 아니라 군자 중의 군자였구먼. 이리 아바마마와 나를 위해 마음 쓰는 것을 보니 충신이로세. 자네가 난색을 표하니 그만 놀리고 그럼 자리를 옮기세. 대신 근사한 차를 내와야만 용서해줄 수 있음이야.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비담의 축객령을 받아들인 태자 주은명이 비담의 쩔쩔매는 모습을 뒤로하고 선예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담은 선예당의 관리들을 닦달하여 최고급 차를 준비하라 일렀고, 그런 차는 없다며 울상을 짓는 관리들에게 자신의 사비까지 털어주었다.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당장 전문대가로 뛰어나가 최고급의 용정차를 구해오너라. 태자마마께 진상할 것이란 귀띔을 하고 돈 역시 달라는 대로 치르거라. 어서 빨리 움직여!” 관리는 엉덩이에 불붙은 송아지마냥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만에 하나 무희들에게 튀는 불똥이 자신에게까지 튄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 끔찍했기 때문이다. 관리를 윽박질러 차의 준비까지 마무리한 비담이 서둘러 태자가 앉아있는 선예당으로 뛰어갔다. “송구스럽습니다, 태자마마. 제가 거하는 곳이 궁 안에서 제법 옹벽하고 외지다보니 태자마마의 입맛에 맞는 차가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리 준비하지 못한 소신의 불충을 용서하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런데 따로 하문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지은 죄는 없사오나 간이 오그라들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매도 일찍 맞는 것이 낫다하였으니 혹시 꾸짖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라면 빨리 혼내주셨으면...” “하하하, 소문대로 괴짜로군. 어찌 알았는가? 미리 누구에게 언질이라도 받은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꾸짖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느냔 말일세.” “저, 정말이시옵니까? 저도 모르게 그냥 나온 말인데 정녕 사실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소신이 어떠한 죄를 지었든 벌을 달게 받을 것이니 하문해주십시오.” “그럼 여기까지 찾아온 김에 사실대로 말하겠네. 혹시 무희들 중에 내 동생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네? 자, 잠시만. 그럼 태자마마의 말씀대로라면 공주마마께서 저기 마당에 계시다는...?” “그렇다네. 내 그리 말렸으나 아바마마께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드리고 싶다며 사정을 하더군. 잠시 행궁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선예당에 덜컥 지원을 하였지. 철저히 비밀을 지켜달라는 희령이의 부탁에 그리 약조를 하였네만 너무 걱정이 되어 참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선예당에 머물고 있는 무희들의 근황에 대해 알아오라 시켰더니 아주 가관이더군. 첫날부터 빠짐없이 모두 보고를 받았다네. 자네야 전혀 몰랐다며 발뺌을 하겠으나 일은 이미 크게 벌어지고 말았네. 아바마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희령이를 그리도 모질게 굴렸으니 살아남기는 무척 힘들 거야. 혹시 남길 유언이 있으면 지금 내게 하게나. 나중에 성심성의껏 자네의 묘비에 새겨주겠네.” “저, 정녕 제가 살아남을 방도는 없는 것이옵니까?” “장담하건대 일할이 채 되지 않을 걸세. 내 조사에 따르면 제법 출중한 무예를 익혔더군. 흔히 강호인들이 말하는 화경의 경지라던가? 하지만 이 제국의 명실상부한 주인은 엄연히 천자인 아바마마시지. 길가의 아무렇게나 핀 잡초까지도 모두 천자인 아바마마의 것이야. 한마디로 자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하여도 제국의 수백만 정예 병사들을 상대로는 힘에 부쳐 얼마 버티질 못할 걸세. 내가 말한 일할의 확률이란 무사히 대륙을 빠져나가 다른 나라에 숨어 사는 것이지. 그 역시 제국의 입김이 닿지 않는 궁색하고 옹벽한 나라여야만 가능하다는 뜻일세.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였는가?” “그,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전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셨는지 소신은 이해를 못하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