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40편 (40/43)
삼면(三面)이 꽉 막힌 채 오직 한 방향만이 뚫려 있었다. 강산은 걸음을 뗐다. "응...?" 한데 막 걸음을 떼던 강산이 웬일인지 움직이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악취 때문이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앞에서 풍겨 오는 것이었다. 강산은 지금까지 별별 냄새를 다 맡아보았다. 모든 동물의 분(糞), 형체가 으스러지고 노란 물이 흘러나오며 구더기가 꿈틀대는 시체 등등... 악취라면 그 이상이 없다 싶을 정도로 별의별 지독한 냄새를 다 맡아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더한다 해도 이 정체불명의 악취에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인가? 강산은 숨을 참으며 계속 걸어나갔다. 그에 비례하여 악취는 더욱더 강해졌다. 그렇게 코가 떨어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꼬박 이십여 장을 전진했을 때였다. "......?"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다. 후우, 후우!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게 꼭 사람의 호흡소리 같았다. 먼저 떨어진 소삭연혼대의 일원일까? 강산은 조금 속도를 빨리 했다. 그리하여 오 장여를 더 전진하자 앞쪽에 모퉁이가 나왔다. 그 모퉁이만 돌면 모든 문제가 확연해질 듯 싶었다. 이윽고, 강산은 모퉁이를 돌았다. 하얀 천이 보였다. 하얗다기보다는 반투명한 천이었다. 천은 넓게 펼쳐져 마치 문처럼 동굴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천이 아니었다. 그것은 줄이었다. 천처럼 보였던 것은 줄이 너무 가늘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 간격이 너무 촘촘했기 때문이었다. 그 줄로 만들어진 문의 중앙에는 줄에 칭칭 말린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다. 그 무언가는 누에고치를 닮아 있었다. 크기는 여덟 자에 달할 정도로 컸지만, 크기를 무시하고 보면 영락없는 누에고치였다. 후욱, 후욱! 하는 소리는 그 무언가에서 나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줄로 만든 문은 거미줄 같았고, 누에고치는 생포된 먹이 같았다. 그렇게 생각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강산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사실적으로 만들었군!' 이라고 생각한 순간, 누에고치의 뒤에서 주먹만한 물체가 튀어 나왔다. 여덟 개의 털북숭이 다리, 뎅글뎅글 묵색 광채를 발하는 눈, 갈고리 같은 입, 그리고 그 입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긴 대롱 하나... 거미였다! 거미라면 강산도 질리도록 보아왔다. 하나 이 거미는 여러 면에서 일반 거미와는 달랐다. 우선 전신이 칠흑처럼 검은 데다, 한 치쯤 되는 검은 털들이 전신이 나 있어 마치 검은 밤송이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보기만 해도 섬뜩한 입에서 연신 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때마치 심한 악취가 풍겨나와 속을 메슥거리게 만들었다. 강산이 보고 있는 동안에 다시 하나의 거미가 누에고치 뒤에서 튀어 나왔다. 그 뒤를 이어 다시 한 마리... 또 한 마리... 그러더니 순식간에 십 여마리의 검은 거미가 튀어나와 강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신에 검은 털이 달린 주먹만한 거미 십 여마리가 귀기어린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모습은 결코 기분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강산의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찡그려졌다. 다음 순간, 사사삭! 십 여마리의 검은 거미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미들의 움직이는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았다. 강산이 눈앞에 무언가 희끗거린다고 느낀 순간, 벌써 서너 마리의 검은 거미들이 그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구토가 치밀어오를 정도로 지독한 악취가 화악 풍겨왔다. "한낮 미물 따위가..." 강산은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거미들을 향해 왼손으로 장력(掌力)을 날렸다. 퍼펑!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하나 이내 강산의 얼굴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바위라도 부서버릴 정도로 강력한 장력을 날렸건만 검은 거미들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돌진하던 기세가 약해져 이 장 밖으로 밀려나기는 했으나, 몸통이 터지기는커녕 다리 하나 부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산은 쇠공을 후려친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자 강산은 훔칫 놀라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손에는 검은 쇠침 같은 것이 잔뜩 박혀 있었다. 그것이 검은 거미의 전신에 나 있는 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산이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 그 털들은 빠른 속도로 그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강산은 황급히 그 털들을 잡아 뽑았다. 왼 손 전체가 마치 독침에 맞은 듯 후끈거렸다. 거미의 털에 적지 않은 독성분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강산은 왼팔의 혈도를 제압하여 독기(毒氣)가 퍼지지 않게 한 후 공력을 운기하여 독기를 몰아내려 했다. 하나 그럴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장력에 이장 여 밖으로 날려갔던 거미떼들이 다시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었던 것이다. 강산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금강을 뽑아 들었다. 팟!팟! 서릿발같은 도광(刀光)이 거푸 피어오르며 진한 악취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끽끽! 괴이한 음향과 함께 검은 거미들은 그의 맹렬한 도기를 견디지 못하고 차례로 토막이 나고 말았다. 토막난 거미의 몸에서는 시퍼런 핏물과 누런 내장이 뒤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악취와 비린내가 뒤섞이자 장내는 그야말로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한데 강산이 막 열 마리째의 거미를 토막내고 있을 때였다. 쉬아아악! 갑자기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괴성이 흘러나오며 무언가 차갑고 섬뜩한 기운이 화악 밀려들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던 강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앞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미가 괴성을 내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거미의 크기는 무려 일 장이 넘어 보였다. 검은 털이 수북히 나 있는 여덟 개의 다리는 어른의 몸통 보다도 더 굵었고, 몸통은 거대한 바위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사람의 머리통만한 얼굴에서는 연신 시커먼 독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거미의 얼굴을 본 강산은 더욱 놀랐다. 거미는 눈과 코, 귀가 모두 갖추어져 있어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얼핏 보기에 마치 인간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단지 얼굴 전체에 한 치나 되는 하얀 털이 수북히 나 있고, 커다란 눈동자가 검은 빛 일색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얼굴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피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는 두 개의 커다란 이빨이 번뜩이고 있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코에서는 연신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뿜어나오고 있었다. 몸통은 시커먼데 유독 얼굴만 하얀 털로 뒤덮힌 모습은 더욱 괴기스럽고 끔찍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제아무리 철담간장의 사나이라 해도 오금이 저리지 않을 수 없는 흉칙한 몰골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인간의 얼굴을 닮은 거대한 검은 거미를 보자 강산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 보니 이것은 전설상의 괴물로 알려진 흑선분면지주(黑線粉面蜘蛛)로구나...!' 흑선분면지주! 온 천하의 거미중에서도 가장 독성(毒性)이 강한 거미는 흑선지주(黑線蜘蛛)라는 것이었다. 이 흑선지주가 일천 년동안 살게 되면 몸통이 엄청나게 커져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변한다. 천년을 산 흑선지주는 영성(靈性)을 지니게 되어서 거의 마물(魔物)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영성을 지닌 흑선지주는 얼굴 또한 사람과 유사하게 변해 마침내 이와 같은 인면지주(人面蜘蛛)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얼굴 부위의 털이 모두 하얀 색으로 변하는데, 그 하얀 색 털이야 말로 천하에서 가장 맹독(猛毒)을 함유하고 있어 어떤 동물이든 단지 스치기만 해도 그 독기에 몸통이 녹아버린 다고 했다. 그 하얀 털로 뒤덮힌 얼굴이 마치 분(粉)을 칠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분면지주(粉面蜘蛛)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강산은 예전에 <환우지이록(環宇地異錄)>이란 기서(奇書)에서 이 흑선분면지주에 대한 글을 읽기는 했지만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직접 본 흑선분면지주는 막연히 글로만 읽고 머리속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츠으...츠으... 흑선분면지주는 듣기 거북한 괴음을 흘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지독한 악취와 비린내가 진하게 풍겨왔다. 강산은 이대로 있다가는 흑선분면지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독기에 중독되어 맥없이 쓰러지고 말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금강을 힘껏 움켜 잡고는 흑선분면지주의 앞으로 날아올랐다. "케엑!" 흑선분면지주는 강산이 자신의 머리위로 날아오자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시커먼 독액(毒液)이 빛살처럼 뿜어나왔다. 강산은 암향부의 신법으로 허공에서 몸을 이동해 미끄러지듯 이장 여를 더 날아갔다. 파스스스... 흑선분면면지주가 뿜어낸 독액이 바닥에 닿자 시커먼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 올랐다. 실로 가공할 독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산은 재차 몸을 이동하여 흑선분면지주의 오른쪽으로 다가가면서 금강을 빛살처럼 휘둘렀다. 팟! 어두웠던 실내가 갑자기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강산이 처음부터 대뜸 도강을 펼쳤던 것이다. 강산의 도강은 분면지주의 오른쪽에 있는 네 개의 다리 중 하나를 그대로 가르고 지나갔다. 크와아아...! 고막을 찢을 듯한 괴이한 비명소리가 흑선분면지주의 입을 뚫고 터져나왔다. 사람의 몸통 만큼이나 굵었던 흑선분면지주의 다리가 그대로 잘려져 나가며 시퍼런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흑선분면지주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전신을 뒤틀며 몸을 돌렸다. 강산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 다시 반대쪽 다리 중 하나를 향해 금강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싸악! 비린내가 화악 풍기며 흑선분면지주의 다리 하나가 다시 두 동강이 나 나버렸다. 끄아아아..! 흑선분면지주는 소름이 오싹 돋는 괴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흑선분면지주가 한 번 몸부림을 칠 때마다 도저히 참기 어려운 악취와 독기들이 사방으로 마구 퍼져나갔다. 강산은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쳐 코와 입의 숨구멍을 막은 후 다시 계속적으로 금강을 휘둘렀다. 팟! 팟! 연거푸 도광이 번뜩이며 흑선분면지주의 몸에서 시퍼런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흑선분면진주는 몇 번이나 몸을 돌려 강산에게 독액을 쏘아보내려 했으나 도저히 암향부의 그 엄청난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애꿏은 석벽에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파스스... 사방의 벽들이 흑선분면지주의 독액에 맞아 매퀘한 연기를 피워내며 녹아들어갔다. 파삭! 마침내 강산은 흑선분면지주의 마지막 여덟 번 째 다리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그토록 미친 듯이 날뛰던 흑선분면지주의 움직임도 극도로 둔해졌다. 다리가 모두 잘려진 흑선분면지주는 자신의 커다란 몸통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괴이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흑선분면지주가 보기 흉한 몸통을 꿈틀거린 채 바닥에서 바둥거리고 있을 때 강산은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흑선분면지주의 머리위로 날아갔다. 흑선분면지주는 검은 눈동자로 강산을 노려보았다. 카아오! 흑선분면지주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괴성과 함께 거의 한 바가지나 되는 엄청난 양의 독액을 뱉어냈다. 시커먼 독액은 반경 오장 이내를 자욱하게 뒤덮으며 날아들었다. 순간 강산은 풍차처럼 금강을 마구 휘둘렀다. 파파파파파... 독액은 엄밀한 도영(刀影)을 뚫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동시에, 츠츠측! 흑선분면지주의 머리통은 도광에 수십 조각으로 잘려지고 말았다. 머리통이 완전히 토막나 버린 흑선분면지주는 거대한 몸통을 세차게 떨다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강산은 머뭇거리지 않고 흑선분면지주의 시체를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우글거리던 작은 흑선지주들은 흑선분면지주가 죽자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져 장내에는 하얀 벽처럼 벽에 걸려 있는 거미줄과 고치 밖에는 남지 않았다. 강산은 무슨 생각에서 인지 고치로 다가갔다. 슥! 금강을 한 차례 휘둘러 고치의 껍질을 벗겨냈다. 그러자 그 안에는 하얀 색 실같은 것에 칭칭 감겨진 사람의 몸뚱아리가 나타났다. 강산은 그의 복장을 보고 그가 소삭연혼대의 대원임을 알아보았다. 멍하니 눈을 뜬 채로 굳어 있는 소삭연혼대원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나 강산은 이미 그의 내장이 흑선지주의 독기에 의해 모두 녹아버린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산은 그 비참한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소삭연혼대원의 사혈을 눌러 버렸다. 한동안 싸늘하게 식어가는 소삭연혼대원의 시신을 바라보던 강산의 눈에는 서서히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저주받은 마물(魔物)을 동원해 사람을 이런 꼴로 만들어 놓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는 마음 속 살심을 참기 어려운 듯 금강을 힘껏 움켜 잡은 채 성큼성큼 어둠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 25 장 처절한 격전. 1 지하 광장! 광장은 남북이 긴 장방형 형태로, 그 길이는 짧은 쪽이 오 장, 긴 쪽이 십오 장 정도였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수는 무려 사십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오 장여의 거리를 두고서 삼십여 명과 아홉 명, 그렇게 두 패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다. 수가 많은 쪽 인물들은 그 행색이 말끔하고 자세도 매우 당당했다. 반면, 수가 적은 쪽 인물들은 그 숫적 열세가 고스란히 외형에 드러나 있어 안색은 추레했고 행색도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복이 헤지고 찢긴 것은 기본이고, 몸뚱이 여기저기에 제 피인지 남의 피인지 모를 피를 덕지덕지 묻히고 있는 것이었다. 양편에는 다같이 눈에 익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우선 수가 많은 쪽에서 눈에 띠는 자들은 북도주인 위지광, 복면인, 양평 등이었고, 적은 쪽에서 눈에 띠는 자들은 구청연, 이항, 곽가량, 그리고 어젯밤 정욕궁 앞에서의 전투에서 첫 선을 보였던 다섯 명의 갈포 노인 등이었다. 마침내 천구를 둘러싼 암투(暗鬪)에 관련된 사람 중 살아남은 자들 대부분이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시위에 걸린 살처럼 언제 튀어나갈지 모르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수가 많은 쪽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위지광이었다. "이 위지모의 부족함을 일깨워준 많은 분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만나 뵙게되니 실로 삼생(三生)의 영광이라 아니할 수 없구료." 그러자 반대편에서도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헐렁한 마의(麻衣) 차림의 육순 노인으로, 이쪽 패거리 아홉 중에서 유일하게 처음 보는 자였다. "위지광, 마치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는 투로구나. 하나 본격적인 일은 지금부터다." 위지광이 마의 노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외람되지 않는다면 혹시 지금 말씀하신 분의 별호와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의 노인은 가슴을 쭉 펴고 한 자 한 자 딱딱 끊어 이야기했다. "노부는 검호(劍虎)라 한다. 이름은 알 필요 없다." "검호라... 그렇다면 귀하는 십이지신의 셋째가 되겠군요." 마의 노인은 의외라는 듯 움찔하였다. 위지광이 그 속을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음지었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십이지신중 '인(寅)'이 곧 호랑이를 뜻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 할지라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흥!" 마의 노인이 냉소를 날렸다. 위지광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래도 귀하가 이번 원정의 우두머리인 듯 싶으니 내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잘 듣고 답해주기 바라오. 아, 참! 제안을 하기에 앞서 우선 축하드리겠소." "무엇을 축하한다는 말이냐?" "영수육십사진(靈獸六十四陣)은 만만한 관문(關門)이 아니오. 그 점은 삼천벽호지관(三千壁虎之關)을 직접 체험한 귀하가 더욱 잘 알고 있을 터, 축하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겠소?" 마의 노인, 검호는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일각(一刻) 전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수천을 헤아리는 벽호(壁虎: 도마뱀)와의 일전(一戰), 공포도 두려움도 모르는 미물과의 전투... 다시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검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씹어뱉듯 한마디를 토해냈다. "그런 미물 따위로 감히... ." 한데 그 순간, 갑자기 한 사람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어휴-, 끔찍했었소, 끔찍했어. 정말이지 너무 무서워서 하마터면 지릴 뻔했다니까." 그의 음성은 경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그 내용은 소위 고수라는 자가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음성의 주인은 물론 한 사람밖에 있을 수 없었다. 검호는 곽가량을 보았다. 위지광도 곽가량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잠시 물끄러미 곽가량을 응시하던 위지광이 가볍게 웃었다. "허허허, 곽형께서는 꽤 혼이 난 모양이구려." "곽형...? 뭐, 호칭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곽가량은 눈을 한번 크게 떴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 말도 마시오. 이따만한 독오공(毒蜈蚣) 놈들이 수치도 모르고 떼거지로 덤벼드는데... 빠르기는 섬전(閃電)이요, 투지는 멧돼지며, 용맹은 청룡(靑龍)이라. 어휴-! 마침 저분이 계셨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했었소. 뭐, 물론 대부분은 내가 처치했지만." 곽가량의 몸짓은 장황한 그의 이야기만큼이나 다양했다.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다가 어떤 때는 끄덕끄덕, 팔뚝을 불쑥 내밀기도 했고, 두 팔을 벌려 한 팔이 다른 한 팔을 공격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뿐이랴? 방원 일 장을 빙빙 돌며 갖가지 장면을 재현하는데, 족히 일만(一萬) 대 일만의 대전투라 할지라도 묘사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와 묘사는 단순히 양념에 지나지 않았다. 정작 그가 하고싶은 말은 단 한 가지였다. - 정말 무서운 놈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 처치했다! 물론 중인들 가운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검호는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곽가량의 뒤로 물러나 있었다. '네게 맡길테니 알아서 한 번 해 봐라.' 하는 뜻이었다. 위지광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과연 반선불, 명불허전(名不虛傳)이오." 곽가량은 호탕하게 웃었다. "으허허! 칭찬 고맙소.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하겠소. 자, 그럼 어디 그 제의라는 것을 한 번 들어봅시다." 위지광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겸허의 뜻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은 둘째치고, 이건 주객(主客)이 뒤바껴도 한참을 뒤바뀌지 않았는가? 위지광은 한동안 곽가량을 응시하고 있다가 느릿하게 이야기했다. "내 제의는 간단하오. 여러분이 투항한다면 지금까지 벌어졌던 모든 일들을 불문(不問)에 부치겠다는 것이었다." 위지광의 말꼬리가 묘하게 변했다. 곽가량이 눈을 크게 뜨고 뇌까렸다. "것이었다?" 위지광의 눈에서 스산한 빛이 번뜩이며 말투와 행동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냥 죽어줘야겠다." 그가 금시라도 자신을 향해 달려들 듯 하자 곽가량은 황급히 손을 휘휘 저었다. "자, 자, 잠깐, 잠깐만!" "뭐냐?" "무조건 항복하면 안되겠소?" 위지광의 음성은 단호했다. "이미 늦었다." 그러자 곽가량의 표정이 괴이하게 변해갔다. 구겨진 종이처럼 애처롭게 변한 것이다.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삼일 굶은 자의 표정이라고 보면 틀림없었다. "위지소방주. 한 번... 딱 한 번만 더 생각해보지 않겠소?" 곽가량은 손가락 하나를 흔들며 애원에 가득찬 음성으로 소리쳤지만 위지광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허튼 수작을 부릴 생각은 아예 않는게 좋다!" 위지광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서 곽가량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연 곽가량의 태도가 돌변했다. "흥! 위지소방주... 아니 위지잡놈아! 네놈은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는 이 떨거지들이 우리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느냐? 네 말대로 그 무섭다는 영수육십사진을 통과한 우리가 아니냐? 삼대일(三對一)이라면 그다지 자신할 만한 숫자는 아닌 것 같은데?" 곽가량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으나 위지광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마치 곽가량이 이렇게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모습이었다. "흐흐... 예전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희들이 영수육십사진을 통과한 이상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호라. 호랑이는 호랑이이되 이빨과 발톱이 빠졌다 이런 말이로군." "흐흐..." 위지광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곽가량은 내심 입맛이 썼다. 그의 말이 핵심을 정확히 찔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영수삼십육진을 통과하면서 곽가량 등 아홉 명은 가진 내력(內力)의 거의 대부분을 소진한 상태였다. 게중 몇 명은 부상이 심각하여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