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10편 (10/43)
여느 때 같았으면 벌써 손을 쓰고도 남을 송자영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인지라 켕기는 게 있는지 툴툴거리며 돌아섰다. 곽가량은 흐뭇한 표정으로 알을 허리춤에 넣었고, 그로써 일단의 악어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날 밤 강산이 초번(初番)을 자청하고 나섰다. "곽형과 제가 초번을 맡겠습니다." 좋으면 저나 할 것이지 왜 남을 끌어들이고 지랄이야, 평상시의 곽가량이라면 능히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곽가량이 평소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좋지, 좋아. 초번뿐만 아니라 중번(中番), 말번(末番)까지 다 내게 맡겨." "......?"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일순 잠잠했던 일행이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만류했다. "무슨 말을, 돌아가면서 봐야지." "몸이 견뎌내질 못할텐데." 그러나 곽가량은 막무가내, 문정인의 만류도 소귀의 만류도 다 소용없다. "어허!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본다면 보는 거야." "그래도... ." "어허-!" 잠자코 곽가량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송자영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너, 술 몇 병이나 가져왔어?" "술...? 없어. 저번에 깨진 것이 다야." 곽가량이 모처럼 진실을 말해보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잠시 후, 곽가량의 의견을 받아들인 일행은 잠자리에 들었고, 말 한마디 잘못 꺼낸 강산은 졸지에 멀쩡히 취한 놈과 날밤을 까게 됐다. 동료를 얻는 대가치고는 피해가 너무 컸다. * * * 강을 따라 나선 지 삼일 째! 적당한 곳을 찾은 일행은 강을 넘기로 하였다. 강폭이 채 이십여 장을 넘지 않은 곳으로, 물살 또한 없는 듯 잔잔한 곳이었다. 물론 악어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멀리서 나무를 구해와 그것을 덩굴로 엮었다. 뗏목은 곧 만들어졌다. 너무 허름하여 뗏목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강을 건너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주변의 흔적을 지우고 막 강을 건너려할 때, 강산이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강을 건너지 말자는 것이었다. 일행은 어안이 벙벙하여 강산을 바라보았다. 그가 결코 허튼 소리를 지껄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 제안은 너무 뜻밖인 것이다. 이윽고 까닭을 묻는 일행에게 강산은 차분히 설명했다. "추적대에 능력이 뛰어난 자가 있다면 우리가 강을 건넌 흔적 정도는 쉽게 찾아내서 추적해 올 거요. 따라서 건너는 척하고 건너지 않는 게 상대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는 길이오. 며칠 전 그들은 야음(夜陰)을 틈타 기습을 감행했었소. 그처럼 어두운 밤에 우리들의 흔적을 정확히 짚어온다는 것은 뛰어난 추적자가 아니면 불가능하오." "맞습니다." 소귀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문정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처럼 뛰어난 추적자라면 우리가 강을 건너지 않았다는 것 또한 쉽게 간파해내지 않겠소?" 강산은 문정인을 향해 빙그레 의미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문형의 말이 맞소. 다만 내가 노리는 것은 시간이오. 제 아무리 뛰어난 추적자라 할지라도 가만히 앉아서 우리의 흔적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오. 강을 건넌 흔적과 똑바로 전진한 흔적, 그렇게 두 가지 흔적이 나타날 때 상대는 반드시 그 둘을 전부 확인해봐야 한다는 말이오." 말을 멈춘 강산은 건너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다시 말하면 그들로서는 저편의 흔적 또한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소?" 그제야 강산의 뜻을 파악한 일행은 저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렇구나!" "확실히 그들은 강을 한 번은 건너야겠군." "최소한이지. 잘만 하면 떨쳐버릴 수도 있겠고." 한데 웬일인지 문정인만은 그다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일행에 휩쓸려 허허! 웃음짓고는 있었지만 조금만 주의해서 본다면 그 웃음이 억지춘향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주의해서 볼 때의 이야기지만. 그런데 공교롭게도 문정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오래 전부터 주시하는 자가 있었다. 그것도 두 사람. 한 사람은 강산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곽가량이었다. 기실 강산이 그와 같은 제안을 하게 된 배경은 시간 벌기에 있지 않았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 그의 제안을 듣고 난감해하는 누군가를 찾아내는데 진정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강산이 그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였다. 강산과 곽가량은 며칠 전에 일행이 강을 건너기로 합의한 순간부터 일행과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물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은밀히 살폈다. 강을 건너기로 했으니 마땅히 첩자는 그것을 표식으로 남길 것이다. 그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하나 그러한 두 사람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표식은 나오지 않았다. 수상한 행동을 하는 자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은 초조해졌다. 첩자가 눈치를 챈 것인가? 아니면 이미 표식을 남겼는데 발견하지 못한 것인가? 불안한 생각들이 이어졌고, 그러다가 마침내 강을 건너야하는 시간이 왔다. 바로 그때 표식이 나타났던 것이다. 멀지 않은 한 그루 나무의 밑둥에.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 전 신경을 기울여 감시했건만 대체 누가 언제 표식을 남겨 놓았단 말인가? 두 사람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좋은 기회가 또 언제 올 것인가? 더구나 첩자의 행적이 이토록 신출귀몰하다면 다시 기회가 온다해서 잡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허탈해 하고 있던 중 문득 강산의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미 표식을 남겼다면 그것을 역이용한다는 것이다! 첩자가 강을 건넌다는 표식을 남겨 놓은 후, 실제로 일행이 강을 건너지 않는다면 첩자는 당황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강산은 그러한 제안을 했고 그의 계략은 멋지게 적중했다. 여우가 꼬리를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자, 그만 떠납시다. 될수록 흔적은 남기지 말아야하니 이 점 유의해서 가시기 바라오. 내가 후미를 맡아 결정적인 흔적이 남지 않았나 살피며 가겠소." 강산이 중인들을 향해 말하자 문정인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강형은 어젯밤을 꼬박 새지 않았소? 힘들 텐데 내가 후미를 맡겠소." 강산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문형, 말씀은 고맙지만 이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맡겨두기 바라오. 곽형, 뭐하시오? 어서 문형을 데리고 출발하시오." 곽가량이 너스레를 떨며 다가들었다. "예, 예. 알아모시겠습니다. 문형, 어서 갑시다." 이쯤 되니 문정인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마음에 꺼리는 바가 있으니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뗏목은 어떻게 처리할 셈인가?" 문제가 되지 않겠냐는 듯 묻는 이항에게 강산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그냥 강물에 밀어버리십시오. 발견해도 좋고 못해도 상관없으니까요." "그렇겠군!" 이항이 뗏목을 밀어버리고 일행은 그 멀어지는 뗏목을 보며 장내를 떠났다. 선두는 소귀, 다음은 구청연, 서문상, 문정인, 곽가량, 양표, 이항의 순이었다. 이항이 서너 장을 벗어나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송자영은 떠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빛에 감탄과 존경, 그밖의 결심... 등등을 담고서. "떠나지 않을 참이오?" 그 껄끄러운 시선을 벗어나고자 강산이 물었다. 하지만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은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저러다가 혹시 덮쳐오지는 않을까 하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강산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비로소 송자영도 걸음을 떼었다. 쫄랑쫄랑 강아지 마냥 그의 엉덩이에 바짝 붙어서. 그렇게 십여 장이나 걸어갔을까, 문득 송자영이 물었다. "어렸을 때 공부 잘했어?" "서당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소." "그렇다면 부모님이 머리가 좋아?" "고아(孤兒)요." 강산은 대충 응대하며 문정인이 또 다른 수작을 부렸지 않나 주변을 살피며 걸어나갔다. 곽가량이 잘 감시하고는 있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고아라는 말에 표정이 약간 이상해졌던 송자영이 강산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을 떤다. "햐! 그럼 스스로 깨우친 셈이네." 뭘 깨우쳤다는 것인지, 강산은 계속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와중에 송자영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왜 아직까지 결혼을 안했어?" "못했소." "흠, 그렇다면 가고 싶은 맘은 있다 이거지?" "...... ." "그렇지?" "...... ." "그렇지?" "그렇소." "호호, 내가 좋은 여자 하나 소개시켜줄까? 마음씨 좋고 용모는 최고에 싸움도 잘하..., 오호호, 그러니까 내 말은 길쌈을 잘한다는 이야기지. 호호호!" 송자영의 웃음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제 6 장 사사족(使蛇族). 1 강산의 계략 덕에 조금은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한 일행은 모처럼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항과 양표는 급조(急造)한 나무알 장기로 장기를 두고 있었고, 남은 일행은 그들을 빙둘러 구경하고 있었다. 다만 문정인만은 조금 떨어진 나뭇등걸에 기대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위난을 타개할 묘책을 생각하는지 아니면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정말 잠에 취한 것인지는 당사자가 아닌 바에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헛, 마(馬)가 나가봤자 헛일인데. 차라리 합졸(合卒)을 해야...." 이항이 수비를 보던 마를 올리려하자 곽가량이 기겁을 했다. 순간, 소귀가 곽가량을 향해 가자미눈을 치켜떴다. "곽대협, 고래로 장기판에서 훈수(訓手)하다가 몇 분이나 가신지 아십니까?" 곽가량이 씹어뱉듯 대꾸했다. "난 모르겠는데, 자네는 아나?" "당연히 저도 모르지요. 그 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추가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딱히 훈수 하는 쪽으로 추가 되란 법은 없지." 칼로 베듯 단호한 곽가량의 이야기에 소귀는 일보 후퇴했다. 아무래도 힘으로 어찌 해보기엔 벅찬 상대 아니겠는가? "그래도 정도(正道)를 지켜야지요. 훈수를 한데서야 내기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웬일인지 장기판을 중심으로 냉랭한 기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기운의 출처는 당연히 소귀와 곽가량이었다. 정작 장기를 두는 이항과 양표는 느긋한 반면 구경꾼에 불과한 소귀와 곽가량이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내기. 곧, 돈이라는 절대절명의 이유가! 일각 전, 양표와 이항이 장기판을 벌이자 소귀가 곽가량을 꼬셨다. 아무 쪽이나 원하는 곳에 돈을 걸면 자신은 남은 사람에게 그 두 배의 돈을 건다는 것이다. 곽가량은 쾌히 응낙했다. 노름이라면 곽가량도 빠지지 않는 터이다. 더구나 두 배의 액수에 선택권까지 준다고 하지 않는가? 거기에 무엇보다 거슬리는 것은 자신만만한 소귀의 태도였다. '건방진 운남 개구리, 정통 중원 꾼의 매운 맛을 보여주리라.' 곽가량은 곰곰 생각 끝에 이항을 선택했다. 그 연륜(年輪)으로 보나 장기판을 마주하고 느긋이 곰방대를 피워 문 자세로 보나 양평은 이항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내기는 성립되었다. 그런데 처음엔 잘 둬나간다 싶던 이항이 웬일인지 판이 짜여질수록 말도 안되는 수만 골라두는 것이다. '영감탱이! 연륜의 반만 보여줬어도... 아니, 장기의 기본만 알고있어도 저따위로는 두지 않을 텐데.' 결국 참다 못한 곽가량이 자꾸 훈수를 두게 된 것이다. 사연인 즉 그렇게 된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이항은 형편없이 몰렸고, 그것을 본 곽가량은 인상을 구기며 애꿎은 땅만 후비고 있었다. '이걸 콱 엎어버려?'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아니될 말, 추잡한 놈이란 낙인이 찍힐 건 불문가지(不問可知)요, 더구나 흥미로운 눈으로 판을 주시하는 송자영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일이 아닌가? 그저 두 눈 빤히 뜨고 훨훨 날아가는 돈을 지켜볼 수밖에. '으흐흐-! 내 돈 서른 냥.' 결국 판은 예정대로 끝났고, 곽가량은 구렁이씨알 같은 은자 서른 냥을 고스란히 넘겨야했다. 비로소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씨팔, 눈 딱 감고 엎어버렸어야 했는데.' 강산은 한참 장기판에 열기가 오를 때 슬며시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자신에게 신경 쓰는 자는 없었다. 장내를 빠져나가자 한 그루 나무에 기대앉은 구청연이 보였다. 그는 홀로 경계를 서는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구청연이 고개를 돌렸다. 강산을 발견하자 무심했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판은 끝났습니까?" "거의 끝나가오." 강산은 구청연의 옆에 앉았다. 구청연이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강산을 바라보았다. 강산의 표정에서 왠지 야릇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말벗이라도 해주러 오셨습니까?" 강산은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구청연을 응시했다. 구청연의 안색이 어색하게 굳어갔다. "아니면, 무슨 가르침이라도...?" 강산은 진중히 입을 열었다. "일행에 첩자가 있소." ".......!" 일순 끔벅이던 구청연의 두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그게... 무슨, 첩자라니요?" "목소리를 낮추시오. 말 그대로요. 일행에 적의 첩자가 스며든 것 같소. 먼젓번의 기습도 일행의 흔적을 정확히 추적해오는 것도 다 그때문인 듯 하오." 강산은 그 동안 자신이 발견한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표식을 발견한 것에서부터 문정인의 석연치 않은 행동에 이르기까지. "흠!" 강산이 말을 마치자 구청연은 생각에 잠겼고, 강산은 그런 구청연을 보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이제는 삼절방과 무천궁이 과연 무엇을 다투고 있는지 말해주어도 되지 않겠소? 그렇게 하는 게 일행의 안전과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보다 많은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오." 구청연의 어깨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이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산을 바라보았다. "아셨습니까?" 알았느냐는 건 아마 삼절방과 무천궁을 이르는 말일 게다. "생각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구청연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강대협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저로서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습니다. 애초에 말씀 드린대로 한 장소에 침입하여 한 가지 물건을 빼오는 것, 그뿐입니다. 장소는 머지않아 나타날 것이고 물건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산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청연은 자신이 무천궁의 인물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처럼 막강한 무천궁에서 굳이 외인(外人)들을 고용한 이유는 무엇이며, 또한 한사코 물건에 대해 숨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 강산은 묻지 않았다. 구청연의 단호한 태도에서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는 걸 깨달은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좀 더 생각해봅시다." "달리 두고볼 이유가 있소?" "음..., 차후에 말씀드리리다." 그와 같은 대화를 마지막으로 강산은 일어섰다. "그쪽은...?" 강산의 발길이 일행이 있는 곳이 아닌 숲으로 향하자 구청연이 물었다. 하나 강산은 듣지 못한 척 그대로 숲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아팠다. 얻은 것도 없이 괜히 이쪽 패만 까 보인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한 가지, 비록 완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소득은 있었다. 그것은 첩자가 있음을 밝혔을 때 보인 구청연의 표정이었다. 겉으로야 심히 놀란 표정이었지만 거기에는 놀람과는 사뭇 다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었다. 당혹이라 해야할까? 단순히 놀라움에 그치지 않는 어색함이 구청연의 표정에 있었던 것이다. '분명 첩자에 대해 알고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강산은 오래 전부터 품고있던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그것은 구청연이 자신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본래 어떤 비밀을 요하는 일에 사람을 쓰고자할 때는 그 사람의 뒷조사를 하는 게 그 계통의 상례이다. 무공수위나 책임감 따위의 기본적인 사항은 물론 선택하게 된 동기, 과거의 행적 등등을 소상히 따져본 후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너무 쉽게 고용되었다. 비록 한 수를 보여줬다고는 하나 앉은 자리에서 승낙을 받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과 같은 고수를 필요로 한다든지 일의 전후가 너무 급박하다든지 하는 등의 이유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었다. 강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강호에서 나름대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조사나 행적등은 쉽사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산은 아직까지는 강호에 정식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이 설사 그의 행적을 파악하려고 해도 알아낼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아예 그의 신분이나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오늘의 경우로 보건데, 강산 뿐 아니라 그 외의 다른 일행들도 별다른 조사없이 고용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곧 무천궁이 애초부터 일행중에 첩자가 끼여들 여지에 대해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삼절방의 정보망이 그처럼 만만해 보였을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자신들과 더불어 중원 패권을 다투는 최대의 난적(亂敵)을 그처럼 쉽게 보진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다.' 강산은 담담하게 숨을 내쉬며 마음속 의문을 털어버렸다. 얽힌 실타래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풀어야하는 법이다. 내일, 모레, 글피를 두고... . 그렇게 문정인이 나왔고 오늘 구청연이 나오지 않았는가?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들이 단지 구청연의 말처럼 물건을 빼내기 위해 고용된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일행에 돌아가던 강산은 도중에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소귀와 이항, 양표가 숲속에 있는 것이다. 물론 세 사람이 숲에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행동이었다. 잔뜩 일행이 있는 방향을 경계하며 무언가를 나누고 있지 않는가? "자, 약속한 것입니다. 정확히 세 등분했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소귀가 중얼거리며 이항과 양표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손에 쥐어진 관계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강산이 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하나 엷게 빛이 나는 물건이었다. 물건을 주고 받는 세 사람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감돌았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강산은 이내 그들이 주고받는 게 은(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된건가!' 오호, 불쌍한 곽가량! * * * 다음 날, 일행은 폭이 좁은 곳을 찾아 강을 건넜다. 혹시나 해서 마지막으로 강을 건넌 강산은 한 그루 나무 아래서 예의 그 표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정인, 참으로 귀신같은 자였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는데 언제 표식을 남겼단 말인가? 그러나 그 귀신같은 손속이야 인정한다지만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먼젓번의 표식으로 추적대는 이미 강을 건넜을테고, 지금쯤은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우왕좌왕 일행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 아닌가? 밀림에서 그렇게 한 번 어긋난 일정을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리라. 이 대해(大海)와도 같은 곳에서 무슨 수로 사람 몇을 찾아낸단 말인가?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게 쉽지. 물론 천운(天運)이라는 게 있어 추적대가 억세게 좋은 운으로 다시 그들을 발견한다면 그건 또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혹시 문정인은 그 천운을 바라보는 것인가? 하나 그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머리를 굴리던 강산은 급기야 하나의 만족할만한 결론에 도달하고 비로소 문정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문정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나마 표식을 남기는 것만이 현재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라는 결론에. 지루한 여정(旅程)이 계속되었다. 내리쬐는 폭염에 보이는 건 누런 열대식물과 덩굴, 거기에 간간이 보이는 독충과 도무지 끝을 보여줄 성싶지 않은 밀림뿐... . 강을 만난 즐거움도 어느새 사라져 남은 건 지치고 귀찮은 마음뿐이다. "이제 반이 남지 않았습니다. 일정의 육할은 소화한 셈입니다." 소귀의 격려도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무언가 이 권태와 지겨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까? 차라리 추적대와 한판 붙어버렸으면... 일행의 마음이 그와 같을 때, 송자영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오전 행군을 마치고 각자 늘어져 휴식을 취하고있을 때였다. "저 녀석들, 저번에 그 곡정에서 보았던 사사족이라는 놈들 아냐?" 사사족? 일행의 귀가 커졌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무언가 즐거움이 없을까 고민하던 때에 들려온 그 한 마디는 일행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뱀을 부린다는 녀석들 말이야." "어디?" 일행은 모두 송자영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과연 십여 장 너머에 두 사람이 보였다. 칠척 장신에 허리춤에 찬 도끼. 비록 사람은 틀렸지만 그 모습이나 풍기는 분위기는 곡정에서 보았던 사사족과 꼭 같은 것이었다. "맞습니다. 사사족이로군요." 소귀가 결론을 내리며 이어 몇 마디를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