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3편 (3/43)
"운남(雲南)입니다. 한데 곽대협의 눈은...?" "내일 봅시다." * * * 시월 말 일정을 시작한 일행은 상음(湘陰), 완주(浣州), 사주(思州)를 거쳐 귀주(貴州) 용리(龍里)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배로 바꿔 주강(珠江)을 올랐다. 물길을 탄지 엿새, 다시 배를 버리고 육로(陸路)를 택한 일행은 안순(安順), 안남(安南), 진안(晋安)을 차례대로 지나 마침내 운남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곡정(曲靖) 땅에 도착하였다. 일정의 대부분은 늦은 오후나 야밤에 이루어졌고, 그 즈음 애초의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도 많이 풀려 일행은 작은 농담 하나에도 곧잘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특히 변한 건 곽가량과 송자영의 관계. 죽일 놈! 살릴 년! 다만 밀지 못해 밟아주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순간 변했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난 일이 있는지 밤낮 얼굴을 맞대고 소곤대는 것이다. 중인들은 과연 어떤 기변(奇變)이 있어 그들의 관계를 바꿔놓았는지 알지 못했다.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단지 그럴 때면 어김없이 강산을 향하는 둘의 시선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 날도 아침식사를 마친 둘은 탁자에 마주앉아 소곤거리고 있었다. 곡정에서 이틀 정도 쉬어가자는데 의견이 일치된 날이었다. 이윽고 송자영과 모종의 눈빛을 교환한 곽가량은 구청연을 보며 물었다. "구형께선 오늘 무얼 하실 겁니까?" 구청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근교의 사찰이라도 돌아볼 생각입니다." 곽가량은 이내 편복노조 이항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배께서는 오늘 무얼 하실 겁니까?" 이항은 두 눈을 끔벅이다 되물었다. "글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어디 갈만한 데라도 알고 있나?" 곽가량은 고개를 저었다. "운남에는 난생 처음인데 저라고 뭐 아는 곳이 있겠습니까?" "그럴테지, 그렇다면 나는 부족한 잠이나 자볼까... ." 곰방대로 한참 등을 긁적이던 이항은 그도 싫증이 난 듯 이층 계단을 올랐다. 그의 등을 보며 씨익! 왠지 음충맞은 미소를 흘리던 곽가량이 세 번째로 접근한 이는 서문상이었다.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소." 서문상의 대답 역시 비슷했다. 그리고 강산 역시. "험! 강형은 계획이 있소?" "없소!" "그렇다면 시장이나 둘러보지 않겠소? 운남의 시장은 특이하여 별별 희귀한 물건이 많다던데." 강산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곽가량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는커녕 그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강산을 꼬드길만한 자신이. 짧은 일정이나마 강산의 성격에 대해 몇 가지 알아낸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열대 과일에서 악어, 지네, 흡혈박쥐에 이르기까지 없는 생물이 없다던데... ." 과연 강산의 눈빛은 변했다. 이 사내는 특이하게도 곤충이나 동물 따위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가봅시다." '그럼, 그렇지!' 곽가량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은근히 송자영을 보니 잘했다고 눈매가 벙실벙실이었다. 하지만 그로써 일이 마무리된 건 아니다. 곽가량은 송자영을 보며 물었다. "영매도 같이 가지?" 송자영은 시큰둥한 태도로 뇌까렸다. "별로... 하지만 할 일도 없고 하니... ." 비로소 일이 마무리 되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시장? 시장이라... 나도 시장에나 가볼까?" 웬걸, 막 이층 침실로 들어서던 이항이 다시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를 시작으로.... "호, 시장. 구경할 거 많겠지." "쩝, 입맛도 없고 한데 오랜만에 보신이나 해볼까?" "엥...?" 싸늘히 굳어가는 송자영의 눈빛에 곽가량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시장에 둘러 희귀 생물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그 맛이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쭉 한잔 걸치는 것만 할까? 강형, 어떻소? 우리 근처의 계곡이나 찾아가는 것이?" 강산의 대답은 단호했다. "시장!" 곽가량은 난감한 표정으로 송자영을 바라보았다. "난 안가!"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2 시장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자기 몸뚱이만한 보퉁이를 이고 진 사람들을 곧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시장이라고 특별히 따로 분리된 공간은 없었다. 수천 수만 평에 달하는 넓은 공간, 그 어디나 짐을 풀어놓은 곳이 곧 시장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판을 벌리고 남은 공간이 길이 되었다. 과연 곽가량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아 일행은 어렵지 않게 열대 과일, 지네, 박쥐 따위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생소한 물품에 앞서 일행의 주의를 끄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물건을 흥정하는 당사자들이었다. 야만족(野蠻族)! 중원인(中原人)과 복색(服色), 풍습 등이 틀리다고 그렇게 불려야 한다면 그들은 틀림없는 야만족들이었다. 맨발에 반벌거숭이 차림, 중원인을 제외한 거의 태반이 그런 차림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양호한 편에 속했다. 출렁이는 가슴을 자랑처럼 드러낸 채 손바닥만한 천으로 간신히 치부(恥部)만을 가린 여인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들에 대한 관심도 어느 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보기 전까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칠척 장신에 빼빼 마른 두 사람! 그들의 특이함은 무심한 눈빛에 있었고 허리에 찬 시퍼런 도끼에 있었다. 또한 그들의 발치에 놓인 거망(巨 )에 있었다. 그 무심함은 강산과 같았고, 그 생김새는 염객 서문상과 흡사한 두 사람이 팔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삼 장이 훌쩍 넘어가는 거망이었다. 실로 어린아이는 가볍게 삼킬 정도로 거대한 거망이었던 것이다. 거망은 통나무를 중심으로 똘똘 말려 마치 열대 과일과도 같은 모습으로 묶여 있었다. 그 주변에는 접근하는 사람이 없어 거망을 중심으로 반경 이 장여의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저들은 사사족(使蛇族)입니다." 구청연의 한 마디에 일행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만(南蠻)의 소수 부족들이 대부분 단신(短身)인 반면 그들 사사족만은 장신(長身)입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크지요. 사사족의 '사사'는 뱀을 부린다는 뜻이랍니다." "저 눈빛 좀 봐, 사람도 잡아먹겠네." 무엇이 그리도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그때까지 일행의 후미에서 툴툴거리며 성깔을 부리던 송자영이 툭 한마디를 내뱉자 구청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셨습니다. 국법(國法)으로 규제를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그 힘이 남만 오지에까지 미치진 못하지요. 악습(惡習)은 빨리 떨쳐버려야 하는데." '규제? 악습...?' 송자영이 뱀과 악습과 규제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한 사람이 뚜벅뚜벅 거망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는 강산이었다. 거망에 접근한 강산은 한 자쯤 앞에 쪼그려 앉았다. 별다른 생각이 있어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말로만 듣던 거망에 빠짝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점은 없었다. 거망이라고 해서 없는 발이 달렸다던가 뿔이 달렸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몸집이 커서 그렇지 흔히 봐왔던 뱀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측은했다. 타오르는 눈, 거망은 여전히 핏빛 두려움이었지만 그 내면은 더 이상 어둠의 제왕도, 공포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식탐(食貪)의 대상일 뿐이었다. 강산은 손을 뻗었다. 손끝에 와 닿는 감촉이 마치 질 좋은 비단을 접한 듯 매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몰랐다면 안기고 싶을 정도, 강산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의 흥이 깨진 건 한 사람 때문이었다. "안 물어?"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굳이 그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 송자영! 도대체가 이 계집은 존대(尊待)를 하는 법이 없다. 일행 중 존대를 받는 사람은 편복노조 이항이 유일할 뿐. 그나마 그것도 완전한 존대가 아니라, '영감님, 밥 먹었어?', '연초 맛있지?' 등등 허리가 부러져 나오기 일쑤였다. "안 무냐니까?" 송자영의 음성이 조금 높아졌다. 하지만 애초부터 강산에게 대답할 생각 따윈 없었다. 다만 자리만은 피해야했다. 삼일 전의 일이 뇌리에 생생히 떠올랐던 것이다. 삼일 전, 어느 봉우리를 넘은 후 송자영이 서문상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디야?" 서문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송자영이 다시 물었다. "이곳이 어디냐니까?" 서문상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직후 비도가 날았다. 두 번째 질문이 떨어지고 난 직후에. 세 번도 아닌 두 번에, 한 자루도 아닌 네 자루가...! 후일 알게된 사실이지만 당시 서문상은 그곳이 어디인지 정말 몰랐었다고 한다. 서문상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고, 그날 밤 술 한잔을 앞에 두고 복수를 다짐하는 서문상 앞에 송자영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삽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용도를 몰라 어리둥절한 일행에게 송자영은 이렇게 말했다. "삽을 땅 파는데 쓰지 뭐에 써?" 일행중에 '뭐하러 파?'라는 의문을 던질 정도로 미련한 자는 없었다. 그 뒤 서문상은 무려 삼 일 동안 오한에 시달렸으며 당연하게도 복수를 하겠다는 따위의 말은 아예 입속으로 중얼거리지도 않았다. 강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돌아섰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져 손가락이 비수주머니로 향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사건은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사!" "......?" 강산은 돌아섰다. 그리고 그 음성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 사사족이 있었다. 뜻밖에도 그에게 제동을 건 이는 송자영이 아닌 사사족이었다. 강산은 얼떨결에 반문하였다. "사...?" 뭐가 사라는 건지? 정말 '사'인지 그 발음조차 모호한 한마디에 이어 이번엔 보다 분명한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만져다, 사!" 하지만 역시 그 뜻을 짐작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만져다, 사?' 영문을 몰라 그의 시선을 쫏던 강산은 두 눈 가득 거망이 들어온 순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뭐가 사라는 것인지, 왜 그들을 중심으로 반경 이 장여의 공터가 형성되어있었는지. 그렇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만졌으니 사.'라는 사사족의 말을 이해했다고 해서 송자영과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도가 언제 날아오나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이 송자영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물-어, 안 물-어?" 그 적당히 늘어지고 또한 적당히 가라앉은 음성은 저 천길 심해에 누워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바위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강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과연 이 난국(難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시간과는 무관한 것일 테지만. "안 사면, 죽는다!" "흥!" 사사족이 도끼를 빼들고 강산을 향해 두어 걸음을 나옴과 동시에 강산의 등뒤에서 싸늘한 비소가 터져 나왔다. 쉬잇!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음향을 접한 순간 강산은 주저하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파팟! 단숨에 장내를 벗어난 강산은 구경꾼들 틈에 끼어 송자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한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뒤끝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소한 시비에 있어 두 번 손을 쓰는 일은 없는 것이다. "씨팔!" 송자영은 투덜투덜 자신의 비수를 회수하고 있었다. 목이 뚝 부러져 지면을 뒹구는 두 자루의 도끼에서. 공교롭게도 강산을 스친 비수가 사사족의 도끼에 박혀버린 것이다. 자루도 아닌 도끼날에. 두 명의 사사족은 중간에서 뚝 부러져 자루만 남은 도끼를 들고서 땡글땡글 두 눈을 크게 뜨고 송자영을 응시하고있었다. "뭘 봐, 이 새끼들아!" 송자영의 한소리에 둘은 냉큼 무릎을 꿇었다. 쏼라쏼라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지껄이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꽤나 혼이 난 모양이었다. 하긴 자루도 아닌 날에 박힌 비수를 본다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 그들에게는 송자영이 여신(女神)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사족이 무릎을 꿇는다는 건 완전히 승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복종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구청연의 해설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고, 구청연은 말을 이었다. "자, 그건 그렇고 이처럼 눈에 띠는 짓을 저질러 버렸으니 속히 곡정을 벗어나야 겠습니다. 그들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재미 적은 노릇이니까요." 구청연을 제외한 일행 중 '그들'의 정체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또한 아주 모르고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자금 동원력이나 행사(行事)의 은밀함에서 볼 때 생각해볼 수 있는 단체는 채 다섯이 넘지 않기 때문이다. '삼절방, 무천궁, 구마림, 조화곡...!' 그중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곳은 삼절방과 무천궁이었다. 문제는 자신들은 그들중 어느 쪽이며, '그들'은 어느 쪽이냐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포섭된 청죽장이 삼절방일수도 있고 무천궁일 수도 있는 것처럼, '그들' 또한 삼절방일 수도 있고 무천궁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전혀 다른 세력일 수도 있었다. 이런 문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하고 어지럽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이 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알게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처럼의 휴식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자 일행은 모두 분통을 터뜨렸고, 그 모든 분통은 고스란히 한 사람에게 퍼부어졌다. 그것은 당연히 이 눈에 띠는 짓을 저질러 버린 자를 향한 것, 당연히 그가 받아야할 몫이었다. "대답 좀 해주지 그랬어." "에잉, 뻔히 성격 알면서." "자네, 말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 생각도 해줘야지." 강산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 없었지만 반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날, 곤명(昆明)에 도착한 일행은 곡정에서의 못다한 휴식을 가졌다. 곤명은 명승지가 숱한 곳이다. 비록 오대호(五大湖)에 끼지는 못하지만 그를 제외하면 단연 최고라는 곤명호(昆明湖), 수천 수만의 돌봉우리가 갖가지 기경을 연출하는 로남석림(路南石林), 높이가 무려 삼십 장에 이르는 대첩수폭포(大疊水瀑布)... 등등. 다행히 곤명에서의 이틀은 만족할만한 것이었다. "햐! 여기가 석림이야?" "석림." "저 바위, 참, 이상하게 생겼네. 꼭 뭐 닮은 것 같은데... 뭐 같아?" "돌." "이건 뭐야?" "돌." "흥! 이것도 돌이야?" "바위." 비록 아슬아슬한 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비도가 날라다니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모두 다 일행의 조언을 충실히 받아들인 강산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 * * 십일월 이십일, 일행은 운남 대리(大理)에 도착하였다. 일행이 머무는 곳은 정심장(停心莊)이라는 곳이었다. 장주(莊主)는 심재기(沈栽畸)라는 오순의 중년인으로, 과거 산서성(山西省) 어느 곳에서 작은 고을의 현령을 지냈다는데 날카로운 눈매나 절도있는 행동거지 등에서 그다지 퇴직관료의 분위기는 배어나지 않는 자였다. 이곳이 목적지냐는 곽가량의 질문에 구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준비를 단단히 갖춘 후에 좀더 들어가야 합니다. 출발은 이삼 일 후가 될 것입니다." 그날 밤, 일행은 저마다 내일을 계획했다. 숭성사(崇聖寺)의 삼탑(三塔)이 볼 만 하다더라, 이해( 海)의 경치가 수려하다더라... 등등. 세상에 이름높은 대리의 명소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란 게 그다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꼬박 날밤을 까며 세웠던 모든 계획은 깡그리 무산되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행동에 극히 주의해야합니다. 따라서 외출은 금하겠습니다." 구청연이 외출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후, 더워!" 할 일 없이 방안에 누워 연신 부채를 부치던 송자영은 이윽고 방을 나섰다. 시원한 나무그늘이라도 찾아볼 참이었다. 실상 운남이 열대지방이라고는 하지만 십일월의 더위는 그다지 혹독하지 않았다. 여타 지방의 여름날씨와 비슷한 정도,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다만 송자영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외출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렇게 외출금지령을 내린 구청연이 저 혼자 외출하였다는 점이었다. "뭐, 일행이 한 명 더 있어서 그 일 때문에 나간다고? 아, 이왕 나갈 거 같이 나가 주변 경치나 구경하고 오면 좀 좋아. 으, 열받아!" 툴툴거리며 걷던 송자영은 곧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큼지막한 정원수 아래 세상 편하게 누워있는 곽가량이었다. 송자영은 곽가량에게 다가갔고, 그 순간 곽가량 역시 송자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이쿠, 누가 또 저 귀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강산...?' 곽가량은 불안한 심정을 억누르며 송자영을 반겼다. "어, 어서 와. 덥지?" 송자영은 앉자마자 불평을 터트렸다. "쳇, 뭐야? 우린 못 나가게 하고 자기만... ."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원인을 발견한 곽가량은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반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곽가량은 서둘러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그렇지? 우리가 뭐 사고뭉치도 아니고." 송자영이 빤히 응시하자 곽가량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저 조용히 경치나 구경하겠다는데 구형이 너무했지." "빌어먹을 인간!" 송자영은 마치 바로 앞에 구청연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먹을 쥐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몇 번의 맞장구에 다소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송자영이 부채질 대신 상의를 펄럭이기 시작했다. "아유, 정말 더럽게 덥네." "덥지? 더울 땐 그저 이렇게 나무 그늘에 가만히 누워있는 게 상책이야." 그때였다. 행여 터질까, 최대한 송자영의 비위를 맞추던 곽가량이 무심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때! 곽가량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 그것은 송자영의 상의(上衣) 속에 있었다. 또한 그것은 붉은 색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붉은 천조각이었다. 천은 무언가 도톰한 두 개의 물체를 감싸고 있었고, 그 펄럭이는 상의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꿀꺽! 곽가량의 목젖이 움찟거리고 그는 곧 가자미 눈이 되었다. "아유, 더워!" '조, 조금만... 조금, 조금만 더!' "정말 못 참겠네." '그래. 벗어라, 벗어버려라.' "아예 발가벗고 다니던지 해야지 원." '벗는다, 벗는다!' 그렇게 한 마리 가자미의 탐욕이 최고조에 이를 때, 문득 송자영이 곽가량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새로운 일행이라는 자는 누구야?" '흐윽!' 다행히 곽가량의 행동은 느리지 않았다. 곽가량은 하늘을 보며 천지가 무너져라 숨을 내쉬었다. "휴우-!" "웬 한숨이야?" "아니, 아니. 그럴 일이 좀, 휴우-!" 연거푸 터져 나오는 한숨에 송자영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곽가량은 애써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 그 구형이 데려온다는 사람? 나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안내인이 아닌가 싶어?" 흥미가 동한 듯 송자영의 얼굴이 바짝 다가섰다. "안내인? 누가 그래?" "휴-! 아니, 누가 그런 건 아니고 내 생각이야." "근거는?" "생각해봐. 이곳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이곳에서 합류할 이유가 없지. 또한 목적지가 아직 남았다고 했는데 이곳에서 더 가봐야 밀림밖에는 없어. 따라서 그 두 가지를 합하면 이곳 사람이면서 앞으로의 행보에 도움이 되는 사람, 즉 안내인이란 결론이 나오지." 송자영이 감탄했다는 듯 탄성을 토해냈다. "호, 제법인데." 곽가량은 하늘을 보며 목에 힘을 주었다. "험! 뭘, 기본이지." 순간, 곽가량의 시야에 둥글고 하얀 물체가 들어왔다. 크기는 꼭 주먹만하고, 생긴 것은... 생긴 것도 꼭 주먹처럼 생긴 물체였다. 곽가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게 뭘까?'를 생각하는 순간 송자영의 음성이 들렸다. "여자 가슴 훔쳐보는 것도 기본이냐?" 퍽! * * * 곽가량이 또다시 닭장을 찾고 있을 때, 구청연은 청운각(靑雲閣)이란 주루를 찾고 있었다. 물어물어 청운각을 찾은 게 미시(未時) 말, 청운각 한켠에 자리를 잡은 구청연은 점소이를 불러 조패(趙覇)라는 자를 찾았다. 괜히 미적거리던 점소이는 은 한 냥을 받고서야 어디론가 달려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족히 일각(一刻) 이상은 지났으리라. 그때까지 점소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루해진 구청연은 새로운 일행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소귀(小鬼)!' 소귀는 무림인이라기 보다는 왈짜 패에 가까운 자였다. 하지만 그 명성만은 매우 높아 근방 백여리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가 그처럼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그가 칼이나 병기 등 결코 방출해선 안되는 물품들을 몰래 야만족들과 거래하는 밀매업자이기 때문이었고, 남은 하나는 그가 소문난 노름꾼이라는 점이다. 밀매(密賣)에 있어 지형의 숙지(熟知)는 기본 중의 기본, 구청연이 소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구청연이 소귀를 생각한지 일다경이나 흘렀을까, 주루의 입구에 한 장한이 나타났다. 삼십 대 후반의 힘깨나 씀직한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장한은 죽 주루를 쓸어보다 구청연과 눈이 마주치자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구청연은 직감적으로 그가 조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