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32편 (32/62)
“오해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오라버니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이번에 세가에 불미스러운 일이 좀 있었어요. 작은아버지가 사도련의 꼬임에 넘어가 한바탕 난리가 났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증조할아버지가 그 같은 정황을 사전에 파악하시고 일이 불거지기 전에 잘 막으셨죠. 하지만 공교롭게도 누군가를 찾겠다며 이상한 놈팡이 하나가 세가를 휘저으며 쑥대밭으로 만들었지 뭐예요.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요절을 내버리고 싶었지만 증조할아버지께서 좋은 수가 생각나셨다며 저를 말리셨어요. 그런 다음 그 놈팡이 녀석과 협상을 하신 후 여기 낙양까지 동행하게 되었죠. 그리고 오라버니를 만나러 오기 직전에야 증조할아버지의 세부적인 계획들을 듣게 되었답니다. 그 자를 전면에 내세워 사도련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오정회의 힘을 결집시켜 그자들의 뒤를 치는 계획 말입니다. 5년 전 정사대전 때 저희 오정회가 당했던 대로 그대로 돌려줘야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 하셨지요. 그렇게 하려면 우선 그자를 회유하여 저희들의 충실한 꼭두각시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저를 이용한 미인계가 필요한 것이고요.” “네 말을 들으니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구나. 그런데 정녕 그자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 것이더냐?” “제가 보았을 때에는 그자의 무공이 조금 고강하다는 것 외에는 특출난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의 안목이라면...” “하기야 검황 어르신의 안목이라면 믿어야 되겠지.” “그래서 말인데 저를 좀 도와주세요, 오라버니.” “알았다. 무슨 일이든 두 팔 걷어붙이고 도울 것이니 말만 하거라. 사도련 그 간악한 자들을 무림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상관없다.” ‘역시 천 오라버니는 믿음직스러운 내 남자야. 장차 무림을 이끌어갈 오라버니께 날개를 달아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의기 넘치는 모용천의 모습에 감흥을 받은 남궁소미가 거듭 자신의 각오를 다졌다. “그럼 세부적인 계획을 말씀드릴게요. 사흘 후, 그 비담이란 자와 제가 백마사로 유람을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증조할아버지께서 잘 주선해준다 하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연후 인적이 드문 적당한 장소로 제가 그자를 유인할 것이고, 그곳에서 잠시 볼일을 해결한다는 핑계를 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럼 오라버니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셨다가 저를 겁탈하려는 시늉만 한 후 그자가 도착하기 전 도주하시면 됩니다.” “내가 너를 겁탈한다?” “그렇습니다. 그자의 무공수위가 높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셨다가 재빠르게 도주해주세요. 그럼 제가 적당히 옷매무새를 헝클어트려 그와 같은 정황이 벌어졌음을 간접적으로 알리고 그자에게 거듭 사의를 표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돌아와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증조할아버지께서 그자에게 술상을 대접할 것이고, 기회를 틈타 할아버지께서 특별히 제조하신 약을 그자의 술잔 속에 몰래 타 넣을 것입니다.” “검황 어르신께서 특별히 제조하신 약이라면...” “순간적으로 인사불성이 되는 미혼제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최음제도 섞어 그자가 여인을 덮치게끔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자가 너를 덮친단 말이냐?” “설마 증조할아버지께서 자신의 친증손녀를 그런 불한당 같은 놈에게 덥석 던지시겠어요? 당연히 저와 비슷하게 생긴 기루의 기녀 하나를 섭외해야지요. 그자는 미혼제에 취해 사리분별력도 떨어질뿐더러 기녀를 적당히 꾸미면 저 인줄 착각하고 덥석 끌어안은 채 뒹굴 것입니다. 그럼 저는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교합이 끝나고 그자가 잠이 들면 그 기녀와 바꿔 누우면 된답니다. 미혼제의 후유증으로 그 자는 간밤에 자신이 나를 안았다 착각할 것이고, 저는 그자의 심사가 복잡한 그 순간에 눈물 몇 방울 살포시 떨궈주고 말없이 방을 뛰쳐나가면 모든 계획은 끝나는 것이지요. 호호, 어때요?” “역시 검황 어르신의 지략은 무섭구나. 그럼 그 자는 너에 대한 죄스러움과 미안함에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겠어.”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럼 저는 그자의 애간장을 살살 녹여가며 마음껏 뒤에서 조종해야지요. 적당히 거리를 둔 채로 말입니다. 호호호.” “하하, 그럼 나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구나. 그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말이야.” “만반의 준비요? 오라버니께서 따로 준비하실 것은 없는데...” “아니지. 너를 겁탈하는 시늉을 하려면 제대로 연습을 해야지. 이렇게 말이다.” “꺄악! 오라버니도 참.” 모용천의 손이 남궁소미의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자지러지는 교성을 토해내며 그대로 숨을 헐떡였다. 77화 한동안 대화를 나누느라 잠잠했던 방안에 다시 열락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달마저 구름 뒤에 숨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엉켜있는 두 남녀를 말없이 지켜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눈동자의 주인은 바로 남궁소미의 뒤를 따라왔던 객잔의 점소이 아삼이었다. 소리와 기척도 없이 언제 방안으로 스며들었는지 천장의 대들보 위에 몸을 숨긴 채 두 남녀의 뜨거운 정사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피가 끓는구나. 마음 같아선 저 요망한 사내의 하물을 당장 잘라버리고 싶지만 당분간 참는 수밖에. 그리고 사내에게 안겨 숨을 헐떡이는 꼴이라니. 네 년의 처지도 정말 한심스럽구나. 그나저나 요망한 년놈들이 어디서 내 사냥감에 먼저 침을 바르려고. 호호, 내가 계획을 다 들은 이상 호락호락 그 녀석을 넘겨줄 수야 없지.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이번 기회에 몸소 체험하게 해주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한순간 눈을 스산하게 빛낸 아삼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중얼중얼 읊었고,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그림자가 쭉 길어지더니 미끄러지듯 방밖으로 흘러나갔다. 다음 날 아침. 모용천과 밤새 오붓하고 뜨거운 시간을 보낸 남궁소미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객잔에 돌아왔다. 늘 보아왔던 주변의 경치나 사물들이 오늘 따라 유독 아름답게 보이는 남궁소미였기에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객잔주인을 향해 인사까지 건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너무나 아리따운 아가씨가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객잔주인은 아침 내내 아삼을 잡느라 소모되었던 기력이 한방에 채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영문도 모른 채 쥐 잡히듯 잡힌 아삼 역시 옆에서 그 기운을 나눠받으며 언제 혼났냐는 듯 벙글벙글 웃음 지었다. 남궁소미는 아침 댓바람부터 헤벌쭉 입을 벌리며 침을 질질 흘리는 사내들을 뒤로 한 채 발걸음도 가벼이 증조할아버지가 묶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증조할아버지, 저 소미예요. 들어가도 되요?” “들어오너라. 그나저나 아침부터 뭘 삶아먹으면 너처럼 기운이 넘치는지 무척 궁금하구나.” “어제 밤부터 삶아 먹었는걸요? 헤헤, 농담이에요. 사실은 늘 마음에 두고 있던 천 오라버니의 마음을 드디어 얻었거든요. 그래서 이리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하고 가볍나 봐요.” “하하, 할아버지의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이게 다 증조할아버지 덕분이에요. 고맙습니다.” 쪽 남궁소미는 한껏 고무된 기분에 증조할아버지의 볼에 살짝 입맞춤까지 해주었다. 남궁헌수 역시 너무나 기뻐하는 증손녀의 모습을 보며 함께 너털웃음을 터트려 주었다. “허허허, 천이 덕분에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호사를 누리는구나. 그나저나 말만한 처자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느라 외박까지 하고. 나중에 네 아비를 어찌 보라고 그리 경거망동 하는 게야?” “치, 그거야 증조할아버지랑 저만 아는 비밀로 하면 되지요. 그리고 이번 일을 꾸미신 것은 증조할아버지시잖아요.” “하여튼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구나. 그건 그렇고 천이에게 이야기는 하였느냐?” “네, 오라버니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고 저랑 약조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계획대로 하면 될 것 같아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나. 내심 그녀석이 어찌 나오나 걱정했는데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어.” “호호, 모두 제 탁월한 미모 덕분이지요.” “아무튼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으련만. 그만 종알종알 지저귀고 내려가서 아침이나 들자구나. 엉큼하고 고얀 증손녀 기다리다가 할애비 등가죽이 배에 들러붙으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요 녀석아.” “헤헤, 제가 모실게요. 어서 내려가서 맛있는 아침 드셔야죠.” “참, 비담 앞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말고 조심 또 조심해야 된다. 명심하거라.” “알았어요. 제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각별히 주의하고 조심할 테니 그만 걱정하세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을 먹기 위해 다정스럽게 내려가는 두 사람이었다. 남궁헌수와 남궁소미가 1층에 자리한 식당에 도착했을 때 비담은 점소이 아삼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자네도 장가가려면 이 기술을 익히는 것이 좋다니까. 내 특별히 공짜로 가르쳐 준대도 그러네.” “정말 그런 기술이 존재합니까요?” “당연하지. 이 기술만 익히면 장안에 내로라하는 미녀들이 죽자고 덤벼든다니까.” “허허허, 세상에 그런 기술이 존재하는가?” 잔뜩 호기심이 동한 남궁헌수가 중간에 끼어들며 물었다. 눈치 없는 불청객으로 인해 비담은 중간에 말을 멈추었고, 아삼은 천고의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무척 아쉬워하였다. “하하,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기술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아침부터 아삼이 잔뜩 풀이 죽어 다니기에 그냥 실없는 농담을 던졌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잘 잤네. 아침은 들었는가?” “방금 먹었습니다. 그나저나 전 어르신께서 손녀분과 이미 드신 줄 알았는데 아직 식사 전인가 보네요?” “하하, 그렇게 됐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전 선약이 있어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알았네. 자네도 잘 다녀오게.” 살짝 목례를 취한 비담이 객잔 밖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남궁헌수는 걸어 나가는 비담의 등을 눈으로 쫓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하늘이 돕는구나. 안 그래도 녀석을 옭아맬 덫을 준비하자면 사흘이라는 시간이 무척 촉박했는데 저리 아침 댓바람부터 나가주니 고마울 따름이지. 그럼 아침을 먹는 대로 바로 약을 제조할 재료들을 마련하고, 소미와 닮은 기녀를 물색해봐야겠군. 그리고 사전답사를 위해 백마사 근처에도 미리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남궁소미와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남궁헌수는 곧바로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항목들을 점검하며 차근차근 준비에 착수했다. 남궁소미 역시 최대한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며 검황을 도왔다. 그렇게 사흘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두 조손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도 모른 채 비담은 흑막주 이성보와 선화를 대신해 취선루의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을 대신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달리 오늘 아침만은 선약을 핑계로 객잔을 나서려는 비담을 남궁헌수가 불러 세웠다. “자네 오늘도 선약이 있는가? 혹시 매우 중요하고 급한 약속이 아니라면 오늘 하루만 잠깐 내 부탁 좀 들어주면 안 되겠는가?” “예? 부탁이요? 뭐 급한 선약은 아니지만...우선 말씀해 보십시오.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만 않는다면 선약을 잠시 미룰 수도 있으니까요.” “고맙네. 다른 게 아니라 낙양에 도착하면 내가 꼭 백마사(白馬寺)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소미와 단단히 약조를 하였는데 글쎄 급한 일이 생겼지 뭔가. 그래서 급히 다녀왔으면 좋겠는데 나를 대신해 자네가 소미를 데리고 백마사에 다녀오면 안 되겠는가? 다른 날로 미루자 하여도 기대가 컸었는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서 내 마음이 편치 않구먼. 물론 자네의 선약이 중요하고 먼저인 것은 내 알지만 혹시라도 시급을 다투는 약속이 아니라면 잠깐 다녀 와 줄 수 없겠는가?” “백마사라면 낙양 근교의 유서 깊은 절 아닙니까?” “맞네. 최초의 불교사원이라 고풍스럽고 멋있다 내가 자랑을 한 것이 그만 화근이 되고 말았지.” “그러게요. 저 역시 풍문으로 듣고 한번쯤 가보고 싶다 여겼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갈 생각에 들떠 있던 남궁소저의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남궁소저의 실망감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군요.”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자네에게 이리 부탁하는 걸세. 그 녀석이 내색은 안 해도 무척 실망한 눈치야. 한 두시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떻게 안 되겠나?” 애절한 눈빛으로 호소하는 남궁헌수를 대하자 비담은 쉬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물론 조손간에 오붓하게 구경하려던 것이 어긋나버린 현재의 상황에서 자신이 나선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장 남궁헌수가 노심초사 걱정하니 그거라도 해소해주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두시진이라면 크게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아니었기에 백마사에 다녀와 취선루의 일들을 처리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78화 비담은 이제나저제나 자신의 입만 쳐다보며 기다리는 남궁헌수를 향해 웃으며 승낙의 말을 건네었다. “알겠습니다. 제 약속은 잠시 미룰 수 있으니 어르신의 부탁대로 제가 남궁소저를 모시고 백마사에 다녀오겠습니다. 저 역시 백마사를 한번 구경하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고맙네. 고마워. 내 오늘 일은 잊지 않고 술상 한번 마련하여 대접하겠네. 그럼 올라가 소미에게 말할 것이니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게.” 비담의 대답을 들은 남궁헌수가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고, 일각 후 표정이 어느 정도 풀린 남궁소미를 데리고 나타났다. 할아버지를 대신해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남궁소미는 비담을 향해 생긋 웃으며 사의를 표했고, 둘은 그렇게 백마사로 향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마차에 오른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마사에 도착하였고, 산책하듯 사원 내를 둘러보았다. 입구에 세워진 백마 상도 구경하고, 크기가 어마어마한 동종(銅鐘)하며 원대(元代)에 조각됐다는 나한상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거듭 탄성을 지르며 둘러보았다. 그렇게 두 시진이 흐르고 객잔 주인이 준비해준 음식까지 맛있게 먹은 둘은 다시 마차에 올라 돌아올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마차에 막 올라선 남궁소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얼굴을 붉히며 무슨 말인가를 하기위해 주저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비담은 계속 주저하는 남궁소미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계속 말을 하시려다 망설이시니 걱정이 되는군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편안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 그게 갑자기 요의(尿意)를 느껴서요. 너무 급한데 둘러봐도 마땅한 장소도 없고, 말씀드리는 것도 부끄러워 차마.” “하하, 당연한 생리현상인 것을요. 그나저나 정말 둘러봐도 적당한 장소가 눈에 띄지 않는군요. 사원 안의 측간을 가자니 너무 멀고, 이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라 마땅치 않고. 이럴 게 아니라 우선은 마차에 오르시고 조금만 참으십시오. 길가를 가다 적당한 장소가 발견되면 마차를 세우라 하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배를 움켜쥔 남궁소미가 얼굴을 붉힌 채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남궁소미는 다급한 와중에도 마차에 오르며 마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고, 마부 역시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껌뻑 숙이고 바로 말들을 채근하여 속도를 올렸다. 그렇게 쭉 뻗은 관도를 시원하게 달리던 마차는 적당히 수풀이 우거진 야산의 초입에서 멈추었고, 양해를 구한 남궁소미만 내려 후다닥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데 남궁소미가 수풀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뾰족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가로이 볼일을 보러간 그녀를 기다리며 마차에 앉아있던 비담은 화들짝 놀라 마차의 문을 그대로 부셔버린 채 뛰쳐나갔고, 비명이 들려온 장소를 향해 바로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비담은 헝클어진 옷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는 남궁소미의 모습에 침음성을 삼켰고, 이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신의 기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의문의 물체 하나가 그의 기감에 포착되었다. 비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바로 몸을 날리기 위해 용천혈로 엄청난 내공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몸을 날리려는 절묘한 순간 자신의 다리를 잡은 남궁소미로 인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쪼, 쫓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공자님께서 제 비명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와 주셔서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넘겼습니다. 볼일이 급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음적 하나 잡으려 공자님의 공력을 소모하지 마십시오.” “하, 하지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 음적을 어찌 내버려둡니까? 더군다나 검황 어르신께서 저를 믿고 아가씨와의 동행을 부탁하신 것인데 이런 일이 생긴데 대한 책임을 져야지요.” “제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책임을 다하신 걸요. 여기서 저 음적을 잡겠다 달려가셨다가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나중에 공자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다행히 옷만 조금 헝클어졌을 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으니 그냥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가씨를 보호해드리지 못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였으니 못내 죄송하고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공자님께 죄스럽고 미안합니다. 제가 혼자서 수풀에 들어가서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의연하게 말하며 옷매무새를 바로 하는 남궁소미를 보며 비담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역시 명문가의 여식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음적에게 겁탈을 당할 뻔 했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다니. 그나저나 남궁소저야 볼일을 보느라 방비가 허술했으니 이해가 되는데 도주하는 속도로 보았을 때 일개 음적의 무공실력이 보통이 아니란 말이지. 잠깐 시간을 지체한 것뿐인데 그새 내 감각 안에서 사라졌다는 게 말이 되나. 하기야 음적질 하기위해 죽어라 경공만 익혔을 수도 있고.’ 다시 본래의 신색을 되찾은 남궁소미가 고개를 이리저리 틀며 생각에 빠진 그를 빤히 응시한 채 재촉하였다. 남궁소미의 재촉에 비담도 무심코 이어지던 생각들을 뇌리 구석에 쑤셔 박고 다시 마차에 몸을 실었다. 남궁소미는 마차 안에서 거듭 사의를 표함과 동시에 비담을 한껏 띄워줌으로써 비담의 생각이 원활히 이어지지 않도록 교묘하게 방해를 하였다. 객잔에 돌아온 비담은 많이 놀랐을 남궁소미를 위해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하고, 거기에 당부의 말까지 더했다. “소저께서 저를 배려해 별일 아니라 말씀해주셨지만 그래도 무사이기 전에 한 여인으로서 오늘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을 당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보살핌으로 큰 일이 생기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지만, 그래도 많이 놀라고 두려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방에 올라가 푹 쉬고, 더불어 심신을 안정시키십시오.” 진심이 가득 담긴 비담의 말에 남궁소미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자신의 고마움을 대신하였다. 비담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휘청하는 남궁소미를 부축하여 방까지 데려다 주었고, 침상에 누워 잠이 든 것까지 확인한 연후에 취선루로 향했다. 비담이 나간 것을 확인한 남궁소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증조할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비담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취선루에서 필요한 일들을 묵묵히 처리한 후 객잔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남궁소미가 걱정이 되어 그녀의 방부터 찾아가 보았는데 그곳에는 남궁헌수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잠든 남궁소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어르신...?” 비담의 부름에 남궁헌수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혹여 잠든 손녀가 깰까 조심히 몸을 일으킨 후 어정쩡하게 서있는 비담을 데리고 객잔의 1층으로 내려왔다. 남궁헌수와 마주앉은 비담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오늘 남궁소미가 겪었을 고초가 못내 미안하고 죄스러워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모기만한 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였다. “면목 없습니다, 어르신. 저를 믿고 손녀 분을 부탁하셨는데 하마터면 씻지 못할 큰 죄를 저지를 뻔 했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그리 말하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지. 좀 전 잠에서 깬 소미에게 모두 들었네. 그래도 자네가 소미의 비명소리를 듣고 재빨리 와준 덕분에 끔찍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리고 방금 다시 잠이 들었는데 계속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잠꼬대로 하더군. 소미도 자네가 재 때에 달려와 준 것이 무척 고마웠던 모양이야. 그러니 더 이상 마음 쓰지 말게나. 그리고 손녀가 저리 무사한 것은 모두 자네 덕분이니 오히려 고마움을 표할 사람은 우리일세. 진심으로 고맙네.” 무림의 까마득한 후배를 향해 남궁헌수는 최대한 예를 갖추어 포권을 하였다. 안 그래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전전긍긍하던 비담은 남궁헌수의 갑작스런 행동에 더욱 당황하여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