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2편 (2/43)
송자영의 성격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녀의 비수를 쓰는 솜씨만큼은 강호에서 일절(一絶)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강산은 내심 긴장하며 그녀의 소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송자영의 고개가 갸웃한다싶더니 스르르 손이 내려갔다. 속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 하는 강산에게 송자영이 물었다. "보아하니 저놈들과 한패는 아닌 모양인데... ." 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너도 그 일로?" 강산은 그녀의 거듭되는 반말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슬슬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어쩐지." 강산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송자영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이름이 뭐야?" "강산." "강산? 장강(長江)할 때의 그 '강(江)'하고 태산(泰山)할 때의 그 '산(山)' 말이야?" 강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이한 눈빛으로 강산을 바라보던 송자영의 입꼬리가 쭈욱 치켜 올라갔다. 곧이어 송자영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푸헤헤, 잘도 그런 촌스런 이름을... 이왕이면 바다산맥이나 하늘땅이라 하지. 아니, 아니, 전답(田畓)도 좋겠고. 푸헤헤...!" 허리를 들썩이며 죽는다고 웃어대던 송자영은 급기야 눈물까지 흘려댔다. 그런 송자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산은 조용히 돌아섰다. "푸헤헤...! 엉? 야, 기다려." 강산이 듣지 못한 듯 계속 걸음을 옮기자 송자영이 훌쩍 뛰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야, 서란 말이 안 들려?" "내게 볼일이 있나?" 무뚝뚝한 강산의 한마디에 송자영의 눈빛이 달라졌다. "참, 더럽게 툴툴거리네. 이런 걸 꼭 멋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다니까." 강산을 째려보던 송자영은 문득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강산의 무표정한 얼굴이 왠지 측은하게 보였던 것이다. 송자영은 한 걸음 양보하기로 했다. "난 송자영이야.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용모는 절색(絶色)에 성격 좋고 무공 뛰어나기로 유명한 그 화왕비 송자영이 바로 나야. 험!" 송자영은 말하는 와중에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아무리 낯가죽이 두꺼운 그녀라도 스스로를 금칠하기엔 조금 간지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계속 하늘만 올려다 본 채 강산은 쳐다보지도 않았으나,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송자영이라는 이름 석 자에 기겁을 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을. 아니 어쩌면 그 무뚝뚝한 얼굴에 한껏 존경어린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험! 뭐, 그런 표정을 지을 것까지는... ." 다시금 강산을 바라보던 송자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존경스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어야 할 강산이 이미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씨...!" 분기탱천! 송자영의 소매춤에서 번쩍하는 빛이 번뜩였다. "원망은 말아라.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쉬잇! 날카로운 소성을 날리며 비수는 곧장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다음 순간, 비수는 여지없이 강산의 목을 파고들었다. "조금은 맘에 드는 녀석이었는데. 쩝!" 뇌까리던 송자영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것은 강산의 목이 꿈틀거리며 움직였을 때였다. "......?" 그것은 손이었다. 목이라고 생각되었던 건 강산의 손이었다. 그리고 박혀있다고 생각되었던 비수는 잡혀있었다. 강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놀라운 속도로 날아오는 그녀의 비수를 목뒤로 손을 움직여 덥썩 잡아 버렸던 것이다. 뿌직! 비수는 이내 강산의 손에서 동강이 났다. 강산은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쏘아보는 그의 눈초리는 차가움을 넘어 섬뜩해 보이기조차 했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본 굶주린 늑대처럼 무서운 눈빛이었다. 하나 그 뿐이었다. 송자영은 그가 금시라도 살기를 번뜩이며 달려들 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으나, 강산은 이내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강산의 뒷모습을 송자영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번쩍이며 펄쩍 뛰었다. "그래. 너도 한 가닥이 있단 말이지? 그래서 청죽장에 뽑혔단 말이겠지? 그렇지? 야, 기다려봐. 야, 야!" 제 2 장 남만(南蠻)으로. 1 곽가량은 잠을 자고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을 감고 침상에 누워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침상에 누운 건 한 시진 전이었다. 당연히 그는 한 시진 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천하의 반선불 곽가량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혹시 그에게 불면증(不眠症)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무슨 말못할 걱정이라도? 고요한 가운데 다시 일다경(一茶傾)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잠자코 있던 곽가량의 입술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더없이 경박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케케케... 이백 냥이다, 이백 냥. 물경 황금 이백 냥. 그것도 일을 마치면 그 곱절인 사백 냥. 푸흐흐흐...!"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불면(不眠)의 원인은 황금 이백 냥이라는 거금(巨金) 때문이었던 것이다. 곽가량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한 사람의 한 달 생활비가 은자 두 냥이던 시절, 거기에 은과 황금의 교환비율이 이십 대 일 정도이니... 황금 사백 냥은 물경 팔천 명의 한 달 생활비인 것이다. 한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일순 미친 놈처럼 웃던 곽가량의 표정이 급변한다. "후-! 돈도 좋지만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한숨이 흘러나왔고 이어 곽가량은 상체를 일으켰다. "빌어먹을!" 그렇게 잠시 고심하던 곽가량은 이윽고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며 다시 침상에 누웠다. 당연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추억을 끄집어내 보기도, 여인과 술, 그리고 도박에 대한 상상을 한껏 펼쳐보기도 했지만 역시 잠은 오지 않았다. 기진맥진, 더 이상의 방법을 찾지 못한 곽가량은 가장 원초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던 차에 그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일흔여섯 마리째의 돼지를 헤아리고 있던 때 벌어진 일이었다. "야! 야, 임마! 통성명 좀 하자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야!" 깊은 밤, 귓청을 후벼파는 여인의 음성! 게다가 그 소리는 또 얼마나 높던지... '일흔일곱, 일흔여덟... 아흔여섯.' 잠잠해 지겠지하고 못들은 척 머리를 싸매고 돼지를 헤아려나가던 곽가량은 마침내 '백스물일곱.'에서 침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어떤 미친 년이...." 쾅! 문짝이 떨어져나가는 소리에 강산은 돌아섰다. 바로 뒤에 송자영이 있었고, 그 뒤에 흔들거리는 문이 있었다. 그리고 흔들거리는 문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그 발의 주인은 곧 모습을 드러냈다. 코가 매우 큰 삼십 대 초반의 장한으로, 강산으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야심한 시간에 곱게 잠이나 퍼잘 것이지, 왜 잘 자는 사람을 깨우고 지랄이야-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온갖 인상을 다 구겨가며 소리쳤다. 어지간히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그때까지 강산을 바라보고 있던 송자영이 발끈하여 돌아섰다. "어떤 개자식이... ." 한데 돌아선 순간, 송자영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하더니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곽가량...? 곽가량! 너, 곽가량 맞지?" 곽가량은 더욱 인상을 구겨가며 말했다. "내가 곽가량이던 말던 사람이 기본 예절이 있... 응?" 거기까지 말하던 곽가량은 문득 이 '미친 년'이 자신을 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비로소 곽가량은 고개를 들었다. 거기 송자영이 있었고, 그녀가 송자영임을 확인한 순간 곽가량은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저, 저 귀신을 여기서 만나다니...' 헉! 어디선가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직후 곽가량은 호탕히 웃음지며 소리쳤다. "와하하하! 이게 누구야? 영매(英妹), 나의 영매 아니야?" 곽가량의 음성은 더없이 친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뒤로 돌아 슬며시 문고리를 잡고있었다. "흥! 이 사기꾼 놈. 누가 너의 영매란 말이냐?" 강산은 자신의 방문을 잡은 채로 잠시 서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송자영은 강산을 조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거나 먹어라." 송자영의 손에서 빛이 번뜩이며 비수가 날라갔다. 그것은 오늘 그녀가 선보인 세 번의 손놀림 중 가장 빠른 것이었다. 그런데도 피를 보지 않은 이유는 곽가량이 이미 대비를 하고있던 때문이었다. 쾅, 다다다닥! 재빨리 문을 닫은 곽가량은 엉거주춤 문에 기대어 선 채 격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비수는 저 문 바깥쪽이 아닌 자신의 몸에 꽂혔을 것이다. "후우, 후우-!" 곽가량이 문에 기대 호흡을 가다듬고있을 때, 콰직! 문이 뚫리고 시퍼런 비수가 머리를 내밀었다. 정확히 그의 사타구니 한 치 아래였다. "......!" 곽가량은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질 못했다. 그렇게 곽가량이 고개를 숙여 '아차 했으면...?'이라는 생각에 몸서리치고 있을 순간, 콰직! 다시 한 자루의 비수가 문을 뚫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곳이었다. "흐으으으...!"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이란 생각에 곽가량이 또다시 몸서리치고 있을 순간, 쾅! 문이 금시라도 떨어져 나갈 듯 세차게 울었다. "이 문 못 열어?" 곽가량은 문에서 떨어지며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마, 말로 하자. 말로!" "흥! 마-알? 당장 못 열어?" 그때까지 송자영을 지켜보던 강산은 슬며시 방문을 닫았다. 밖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뭘?" "잘못? 잘못한 게 없는 놈이 왜 숨고 지랄이야?" 펑! "알았다. 연다.. 열어." 쾅, 와지직! "으아아아악...!" 침상으로 다가가던 강산은 곽가량의 비명에 멈칫 돌아서 다시 문을 향했다. 문에는 총 세 개의 겉쇠가 달려있었다. '열 개쯤 되었으면.' 아쉬운 마음으로 세 개의 겉쇠를 몽땅 건 강산은 비로소 침상으로 향했다. 침상에 누운 강산의 눈에 반쯤 열린 창문이 보였다. 강산은 다시 일어났다. 창문마저 닫고난 다음에야 강산은 침상위에 벌렁 드러 누웠다. 물론 옷은 벗지 않았다. 송자영이 언제 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와 비수를 날릴 지 모르는 판국에 제아무리 철담(鐵膽)의 강산이라도 마음 편하게 잠자기는 틀려버린 것이다. * * * 꼬꼬댁, 꼬댁, 꽉! 야밤 삼경에 닭이 울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수십 마리가 합창을 하듯 떼거지로 울어대고 있는 것이다. 저 놈의 닭들이 단체로 미쳤는가? 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울음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다급절박한 울음소리. 거세게 홰를 치는 소리... .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오소리나 족제비 따위의 침입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의 울음소리에서 겁을 먹고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닌 사납게 공격하는 기색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닭장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한 밤중에 강산은 곽가량의 방문(訪問)을 받았다. 절박했던 닭들의 울음소리가 꼬꼬꼬, 흑흑! 처량히 잦아들던 때였다. 곽가량은 한 손에 술과 안주를 들고있었다. 그리고 그의 남은 한 손엔 막 닭장에서 꺼내온 달걀이 쥐어져있었다. "삼 년쯤 전에 그녀를 만났지요. 우리는 곧 의기투합해서 동행이 됐습니다." 곽가량은 쭉 잔을 들이켰다. 와중에 달걀은 계속 그의 눈두덩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무심코 뱉은 한마디, 화(禍)는 그 한마디에서 비롯됐습니다. '뭐, 쓸만한 놈이 없다고? 걱정하지마. 이 오라버니가 괜찮은 놈으로 하나 구해줄 테니까. 걱저-엉! 그거 뭐에 쓰는 물건이야? 자, 마셔 마셔. 부어-!' 정확히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곽가량은 다시 자기 잔을 채웠다. 본래부터 잔을 하나만 달랑 가져왔으니 인사치레라도 강산에게 한 잔 마셔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었다. "크윽! 달포는 좋았습니다. 그녀는 저를 아주 극진히 모셨지요. 물을 생각하면 술이 있었고, 밥을 생각하면 고기가 있었습니다. 녹피화(鹿皮靴)는 언제나 깨끗이 닦여있었고 주머니 속엔 돈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달포뿐이었습니다." 이야기 도중 곽가량의 감정이 격해지는가 싶더니, 파삭! 기어코 달걀이 깨졌다. 대충 내용물과 달걀껍질을 털어낸 곽가량은 품속에서 다시 한 알의 달걀을 꺼냈다. 강산은 비로소 그의 품에 주의를 기울였다. 가슴 부근이 눈에 띠게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아예 닭장 안을 몽땅 쓸어온 것 같았다. 곽가량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밥은 소태로, 고기는 비지로 변해갔습니다. 그렇게 시시각각 조여드는 생명의 위협에 맞서 싸우던 어느 날, 저로 하여금 결심을 굳히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만두속에서 갈가리 찢긴 저의 녹피화가 발견된 것입니다." 강산은 이제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애당초 문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은 한푼도 없었다. 다만 '쉿! 바로 제가 기다리던 사람입니다.'라는 이야기에 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꼴깍! 다시금 잔을 비운 곽가량은 아예 술병을 쥐었다. "그렇다고 제가 노력을 게을리 했던 건 아닙니다. 열다섯 명, 보름 동안 무려 열다섯 명을 그녀에게 소개시켜 줬습니다. 그 열다섯 중 일곱은 팔 병신이, 넷은 다리 병신이, 셋은 언청이가 되었고...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두 번 다시 사내 구실을 할 수 없는 병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꿀꺽꿀꺽! 부지런히 오르내리던 곽가량의 목젖이 잠잠해졌다. 술병이 빈 것이다. 탁! 곽가량이 거칠게 술병을 내리며 물었다. "강대협, 말 좀 해주시오. 그래도 내가 잘못한 것이오?" 강산은 '오냐!'라는 말을 꾹 참고 되물었다. "내게 해줄 말이 있다고 들었소." 강산의 시큰둥한 반응에 곽가량의 눈빛이 달라졌다. 힐끗 빈 술병을 일견한 후 다시 강산을 바라보는 곽가량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째째한 자식! 강산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곽가량을 응시하다간 아무래도 사고를 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좀 많기로 서니 사부가 부탁한 사람을 초면에 두들겨 패줄 수야 없지 않겠는가? 다행히 곽가량은 눈치가 빨랐다. "나도 별로 해줄 말은 없소. 그저 이들과 보조를 맞추다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처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니까. 다만 강대협보다 먼저 온 관계로 이들 일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소." 곽가량의 이야기는 이어졌고, 강산은 그에게서 청죽장에 모인 일행의 면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일행은 총 일곱이었다. 자신과 이미 알고 있는 반선불 곽가량, 염객 서문상, 화왕비 송자영, 그 외에 편복노조( 老祖) 이항(李沆)과 초자도(超自刀) 문정인(文情仁), 그리고 상문신(喪門神) 양표(揚標)였다. 강산은 일행에게서 뚜렷한 두 가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나는 일곱 명 모두 소속단체가 없다는 점이었고, 남은 하나는 어느 한 사람 허술히 대할 수 없는 절정의 고수들이라는 사실이었다. * * * 다음 날, 강산은 구청연의 부름을 받았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어느 회의청으로, 둥근 원탁을 빙 둘러싸고 이미 다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육십 쯤 되보이는 곰방대를 물고있는 노인과 비쩍 말라 강시(疆屍)를 연상케하는 사십 대 중년인, 다소 작은 키에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를 둘러멘 삼십 대 장한, 칠척 장신에 우람한 몸집을 자랑하는 삼십 대 장한, 그리고 곽가량이었다. 중인들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막 들어선 강산을 쳐다보았다. 가볍게 아래위를 훑던 중인들의 눈빛이 그의 허리께에 이르러 딱 멈췄다. 거기엔 칼집도 없이 달랑 끈 한 가닥에 의지해 매달려 있는 금강도가 있었다. 이곳에 모인 중인들은 모두가 강호의 절정고수들인지라 한 눈에 보기에도 그 거무틱틱한 칼이 결코 만만한 병기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아울러 저런 병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결코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강산은 중인들의 시선이 묘하게 변하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리를 잡았다. 그의 성격은 처음 본 자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신변잡기를 이야기할 정도로 원만하거나 부드럽지 못했다. 이내 강산을 향했던 눈빛이 하나둘 거두어졌다. 그들의 성격 역시 그다지 부드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장내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곰방대를 문 노인의 옆에 찰싹 붙어 열심히 떠벌리는 곽가량이 아니라면 초상집이라해도 좋을 그런 분위기인 것이다. "그렇다고 제가 노력을 게을리 했던 건 아닙니다. 열다섯 명, 무려 보름 동안 열다섯 명을 소개시켜줬습니다. 그 열다섯 중 일곱은 팔 병신이, 넷은 다리 병신이...." 곽가량의 이야기는 더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주워 삼키는지... . 곽가량에게서 신경을 거둔 강산은 차분히 일행을 살폈다. 먼저 곽가량의 옆에 조는 듯 앉아있는 노인은 편복노조 이항이 틀림없었다. 장내에 이항의 연배라곤 그밖에 없었고, 또한 곰방대를 물고있다는 특징이 소문으로 들은 그의 모습과 일치했다. 그리고 비쩍 말라 강시를 연상케하는 중년인은 염객 서문상인 것 같았고,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인물은 상문신 양표임이 분명했다. 남은 한 사람,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삼첨양인도를 메고있는 자는 당연히 초자도 문정인이 될 것이다. 문정인의 독문병기가 삼첨양인도라는 건 강호인(江湖人)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강산이 막 일행에 대한 확인을 마쳤을 때 곽가량의 하소연 역시 끝을 보고 있었다. "이선배, 말 좀 해보십시오. 그래도 제가 잘못한 것입니까?" 지그시 눈을 감고있던 이항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글쎄, 남녀간의 일이란 게 워낙 복잡미묘한 것이 되어놔서... ." 이항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한 듯 곽가량은 장내를 둘러보며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서형, 문형, 양형, 강형, 뭐라 말 좀 해보시오." 곽가량은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하나 이번에는 대답조차 나오지 않았다. 곽가량은 볼을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참말 사갈(蛇蝎)같은 년이지요." 그때였다. 막 곽가량의 중얼거림이 끝났을 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송자영이 들어왔다. "뭐야? 분위기가 왜이래?" 나타나자마자 툭 한마디를 던진 송자영은 매서운 눈초리로 장내를 쓸어보았다. 일행은 모두 찔끔하여 시선을 돌렸고, 송자영은 차례차례 한사람 한사람을 쓸어본 후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앉은 곳은 공교롭게도 강산의 맞은편으로, 그녀의 좌측에는 양표가, 다시 우측에는 서문상이 앉아 있었다. '휴우-!'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던 곽가량은 송자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헤벌쭉 웃음지었다. "헤헤, 영매 잘 잤어?" "누가 영매야?" 쾅! 송자영의 주먹질에 탁자가 웅웅거렸다. 장내는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그러던 한 순간 어디선가 괴이한 음향이 흘러나왔다. 삐이-꺽! 강산이 바라보자니 양표가 슬그머니 의자를 밀어 송자영에게서 떨어지고 있었다. 괴이한 음향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그가 서너 자나 떨어졌을까? 힐끗 송자영이 양표를 바라보았다. '이거 뭐하는 짓거리야?'하는 눈빛이었다. 양표는 찔끔하여 동작을 멈췄다. 그와 그녀의 거리는 서너 자였다. 지금같은 실내에서 결코 좁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또한 결코 안심할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은연중 송자영의 눈치를 살피던 양표는 그녀가 시선을 거두자 다시 의자를 밀기 시작했다. 순간, 쾅! 또다시 탁자가 비명을 질렀다. "삐걱거리지 마!" "옙!" 대답한 자는 반대편의 서문상이었다. 다시금 침묵이 흘렀고, 침묵은 구청연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가 늦었습니다." 늦게 온 자의 말치고는 다소 뻔뻔스러운 것이었지만 일행 중 누구도 그를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뭐야? 벌써 이 각(刻)이나 기다렸잖아?" "송소저,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 "됐어. 뭣 때문에 불렀는데?" "예, 그 동안 의문이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 오늘 모이게 한 것은 여러분들을 고용한 목적에 대해 간략히 설명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중인들의 시선은 전부 구청연에게 집중되었다. 구청연은 좌중을 한번 쓱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어느 장소에 가서 한 가지 물건을 빼오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과연 구청연의 설명은 간략한 것이었다. "......?" 눈을 깜박이며 구청연의 입을 주시하던 송자영이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그것 뿐이야?" 구청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것은 도착 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송자영의 볼이 잔뜩 부어오르며 막 씨! 자를 토해내려 할 때, 편복노조 이항이 곰방대를 톡톡! 탁자에 두드리며 말했다. "어줍잖은 질문 받자고 개개인에 황금 이백 냥씩 쏟아부은 건 아닐 테지. 우리 일곱이 전부인가?" "저까지 여덟입니다." "자네도 간단 말인가?" "안내인도 없이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출발은 내일입니다. 그럼, 내일 뵙기로 하겠습니다." 구청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곽가량이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오?"