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34편 (34/62)
그러다 자신의 눈앞에 생면부지의 이불을 둘러쓴 여인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더 당황하고 말았다.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고.” “누, 누구냐...?” “너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지. 옆방에 있는 사냥감은 내가 요리했으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옆방의 사냥감이라니?” “호호, 네 년과 망할 영감탱이가 꾸민 계획에 따라 최음제를 양껏 들이키고 해롱거리던 모자란 녀석 말이다.” “어, 어떻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고. 중요한 것은 내가 한 요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 분이 안 풀린다는 것이야. 나는 여태껏 점찍은 사냥감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그래서 말인데 네년이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누구인지 몰라도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계획을 망친 너를 왜 도와야하지?” “사랑과 명예를 지키고 싶다면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르는 게 신상에 이로울 텐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여튼 사내나 계집이나 멍청한 것들을 상대하려면 피곤하다니까. 한번만 말할 테니 알아서 잘 판단하거라. 우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다른 이의 몰락과 치부에 환장하는 모사꾼들이 쌍수를 들며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겠지? 그럼 정파 무림을 이끌어간다는 공명정대한 세가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난도질당하는 것은 예삿일일 것이며 검황을 비롯해 너희 남궁세가가 씻지 못할 불명예를 얻고 그 더러운 멍에를 자자손손 대물림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돕지 않으면 너는 세가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마음에 담고 있는 모용가의 녀석도 제대로 망가뜨려 돌려주마. 몸과 마음 모두 말이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증조할아버지와 남궁가를 어찌 보고 그런...” “협박? 아직도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구나.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알량한 그 세력과 간판을 들이밀고 싶나본데. 후후, 그럼 잠깐이나마 감상해 보거라.” 매영은 발끈하며 덤비는 남궁소미를 향해 자신의 독문절학인 역체변용술을 시전 하였다. 순간 사이한 안개가 몽글거리며 매영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모습을 바꾸어놓았다. 침상에 쓰러져 있는 남궁소미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똑같은 얼굴이었고, 더불어 스르르 흘러내려간 이불 안에 숨어있다 드러난 알몸 역시 완벽하게 재현해 내었다. 심지어는 목소리까지 판에 박은 듯 닮아있었다. 남궁소미는 역체변용술이 무림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여인처럼 애들 장난하듯 펼친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고, 그 짧은 시간에 이렇듯 완벽하게 펼칠 수 있다는 사실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놀라움에 입을 쩌억 벌린 남궁소미를 향해 매영은 기분 좋은 웃음을 날렸다. “호호호,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한껏 뜬 네 모습이 아주 가관이구나. 자, 이제 감이 좀 잡히나?”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네 년의 놀란 얼굴이나 보자고 힘들게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니 너저분한 감상평은 집어치우고 어서 결정을 내려라. 나를 도울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사랑과 세가의 미래를 동시에 잃을 것인지.”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꼭 듣고 싶다면 가르쳐주지. 우선은 모용가의 녀석부터 손봐줄 생각이다. 아마도 그 녀석은 감쪽같이 속아 어설픈 밀어나 속삭이며 신나게 나를 안고 뒹굴겠지? 그런 연후 그 녀석의 하물을 잘라버릴 생각이다. 그럼 평생 너를 원망하고 저주하며 죽이려 혈안이 될 거야. 볼 만한 구경거리인데 조금 아쉽기도 하구나. 아무튼 모용가의 녀석을 그렇게 처리한 후 너 역시 폐인으로 만들어 버릴 거고, 그런 다음 입이 싼 호사가들에게 슬쩍 소문을 흘리고 나는 꼭꼭 숨어버릴 것이다. 아무리 세가의 역량과 인맥을 총동원하더라도 작정하고 숨어버린 나를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니 괜한 상상은 하지 말도록. 그리고 한 가지 충고를 덧붙이자면 만약 나를 돕는 척 하면서 꿍꿍이를 꾸미다 걸리면 방금 말한 대로 대가를 치르도록 해 줄 것이니 자신 있거든 시도해 보거라. 한 번에 나를 죽이지 못할 거라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대충 궁금증은 풀렸을 테니 이제 선택을 하실까?” 스산한 살기를 피워 올리며 결정을 강요하는 매영의 모습에 남궁소미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도, 돕겠다.” “좋아, 아주 현명한 선택을 내렸어.” “내가 어찌하면 되느냐?” “우선은 원래의 계획대로 모자란 저 녀석 옆에 누워 아침을 맞이하거라. 저 녀석이 너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가져야 한결 일이 수월하게 풀릴 테니까. 그런 연후 조그마한 사내아이로 변한 나를 서동(書童)으로 소개하여 저 녀석을 따라다닐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면 된다. 그럼 우리의 동업자 관계는 원만하게 계속 유지되는 것이지.” “흐음, 알겠다.” “참, 그리고 늙은이에게 말해 오늘밤 사용했던 약과 동일한 약을 만들어 내게 가져오너라. 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적당한 핑계를 대고 구해놓는 게 좋을 것이다. 앞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물건이니 행여나 장난칠 생각은 하지 말고.” “알았으니 대신 모용오라버니와 세가는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 약조는 반드시...” “후후, 네가 먼저 동업을 파기하지 않는 이상 나 역시 철저히 지킬 것이니 걱정말거라. 그럼 연락 기다리지.” 매영은 날카롭게 날이 선 손톱의 강기를 이용해 남궁소미의 포박을 끊어주었고, 그녀의 점혈 당한 마혈 역시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묵고 있는 장소만 남긴 채 방안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남궁소미는 신출귀몰한 매영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며 조금씩 고개를 치켜들던 생각들을 후다닥 지워버렸다. 괜히 어설프게 시도하기엔 실패했을 때의 대가가 너무나 가혹했기에. 남궁소미는 미혼제에 취해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비담 옆에 자신의 몸을 뉘였다. 그리곤 초대하지 않은 괘씸한 손님의 정체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하며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82화 다음 날 아침. 비담은 몽롱한 정신을 쫓기라도 하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거지? 남궁소저랑 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당최 기억이 나질 않으니. 그나저나 목이 타는데 마실 게 어디 없나...” 이리저리 물을 찾아 둘러보던 비담은 순간 자지러지듯 놀라며 침상에서 튀어 나갔다. 자신 옆에서 고이 잠들어 있는 남궁소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 어째서? 내, 내가 혹시...아, 아닐 거야. 에이, 아무리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설마하니 남궁소저를 덮쳤겠냐고. 하, 하지만 이 시원함은 대체 무엇으로 설명해야 좋단 말인가.” 침상에서 뛰쳐나온 비담은 자신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자 망연자실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검황에게 자신은 사랑하는 여인이 있노라고 자랑스레 떠벌려놓은 것이 불과 이레 전의 일이고, 남궁소저가 음적에게 당할 뻔 했던 날로부터 사흘 밖에 흐르지 않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오정회로 간 검황 어르신은 무슨 낯으로 볼 것이며, 잠시 후 깨어날 남궁소저에겐 뭐라 설명한단 말인가.” 그렇게 비담이 옷을 걸칠 생각도 까맣게 잊은 채 안절부절 방안을 서성이고 있는 동안 드디어 침상에 누워있던 남궁소미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더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비담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간밤에 편안히 잘 주무셨는지요? 어머!” 인사를 건네던 남궁소미가 알몸인 채로 얼어있는 비담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비담은 그제야 자신의 알몸이 방안으로 스미는 빛에 적나라하게 비춰짐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옷을 찾느라 분주해졌다. “내 분명 옷을 벗은 기억이 없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괴이한 도깨비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놈의 바지는 어디로 갔기에 안 보인담.” 그래도 다행히 바지까지 찾는데 성공한 비담이 후다닥 옷을 걸친 채 자세를 바로 하였다. “저, 저기 간밤에 소저와 함께 달을 노래하며 기껍고 흥겨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원하게 술을 마신 부분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혹시 제가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바, 방금 실수라고 하셨나요? 소녀가 마음에 든다며 세가와 저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니 크고 넓은 내 가슴에 마음껏 안기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모두 빈말 이셨던 것입니까? 그저 단순히 소녀의 몸을 하룻밤 탐하기 위한 입에 발린 사탕발림이었나요?” “헉! 제, 제가 그런 말을 소저께 했다고요?” “아닙니다. 공자님의 표정과 반응을 보니 그저 소녀의 몸이 하룻밤 필요하셨던 모양이네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달콤한 약속의 말에 속아 기꺼이 공자님의 품에 안기고 말았으니. 마음도 없으신 공자님을 상대로 이런 말을 이어나가기가 무척 힘이 들고 비참해지네요. 그저 소녀로 인해 욕정을 푸셨다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소녀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흑흑.” 헝클어진 옷을 바로하고 남궁소미가 쏜살같이 방안을 빠져나갔다. 비담은 어안이 벙벙하고 다리가 후들거려 차마 뛰쳐나가는 남궁소미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방안에 홀로 남은 비담은 밀려드는 자책감에 턱하니 침상에 걸터앉고 말았다. “미쳐버리겠구나. 어쩌자고 만취해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정말 이놈의 색공 때문에 하룻밤 욕정이나 해소하자고 그런 입에 발린 말들을 쏟아냈단 말인가. 아, 앞으로 서희 얼굴은 어떻게 볼 것이며 남궁소저는 또 어찌 대해야 한단 말인가.” 비담은 세상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망연자실 허공만 응시하였다. 그러다 자신의 힘만으론 헝클어진 난국을 해결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길천과 상의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비담의 간절하고 절박한 의념이 상단전의 길천에게 전달되었다. ‘휴우, 일이 더럽게 꼬여버렸구나.’ 비담이 강신귀공을 운용하고 의념을 전달하자마자 길천에게서 튀어나온 의념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이었다. ‘그러니까요. 어쩌자고 남궁소저를 덮친 것인지. 정말 제가 생각해도 너무 한심하고, 미안하고, 멍청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네요.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제 자신이 싫고 원망스럽습니다.’ ‘그리 자책할 필요 없다. 너는 남궁소미를 덮치지 않았으니까. 내가 일이 더럽게 꼬여버렸다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야.’ ‘예? 남궁소저를 덮치지 않았다고요? 그럼 발가벗은 제 모습은 뭐고 아침에 제 옆에 누워 있다가 울며 뛰쳐나간 남궁소저의 말은 또 뭡니까? 그리고 다른 일이라니요? 제발 속 시원하게 말씀 좀 해주십시오. 소제는 지금 무척 급하다고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비담이 다급하게 재촉했다. ‘담이 너도 알다시피 너의 감각기관이 열려있는 동안 네가 느끼고 인지하는 모든 정보들을 나 역시 받아들이고 알 수 있다. 반대로 네가 혼절하거나 잠이 들었을 경우에는 그 어떤 정보도 들어오지 않지. 그래서 어젯밤 네가 쓰러져 기절하였을 때에는 나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중간에 최음제의 효과가 강하게 나타나며 네가 깨어났고, 그사이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얻을 수 있었지. 생판 모르는 독한 년 하나는 건드렸는지 몰라도 너는 절대 남궁소미를 덮치지 않았어.’ ‘저, 정말이에요? 정말 남궁소저를 덮치지 않았어요? 그럼 아침에 제 옆에 누워 있다가 저리 울면서 뛰쳐나간 이유가...’ ‘간단하게 말해서 또 당한거지. 저번에 목각인형 붙들고 구멍 찾는 거랑 비교하면 오십 보 백 보야. 단지 차이가 있다면 섭혼술과 최음제 정도랄까? 내 그렇게 이르지 않았더냐.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 것이며 강호에는 온갖 지랄 맞은 음모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그럼 제가 최음제에 당한 것입니까?’ ‘그래, 최음제에 당해 어젯밤 독한 년과 뒹군 것은 정확한 사실이다. 그때는 네가 깨어있는 상태라 나 역시 지켜보았으니까. 그런데 이유를 모르겠어. 어째서 검황 그 새끼랑 그 손녀 년이 술에다가 최음제를 탔는지 말이야. 분명 너랑 뒹군 독한 년이 그랬거든. 망할 영감탱이가 술에다 최음제를 탔다고. 그런 정황들로 보았을 때 뭔가 꿍꿍이가 있는 술자리였단 말인데. 왜 밝혀지면 세가의 얼굴에 똥칠이나 할 그런 위험천만한 짓거리를 벌인 것일까? 위치로 보았을 때 너 하나 얻자고 벌이기엔 너무 구리고 손해 보는 장사인데 말이지.’ ‘꿍꿍이가 있는 술자리요? 그럼 제가 남궁소저를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아마도 고마움이나 표하자고 마련한 술자리는 아닐 거다. 최음제를 술에 탄 것도 그렇고 마치 사전에 합이라도 맞추고 하는 약속대련처럼 네 옆에 누워있다 눈물 질질 짜며 뛰쳐나가는 손녀 년을 봐도 그렇고.’ ‘그럼 형님 말씀은 저것들이 저를 이용해 뭔가를 꾸미기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접근했다는 뜻인가요?’ 검황 어르신과 남궁소저라는 호칭은 어느 순간 비담의 생각에서 저것들로 변경되었다. 그만큼 비담 내부로부터 억울함과 분함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십 중 십. 정확히 너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그런 것인지 아직 알 순 없지만 치밀하게 계획하고 접근한 것만은 사실이다. 최음제가 동네 의원에서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닐뿐더러 현경의 무위와 흡정색공을 익히고 있는 너를 보내버릴 정도의 약효라면 최상급의 최음제일 텐데 보통의 재료들론 어림없는 일이지. 분명 사전에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검황이라는 명성이나 위치로 보았을 때 평소 지니고 다니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이고, 설마하니 일반인을 상대로 고가의 희귀한 약재들을 혼합하지는 않았을 터. 분명 낙양에 와서 구하거나 아님 직접 조제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최음제의 성분이 중화됨과 동시에 네가 다시 혼절한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성분은 최음제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다량의 미혼제 역시 술에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우라질 영감탱이랑 간사한 년을 봤나. 그리 선한 얼굴을 하고 공명정대, 예의염치를 논해? 확 그냥 그놈의 잘난 아가리를 찢어놓고야 말리라.’ 비담은 색성 체면에 그깟 최음제에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함정에 빠져 자신이 그들의 더러운 음모에 이용당할 수도 있었다는 길천의 말에 노발대발 길길이 날뛰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남궁소미를 잘근잘근 씹어 먹기 위해 뛰쳐나갈 기세였다. 그런 선불 맞은 멧돼지를 진정시킨 건 역시나 노련한 길천의 한마디였다. ‘네 녀석의 달랑거리는 하물 온전히 보전하고 싶으면 그만 지랄하고 우선 앉아. 지금 뛰쳐나가봐야 몸통은 구경도 못하고, 기껏 깃털 몇 개 얻는 것이 고작이니까.’ ‘예? 깃털이요?’ ‘그래 임마. 이만한 일을 겪어놓고 깃털 몇 개 뽑는다고 치미는 울화가 사라지냐? 진득하니 헝클어지고 흐트러진 조각들을 짜 맞추어 몸통을 찾아야지. 그런 다음 가루가 될 때까지 부셔버려야 속이 좀 풀리고 뒷맛이 개운한 거야. 알겠냐?’ 차분하게 타이르는 길천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비담이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침상에 걸터앉았다. 비담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길천이 흐뭇한 마음에 칭찬 한마디 던져주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게 많이 진중해지고 마음도 빨리 다스리네. 좋아, 그럼 우선 흩어진 조각들부터 모아보자고. 모름지기 어떤 일이나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는 그 뼈대가 존재하는 법이지. 이것을 유식한 용어로 ‘범행요건’이라고 한다. 이 범행요건은 크게 시간, 장소, 인물, 동기, 목적의식 정도로 나눌 수 있다.’ ‘형님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주세요.’ 83화 ‘나도 이거 배우고 이해하느라 관리들 비위 엄청 맞추고 고생했는데 어쩔 수 없지. 동생을 위해서니 기꺼이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주마. 뭐 조금 어폐가 있긴 하지만 여인과의 교합에 비유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 같으니 대충 감만 잡거라. 그럼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된다. 먼저 여인이랑 그 짓을 할 때 훤한 대낮이 좋냐? 아님 아늑한 밤이 좋냐?’ ‘그야 밤이죠.’ ‘그게 시간이다. 다음. 그럼 아늑하고 포근한 침상 위에서 그 짓을 할 때랑 자갈밭 위에서 할 때랑은 어디가 더 좋겠냐?’ ‘에이, 당연히 아늑하고 포근한 침상 위가 더 좋죠.’ ‘그게 장소고. 다음으로 젊고, 예쁘고, 아리따운 여자랑 하는 게 좋으냐? 아님 관까지 이미 다 짜놓은 쭈그렁 늙은 할망구랑 하는 게 좋으냐?’ ‘지금 장난치세요? 당연히 젊고 예쁜 처자가 백번 낫지요. 저를 어떻게 보고 늙은 할망구에다 가져다 붙이세요?’ ‘그게 인물이야. 다음으로 사내들이 여인들이랑 그 짓을 왜 하지?’ ‘당연히 하면 좋으니까 하는 거죠. 그건 그렇고 늙은 할망구 싫다니까요?’ ‘그게 동기다. 마지막으로 이제 사랑이나 열정도 다 식어버린 아내 위에 올라타 의무감으로 그 짓을 할 때랑 비싼 돈을 지불하고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기녀 위에 올라타 그 짓을 할 때랑 어떤 게 더 짜릿하고 좋을까?’ ‘돈을 지불한 기녀랑 할 때 더 짜릿하고 좋겠지요.’ ‘그게 목적의식이라는 거야. 이제 이해가 되냐? 범죄나 음모, 계략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품을 팔아 남의 뒤통수를 치고, 뭔가를 벗겨 먹으려면 그만큼 효과적이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방법들을 찾을 수밖에. 그럼 방금 여인의 교합 시 언급했던 항목들을 이번 사건에 대입시켜 사실과 가정으로 나누어 간추려 보자고. 우선 젊고 이용가치가 높은 너를 향해 달려든 사냥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위기에서 구해줬다는 핑계로 술자리를 마련하여 최음제와 미혼제를 탄 남궁가의 늙다리 놈과 젊은 년, 그리고 너랑 교합한 후 하물을 잘라버리겠다며 손톱의 날을 세우던 독한 년. 이렇게 두 부류지. 그런데 독한 년이 너희 하물을 자르려 했던 것으로 보아 남궁가의 것들하고는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너를 회유하고 끌어들이려 했다면 하물을 자르는 무리수를 둘리 없을 테니까. 그래서 두 부류로 나눈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는 이곳 고풍루이고, 적절한 시점에 늙다리가 회의를 핑계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멀쩡하던 네가 쓰러졌는데 아마도 자리를 벗어난 늙다리가 새로 들어온 술병에다 뭔가 수작을 부려 놓은 게 틀림없다. 그럼 앞뒤 정황이 맞아 떨어지지. 동기는 너를 얻어 뭔가 일을 꾸미고 싶어서 일 테고,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아침에 네 옆에 누워있는 것도 과감히 감수한 젊은 년이다. 그런 다음 질질 짜며 뛰쳐나갔지. 아침까지 남궁가의 젊은 년이 너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은 계획이 성공했다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뻔뻔한 얼굴로 아침에도 너를 궁지로 몰아붙였던 것이지. 그런데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남궁가의 년놈들과 연관이 없는 독한 년이 중간에 등장했냐는 것이지. 당연히 최음제를 먹인 당사자인 남궁가에서 네 욕정을 해소시키기 위해 방비를 해 놓았겠지만 독한 년은 아니었을 것이란 게 내 추측이고 생각이다. 그럼 여기서 또 모순이 발생한단 말이지. 남궁가의 년놈들이 마련한 계획을 중간에 독한 년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단 말인데 어째서 남궁가의 젊은 년이 그리 가증스런 얼굴로 아침에 연극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럼 두 부류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럼 하물을 자르겠다고 한 독한 년의 말을 납득할 수 없고. 결국 드러난 정황만 놓고 보았을 때, 이번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이 모순을 해결해야만 사건의 진실과 진짜 배후의 인물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뛰쳐나가려는 너를 붙잡았던 것이야.’ ‘그러니까 형님 말은 어울리지 않는 두 부류가 섞였음에도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모순과 도대체 두 부류가 저에게 무슨 목적으로 접근한 것인지를 알아내야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두 부류의 인물들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으니 열어 두자고. 결국 남궁가의 년놈들은 애초의 목적을 위해 자네에게 또 다시 접근할 것이고, 독한 년 역시 자네 하물 운운하며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네. 결국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기어들어가고, 여인을 안고 싶으면 구멍의 위치를 찾아 정확히 찔러 넣어야지. 자네의 하물이 잘리지 않고 이번 사건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천운일세. 저들은 자네가 깜박 속은 줄로만 알고 있을 테니 속아주는 척 역이용해서 저들의 목적과 정체를 알아내게. 그런 다음 자네를 건드린 대가를 몸소 치르게 해줘야만 두 다리 뻗고 잠이 오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순진무구한 가면을 쓰고 저것들 뒤통수를 날릴 때까지 기다려야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