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41편 (41/43)
곽가량 자신도 거듭되는 격전과 내력의 소모로 이렇게 서서 입을 놀리는 것조차 조금은 힘겹게 느껴지지 않는가? 곽가량은 한 호흡을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발톱은 다시 자라는 법이지. 간혹 빠진 이빨이 나기도 하고. 그리고 어떤 호랑이의 발톱은 애초부터 빠지지를 않아." 위지광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곽가량은 냉랭히 그를 쏘아보기만 했다. 위지광은 한참을 웃다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 발톱이 빠지지 않는 호랑이라... 혹시 강산이라는 애송이를 두고 하는 말이냐?" 곽가량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위지광은 그런 곽가량을 측은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알려주마. 불쌍하게도 그가 떨어진 곳은 인면지주지관(人面蜘蛛之關)이다. 총 육십사로(六十四路)로 이루어진 영수육십사진에서도 가장 무섭고 험악한 곳이라 할 수 있지. 인면지주지관에 비하면 네가 빠져 나왔던 삼안오공지관(三眼蜈蚣之關)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다." 장내는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때를 같이하여 이항과 천마 등 몇몇 사람의 안색이 노랗게 변해갔다. 사실 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어서 빨리 강산이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영수육십사진이 험악하다고는 하나 자신들도 빠져나왔는데 자신들보다 훨씬 더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강산이 빠져나오지 못할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위지광의 말은 그들의 그런 기대를 산산히 부수어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 적어도 한 사람만은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곽가량이었다. 그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물었다. "네가 강산을 얼마나 아느냐?" 위지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곽가량의 질문이 너무 황당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나 위지광은 이내 본래의 덤덤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는 곧바로 뒤쪽의 양평을 불렀다. "양 노사!" 양평이 다가오자 그는 나직이 몇 마디를 던졌다. 너무 작아 곽가량은 들을 수 없었다. 양평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는 곳은 위지광에게서 일 장 정도 떨어진 좌측의 한 통로였다. 양평의 모습이 이내 장내에서 사라졌다. "사대천왕(四大天王)." 위지광의 부름에 다시 네 사람이 나섰다. 위지광은 양평이 사라진 통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통로에 접근하는 자는 누구든 베어버리시오." "예. 알겠습니다." 사대천왕이라는 자들이 통로를 막고 섰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일말의 조치를 취해놓은 연후에야 위지광은 비로소 곽가량을 바라보았다. "강산이 어떤 인물이라도 상관없다. 이제는 그가 살아날 수 있는 실날같은 기회조차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흐흐... 보고도 모른다면 말해도 소용없겠지." 곽가량은 처음에는 위지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내 그의 말속에 포함된 뜻을 깨달았다. 강산은 강하다. 하지만 인면지주 역시 강하다. 요행히 강산이 인면지주를 처치하고 나온다 하더라도 그는 이곳에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양 노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곽가량은 그제야 위지광의 말과 행동을 이해했다. 곽가량은 히죽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흐-! 이왕이면 이삼 십 명 더 보낼 것이지, 겨우 한 명으로 되겠느냐?" 위지광도 웃었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곽가량의 얼굴에 떠오른 것보다 더욱 짙은 비웃음이었다. "크크크-! 정말 상대하기 귀찮은 놈이로군. 그렇게도 강산이라는 놈을 믿는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만 더 말해주지." "무엇이냐?" "그의 이름은 양평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과거 그가 무림을 종횡(縱橫)하던 시기에 그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곽가량은 호기심과 불안감이 교차되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누구냐?" "삼불귀(三不鬼) 양한평(楊瀚平)!" 쿠쿵! 일시지간 장내에 벼락이 쳤다. 더불어 북풍(北風)이 불었다. 벼락은 중인들의 머리에 떨어졌고 북풍은 중인들의 가슴에 몰아쳤다. 삼불귀 양한평! 그는 전전대(前前代)의 절대고수였다. 그가 무림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무려 오륙십 년 전. 전대(前代)에 무림의 신(神)이라 추앙 받던 오신(五神)보다도 오히려 한 배분이 높은 신화 속의 이름인 것이다. 당시에 그는 자신의 눈밖에 벗어난 자는 지옥끝이라도 쫒아가 척살하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그의 외호에 붙은 '삼불'이라는 이름도 그가 불인불자부덕(不忍不慈不德)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었다. 결코 참거나 용서할 줄 모르고 한 번 손을 쓰면 반드시 상대를 죽이고야 마는 불가일세의 살인마(殺人魔)! 그가 설마 위지광의 수하로 있을 줄이야... 처음의 충격이 가시자 장내에는 놀라움과 경악에 가득한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그, 그럴 수가?" "어떻게 지금까지?" 경악한 자들은 비단 곽가량이나 무천궁의 인물들만이 아니었다. 위지광을 제외한 흑지의 인물들 역시 똑같았던 것이다. "크크크, 이제는 알았겠지? 강산이 이곳에 나타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위지광의 비웃음에 곽가량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확실히 삼불귀라는 이름은 무게가 있었다. 강산! 지금까지 강산이 보여준 신위는 그 어떤 이름에 비교해봐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십이지신, 칠대공, 구청연, 삼마... 하지만 확실히 삼불귀라는 이름에는 떨어져 보였다. '빌어먹을!' 곽가량은 허리에서 용수를 풀었다. 그리고 용수를 풀자마자 앞으로 달려나갔다. "강산이 아니더라도 호랑이는 여기에도 있다!" 위지광은 이미 그의 그런 행동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뒤로 훌쩍 물러나며 소리쳤다. "십팔신장(十八神將), 쳐라!" 그의 음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위지광의 뒤에 도열해 있던 흑지의 고수들이 일제히 곽가량 등을 향해 날아왔다. 2 곽가량은 소림의 절학인 대원도법(大元刀法)중의 절초를 펼쳐 위지광의 관자놀이를 찍어왔으나, 위지광은 유연하게 허리를 비틀어 다시 옆으로 삼 장이나 이동했다. 곽가량은 위지광이 너무도 수월하게 자신의 도세를 빠져나가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수구나!' 사실 그동안 위지광의 정체는 강호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삼절방의 방주인 위지한승의 수제자(首弟子)로, 위지한승의 총애가 깊어 그에게서 '위지'라는 성(姓)까지 물려받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흑지에서 벌어진 무천궁과의 치열한 싸움에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선두에 나서 싸워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곽가량은 은연중 그의 무공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방금 보여준 신묘한 몸놀림으로 보아 위지광은 삼절방의 이인자(二人者)다운 놀라운 실력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곽가량이 순간적으로 멈칫 거릴 때 흑지의 고수들 중 세 명이 그를 향해 덤벼 들었다. 쉭쉭! 채 병기가 다가오기도 전에 섬뜩한 검기가 피부를 찔러오는 것으로 보아 하나같이 뛰어난 검법의 소유자들임이 분명했다. 곽가량은 황급히 마음을 가다듬고 대원도법의 절초들을 펼쳐 그들에 맞서갔다. 그러면서도 장내의 상황을 재빨리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내는 그야말로 일대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수십 명의 고수들이 어우러져 치열한 난전(亂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중 고수 아닌 자가 없었고, 내뻗는 무공들은 하나같이 살기에 가득찬 것들이었다. 검호를 비롯한 십이지신들은 십팔신장이라 불리운 흑지의 고수들과 생사(生死)를 알 수 없는 흉험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구청연은 십이지신의 조금 뒤에서 그들의 배후를 지킴과 동시에 호시탐탐 위지광을 향해 몸을 날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천마는 십팔신장 중 두 사람을 데리고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들중 가장 위급한 사람은 편복노조 이항이었다. 원래 그들중 가장 무공이 떨어지는데다 부상이 적지 않았던 이항은 가장 많은 네 명의 고수들에게 포위된 채 악전고투(惡戰苦鬪)를 벌이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흑지에서는 일부러 가장 약한 그를 집중공격해 쓰러뜨린 다음 다른 사람들을 제거할 작정인 듯 했다. 곽가량은 자신을 공격하는 세 명의 고수들과 맞서 싸우면서 조금씩 이항에게로 몸을 이동시켰다. 하나 그를 공격하는 고수들의 검세가 어찌나 살벌하던지 좀처럼 몸을 빼낼 기회를 찾지 못했다. '제기랄... 그 놈의 지네떼들과 씨름하느라 지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놈들은 한 주먹거리도 안될텐데...' 곽가량은 새삼 자신들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절감했다. 대원도법은 그 뛰어난 위력만큼이나 진력(盡力)의 소모가 극심한 것이어서 곽가량은 함부로 전력을 다해 도법을 펼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대원도법은 원래 무거운 도(刀)로 펼쳐야 하는데 용수도가 워낙 가벼운데다 아직 손에 익지를 않아 마음 먹은대로 펼치기 힘들었던 것이다. 차창! 다시 한 차례 요란한 마찰음과 함께 용수도와 다른 고수의 검이 허공에서 세차게 격돌했다. 순간 그 고수의 검이 뚝 부러지며 그의 가슴에 핏물이 튀었다. "큭!" 그 고수는 신형을 한 차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곽가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의 머리를 타넘어 이항에게로 날아갔다. 이항이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 다른 두 명의 고수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쉬악! 곽가량은 자신의 등뒤로 두 가닥의 섬뜩한 검기가 날아드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갈등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움직여 검기를 피한다면 자신은 무사할 수 있지만 이항은 참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반대로 검개를 무시하고 계속 날아간다면 이항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등을 관통당해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한 줄기 결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차압!" 곽가량은 돌연 허리를 있는 힘껏 뒤로 제치며 용수도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그와 함께 오른 발로 왼발의 발등을 밟으며 몸을 회전시켰다. 까깡! "크악!" "흑!" 불똥이 튀기며 비명이 연거푸 터져나왔다. 곽가량의 신형은 허공을 삼 장이나 날아 이항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가 지나간 곳에는 두 명의 고수들이 가슴과 배를 난자당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나 곽가량 또한 왼팔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조금 전에 곽가량은 대원도법중의 최절초인 회선참마(廻旋斬魔)를 펼쳐 자신의 등을 찔러오는 두 명의 고수를 격퇴시킴과 동시에 천상제(天上梯)의 신법을 펼쳤던 것이다. 하나 그 대가로 그는 왼팔과 왼쪽 옆구리에 이검(二劍)을 맞고 말았다. 곽가량은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이항을 향해 떨어지며 용수도를 상하(上下)로 그어댔다. 쉬아악! 마치 바람이 숲을 지나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막 이항의 옆구리를 찌르던 흑의인의 머리통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흑의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잘린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하나 그때 다른 한 명의 고수가 이항의 왼팔을 그대로 잘라버렸다. "크윽!" 이항의 입에서 고통에 가득 찬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곽가량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 뜬 채 이항의 팔을 잘라버린 고수를 향해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한편, 위지광과 복면인은 장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선 채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뜻 위지광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격전이었으나 조금씩 흑지의 고수들이 우세를 점해 가고 있었다. 십이지신은 세 명이 죽고 검호를 비롯한 세 사람만이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나, 그들도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구청연의 상태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는 십팔신장 중 세 명이나 쓰러뜨리는 신위를 보였으나, 그 대가로 등과 허벅지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자신의 몸을 지키는데 급급하고 있었다. 이항도 왼팔이 잘려나가 전신에 피칠을 한 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곽가량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지 정체모를 중노인 하나만이 그런대로 버티고 있었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못할 사실이었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십팔신장 또한 절반 가까이가 죽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일각 이내로 상황은 끝난다.' 위지광은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때 문득 그는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복면인의 모습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복면인은 어느 새 뒷편의 통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위지광은 그의 의중을 몰라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몸을 날려 그의 앞으로 내려섰다. "굳이 나서실 필요는 없소. 양평이 간 이상 강산이 제아무리 숨겨진 실력을 지닌 고수라 해도 살아나오지 못할 거요." 복면인은 위지광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의 눈에는 한 줄기 야릇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위지광의 뒤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뒤에...." 위지광은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텅빈 통로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대천왕의 모습만이 보일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게....' 그가 움찔 놀라는 순간, 휙! 복면인이 갑자기 벼락같이 손을 내밀어 위지광의 목을 그대로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흑!" 위지광은 목뒤의 천돌혈(天突穴)을 제압당해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위지광은 눈을 부릅뜨며 복면인을 쏘아보았다. 복면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의 목을 움켜쥔 채 통로를 지키고 있는 사대천왕을 바라보았다. "물러나라." 사대천왕은 아직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위지광이 복면인에게 제압당한 채 꼼짝도 못하고 있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돌연한 사태에 놀란 것은 사대천왕 뿐이 아니었다. 흑지의 실질적인 주인인 위지광이 제압당하자 십팔신장을 비롯한 흑지의 고수들은 앞을 다투어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덕분에 그토록 치열하게 전개되던 장내의 격전은 어느 새 멈춰져 버렸다. 하나 살아남은 인원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십이지신은 검호를 제외한 모든 인원들이 죽었고, 이항은 팔이 잘려졌으며, 구청연과 곽가량은 제대로 서 있기 조차 힘들어 하는 표정이었다. 십팔신장 또한 여덞 명 밖에 남지 않았으나, 그들중 몇 명은 별다른 부상이 없는 온전한 상태였다. 십팔신장 들은 복면인을 멀찌감치 에워싸고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물러나지 않으면 위지소방주의 목숨을 책임질 수 없다." 복면인의 입에서 싸늘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사대천왕은 그의 말을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복면인이 두 눈에 차가운 빛을 번뜩이며 위지광의 목을 움켜쥔 손에 공력을 돋구려 할 때였다. "그럴 필요없다!" 돌연 그의 귓전으로 냉혹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음성을 듣자 복면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음산하면서도 악독함이 가득 서려있는 음성. 그것은 바로 위지광의 것이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쾅! 복면인에게 목을 제압당해 있던 위지광이 오른손으로 번개같이 복면인의 가슴을 강타했다. 그것은 실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크아악!" 복면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오 장이나 밖으로 훨훨 날아갔다. 그의 입에서 폭포수같은 피가 뿜어나오고 가슴이 움푹 꺼진 것으로 보아 위지광의 일장(一掌)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으으.... 어.... 어떻게..." 복면인은 오장 밖에 나가 떨어져 몇 차례 검붉은 피를 게워내다가 힘겨운 음성으로 물었다. 한데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중인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조금 전만 해도 굵고 낮게 가라앉아 있던 복면인의 음성이 젊은 여인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곽가량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아예 핼쓱하게 변해 버렸다. "이... 이 음성은... 혹시..." 그는 황급히 쓰러진 복면인에게 다가가 그의 복면을 벗겨냈다. 다음 순간, "음...." 그의 입술을 뚫고 도저히 참기 어려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복면밑으로 드러난 얼굴은 바로 송자영이었던 것이다. 제 26 장 제삼(第三)의 칼. 1 비록 시커먼 피가 잔뜩 묻어 있고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질려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분명 흑지의 입구에서 실종되었던 송자영의 얼굴이었다. 복면인이 송자영임을 확인한 곽가량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그의 품속에서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던 송자영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내 점혈을...." 그것은 위지광을 향해 묻는 말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로 위지광의 천돌혈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그녀의 난화불혈수는 무림에 산재한 점혈수법(點穴手法)중에서도 최고의 위력을 지닌 것으로, 일단 이 수법에 제압당하면 제아무리 가공할 내공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위지광은 천돌혈이 제압당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장력을 날려 그녀에게 심각한 내상을 입혔던 것이다. 위지광은 처음의 위치에 우뚝 선 채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한 줄기 악독한 미소가 떠올랐다. "깜찍한 년! 제 에미의 체면을 보아 잘 대접해 주었더니 감히 흑심(黑心)을 품다니..." 그는 그녀의 가슴을 가격한 자신의 손을 허공에 몇 차례 흔들었다. "죽기 전에 똑똑히 알아두어라. 나의 혈라공(血羅功)은 점혈수법 따위가 아예 통하지 않는 최고의 호신신공(護身神功)이다." 그 말에 송자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격하게 떨다가 다시 한 차례 시커먼 피를 토해냈다. "우욱...!" 곽가량은 퍼뜩 정신이 들어 황급히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다시 꺼낸 그의 손에는 금빛이 감도는 둥그런 환약(丸藥)이 쥐어져 있었다. "영매...." 그는 송자영을 끌어안고는 그 환약을 억지로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송자영은 그것을 먹지 않으려고 몇 차례나 고개를 흔들었으나 곽가량의 손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마침내는 그 환약을 삼키고 말았다. 환약은 그녀의 입속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녹아서 목안으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곽가량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그녀에게 먹인 환약은 소환단(小還丹)이라는 것으로, 소림사가 천하에 자랑하는 대환단(大還丹)에 못지 않은 약효를 지닌 영약(靈藥)중의 영약(靈藥)이었다. '소환단을 먹었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곽가량은 그녀의 피로 물든 가슴을 내려다 보며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가슴뼈가 움푹 꺼질 정도의 중상을 입어서 당장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나 지금의 상황으로는 도저히 그녀를 치료할 시간이 주어질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는 모든걸 끝낼 시간이 되었다." 위지광의 음산한 음성이 울림과 동시에 십팔신장의 남아있는 여덟 명의 고수들이 앞으로 다가왔다. 중인들의 시선이 암담하게 변했다. 그들중 조금이나마 대항할 힘이 있는 사람은 오직 천마 뿐이었다. 하나 그 혼자 여덟 명의 고수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위지광도 직접 손을 쓰려는 듯 살기어린 기색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이제야 말로 마지막이구나!' 이것은 곽가량 뿐만 아니라 모든 중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그들이 살아날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절대절명의 순간, 휙! 갑자기 어디선가 하나의 물체가 날아들었다. "앗?" 사대천왕의 놀람에 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사대천왕이 지키고 있던 통로 안에서 희끗한 물체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와 장내의 중앙에 떨어져 내린 것이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물체는 바닥에 쳐박혔다. 그와 함께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시체였다. 수급(首級)이 없는 시체였다. 마치 만두 속처럼 처참하게 난자 당한 한 구의 시체였다. 중인들은 숨을 죽이고 시체를 바라보았다. 외견상 시체의 정체를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것이 날아온 장소로 보아 오직 두 사람만이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산, 양한평! 과연 두 사람 중 누구인가? '양한평, 양한평이다!' 곽가량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태는 비관적이었다. 시체에 난 상처 때문이었다. 시체의 상처는 오직 한 가지 병기에 의한 것이었다. 베인 듯 베이지 않고 찢긴 듯 찢기지 않은 상처! 그와 같은 상처는 결코 칼로써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검도 아니었다. 창(槍)이나 추(錘), 편(鞭) 같은 것도 아니었다. 어떤 병기를 가지고도 그같은 상처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직 하나의 병기만이 그같은 상처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 톱! 시체는 톱으로 난자당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곽가량이 알고 있는 한 강산의 병기는 칼이었다. 그러니 그 시체를 만든 사람은 강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시체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너무도 명확관화한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