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8편 (8/43)

2026-10-08 18:52:44 조회 5
잔뜩 기대를 걸고 있던 송자영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나 그대로 후퇴하지는 않았다. 불쑥 오른손을 강산의 턱밑에 갔다대고 새끼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가리켰다. "맛보기로 요만큼만... ." 말을 하며 강산의 인상을 살피던 송자영은 그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지자 황급히 말을 바꿨다. "물론 안되겠지? 알았어, 알았어, 그럼 다음에 구경하지 뭐." 다음에, 끝까지 일말의 여지를 남겨놓는 송자영이었다. 강산은 씁쓸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무기를 챙기시오. 우선 이곳을 벗어납시다." 바로 그때였다. 송자영이 막 비수를 회수하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 "크크크크!" 어디선가 모골을 송연케하는 귀소가 터져 나왔다. 방향은 그 외곽초소가 있는 쪽이었다. 강산은 천천히 초소쪽으로 돌아섰다. 어스름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초소 지붕위에 올라앉아 번뜩이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더구나 괴 인영은 한둘이 아니었다. "크크크,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온전할 줄 알았더냐?" 괴영이 하나 둘 씩 초소를 돌아 나오며 저마다 원한 사무친 한소리씩을 토해내는데, 그 풍기는 기도가 하나같이 고수급이었다. '설마.. 점창오로가 전부 출동했다 말인가? 그럴리는 없을텐데...?' 강산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칼자루를 쥐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일전은 길(吉)보다 흉(凶)이 많을 듯 싶다. 송자영 역시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스르릉! 강산은 금강도를 뽑아 아래로 늘어뜨렸다. 괴영들은 개개인이 조금 전의 구영소보다 절대로 못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 바탕 크게 살계(殺戒)을 어겨야 할지도 몰랐다. 순간, 괴 인영 쪽에서 의문 섞인 몇 마디가 터져 나왔다. "잉? 칼을 뽑아?" "어허라, 감히 꿇어 엎드려 빌 생각은 않고." 강산은 어리둥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귀에 익은데...' 삼 장, 이 장...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강산은 비로소 상황을 이해하였다. 그들의 음성이 낯설지 않음을, 그들의 형체가 낯설지 않음을. 괴인영들은 곽가량을 비롯한 일행들이었던 것이다. 제 5 장 추적대! 1 소귀는 확실히 뛰어난 안내자였다. 지형의 숙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느 곳에 마실 물이 있는지, 어느 곳에 위험이 있는지, 사방 수백 리에 달하는 점창산을 마치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고있었다. 덕분에 일행의 고초는 더위, 벌레 따위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 국한되었다. 다만 일행의 신경을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추적대였다.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삼절방이 보냈을 추적대는 꼬리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늪에는 당연히 악어가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악어가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그것이 일행의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었다. 점창과의 마찰이 일어난지도 이틀이 지났다. 그 동안 부지런히 여정을 재촉한 일행은 점창산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사시(巳時) 말, 앞서가던 소귀가 소리쳤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정상 부근으로 듬성듬성한 나무 사이로 솔솔 바람이 시원한 곳이었다. 구청연이 힐끗 해를 응시한 후 말했다. "아직 정오가 되려면 멀었는데 아예 이 봉우리를 넘어가서 쉬도록 하지." 그 동안의 여정이 가장 무더운 미시(未時) 전후를 피해 새벽과 오후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소귀가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이 밟고 있는 봉우리가 바로 오대봉(五岱峯)입니다. 점창산의 맨 마지막 봉우리입지요. 같은 운남이라고는 하지만 이 오대봉을 경계로 그 안과 밖은 전혀 다릅니다." "다르다니?" "지금까지가 평평한 관도(官道)를 걸어온 것이라면 지금부터는 불붙은 장작을 한아름 등에 지고 전갈 밭을 지나간다 생각하시면 틀림없을 겁니다." 곰곰히 듣고 있던 송자영이 불쑥 끼여들었다. "겨우 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 차이가 난단 말이야?" "지형 때문입니다. 이쪽은 고저(高低)가 있는 산악지대인 반면 저쪽은 끝도 없는 평지이기 때문이지요. 사방이 꽉 막힌 분지(盆地)인 셈 이지요. 진정한 밀림은 이 오대봉을 넘어서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소귀를 제외한 일행의 눈에 일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비록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한 사람은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죽을 맛이었는데 이제까지는 연습이요, 지금부터가 진짜라니... "빌어먹을, 힘 빠지는군." 곽가량이 상의를 벗어 꾹 짜자 천에 밴 땀이 한 바가지나 떨어졌다. 소귀가 그늘을 찾아 벌렁 드러누우며 뇌까렸다. "불평 마시고 편안히 휴식이나 취하세요. 미풍(微風)이나마 이곳이 마지막일 테니." "바람 한 점도 없단 말인가?" "아예 없기야 하겠습니까? 대 여섯 번은 불어오지요." "그 정도라면야." 곽가량이 안심했다는 투로 중얼거리자 소귀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일 년에!" "......!" 한 시진여의 휴식을 취한 일행은 다시금 일정에 올랐다. 과연 소귀의 설명은 어긋남이 없어 오대봉을 넘어선 일행은 일제히 팍팍한 한숨을 내쉬었다. 발 아래로 보이는 광경은 답답함, 바로 그것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나무의 바다. 고저도 장단도 없이 그저 보이는 세상 끝까지 펼쳐진 노란 진흙 세상. 아무 특징도 없이 밋밋한, 그래서 암울해 보이기까지 한 밀림이 일행을 반겨주는 것이다. "빌어먹게 넓군!" 툴툴거리는 곽가량을 향해 소귀가 입을 열었다. "시작입니다." * * * 일행이 오대봉을 넘어선지 반나절이나 흘렀을까? 서천으로 이어지는 검붉은 해그림자 사이로 하나 둘 괴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꾸역꾸역 숲을 뚫고 한데 모인 괴 인영의 수는 무려 이십을 헤아렸다. 한데 그 차림새가 사뭇 눈에 익었다. 헐렁한 하의에 소매가 좁은 약간은 변형된 도복 차림. 바로 점창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삼십 후반의 중년대한들로, 그 차림새 또한 핏빛 적색(赤色)도포를 걸친 동일한 것이었다. 단지 그 가운데 두 명의 육순 노인들만이 백포(白袍)를 걸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느냐?" 질문을 던진 자는 두 명의 백포노인 중 나이가 조금 더 들어보이는 인물로, 점창오로의 둘째인 일지삼공(一指三孔) 고격(古擊)이었다. 그리고 옆의 검을 찬 노인은 점창오로의 셋째인 현천검(玄天劍) 조한영(曺寒瑛)이었다. 고격의 질문에 줄곧 선두에 섰던 중년대한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찾아내어 그 절단면을 살펴보고있던 중이었다. "통과한지 채 세 시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재촉하면 오늘 밤중으로, 늦어도 내일 오후까지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놈들, 감히...!" 이를 갈던 고격이 씹어 뱉듯 한마디를 던졌다. "오늘 끝장을 본다." "옛, 알겠습니다." 중년대한은 서둘러 답하고 걸음을 옮겼고, 이내 남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나마 인간의 기척이 있었던 공간에 다시금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족히 한 시진은 흘렀으리라. 이제 밤은 깊어 사위는 뿌연 어둠에 잠기고 간간이 흐르는 뭇짐승들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스스스스! 바람이 풀잎을 스치듯 미세한 음향이 일고 그와 동시에 한 사람이 장내에 모습을 보였다. 나타난 자는 큼지막한 동전으로 왼쪽 눈을 가린 애꾸였다. 애꾸는 나타나자마자 무언가를 찾는 듯 무릎걸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씨익 미소지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한 그루 나무였다. 나무의 밑둥에 '입(入)'자처럼 생긴 자국이 나있었다. 아이가 낙서를 한 것처럼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애꾸에겐 중요한 듯 싶었다. 애꾸가 원하는 것을 찾고 미소짓고 있을 때, 장내에 다시 세 명의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큼지막한 한쌍의 은륜, 그리고 복(卜)자처럼 생긴 변형된 초겸이 낯익은 인물, 바로 삼절방의 칠대공중 근공 쌍륜 사마자웅과 풍공 신응 고량, 그리고 백옥장의 장주인 양수초겸 낙광영이었다. 웬일인지 고량의 심복과도 같은 매는 보이지 않았다. 사마자웅이 애꾸를 보며 물었다. "마영소(麻靈巢), 얼마나 떨어졌느냐?" 마영소라 불리운 애꾸가 공손히 대답했다. "놈들의 속도로 미루어 이십 리 정도라 짐작됩니다." "방향은?" "흑석평(黑石平)을 좌측에 끼고 난창강( 滄江)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낙광영이 힐끗 고량을 일견한 후 대화에 끼어들었다. "곧장 가면 어디냐?" 그는 굳이 안된다는 걸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하여 일행에 합류한 터였다. 때문에 사소한 일이나마 고량의 눈치를 살피게 된 것이다. "역시 옥룡대산(玉龍大山)입니다." "흠, 역시!" 낙광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마자웅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용케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물론 사마자웅은 낙광영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놈들의 목표가 확실한 이상 더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말일 것이다. 사마자웅은 못 본 척 고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놈들의 목적은 확실해졌는데... 문제는 점창이란 말씀이야. 넷째형, 이대로 두고볼 참이오?" 그 말에 마영소가 장단을 맞췄다. "잘못하면 놈들이 표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귀찮은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쓸어버리심이... ." 고량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좀 더 두고보자." 사마자웅이 답답한 듯 숨을 들이켰다. "무얼 걱정하는 것이오? 흑사대(黑死隊)라면 놈들을 일각 안에 쓸어버릴 수 있는데." "소방주(少幇主)께 알렸으니 조만간 답신이 올 것이야. 그리고 점창오로는 그렇게 만만한 자들이 아니야. 마영소, 앞장서라." "예!" 마영소가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고량이 따랐다. 사라지는 고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사마자웅이 고개를 살래살래 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신형을 날렸다. "참, 넷째형은 너무 신중한 게 탈이라니까." 스스스! 그와 함께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데 어울려있는 검은 구름 마냥 그 형체가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가 네 사람의 뒤를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장난에 여념이 없던 그림자가 주인이 사라진 걸 깨닫고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았다. * * * "후아! 정말 우라질나게 덥네. 도대체 한밤중에 이렇게 더우면 대낮엔 어쩌겠다는 거야?" 곽가량이 못참겠다는 듯 상의를 펄럭이며 투덜거리자 그 모습을 본 소귀가 타이르듯 말했다. "덥다고 상의를 벗으면 안됩니다." 소귀의 뒤를 따르던 송자영이 역시 짜증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기껏해야 모기에 몇 방 쏘이는 정도겠지, 뭐." 소귀가 눈을 크게 뜨고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곳의 모기를 중원(中原)의 그 얌전한 모기와 비교하면 안됩니다. 이곳의 놈들은 코끼리 살갗이라도 뚫을 정도로 강력한 침(針)을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부드러운 살을 노리는 건 모기 뿐만이 아닙니다. 말벌 만한 파리, 육안으론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은 거머리, 전문적으로 사람의 목만을 노리고 피를 빨아먹는 흡혈박쥐 등등, 놈들의 한끼 식사 가 되고싶지 않다면 될수록 피부를 노출시키지 말아야합니다." "쳇! 그까짓 파리, 모기 따위... ." 콧방귀를 날리면서도 송자영의 손은 어느새 옷깃을 여미고있었다. 남은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벌 만한 파리에 보이지 않는 거머리, 피를 빨아먹는 박쥐...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태연히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어쩐지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 듯한 송자영이 차츰 뒤로 물러선다 싶더니 이내 강산의 곁에 바짝 붙었다. 때를 같이하여 걸음을 재촉한 강산은 소 닭 보듯 송자영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이, 씨...!" 볼따구에 잔뜩 바람을 집어넣고 살기등등한 눈으로 강산의 뒷등을 쏘아보던 송자영은 이내 시선을 돌려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마침 이쪽을 바라보는 구청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 먹이의 탐탁치 않음에 송자영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안하무인 격인 송자영이라고는 하나 구청연과 이항은 다소 꺼림칙한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송자영의 성격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일행이 현재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앞선 자는 앞선 자대로 뒤따라오는 자는 따라오는 자대로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외면하며 걸어갈 뿐이다. 꿩대신 닭이라고, 송자영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면서도 이내 구청연을 향해 돌아섰다. 한데 아뿔싸, 이미 늦었다. 구청연 역시 돈이라도 흘린 놈마냥 잔뜩 고개를 숙인 채 저만치 앞으로 정신없이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송자영은 결국 자신이 꿩도 닭도 다 놓쳐버렸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야! 야, 곽가량." 그날 밤, 이항은 잠자리에 들기 전 곽가량의 방문을 받았다. "선배, 혹시 달걀 있습니까?" 당연하게도 이항은 고개를 저었다. "달걀이라면 자네에게 있지 않은가?" 곽가량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건 다 곯아버려서." 당연한 이야기, 맺힌 땀방울이 흐르기도 전에 말라버리는 폭염 속에서 달걀이 상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어이없는 질문에 내심 귀찮아하던 이항은 곽가량의 퉁퉁 부어오른 눈자위가 안쓰러워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그러나?" "선배가 마지막입니다. 강형은 어디 갔습니까?" 이항은 일행이 걸어왔던 방향을 손짓했다. "불침번이야. 저쪽으로 갔네." 일행은 잠을 잘 때 불침번을 세웠다. 하룻 밤에 세 명이 교대로 돌아가며 서는 것이다. 강산은 오늘 첫 번째 불침번이었다. '강산을 찾아가서 물어볼까?' 잠시 생각하던 곽가량은 이내 마음을 바꿔 돌아섰다. '있을 턱이 없지.' 아무래도 빨리 자는 게 조금이라도 아픔을 더는 길이리라. 아픈 눈을 매만지며 자리에 누운 곽가량은 한 가지를 다짐했다. '내 저것을 갈아 마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끙끙!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은 새알이라도 찾아봐야겠다. 곽가량이 뒤척뒤척 잠을 설치고 있을 때, 강산은 일행으로부터 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높은 나무에 올라 경계를 서고 있었다. 경계라고는 하지만 주위의 밀림이 워낙 울창해서 두 눈은 있으나 마나이니 가만히 앉아 귀를 쫑긋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강산은 몸통 만한 가지에 기대앉아 편안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찌르르! 벌레 소리에 묻혀 간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지만 중압감이 배어있는 소리와 함께 은은히 풍겨오는 노린내, 아마도 삵쾡이나 표범의 냄새일 것이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놈들 중에는 그 형체가 보일 정도로 가깝게 접근하는 놈들도 있었다. 하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놈들은 살기어린 눈을 번뜩이다 이내 발길을 돌려 사라졌다. 인간에 대한 경험이 있는지 아니면 일행의 무서움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처음에는 접근하는 표범에 주의하던 강산이었으나 한 시진여가 흐르자 그도 그저 그런 일상이 되어버렸다. 차츰 긴장이 풀린 강산은 잠시 딴 생각에 잠겼다. '감람패, 옥룡대산, 위치는 어느 정도 밝혀진 셈인데 과연 그 빼내야할 물건이란 어떤 것일까? 필시 그 값어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물건일 텐데... 무공비급, 보물, 아니면 중요한 문서...?' 곽가량은 어디까지나 알고 있을까? 다른 일행은? 그들도 자신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까? 또한 정심장에서 보여줬던 이항과 송자영은 행동은...?' 그렇게 한번 일어난 의문은 그 동안의 모든 의문을 차례차례 나열한 후에야 끝을 맺었다. 강산은 무거운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끊임없이 생각해보지만 풀리는 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단순한 의문의 나열,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다. 강산은 휘휘 의문을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교대시간이 지나있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강산이 막 의문을 접고 일어서려 할 때, 어디선가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툭!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강산은 황급히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지면에 바짝 귀를 붙였다. 소리가 들렸다. 육중하면서도 조심스런 발자국소리가. 표범 따위가 아니라는 건 그 수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었다. 추적대였다! '하나, 둘... 최소한 열다섯. 거리는 삼십, 사십. 위험할 뻔 했군.' 후욱! 짧게 숨을 내쉰 강산은 서두르지 않고 일어났다. 사십 장이라면 약간의 여유는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막 일어서던 강산의 눈에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다. 무심결에 스쳐본 탓에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신경을 거슬리는 것임엔 틀림없었다. "......?" 강산은 다시 무릎을 굽혔다. 나무 밑둥에 괴이한 자국이 있었다. 방금 전 귀를 댔던 지면에서 채 한 자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두 가닥 선(線)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모양이 은행잎 같기도 하고 새 발자국 같기도 했다. 하나 짐승이 몸을 부벼 생겨난 자국과는 사뭇 달랐다. 비록 조잡하고 볼품없는 것이었지만 그건 분명 인위적인 자국이었다. 자국이라는 말보다는 표식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잠시 표식을 노려보던 강산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였어." 적어도 한 가지 의문은 풀린 셈이었다. 왜 추적대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물론 누가? 라는 새로운 의문이 생겨나긴 했지만 말이다. 강산은 망외(望外)의 소득에 기뻐하며 일행에게 달려갔다. 머리가 복잡하여 그 이상 생각나진 않았지만 이후 차분히 생각해보면 좀 더 많은 의문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삼십 장 후미에 추적대가 왔소." 일행은 채 세 번의 호흡이 이어지기 전에 전부 깨어났다. 고수는 자면서도 눈과 귀를 열어 놓는다는 가르침에 어울리는 훌륭한 반응들이었다. "추적대라... 드디어 왔군." "얼마나 되오?" "목소리들 낮추시오. 열 다섯 이상이오." 차분히 답한 강산은 이어 구청연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구청연은 난감한 듯 상을 찌푸리고, 와중에 서문상이 자신의 두 자루 옥구(玉勾)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다. "그까짓 것 시원하게 쓸어버립시다." 적잖이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하긴 염객이라는 그의 별호에 비추어 근래 일행에 벌어진 일들은 너무 무료한 것이었 것이다. 문정인이 서문상을 거들고 나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에 뽑아 들었는지 그 크기 때문에 둘로 분리하여 등에 꽂아두었던 삼첨양인도가 들려있었다. "그 동안 찜찜했었는데 이제 놈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지." 남은 사람들 역시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했고, 그렇게 매복 기습으로 의견이 모아지는가 싶을 때였다. "삼절방의 정보망을 무시하면 안돼. 우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무작정 추적길에 나섰다 생각하면 그거 오산이야.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노출이 됐다고 생각하는 게 현명해." 입을 연 자는 이항이었다. 이항은 소리죽여 말을 계속했다. "더구나 양수초겸 낙광영은 그 순수한 무공만으로는 삼절방 서열 십위 내에 드는 강자(强者)야. 사욕(私慾)이 없어 일개 분타주에 만족하고 있다지만 실상은 칠대공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인물이지." 이항의 이야기에는 충분한 논리와 타당성이 있었다. 서문상과 문정인이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들의 병기를 갈무리했다. 자칫 고조될 뻔했던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소귀, 앞장서라." 막 소귀가 신형을 날리려 할 때, 강산이 곽가량을 불렀다. "곽형, 그 술병 아직 가지고 있소?" "가지고는 있는데...?" 강산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주시오." 강산의 행동이 워낙 진지한지라 곽가량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술병을 건네주었다. 술병을 받은 강산은 그것을 상의로 감싸더니 지체없이 깨버렸다. 이어 그 깨진 조각을 들고 훌쩍 나무위로 뛰어올랐다. 다급한 순간에 이게 무슨 짓인가? 강산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일행은 그저 의문과 질책이 뒤섞인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 일행의 의문이 풀린 것은 강산이 나무에서 내려오고 난 뒤였다. "오!" "이제보니!" 일행은 나직이 탄성을 터트렸다. 강산이 돌아다닌 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인지 맹수인지 모를 싸늘한 눈빛이 이편을 꼬나보고있는 것이다. 물론 그건 사람도 맹수도 아니었다. 단지 깨진 병조각과 달빛이 엮어낸 마술일 뿐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의 시선에 강산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가지 않을 참이오?" 일행은 순식간에 장내를 벗어났고, 잠시 후 장내에 도착한 일지삼공 고격 등은 달빛에 반사된 깨진 술병조각들 때문에 꼬박 한 시진 이상을 허비하고 말았다. 일행은 추적대 최초의 기습을 멋지게 따돌렸다. 하지만 일행이 모르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추적대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강산은 자신이 나무밑둥에서 발견한 정체불명의 표식과 삼절방의 기습(奇襲)을 한데 묶어 생각하였고, 그러한 생각은 차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