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4편 (4/43)

2026-10-08 18:52:44 조회 7
구청연의 면전에 위압적으로 버티고 선 장한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나를 찾았다고?" "그렇소. 소귀를 만나고 싶소." 구청연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소귀는 청운각으로 조패를 찾아와서 그에게서 자신의 행방을 물어보라고 하였다. 잠시 곱지 않은 시선으로 구청연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조패가 물었다. "어떤 소귀 말이오?" 구청연은 일순 의아해졌다. "어떤 소귀... 라니...?" 떨떠름한 구청연의 표정을 무심히 바라보던 조패가 하나씩 손가락을 꼽았다. "완주(完州)의 소귀, 양양(襄陽)의 소귀, 산동(山東)의 소귀, 무주(武州)의 소귀... . 여긴 소귀라는 별명이 붙은 놈만도 열 놈이 넘소." 예상치 못했던 문제에 당황하던 구청연은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조패의 무심한 얼굴에서 이내 질문의 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 번 떠보자는 것인가.' 구청연은 피식 웃음지며 말했다. "그는 완주의 소귀도, 양양의 소귀도, 그렇다고 산동의 소귀도 아닌 그냥 소귀요." 비로소 조패의 표정이 풀어졌다. 구청연의 대답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하나 뒤이어 나온 조패의 한마디는 다시금 구청연을 멍청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금 늦었소." "늦다니...?" "그놈, 지금쯤 죽었을 것이오." 구청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다니, 자세히 설명해주시오." 조패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속임수를 쓰다가 들켰소. 본래 손목 정도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이지만 상대가 나빴소." "누구요?" "양수초겸(兩首草鎌) 낙광영(駱光靈)!" 조패의 한마디에 구청연의 눈쌀이 한껏 찌푸려졌다. "낙광영이라면, 백옥장(白玉莊)의 장주...!" "그렇소. 백옥장의 장주이자 삼절방(三絶幇) 대리(大里)분타의 수장(首長)이오." * * * 유시(酉時) 말, 곽가량은 창가에 앉아 처량한 표정으로 야공을 응시하고있었다. 물론 그의 손에는 달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씨팔, 좀 본다고 닳냐?" "독하기가 사갈보다 더한 년!" "툭하면 주먹질이니. 아이고, 쓰라려." 잔뜩 부은 볼때기로 투덜투덜 끊임없이 주절대던 곽가량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아래를 보았다. 막 어느 전각을 돌아나오는 강산이 보였다. 그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후원을 향하고 있었다. 산책이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곽가량은 손을 들어 강산을 부르려했다. 하나 이내 손에 쥔 달걀을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내가 이 꼴로 무슨." 곽가량은 창문을 닫았다. "흐으읍!" 강산은 천천히 숨을 들으켰다. 달콤쌉쌀한 향기가 입과 코를 자극했다. 낯익은 향기,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 강산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홀린 듯 향기를 따라 걸었다. 잠시 후, 몇 채의 전각과 몇 개의 월동문을 지난 강산은 향기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석류(石榴)였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꽤 넓게 펼쳐진 석류밭으로, 석류는 저편 이십여 장 너머의 담벼락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좋구나. 십일월에도 석류가 있다니." 강산은 석류 한 알을 따 코로 가져갔다. 절로 침이 고이며 싸한 옛정취가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애향원(愛香院)의 여러 친구들, 뒷동산, 토끼, 천렵, 동굴, 석류... 그리고 사부(師父). 강산은 그대로 지면에 몸을 뉘었다. 어린 시절, 석류는 귀한 음식이었다. 온 산을 떠돌아 한 바가지 그득 따온 산딸기보다도, 종일 대 밭을 들쑤셔 캐낸 한 뿌리의 칡보다도, 줄줄이 댓살에 꿰여 늘어진 개구리보다도... 특히 부모도 모르는 애향원의 아이들에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어느 가을 누군가 한 알의 석류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는 곧 아이들의 대장이 되었다. 코를 훌쩍이며 헤헤 웃음짓는 아이들의 손, 그 까만 손위에 한 개 한 개 석류 씨를 올려놓는 기분은 결코 대장이 아니라면 느껴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을에 석류가 있는 집은 딱 둘뿐이었다. 마을을 거의 벗어나 뒷산 어귀에 있는 도깨비 할아범네와 마을 제일의 갑부인 진씨 나으리 댁, 그렇게 둘뿐이었다. 때문에 가을이 되면 대장은 으레 진씨네 둘째 도령 차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대부분이 석류 씨를 핥을 때 강산과 몇몇 아이들은 도깨비 할아범네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 불만을 토해내곤 했었다. "흥! 자식들 꼬리를 살살대는 꼴이란...." "앞으로 저 자식들하고는 안 놀아."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다보면 영락없이 '야, 우리 죽마(竹馬) 탈래?' 제안하는 아이가 나왔고, 아이들은 이내 죽마다 칼싸움이다 해서 잠시동안이나마 그 석류에 대한 씁쓸한 기억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잠시 뿐이었다. 단지 생각만으로 침이 괴는 석류에 대한 기억을 누구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흥이 나지 않았다. 당연히 아이들의 놀이는 도깨비 할아범네 담벼락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곰보에 외팔이에 얼굴 가득 칼자국이 나 있는 도깨비 할아범네 담을 넘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도깨비 할아범네 담벼락 밑에 모이던 아이들의 수가 하나 둘 줄어, 급기야 언제나 코를 흘려 별명이 '코보'인 진범(眞凡)과 강산, 오직 그 둘만이 남게된 날이었다. 그때 진범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야, 우리 한번 넘어가보자." 강산은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런 강산을 진범은 계속 꾀었다.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얼굴이 무서운 사람일수록 마음은 그렇지 않다더라', '아이들의 간(肝)을 빼먹는다는 건 누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더라', '도깨비 할아버지 몸이 그렇게 된 건 옛날에 군대에서 나쁜 사람들과 싸워서 그렇다더라'.... "나쁜 사람들하고...? 좋은 사람들이 아니고?" 결국 강산은 고개를 끄덕였고, 연후 불행히도 가위바위보에서 지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월장(越墻)은 진 사람의 몫이었다. 얼마나 망설였을까, 결국 강산은 담을 탔다. 그리고 담벼락에 반쯤 기대 허둥지둥 석류를 따던 강산은 '이놈들!'하고 쩌렁 울리는 고함소리에 그대로 떨어져 혼절하고 말았다. 강산이 깨어나 처음 본 것은 작은 방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물건들이 잔뜩 깔려있는 곳으로, 금방이라도 쓱싹쓱싹! 칼 가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그런 곳이었다. 정신을 차린 강산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앞세워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채 몇 걸음 떼지 못해 시커먼 손아귀에 붙잡히고 말았다. 대롱대롱 매달려 감히 울지도 못하는 강산의 면전에 불쑥 빨갛고 파란 물체 두 개가 나타났다. 음침한 한마디와 더불어. '얘야, 석류 가져가야지!' 그후 도깨비 할아범은 강산의 친구가 되었고, 그 가을 내내 강산의 주머니에는 석류가 마를 날이 없었다. 게다가 강산이 그 늙은 친구에게서 받은 것은 단지 석류만이 아니었다. '사부!' 달콤한 옛날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문득 신경을 거스르는 기척이 있어 강산을 깨어나게 하였다. "응...?" 강산은 그 인기척이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의 야행인(夜行人)이 보였다. 그 야행인은 강산이 돌아왔던 바로 그 전각을 돌아 똑바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킬까 하던 강산은 문득 야행인의 동작에 의문을 느끼고 생각을 바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힐끗 힐끗 주위를 둘러보는 것하며 조심스럽게 내딛는 움직임 등에서 수상쩍은 낌새를 챈 때문이었다. 야행인은 석류밭에 은밀히 숨어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다가들었다. 오장, 사장... 급기야 거리는 일장여로 좁혀졌고, 그 순간 강산은 야행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아니 그녀는 송자영이었다. "......?" 송자영은 끝내 강산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옆을 스쳐 훌쩍 담을 넘어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후, 하나 둘 셋을 헤아린 강산은 비로소 신형을 일으켜 바짝 담에 붙었다. 돌 틈새로 살펴보았지만 이미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쫓아가 볼까?' 하나 강산은 이내 추적할 생각을 포기했다. 벌써 인기척도 사라졌거니와 행여 송자영이 어딘가에 숨어서 이쪽을 주시하고있기라도 한다면 괜히 어색한 결과만 생겨나지 않겠는가 말이다. '답답해서 외출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강산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누웠다. 달콤한 석류 향이 또다시 밀려들었지만 선뜻 옛 일은 이어지지 않았다. '단순한 외출이라면 그처럼 은밀하게 행동하지 않아도 될텐데...?' 평소에 천방지축처럼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던 송자영의 야릇한 행동에 대해 생각하자니 또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구청연이 속한 단체는? 게다가 의문은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적(敵)은? 곽가량은 과연 사부와 어떤 관계인가? 그의 진정한 목적은? 구청연이 말한 그 빼내와야 한다는 물건은? 송자영의 행동은...? 끝도 없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만 적어도 그중 한 가지는 밝혀졌다고 할 수 있었다. 삼절방! 아마 적의 정체는 삼절방일 것이다. 그것은 삼절방의 근거지가 운남이라는 사실과 문득문득 이야기 중에 나타나는 구청연의 태도로써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연히 또 하나의 의문이 풀린다. 구청연이 속한 단체, 곧 청부자(請負者)는 무천궁임이 틀림없었다. 다만 그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없었다. 당대 무림을 양분(兩分)하고 있다 할 수 있는 삼절방과 무천궁. 그들의 강약(强弱)을 논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지만, 딱히 그를 논하자면 열 사람 중 여섯 일곱은 무천궁을 지목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그처럼 막강한 무천궁에서 굳이 외부의 힘을 끌어 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내적(內的)인 것인가, 아니면 외적(外的)인 것인가? 하나가 풀리면 다른 하나가, 둘이 풀리면 또 다른 셋이 엉클어졌다. 곽가량에게 억지를 부린다면 게중 몇 가지는 알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마음이 허락치 않았다. '구청연, 곽가량, 송자영... .' 강산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더러운 기분, 진흙탕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송자영이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반 시진 정도가 흐른 후였다. 그녀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돌아와 곧바로 자신의 처소를 향해 사라졌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강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순간!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인기척에 강산은 황급히 몸을 숨겼다. 때를 같이하여 부드럽게 담을 넘어오는 자가 있었다. 편복노조 이항이었다. '이것 봐라...?' 강산은 조용히 눈을 반짝였다. 제 3 장 최초(最初)의 격돌(激突). 1 해시(亥時) 초, 정심장에 도착한 구청연은 곧 일행을 소집했다. 해가 떨어진지는 한참이었지만 잠자리에 들기에 조금 이른 시간이었던 지라 일행은 곧 한자리에 모였다. 한데 강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구청연이 장내를 둘러보며 물었다. "강대협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분 없습니까?" 내심 빨리 돌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송자영은 그제서야 장내를 둘러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강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송자영은 구청연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송자영에게서 눈을 돌린 구청연은 곽가량을 바라보았다. 곽가량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글쎄, 조금 전에 석류 밭쪽으로 가는 걸 봤는데... ." 곽가량의 이야기가 끝나자 거의 동시에 세 마디가 터져 나왔다. "석류 밭?" "석류 밭에?" "응? 석류 밭에 있다고?" 첫 마디는 당연히 구청연의 것이었고, 남은 두 마디는 송자영과 편복노조 이항의 것이었다. 곽가량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굳이 찾으러가겠다는 곽가량을 밀치고 밖으로 나온 송자영은 석류 밭으로 달려갔다. 그 석류 밭 한 귀퉁이에 누워있는 강산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뭐해?" "아무 것도." "음... ." 송자영은 잠시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강산의 아래위를 살펴보았다. 하나 끝내 마음속의 의문을 꺼내지 못하고 강산의 소매를 끌었다. "구형이 오래." 툭! 소매를 털고 일어선 강산은 송자영에 앞서 걸음을 옮겼다. 송자영은 발끈하여 주먹을 올렸으나 차마 뻗지는 못했다. 그녀는 다시 강산의 소매를 잡았다. "야, 같이 가." 툭! "같이 가자니까." 툭! ....... "오냐, 그래. 먼저 보내주마. 이 개자식아." 쉬쉬쉿! 비도가 날았다. * * * "어이, 왕오(汪五). 그만 일어나. 교대 시간이야." "알았어. 딱 한판만 더하고." "안돼! 한판 한판 하던 게 벌써 몇 판 째야. 이러다가 위에서 순찰이라도 나오면 그땐 정말 한판이 막판되는 수 있어." "에이, 참. 한참 끗발이 서는 판에... ." 동료 장삼(張三)의 재촉에 왕오는 비척비척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하긴 재수없이 걸리기라도 하면 곤장이 오십 대다. 저번 달에 근무지를 이탈해 술을 마시다 발각된 장춘삼(張春杉), 반주검이 된 그를 생각한다면 최소한 근무 시간 만큼은 철저히 지켜야했다. "돌아올 때까지 판 깨면 안돼." 괜히 아쉬워 한마디 던진 왕오에게 동료들의 타박이 요란했다. "염병, 돈은 혼자 딴 주제에." "근무 마치고 튈 궁리나 하지 말아." 숙소를 나온 왕오와 장삼은 잰걸음으로 북쪽을 향했다. 그들의 근무지는 북문 조금 못미처 있는 흑색 대리석 건물로, 백옥장의 수하들은 그곳을 일컬어 흑옥(黑獄)이라 했다. "얼마나 땄어?" 은근한 장삼의 물음에 왕오는 전낭을 만져보았다. 묵직했다. 대충 헤아려보아도 댓 냥은 너끈할 듯 싶었다. "뭐, 별로 신통찮아. 겨우 두 냥 될까말까." "힉! 두 냥이나? 고스란히 한 달 봉급이네. 좌우지간 자네 투자( 子: 주사위) 솜씨는 알아줘야 해. 도대체 붙어서 깨지는 법이 없잖아." "뭘, 새삼스럽게... . 험!" "쩝쩝!" 계속 입맛을 다시던 장삼이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작은 자기 병이었다. "뭐야, 이게?" "보면 몰라? 한 모금 쭉 들이켜봐. 시원해질 테니." "언제 또 이런 걸 꼬불쳤어?" "자네와 마시려고 준비해뒀지." 왕오는 스윽 주위를 둘러본 후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싸한 기운이 목구멍을 할퀴고 뱃속을 파고 들었다. "크으-! 좋다. 뭐야, 매실(梅實)인가?" 병을 건네자 장삼은 손을 저었다. "응, 집에서 담근 거야. 아니, 자네나 더 마셔. 난 집에 가면 많이 있으니까." "이 사람, 술이란 게 어디 혼자 맛인가. 자 마셔. 우선은 아쉬운대로 목이나 축이고 이따 근무 끝난 후에 한번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보자고." 원하는 답을 받은 장삼의 입가에 흐벅진 미소가 흘렀다. "헤헤, 좋지!" "오랜만에 춘란이년 엉덩이도 두드려가면서." "헤헤헤!" 주접을 떠는 동안 둘은 어느새 흑옥에 당도했다. 흑옥은 거대한 사각형 석조 건물로, 마치 석산(石山)을 통으로 깎아 만든 듯 종잇장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곳이었다. 왕오는 기세좋게 문을 두드렸다. 쿵쿵! "누구야?" "나다. 형님이시다." "형님...? 칠(七)!" "제에미 칠은 무슨, 아, 이 자식들아, 형님 목소리도 몰라?" "칠!" "오냐, 그래 너 잘났다. 팔(八)이다. 팔!" '팔'이라는 대답에 비로소 그그긍! 석문이 열리고 열린 틈새로 삼십대 장한의 모습이 보였다. "왕오, 이 빌어먹을 자식! 늦게와서 한다는 말이 뭐, 형님?" 장한의 뒤에서 또 한 명의 장한이 모습을 보였다. "놔둬, 자식 꼴을 보니 또 한 건 한 모양이지. 자자, 우린 가자고." 그 두 명의 장한과 엇갈려 들어가던 왕오는 갑자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은 철벽이나 다름없는 대리석 벽이오, 네 평 남짓한 공간에 있는 것이라곤 의자 둘에 탁자 하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답답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이구, 또 세 시진을 어떻게 보내나." 저만치 걸어가던 장한이 왕오의 말을 들었는지 큰소리로 외쳤다. "야, 잠이나 자. 안 오면 연애나 하던지." 그그긍! 문이 닫히고 근무자들이 멀리 사라질 즈음 사위(四圍)는 다시금 밤 본래의 정적을 되찾아갔다. 화사한 달빛 아래 신화 속의 공룡인 양 웅크려 누운 흑옥만이 가끔 빛을 발할 뿐이었다. 왕오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쭉 뻗어 탁자에 올렸다. 편안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꼴짝꼴짝 매실주를 기울여보지만 시원한 기분은 그때 뿐이었고, 매실주가 목구멍을 넘어 위장에 당도할 쯤에는 이미 다른 기운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빌어먹을, 차라리 꼬박 열두 시진을 서도 좋으니 인원을 늘려주면 좋을 텐데." 말 같잖은 소리에 장삼이 대꾸를 않자 중얼중얼 혼자 중얼거리던 왕오는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한데 이것 봐라, 몇 방울 툭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잠잠 소식이 없다. "엥, 벌써?" 술병을 거꾸로 들어 속을 살피던 왕오는 장삼을 향해 술병을 흔들었다. "이봐, 장삼. 더 없나?" "그것 뿐이야." 바로 그때였다. 솟구치는 아쉬움을 지우지 못한 왕오가 술병을 짜고 있을 때, 누군가 석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일순 뭐냐 싶던 왕오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화다닥 술병을 탁자 밑으로 치웠다. '순찰!' 근무 중 술을 먹은 사실이 발각되면 최소한 곤장이 스무 대다. 장삼은 왕오가 술병을 치우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시, 십일(十一)." ...... 약간의 시간이 흐르도록 암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평상시라면 당연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기에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장삼은 다시 한번 힘차게 소리쳤다. "십일!" "사(四)!" 답이 나오자 장삼은 손잡이를 돌렸다. 그그긍! 문이 열리고 거기 낯선 한 사람이 있었다. "근무중 이상 없...?" 순간적으로 순찰당주(巡察堂主)가 바뀌었나를 생각하던 장삼은 빙그레 웃음짓는 상대의 얼굴에서 비로소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삼은 멈칫 뒤로 물러서고, 왕오는 손을 돌려 칼을 잡았다. 하지만 상대는 왕오나 장삼이 어찌해볼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큭!" "꺽!" 스스스! 몇 개의 인영이 흑옥으로 스며들고 문이 닫혔다. * * * "소귀 알지?" 장삼은 눈을 부릅떴다. "네놈들이,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곽가량은 손으로 의자를 집었다. 싹! 떡 쪼가리 떨어지듯 의자 한 귀퉁이가 뭉턱 떨어져나갔다. 곽가량은 씩 웃으며 다시 물었다. "소귀 알지?" 장삼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가, 감히. 백옥장, 아니 삼절방에서... ." 곽가량이 떨어진 의자 조각을 바닥에 놓고 툭 장난처럼 때리자 의자 조각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나무가 돌을 파고든 것이다. 곽가량은 세 번째로 물었다. "소귀 알지?" 장삼의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소귀라니, 난 그런 사람 몰라." 이제 곽가량은 손을 뻗어 장삼의 무릎을 쥐었다. 빠악! 그의 손가락이 장삼의 무릎뼈를 파고들며 관절을 옥죄었다. "소귀 알지?" 장삼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마구 떨면서도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저었다. "모, 모, 모릅니다." 슬슬 장삼의 다리를 더듬어 오르던 곽가량의 손이 사타구니 사이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여전히 같은 질문이 떨어졌다. 하지만 역시 마찬가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곽가량은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며 뇌까렸다. "이놈, 기절했는데. 정말 모르나봐." 잠시 후 곽가량은 후회했다. 왕오에 앞서 장삼을 깨운 자신의 선택을. "소, 소귀는 지하 수뢰(水牢)에 갇혀있습니다. 저, 저기 꾸러미 중 맨 왼쪽에 있는 게 지하실용 열쇠들입니다. 수뢰로 통하는 길은 문을 나가 왼쪽으로... ." 왕오의 입을 열기엔 의자로 충분했던 것이다. 약 일각 후, 지하실로 갔던 구청연이 중년 대한 한 명을 떠메고 돌아왔다. 그가 소귀인 듯 싶었다. 그는 삼십 후반으로 날카로운 눈빛하며 빼빼 마른 몸매, 푸석푸석한 얼굴 등등이 볼 것 없이 노름꾼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그다지 호감과는 친숙하지 못한 인상이었다. 그는 흠뻑 젖은 생쥐 꼴로 구청연의 등에 죽은 듯 늘어져있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입만은 쉬지 않고 있었다. "하하, 내 이미 어른께서 구해 주리란 것을 알고 있었습지요. 그래서 옆 방에 갇혀있는 놈과 내기를... 아차차! 어르신, 돌아갑시다. 그 놈에게 차용증이라도 받아둬야... 윽! 어르신, 좀 천천히, 윽!" 소귀를 구한 일행은 어둠 저편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 * 안절부절 똥 마려운 개새끼마냥 서재를 누비던 양수초겸 낙광영은 한순간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해 뿌드득! 이를 갈았다. "감히 어떤 놈들이...?" <어젯밤 일단의 신비인들이 침입하여 소귀를 구출해 갔습니다.> 어스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조식(調息)을 마치고 언제나처럼 상쾌한 하루를 시작하려던 때 접하게 된 수하의 보고는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