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호색 -완 - 27편 (27/62)
가끔은 적당히 즐기기도 하고 삶의 환희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도 괜찮답니다. 뭐 조금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 중에 한 가지를 맛보셨으니 다행이지요.” “하하하, 자네는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한 구석이 많단 말이야. 이럴 때 보면 꼭 세상 살 만큼 산 노인들이 손자들 앉혀 놓고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니.” “후후, 형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실 제 상단전에는 형님께서 말한 그런 분이 머물고 계시다는 것을요.” “아! 내가 깜빡했구먼. 도색성 길천 어르신이라 했는가? 어떤 분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분임에는 틀림없으이. 이번에 남녀 간의 일을 겪으며 그분의 발상이 얼마나 뛰어나고 대단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네. 그리고 천마 할아버님과도 같은 시대를 사셨다고 하니 더욱 궁금해지는구먼.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인사를 드려야 되겠어. 무림의 후배로서 당연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알겠습니다. 아마 어르신께서도 형님의 인사를 흔쾌히 받으실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자리를 마련하지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아침을 함께 든 비담과 인철은 곧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이동하였다. 흑막주 이성보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길 기다리며 취선루에서의 생활은 이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었다. 부족한 잠은 오전에 해결하였고, 오후에는 빙루와 함께 바깥나들이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밤이 찾아오면 인철은 기녀를 상대로 열심히 기술들을 연마하였고, 비담 역시 빙궁과 까망이들을 상대로 드잡이 질하며 탕진한 내공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선화와 동침을 하며 색기를 내공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벼룩도 낯짝이 있던 터라 비담은 자신이 지닌 전낭을 마음껏 풀어 가급적 취선루의 살림엔 누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진 그렇게 아무런 근심 없이 일주일이란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달콤한 잠에 빠져있던 비담의 방으로 헐레벌떡 찾아온 선화가 한 통의 서찰을 내밀었고, 비몽사몽 눈을 부비며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비담의 정신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확 깨고 말았다. “언제 도착한 것입니까?” “방금 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아무래도 형님과 상의를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 여기 머물러 계십시오.” 비담 역시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 곤히 잠들어 있는 인철을 인정사정없이 깨웠다. 정신없이 꿈나라를 헤매고 있던 인철 역시 탱탱 부은 눈을 힘겹게 떠 다짜고짜 내밀어진 편지를 읽어 내려갔고,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이게 정녕 사실인가?” “선화가 저리 당황한 모습은 처음입니다. 선화의 상태를 보고 짐작하건대 흑막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서라도 선화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서 제 방으로 가시지요.” “그게 좋겠군. 나 역시 신세를 졌으니 의당 보답을 해야겠지.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가보세.” 옷매무새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한 인철이 서둘러 비담을 따라 나섰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방안을 서성이던 선화가 나타난 비담과 인철을 향해 애원하였다. “도와주십시오. 막주님께서 큰일을 당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비담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애원하는 선화를 달랜 후, 인철과 차후의 일들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제가 가늠해본 막주님의 실력이라면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충분히 자신의 몸 하나쯤은 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꼬리를 잡혀 쫓기고 있다면 쫓는 자들의 실력이 수준급임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부실하여 정확한 상황을 알 수도 없고, 매우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이니 우선 빙소저와 까망이들은 이곳 취선루에 남겨두고, 저랑 형님만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게 좋을 것 같구먼. 여럿이 움직이면 기동성도 떨어질뿐더러 상황대처 능력도 떨어지지. 그리고 그런 위험한 곳에 무공도 모르는 빙소저를 데리고 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언제 출발하면 좋겠는가?” “지금 당장 출발하지요. 까망이들에게는 빙소저를 잘 보호하며 기다리라 하십시오. 그리고 선화도 당분간 취선루의 문을 다시 닫는 게 좋겠어. 만에 하나 막주님의 정체가 탄로 나게 되면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니 문을 닫고 잠시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게 상책이지.” 모든 상황을 빠르게 정리한 비담이 인철과 함께 서둘러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자신을 위해 물심양면 도와주고 각별히 편의를 봐준 막주에게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빛의 속도로 쏘아져가는 비담과 인철에게선 누구 하나 지난 일주일간 보여주었던 흐트러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이를 앙다문 둘의 모습에선 강한 분노와 적개심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선화 역시 비담이 시킨 대로 서둘러 취선루의 업무들을 정리하고, 일꾼들 역시 특별휴가를 주어 돌려보낸 후 다시 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까망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빙루와 흑막의 주요 인사들만 대동한 채 안가로 몸을 피했다. 무사히 안가에 도착한 선화는 품안에 고이 간직해둔 편지를 꺼내어 보았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이성보의 편지에선 제대로 형체를 갖춘 글씨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급 전 남궁세가에 스며든 불순한 무리의 움직임 포착. 가주의 둘째 동생인 창천검(蒼天劍) 남궁현호와 끈이 닿은 것으로 보임. 이미 포섭되었을 가능성도 높음. 불순한 무리와 창천검의 추종세력들이 엄청난 계략을 꾸미고 있으나 아직 불분명. 창천검과 그 추종세력들의 움직임을 조사하던 중 정체불명의 복면괴한들에게 쫓기고 있음. 등하불명(燈下不明)의 책략에 따라 다시 남궁세가로 잠입하겠음. 만약 3일 안에 추가의 전서구가 도착하지 않으면서둘러 막을 정리하고 어둠 속에 숨기 바람. -주(主)- 선화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이 편지에 떨어져 퍼져나갔다. ‘아버지, 공자님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제발 무사하셔야 돼요.’ 64화 제 8 장 남궁세가(南宮世家) 안휘성 천주산에 위치한 남궁세가의 본가. 지붕위에 납작 엎드린 채 다급하게 뛰어가는 한 인영을 눈으로 쫓는 의문의 그림자들이 있었다. “세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찌할까요?” “후후, 쥐새끼 한 마리 잡자고 그동안 공들여 지었던 집을 홀랑 태워먹게 생겼구나. 귀풍대(鬼風隊)에선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었느냐?” “녀석이 교묘하게 흔적을 지우고, 교란하여 그동안 애를 먹었으나 결국 이곳으로 다시 숨어들어온 정황증거를 포착하였다는 보고가 방금 들어왔습니다. 세가의 규모가 방대하여 숨은 위치를 정확히 찾는데 시간이 조금 소요되겠지만 곧 꼬리가 잡힐 것 같다고 하옵니다.” “어떤 녀석인지 정말 애를 먹이는구나. 잡히면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세가의 움직임은 그냥 내버려둔다. 련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무림전복지계(武林顚覆之計)’가 조금 앞당겨 지겠지만 세가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무너지는 것은 예견되었던 일. 우리는 귀풍대의 보고가 올라올 때까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본다.” “복명!” 복면을 한 괴한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나며 다시 지붕위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명을 내린 사내는 무림을 뒤집어엎을 거대한 파도를 상상하며 음침하게 웃었다. 전각 앞을 정신없이 뛰어가던 사내는 가주가 머물고 있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더니 침상의 한 쪽 귀퉁이를 돌린 후 드러난 공간으로 잽싸게 몸을 던졌다. 사내를 삼킨 침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의 자리로 미약한 소리와 함께 원상복구 되었다. 의문의 사내는 일렁이는 횃불에 의지한 채 좁다란 통로를 따라 끊임없이 걸었고, 곧 조그마한 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똑똑 똑똑똑 일정한 음률에 맞춰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도 화답하듯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 사내는 문안으로 몸을 던졌다. 사내가 들어선 방에는 이미 어른 10명 정도가 둥글게 원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문사건을 단정히 쓴 40대 중반의 남성이 들어온 사내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그 자의 상태는?”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허나 워낙 깊은 상처를 입어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그래, 그자가 가지고 있다는 치부책은 회수하였느냐?” “그것이 아직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세가를 벗어나 도망가는 와중에 의문의 괴한들에게 쫓긴 듯 보이고, 그 와중에 어딘가에 숨겨놓은 것 같습니다. 지금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지라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아니다. 그래도 그자가 목숨을 건졌다니 한 줄기 희망은 보이는구나. 만약 그와 같은 치부책이 저들의 손에 넘어가거나 정도맹의 손에 넘어간다면 세가는 다시 일어설 기반조차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한낱 꼭두각시가 되어 더러운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게 될 것이야. 그자가 깨어나는 대로 이유 불문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것을 회수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가주님.” “고생했다. 돌아가 쉬어라. 참, 현호와 창궁대, 더불어 정체모를 더러운 녀석들이 세가 곳곳에 숨어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을 것이니 각별히 주의해서 이동하여라.” “알겠습니다, 그럼.” 검례를 취한 사내가 서둘러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고, 방안에 남은 사람들은 깊은 한숨과 함께 꼬여버린 세가의 운명에 대해 개탄을 하였다. “가주, 그나저나 이제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직은 저도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현호와 그 녀석이 데리고 있는 창궁대를 상대하기에도 벅찬 마당에 그동안 어둠속에 숨어 세가를 좀먹었던 쥐새끼들이 호시탐탐 뒤를 노리고 있으니...휴우!” 방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가주 남궁현탁의 시름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 역시 동화되어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장으로썬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봅시다. 현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는 하나 설마 혈족을 향해 칼을 들이대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요.” 세가에 드리워진 암운을 걷어내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회의를 거듭해온 가솔들은 가주의 말대로 우선은 기다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남궁현호가 늘 형의 그림자에 묻혀 분노를 표출하기는 하였으나 세가의 안위를 도외시한 채 혈족들을 상대로 막 나가지는 않을 것이란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비상대책회의를 하던 그 시각. 낙양을 떠난 비담과 인철이 천주산 끝자락에 막 당도하였다. “부리나케 달려온 보람이 있네요. 단 하루 만에 두 개의 성을 가로질러 오다니...” “휴우, 한 번은 쉬었다 가자 할 줄 알았는데, 정말 태어나 원 없이 달려본 하루였어.” “죄송합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중간에 쉴 수가 없었어요.” “후후, 그냥 해본 말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나저나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남궁세가에 한바탕 불을 지를 생각입니다. 그래야 꼭꼭 숨어있는 쥐새끼들이 튀어나올 것이고, 이성보 막주님께 집중된 이목도 분산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튀어나오는 대로 족족 편 가르기를 해서 막주님을 괴롭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줘야지요. 제가 시선을 분산시키는 동안 형님께선 막주님을 찾아봐 주십시오. 세가 어딘가에서 바깥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숨죽이고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 괜찮겠는가? 자네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네만 그래도 혼자 상대하기엔 세가의 저력도 만만치 않을 테고, 막주를 뒤쫓았다는 의문의 복면괴한들 역시 아직 이 근처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음, 이 상황에서 형님께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너무 걱정하시니 드려야 되겠네요. 저번에 국경지대에서 형님과 제가 신나게 싸웠을 때 제가 얼마의 능력을 사용했다 생각하시는지요?” “팔 할 이상의 능력을 썼다 여겼네.” 비담은 걱정스레 답하는 인철을 향해 방긋 웃으며 손가락 일곱 개를 펼쳐 보였다. “일곱?” “네, 형님의 자존심 상하실까 저어되어 말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는 싫었거든요. 저는 그 때 본신실력의 단 칠 할만을 사용하였습니다. 형님께서 무얼 걱정하시는지 충분히 알고 있고, 저 역시 서희를 생각해 모험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형님께서는 흑천맹 흑천대의 대주가 아니십니까? 저야 그저 무림의 떠돌이에 불과하여 무슨 사고를 쳐도 자유로이 빠져나올 수 있지만 형님은 위치가 위치인지라 잘못하면 정사대전으로 번질 소지도 다분히 높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형님이 전면에 나서시는 것보단 제가 혼자 나서서 들쑤셔놓고, 그 틈을 이용해 뒤에서 형님이 막주님을 수색하는 양동작전이 훨씬 효율적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일곱이라. 겨우 일곱의 능력만 사용한 자네와 팔 할의 실력을 사용한 내가 대등하게 싸웠다 이 말이지? 이거 형님으로서의 위신이 안 서는구먼. 지금은 상황이 이러니 나중에 오붓하게 한 번 더 붙기로 하고, 우선은 자네 말에 따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겠군. 하지만 나와 한 가지는 분명히 약조를 해주게.” “그게 무엇입니까?” “자네는 이제 자네 혼자의 몸이 아닐세. 자네가 어떤 상황을 우려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네만, 만약 몸 성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정말 제2차 정사대전이 벌어질 것이란 사실만 명심하고 떠나게. 알겠는가?” 비담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인철을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천애고아로 자란 자신에게 친 혈육의 정을 나누어주었던 스승님이 돌아가신 이후 가족처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준 이는 인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인철의 눈빛을 보았을 때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앞뒤 가리지 않고 큰일을 벌일 인철의 기세를 느끼며 비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맴돌았다. ‘가족이 옆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하고 좋은 거였구나. 외롭고 쓸쓸했던 그 길을 이제 더 이상 혼자 걸어가지 않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형님.’ “정사대전을 막기 위해서라도 더 몸조심해야겠네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허흠, 자네보다는 혼자 남게 될 서희가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너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게.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 “하하, 오해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그래도 형님이 정색을 하며 싫어하시니 이쯤에서 그만 헤어지지요. 혹시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모습 드러내지 마시고, 세 시진 후 여기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자기 할 말만 후다닥 끝낸 후 서둘러 자리를 뜨는 비담이었다. 어느새 점이 되어버린 비담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인철이 툴툴 웃었다. “후후, 싱겁기는. 아무튼 가족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매제.” 65화 인철 역시 비담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서로에게 내보이지 못했던 감정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둘의 모습을 배웅하였다. 남궁세가의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은 자신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는 인영의 모습에 당황하여 황망히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질수록 긴장도가 높아지고 막 부딪히려는 순간, 아찔한 속도로 질주하던 그림자가 거짓말처럼 자신들 앞에서 뚝 멈추었다. “누, 누구냐?” “손님인데요.” “뭐, 뭐라? 손님? 먼저 이름을 밝혀주십시오.” 언제 당황했냐는 듯 정문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비담이라 하는데요.” “미리 약속을 하고 방문하신 것입니까?” “예약을 해야 하나요?” “지금은 세가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누구를 막론하고 함부로 들이지 말라는 가주님의 엄명이 내려진 상태라 저희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니 협조해 주십시오.” “그럼 할 수 없지요. 손님이니 의당 방문한 곳의 법도를 따르는 수밖에요. 혹시 이곳에 창천검 남궁현호라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다행히 계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그분께 급히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요. 계시면 번거롭더라도 연통을 좀 넣어주십시오. 위에서 왔다고 하면 알아들으실 것입니다.” “위요?” “그렇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더 이상 숨거나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말하면 버선발로 뛰어 나올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우선은 그리 전하겠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문지기무사는 알쏭달쏭한 비담의 말에 강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기로 하였다. 괜히 윗사람들의 일에 미주알고주알 참견했다가 험한 꼴 당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비담이 한가로이 남궁세가의 편액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 무렵,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청년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나왔다. 비담은 험악한 인상의 청년을 바라보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후후, 이제 시작이구나. ‘불입호혈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란 말대로 한바탕 제대로 들쑤셔주마.’ “창천검 남궁현호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분의 휘하조직인 창궁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남궁성운이라 합니다. 그분의 장자이기도 하지요. 아버님께서는 지금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몸을 빼실 수 없다며 거듭 사죄의 말씀을 전하라 하셨고, 아울러 정중히 모셔오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저야 상관없으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럼 안내하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사온데...?” “그게 무엇이오?” “제가 듣기론 위에서 나오셨다 그러던데 정확히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여쭈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후후, 너무 많은 걸 알려하면 다치는 법이거늘.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모양이오. 뭐, 굳이 듣고 싶다면 가르쳐드리리다. 이곳의 이목과 상관없이 밝혀도 된다면 말이지요. 그래도 괜찮겠소?” “아,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언짢음을 거두시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럽시다. 때가 되면 자연히 밝혀질 일, 피차 서두르지 맙시다.” 남궁성운은 비담의 능수능란한 응대에 본전도 못 찾고 바로 길을 안내하였다. 뒤가 구릴수록 허점도 많은 법. 비담은 여유롭게 밀고 당기며 숨어서 계략을 꾸미고 있는 쥐새끼들을 제 풀에 놀라 튀어나오게 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미끼마다 주렁주렁 방울을 달아 가급적이면 요란하게 흔들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면 집중될수록 인철의 수색은 한결 수월해 질 테니까. 회랑을 따라 한참 걸어가자 가주의 집무실 못지않은 크기의 으리으리한 전각이 비담의 눈앞에 나타났다. 창천각(蒼天閣) 남궁세가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천뢰대(天雷隊)와 쌍벽을 이룬다는 무력집단, 창궁대(蒼穹隊)의 실질적 수장인 창천검 남궁현호가 머무는 전각이었다. 으리으리한 전각의 규모에서도 알 수 있듯 가주의 동생으로서의 위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세가의 특성상 혈족으로 이루어진 집단이고, 그러한 특수성 때문에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의 전통과 가문을 지켜내기 위해 몇몇 힘을 가진 혈족에게 힘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한 결속력과 탄탄한 무공을 바탕으로 세가는 험한 무림의 풍파 속에서도 가문을 지켜내었고, 지금은 그러한 힘의 균형이 가주인 남궁현탁과 둘째인 남궁현호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가의 전통과 불문율은 외부세력으로부터 가문을 지켜주는 튼실한 바람막이 역할도 하였으나 그에 따른 치명적인 약점도 내포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누군가 혈족을 배신하고 안에서부터 균열이 생겨 무너져 내리면 속수무책 당한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설마 가족을 배신하겠냐는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있기에 그러한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마찰 없이 이러한 구조가 유지되었으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세월이 흐르다보면 가족에게 칼을 겨누는 패륜아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거니와 늘 누군가의 그림자에 갇혀 열등감 속에 살아온 망나니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바로 남궁현호처럼 말이다.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른들로부터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형과 달리 늘 비교당하며 암울한 시절을 보내야했던 남궁현호.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남궁현호는 형을 이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단히도 무공을 연마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남궁현호의 무공은 나날이 성장하였고, 어느새 가문 안에선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가주인 아버지와 어른들은 무재(武才)가 뛰어날지언정 성정이 급하고 편협한 현호보다는 성품이 온화하고 배려심 많은 현탁을 차기 가주로 내정하였고,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형이 가주에 오른 순간부터 자신의 무력을 이용하여 암암리에 세를 불리던 남궁현호는 급기야 창궁대라는 친위대와 다름없는 무력집단을 창설하였고, 세가 내에서 순수하게 무를 쫓는 젊은이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